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高麗(今 開城) 2
結識中朝趙子昂
風流都尉瀋陽王
教人提挙征東省
留醉蘆溝万卷堂
中朝의 趙子昂을 結識하였으니
風流하는 都尉이고 瀋陽王이러라.
人으로 하여금 征東省을 提拳하였으니
머물러 芦溝 万巻堂에 醉하였더라.
趙子昂은 元의 名筆 趙孟頫라. 瀋陽王은 의 忠宣王이니 高麗史에 忠烈王의 子源이 王位를 襲하여 忠宣王이 되었다.
忠宣이 初年에 元에 在하여 宝塔宝麟 公主를 娶하고 瀋陽王의 爵을 進하였다.
征東省은 元史에 至元 二十年에 征東省을 高麗에 두었다 하고 万巻堂은 忠宣의 談書堂이니 忠宣이 일찍 元에 如하여 宿衛한지 十年에 仁宗을 도와 内乱을 定하고 武宗을 迎立하였으며 大尉로써 燕에 留하여 万巻堂을 講하고 書史로서 自娛하니 当時 名士 姚燧와 閣復과 元明善과 趙孟顆 等이다. 王의 門에 遊하였다.
銀燭如星照禁扁
題詩多上牧丹亭
如今破瓦嵩山在
不復三呼繞殿青
銀燭이 星과 같이 禁扃에 비치니
題詩하는 이가 많이 牧丹亭에 올르더라.
이제 破瓦가 嵩山에 있으니
다시 三呼繞殿青이 아닐너라.
禁扃은 闕門의 문빗장이라. 牧丹亭은 李相国(高麗名臣 李奎報) 集에 말하되 山呼亭에 牧丹이 盛開하여 詩를 賦하는 者가 많아 百人에 읽는다 하였고 대개 山呼亭은 故 延慶宮内에 있으니 延慶은 高麗의 宮名이다.
嵩山은 松岳山을 指함이니 開城 北五里에 在하였다. 初名은 扶蘇라 하고 또 鶴嶺이라도 하며 또 松山 或 神嵩이라고도 하니 대개 嵩山은 君上에게 寿를 上할 때 願컨대 聖王은 嵩山과 같이 寿하십시오 라고 불렀었다.
三呼繞殿은 麗史에 忠宣王 때 松岳이 밤에 울거늘 王이 怪하여 問한데 陳無作이 대對하여 曰 無傷합니다. 古詩에 嵩岳三呼繞殿青이란 글이 있다 하니 王이 기뻐하였다.
<한글>
중국 원나라의 명필가 조자앙(조몽규)을 알게 되었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도위(고위 관직)이자 심양왕이었지.
그로 인해 나는 원나라의 정동성을 찾아가게 되었고
술에 취해 여가를 보내며 만권당에 머물렀었다.
조자앙은 원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조몽규를 가리킨다. 심양왕은 고려의 충선왕으로, 고려사에 의하면 충렬왕의 아들 원이 왕위를 이어받아 충선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초년에 원나라에 있을 때 공주와 혼인하고 심양왕 작위를 받았다.
정동성은 원사에 나오는데 원나라가 고려에 두었던 기구이다. 만권당은 충선왕의 독서당으로, 그가 원나라에 있다가 10년 만에 돌아와 인종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을 옹립했으며, 대위로 연에 머물며 만권당을 열고 책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야수, 갈부 등 명사들이 왕의 문하에 출입했다.
은촉대가 별처럼 궁궐의 금빛 섬돌에 비치니
시 읽는 이들이 많이 목단정에 올랐었지.
지금은 폐허가 된 송악산에서
다시는 삼호요전청(시 구절)을 들을 수 없겠구나.
금돌은 궁궐의 대문 빗장이다. 목단정은 고려 명신 이규보의 시집에 나오는데 산호정에 목단이 활짝 피어 시 지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산호정은 고려의 연경궁 안에 있었다.
송악산은 개성 북쪽 5리에 있었던 산으로, 부수산, 학령, 송산, 신숭 등 여러 이름이 있었는데 왕에게 축수할 때 송악과 같이 오래 사시길 바란다고 해서 송악이라 불렀다.
삼호요전청은 충선왕 때 송악산이 밤에 울자 왕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신하 진무작이 "괜찮습니다. 옛시에 '송악이 세 번 울면 전정의 버드나무가 푸르다'는 구절이 있다"고 대답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