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물-필사하기
연착/ 노수옥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설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2023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