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과 동학란(東學亂)과 일청전쟁(日淸戰爭)
이때에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러워짐에 조정(朝廷)에는 관작(官爵)을 공매(公賣)하며 지방(地方)에는 토호(土豪)가 일어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더라. 고종(高宗) 31년 갑오(甲午)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한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나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빙자하고 그 세력(勢力)이 전국(全國)에 퍼지니 처처(處處)에 인심(人心)이 소요한지라. 교도(敎徒) 중 전봉준(全琫準)이 고부(古阜)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학정(虐政)을 분개(憤慨)하여 민중(民衆)을 모아 관리(官吏)를 항거(抗拒)하더니 그 후로 각지(各地)의 교도(敎徒)가 벌같이 일어나 난(亂)이 점점 커진지라. 관군(官軍)과 싸워 이기고 드디어 전주(全州)를 점령(占領)하니 충청전라(忠淸全羅) 여러 고을이 다 소란한지라. 조정(朝廷)이 이를 진정키 위하여 청국(淸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니 청국(淸國)이 드디어 엽지초(葉志超) 섭사성(攝士成)으로 하여금 육군(陸軍) 일천(一千)을 거느리고 아산만(牙山灣)에 상륙(上陸)함에 일본(日本)도 또한 거류민(居留民)을 보호(保護)한다 칭(稱)하고 대도의창(大島義昌)으로 하여금 육군(陸軍)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인천(仁川)에 상륙(上陸)하니 이에 일청전쟁(日淸戰爭)이 시작(始作)되어 성환(成歡) 평양(平壤) 등지(等地)에서 수차(數次) 접전(接戰)한 결과(結果) 일군(日軍)이 크게 이기(利器)로 남만주(南滿洲)까지 들어갔더니 그 이듬해 을미(乙未) 4월에 청사(淸使) 이홍장(李鴻章)이 일본(日本) 마관(馬關)에 가서 일사(日使) 이등박문(伊藤博文)과 담판(談判)한 결과 이후로부터는 일청(日淸) 양군(兩軍)이 다 조선(朝鮮)을 간섭(干涉)하지 말고 조선의 독립(獨立)을 공인(公認)하는 조약(條約)을 맺었느니라.
- 한글
이 때 정치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져, 조정에서는 관직을 공개 판매하고 지방에서는 토호들이 일어나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갔습니다.
고종 31년(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동학교도들은 척양척왜를 내세워 세력을 전국으로 확산시켰고, 곳곳에서 백성들이 소요하게 되었습니다. 동학교도 중 전봉준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정치에 분노하여 민중을 규합하고 관리에 저항하자, 각지의 동학교도들이 봉기하여 점점 더 큰 난이 되었습니다.
관군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자, 충청과 전라 지역 여러 고을에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은 이를 진압하고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엽지초와 섭사성을 이끌고 아산만에 상륙했습니다.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대도의창이 이끄는 3천 명의 군대를 인천에 보냈습니다.
이에 일청전쟁이 시작되었고, 성환, 평양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으나 일본군이 크게 승리하여 남만주까지 진격했습니다. 이듬해 4월 청나라 사신 이홍장과 일본 사신 이등박문이 마관에서 담판한 결과, 일청 양국이 조선의 독립을 공인하는 조약을 맺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