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펴냄) 중에서
"아기들은 모든 것이 신기하다. 모든 것을 ‘처음’ 본다. 처음 보는 건 당연히 ‘처음’이고, 두번째 보는 것도 ‘처음처럼’ 본다. 하긴 그게 맞지 않나?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설 수 없듯이,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찰나생 찰나멸하기 때문이다. 아기들이 같은 이야기, 같은 노래를 수없이 듣고도 처음처럼 반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들은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한마디로 신체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존재의 유동성이 교감의 원천이다. 조금 더 자라고 학교를 가면 이런 능력은 사라진다. 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닌 대립이 더 우세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별과 대립이 강화될수록 몸은 뻣뻣해진다. 가질수록 헛헛하고 누릴수록 막막해진다. 그럴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메아리친다.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매 순간 만물과 교감하고 싶다고."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그것은 생명의 토대이자 동력이므로. 다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과 속도는 알아차려야 한다. 생명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때, 그것은 과속으로 치달린다. 치달리는 순간 방향이 어긋난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길’ 찾기다. 길을 찾으려면 지도가 있어야 한다."
"말의 신성함이 세상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그 신성함을 잃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세상을 단절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물건 등 모든 관계는 어그러지고 분열한다. 말 한마디에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무너뜨린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말은 디바가 아니라 다이몬(악령)에 가깝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말을 줄이려 한다. (…)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말의 신성함을 복원하는 일이다. 신성함이란 특별하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가르침을 말하고, 계율을 말하고, 새길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고, 신중하고 이익을 가져오는 말을 때에 맞춰” 하는 것이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읽기는 그저 정보로 환원된다. 그 정보는 아무리 원대하고 심오해도 결코 존재의 심연에 가닿을 수 없다. 그때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다. 책이 신체와 접속, 감응하여 ‘활발발한 케미’가 일어나는 것이 쓰기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늘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 생각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천지분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여,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수렴과 집중이 그것이다.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여 수승화강(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선 신장의 물은 올라가고 심장의 불은 내려가야 한다는 양생의 원리)을 이루고, 욕망과 능력이 마주치는 포인트를 찾아야 하고, 뇌의 재잘거림을 멈추게 하는 마음훈련을 해야 한다.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수렴과 집중은 필수다."
"철학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철학을 합니다. 철학이란 특별한 ‘분과학’이 아니라 인식과 사유, 행동의 총칭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철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곧 자기 삶의 철학자임을. 그 결과 정신과 영혼, 언어와 사유를 돌보는 데 한없이 게을러집니다. 게으름은 무지를 낳고, 무지는 충동과 허무를 낳습니다. 에세이는 이 ‘허무의 수레바퀴’에서 탈주하기 위한 실존적 결단의 일환입니다."
"자의식의 장벽을 넘는 것도 철학이고 수행입니다. 현대인은 특히나 자의식의 비만이 심각한 수준이라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적 탐구란 ‘자아를 굶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굶긴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훈련, 그게 바로 ‘에세이-하라’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