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생각_작은 깨달음, 큰 기쁨. 월간 한국뉴스 2014년 신년호>
타원형사회, 타원형정치
-기하학으로 풀어보는 ‘더불어 삶’의 지혜-
편집인 양재섭
타원형적 삶이 숙명이라고요?
타원(橢圓, ellipse)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달걀이나 럭비공이 연상될 수도 있고 길게 둥근 호박이 눈앞에 어른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그리고 있다는 우주적 사실까지 근거로 동원하여 ‘인간은 숙명적으로 타원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내세운다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이라 하시겠지요? 이 얼토당토 않는 생뚱맞은 제안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의아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단 사람은 태생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며 궁극적으로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여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찬성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한 동질감을 바탕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기하학적으로 타원형 그리기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고등학교 시절 기하학 시간에 배운 타원의 정의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평면상에서 두 정점으로부터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곡선”을 타원이라고 하는 데 오래 전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여 감이 잡히지 않는 독자도 많겠고요. 그런데 가뜩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이제는 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만끽했던 필자가 기하학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좀 머쓱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혹시 수학기피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까지도 동지의식을 가지고 조금은 수월하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집니다.
<기하학적으로 타원형 그리기>
우선 타원을 한 번 그려볼까요? 길이가 일정한 끈을 마련한 다음 양쪽 끝을 고정하고 그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팽팽히 당기면서 잡아 돌리면 타원이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끈의 길이가 일정하여 변함이 없다는 점, 그래서 한쪽이 길어지면 다른 한쪽이 짧아지면서 타원이 그려지는 모습입니다. 고정된 양쪽 끝을 초점이라고 하고 따라서 두 개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원은 “평면상의 어떤 점에서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으로 정의되고 끈의 한쪽 끝을 고정하고 다른 한쪽에 연필을 매달아 잡아 돌리면 원이 그려집니다. 따라서 원이 한 개의 중심을 가진다고 하면 타원은 두 개의 초점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원의 중심이 배타적 독점을 의미한다면 타원형의 초점은 처음부터 한 개씩 나누어 가지고 더불어 함께 도와서 전체를 만들어 간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쪽이 모자라면 다른 쪽이 기꺼이 보완하면서 절대로 전체 판을 깨지 않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중심을 차지하려고 애쓰지요. 중심을 빼앗긴 사람은 다시 중심을 탈환하려고 싸움을 걸 것입니다. 결국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지요. 그런데 타원형적 사고는 애초부터 초점을 하나씩 나누어 시작하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서로 살림의 생명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라파엘(Raphael)이 그린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
기하학의 즐거움
여기서 잠깐, 더불어 함께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전해주는 기하학(幾何學, geometry)은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B.C 385년경 아테네 근교에 플라톤이 아카데미를 세우고 많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기하학은 아주 중요하게 다룬 과목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학교 건물 현관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니 기하학의 무게를 알만합니다. 더 나아가서 플라톤은 그의 대표적 명저 국가(Politeia)에서 “기하학은 아래로 향하는 영혼을 위로 향하도록 철학적인 마음가짐을 만들고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가는 학문”이라 갈파했습니다. 기하학을 바라보는 플라톤의 사고는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워 보입니다. 갈등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에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하학으로부터 해결방법을 빌려오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현들의 가르침과 타원형사상
역사적으로 많은 지혜의 선배들은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 고승 원효(元曉, 617~686)는 “한 가지 설에 편협 되면 부처님의 참 뜻을 잃고, 두 가지 설이 각기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으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며 화쟁(和諍, harmonization)의 사상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긍정과 부정으로 분리되어 다투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어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그의 통합적 사고는 가히 타원형적 사유방식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권고는 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메뉴입니다.
근대의 스토리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960년대 미국은 존 케네디(J. F Kennedy)가 암살되고 흑인의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M. L. King,Jr)이 비운에 죽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분쟁과 흑인, 백인을 차별하는 당시의 사회상이 불러온 비극이었지요. 유난이도 평화가 그리운 그 시대에 미국의 교회는 화해(和解, reconciliation)라는 단일 주제로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이른바 ‘1967년 신앙고백’이 그것인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계를 자기와 화해시키셨다.....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 화해되고 서로 서로 화해하라고 사람들을 부른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는 세상을 추구하라는 명령이며, 결국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화해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도 타원형의 두 초점으로 ‘신과 인간’을 정하기도 하고 ‘자아와 타아’를 배치할 수도 있어 타원형사상의 적용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일반적으로 타원형사상을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통합지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tolérance)라든지, 최근 국내에서도 논의가 활발한 사회통합, 그리고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며 또 교육이념이기도 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개념들 속에는 ‘자신과 이웃’을 타원의 두 초점으로 하여 통합적 세계관을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순도순 서로를 아끼며 함께 사는 타원형사회!!.필휴먼 로고>
오순도순 정을 나누는 타원형사회
이제 타원형의 양 초점에 해당하는 사회학적 요인들을 탐구하여 타원형의 기하학적 원리를 이 사회에 적용하는 타원형사회(The Elliptical Society)를 감히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타원형사회를 성취하는 다양한 방법을 탐색하여 더욱 확장해 나간다면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는 행복한 사회건설에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흑백 논리에 의해 양분된 여러 요인들을 적대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깨닫고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갈등에 의해 손실되는 부분을 공동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타원형사회의 예시>
우선 두 개의 초점이라고 여겨지는 요인들을 나열하여 보면, 나와 너, 자신과 이웃,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지도자와 구성원(leader & member), 강자와 약자, 부유층과 빈곤층, 정규직과 비정규직, 기업가와 노동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산업화와 민주화 등등 아마도 무궁무진하게 많은 대칭어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요사이 유행처럼 회자되는 갑과 을이나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도 여기에 추가한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승승(win_win) 패러다임이라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맘먹기에 따라 행복한 타원형사회는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습니다. 1960~70년대로 기억됩니다만 대학가에 “연애타령”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단과대학별로 연애의 형태를 풍자한 재밌는 노래였는데 늘 후렴구가 “......., 에헤야 가다 못 가면, 데헤야 쉬었다 가자, 호박같이 둥근 세상, 둥글둥글 삽시다.”였습니다. 호박같이 둥근 세상은 타원형세상을 암시한 것으로 여기고 싶습니다. 오순도순 따뜻한 정을 나누는 타원형사회는 실현 가능한 꿈입니다.
타원형정치! 활짝 웃는 모습으로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타원형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가 좀 제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정치에 관련된 뉴스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싶다는 시청자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늘 다투는 장면만 나오기 때문이겠지요. 정치혐오증이 깊어지면 결국 우리 사회는 파국을 맞고 말 것입니다. 이 파국을 사전에 방지하는 방법이 타원형정치라고 감히 제안하는 바입니다. 흔히들 통 큰 정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만 두 상대방이 강약을 조절하면서 전체의 판을 깨지 말자는 것입니다. 한 쪽이 짧아지면 다른 쪽이 길어지면서 상호보완하는 타원형의 원리를 정치에 응용한다면 그야말로 정치다운 정치가 될 것입니다. 통치가 아니고 정치 말입니다. 요사이는 협치(governance) 개념도 유행한다지요?
정치를 염두에 두면서 타원형의 두 초점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통령과 국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정부와 비정부기구 혹은 시민단체, 결정적으로 여당과 여당, 등등 이들이 모두 상생의 방법만 터득한다면 국민들은 행복해 할 것입니다. 권력의 중요한 속성이 나눔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한쪽에 치우친 권력은 결국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권력 나눔의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라도 있다면 정치인들을 모두 입교시켜 일정기간 교육하면 어떨까요? 정치권력의 목표가 국가와 민족의 융성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해 봅니다. 겨우 자기 목전의 이익이나 탐하는 쩨쩨하고 지지리 못난 인물들이 정치를 한다면 국민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자신감에 넘쳐 당당하게 나눌 수 있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멋진 정치가들이 속속 출현하기를 기대합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정치현실을 되돌아보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이라도 가져보면 좋을 듯합니다. 박정희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이 그리고 노무현대통령과 박근혜대통령이 서로 손을 맞잡고 파안대소하며 활짝 웃는 모습으로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우리 국민은 얼마나 행복해 했을까요? 과거가 그렇다고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닐진대 이제부터라도 적대적 관계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타원형의 양쪽 초점을 담당하여 상호보완의 원리를 실천하는 타원형정치를 해보기를 간절히 당부합니다. 우리나라 정치학 교과서에 타원형정치에 관한 항목이 삽입되는 꿈을 꾸겠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아끼면서 권력 배분의 법칙을 잘 활용하여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타원형정치는 기필코 이루어질 것입니다. 타원형정치를 지향하는 많은 정치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마지막으로 타원형사상을 예언자적 예지로 애절하게 표현했던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중 핵심이 되는 한 문장을 상기하면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글을 마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그런 꿈 말입니다.(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