아픈 아이는 1885년에서 1926년 사이,
노르웨이 예술가, 에드바드 뭉크에 의해 완성된 6점 그림과
많은 리소그래프(석판 인쇄), 드라이포인트(오목판화), 에칭(화학적 조각 판화) 작품에 주어진 작품 제목이다.
모든 작품들이 15세의 나이로 결핵에 걸린 뭉크의 큰 누나, 요하네 소피(1862-1877)의 죽음 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뭉크는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의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이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회귀하게 된다.
작품들 속에서,
소피는 전형적으로 그녀의 이모, 카렌으로 여겨지는 검은머리의 슬픔에 잠긴 여성과 함께
옆에서 임종 중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연구작들은 종종 소피를 잘라낸 머리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그림 버전에서 소피는 확실히 고통을 겪으며 커다란 흰색 배게에 기댄 채 한 의자에 앉아 있다.
죽음의 상징으로써 의도된 것 같은 불길한 커튼 쪽을 보면서......
소피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며
슬픔에 잠긴 나이든 여성의 두 손을 잡으며,
소피는 유령같은 표정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녀의 머리는 마치 어린 소녀의 눈을 계속 참으며 쳐다볼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있다.
뭉크의 생애 전반에 걸쳐,
종종 자신의 그림들로 되돌아 갔으며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몇몇 변형들을 창작했다.
이 작품, 아픈 아이는 뭉크가 아이였을 때, 결핵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자신에게
자신만이 살아 남았으며 고인이 된 큰 누나에 대한 상실감에 직면한 사람이라는
절망감과 죄책감 모두를 기록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뭉크는 그 이미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뭉크는 다양한 형식으로 수많은 버전들을 창작했다.
6점의 그림 작품들은 많은 여러 모델들을 사용하여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실행되었다.
이 일련작들은 "한 퇴행성 질병의 파괴에 대한 생생한 연구"로써 묘사되어져 왔다.
그림 작품들 모두와 보조 작품들 상당수가 뭉크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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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구성된
1896년작 리소그래프(석판 인쇄)는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2001년 25만 달러(3억6,200만원)에 팔렸다.
각 그림들은 임종에 놓여있는 측면의 소피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피는 확실히 발전되고 심각한 결핵의 한 증상인 호흡 곤란을 겪고 있다.
소피는 자신의 허리에서부터 커다랗고 두꺼운 흰 배게 옆에서 기대고 있다.
그 베게는 부분적으로 소피의 뒷 벽에 걸려있는 커다랗고 둥근 거울을 숨기고 있다.
소피는 무겁고 어두운 담요를 덮고 있다.
소피는 빨간 머리이고 연약하게 보여지며
병으로 창백한 얼굴로 빈 허공을 바라본 채 연약하게 보여지고 있다.
소피는 왼쪽에 있는 어둡고 의미심장한 전체 길이의 커튼 쪽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 사학자들은 커튼을 죽음의 상징으로써 해석하고 있다.
아픈아이
에드바드 뭉크(1863-1944)
드라이포인트(오목 판화)
1895년작 `아픈 아이` 방의 장명이외의 장면이 있다. 대영박물관에 따르면,"이 작품은 인류의 죽음과 함께 피어나는 자연의 생명을 대조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드레스 입은 검은 머리의 나이 든 여성은 그 아이의 손을 잡으며 아이의 임종 옆에서 앉아있다.
매 작품마다, 정중앙에 위치한 그들의 손을 함치면서 둘 사이의 유대는 확립되고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움겨쥠은 전형적으로 그러한 비애감으로 그려졌으며
두 인물이 깊은 감정적 유대뿐아니라, 그들이 혈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예술사학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강렬하게 하고 있다
아마도, 그 여성은 소피의 이모 카렌일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나이 든 여성이 아이보다 더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관잘해왔다.
비평가, 파트리샤 도나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 아이가 마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인내의 끝에 도달한 한 사람을 거의 위로하고 있습니다." :
그 여성의 머리는 소피를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고뇌 속에서 숙여진 채 있다
그녀의 얼굴은 불불명하다
그리고 관람자는 오직 그녀의 머리 위만을 볼 수 있다.
왼쪽에는 하나의 물병이 화장대 아니면 사물함 위에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하나의 유리잔이 모호하게 묘사된 테이블 위에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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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의 색상은 다양하다
일련작들 중 특히 첫번째 작에서 흰색은 망각의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후에, 녹색과 노란색이 질병의 표현하는 표현으로써 특징을 하고 있다.
반면,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붉은색이 말기 결핵의 가장 극적이며 물리적인 특징 - 피를 토하는 기침 - 을 표현하고 있다. :
일련작들의 매 작품들은 독일 표현주의 관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반면 상당수 작품들은 기교면에서 매우 인상주의적이다.
그림 버전들은 임파스토(유화의 기법으로 두껍게 바르는 기법) 물감의 두꺼운 층들로 축적되었다.
그리고 전형적으로 강하고 폭넓은 수직적 붓놀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수직에 대한 강조는 작품들에게 흐릿한 느낌을 주고 작품의 감정적 힘을 더하고 있다.
작품들의 감정적인 힘은
예술 비평가 ,미셸 파코스가 마치 눈물 그리고 기억의 베일을 통해 보여지는 것처럼,
관람자를 근접 범위에서 경험하게 하지만 흐릿하게 경험하게 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던 효과이다.
뭉크가 1885-1886년작그림을 완성했을 당시,
뭉크는 겨우 26세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충분히 불확실했다..
뭉크는 이 작품에 임시 연구 작품명을 부여했다.
뭉크는 `아픈 아이`란 작품명으로 6점의 그림 작품을 완성했다.
3 작품은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1885–86, 1925, 1927)에 있고,
다른 작품들은 스웨덴 괴텐베르그(1896), 스웨덴 스톡홀름 (1907) 그리고 영국 런던(1907)에 있다.
뭉크 작품에 대한 요구가 커진 1892년,
그는 돌파구를 찾은 후,
드라이포인트(오목 판화)와 에칭(화학적 조각판화)으로 8점의 연구 작품을 창작했다.
첫 버전(판)은 완성하는데 1년 이상이 걸렸다.
뭉크는 그것이 불행하고 좌절스러운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캔버스는 거의 집착스럽게 작업되고 재작업되었다.
1885년에서 1886년 사이,
뭉크는 자신이 만족했던한 이미지(영상)에 결국 도달하기 전,
그 이미지(영상)를 그렸고,닦고, 그리고 다시 그렸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와 출판물에서 이 작품들을 자주 언급했다.
이 작품은 뭉크의 "`생의 프리즈`의 기원" (Live Friesens tilblivelse).에 크게 등장한다.
뭉크는 후에,
1885-86년작 그림이 대단히 어려운 싸움이어서 작품의 완성은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돌파구"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라고 썼다.
뭉크는
"한 명의 인상주의자로서 시작했지만,
보헤미안 시대의 격렬한 정신적 생명적 격변 동안,
인상주의가 저에게 불충한 경험을 주었습니다
- 저는 제 마음을 휘젖는 것을 위해 하나의 표현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인상주의와의 첫 결별은 작품 `아픈 아이`였습니다..... 전 표현(표현주의)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픈 아이
에드바드 뭉크
1896년
캔버스 위에 유화
121,50 x 118,50 cm
스웨덴 괴텐베르그,괴텐베르그 뮤지엄 오브 아트 소
아픈 아이
에드바드 뭉크
1907년
캔버스 위에 유화
118 cm (46.4 in) x 120 cm (47.2 in)
스웨덴 스톡홀름, 틸 갤러리 소장
아픈 아이
에드바드 뭉크
1907년
캔버스 위에 유화
118.7 cm (46.7 in) x 121 cm (47.6 in)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박물관 소장
아픈 아이
메드바드 뭉크
1925년
캔버스 위에 유화
117 cm (46 in) × 118 cm (46 in).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뮤지엄 소장
아픈 아이
에드바드 뭉크
1927년
캔버스 위에 유화
117.5 cm (46.2 in) x 120.5 cm (47.4 in)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박물관 소장
아픈 아이
에드바드 뭉크(1863-1944)
1885-1886년 작
캔버스 위에 유화
120 × 118.5 cm (47.2 × 46.6 in)
노르웨이 오슬로, 내셔널 뮤지엄 오브 아트 아키텍쳐 앤 디자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