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과 우왕(禑王)의 진가(眞假)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이 없음으로 항상 종사(宗嗣)의 일을 염려하여 아들을 구(求)하려고 한 때는 궁중(宮中)의 풍기(風紀)까지 어지럽더니 마침내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피시(被弑)하고 우왕(禑王)이 위(位)를 이으니 이때에 우왕(禑王)에 대(對)한 논평(論評)이 많은지라. 공민왕(恭愍王)이 일찍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사랑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맡김으로 신돈(辛旽)이 전횡(專橫)하더니 왕(王)이 일찍 신돈(辛旽)의 집에 행행(幸行)하였다가 그 가비(家婢)를 사랑하여 자(子)를 낳으니 왕(王)이 궁중(宮中)에 맡아 드려 태자(太子)를 삼고 이름을 우(禑)라 하였더니 및 왕(王)이 고(薧)함에 우(禑) 마땅히 설지라. 혹(或) 가로되 왕(王)의 자(子)가 아니라 왕위(王位)를 이음이 불가(不可)타 하고 혹(或)은 가로되 왕(王)의 아들이라 위(位)를 이음이 가(可)타 하여 한참은 왕위(王位) 계승문제(繼承問題)로 매우 어지러워졌더니 이장(李檣) 정몽주(鄭夢周)의 말을 좇아 우(禑)를 세워 왕(王)을 삼았느니라.
- 한글
공민왕은 아들이 없어서 항상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궁중의 풍기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결국 홍윤, 최만생 등에 의해 피살되었고, 우왕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일찍이 요승 신돈을 사랑하여 중요한 일들을 그에게 맡겼고, 신돈이 전횡을 하였습니다. 또한 왕은 궁중에 머물다가 한 가비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아 이름을 우라 하였습니다.
왕이 죽자 우가 왕위를 이었는데, 이에 대해 논란이 많았습니다. 일부는 그가 왕의 아들이 아니므로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고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왕의 아들이므로 적법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이장, 정몽주의 제안을 따라 우를 왕으로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