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경성 덕수궁에 모였다. 조선 대표도 다소 참석을 하였으나 신탁통치를 목적하고 모인 회인 고로 조선대표는 일절 참석을 거절하였는데 소위 중간노선을 취한 자 몇 사람만은 참석한 모양이다.
양국위원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교환한 결과 소련 측 주장은 조선인으로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와 개인은 전부 위원에 참가권을 허락지 않을 것을 절대로 주장하고 미국 측 위원의 주장은 반대와 및 찬성은 인민의 자유이다.
어느 정당은 참가하고 어느 정당은 참가를 허락지 않음은 민주주의 위반이라 다 참가하기를 주장하였다. 소련위원들의 주장을 공산당이외 정당은 다 거절하자는 고집을 끝까지 주장함에 미국위원의 주장은 그러면 소련이 원치 않는 공산화 되는 나라이니 결코 할 수 없고 조선 사람들이 무서운 일본정치에 고생하던 민족이다.
또 신탁통치를 원할 리가 없고 원치 않는다고 민중의 자유를 무시하고 남조선 사람 전부를 배척하고 무슨 나라들 만들 수 있느냐 함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주장하여 겪고 트는 통에 아무 결과 없이 무기 휴회가 되었다.
그 후에 미 국무장관 마샬씨의 서한에 의하여 1947년 5월에 재차 미소위원회가 또 덕수궁에 모여 타협점을 발견하려고 회를 계속하였으나 소련서는 털끝만치도 양보가 없고 전의 주장하던 것을 그냥 고집하였다. 문제는 친탁 반탁 두 가지인데 쌍방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
부득이 휴회하고 이 문제를 다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사상회에 넘겨 절정하기로 하고 동년 9월 8일 미경 와싱톤에 모이기로 정하고 소련에 통첩을 보내었더니 거절하고 오지 않았다. 부득이 조선 문제를 국제안전보장이사회에 넘겨 결정하도록 되었는데 소련이 반대하기를 이 문제는 미소양국이 체결할 문제인데 하필 국제에 제출하느냐 하고 별안간 미소양군 철퇴를 주장하고 정부수립문제는 조선 사람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이것은 내란을 조장함이다.
북방은 군대를 양성하여 거의 20여만이 있고 남방은 양성한 군인이 없으니 북의 공산당은 남방을 토벌하려고 벼른 지가 오래이다. 양군이 철퇴하는 즉시로 내란을 면할 수 없다 하고 미국은 응치 않았다.
결국은 문제가 국제회의에 올라 토의한 결과 57개국의 결의로 조선 독립 정부수립 국회원 선거감시위원을 보내기로 41대 2로 가결되어 1948년 1월 8일에 감시위원 27인이 비행기로 조선에 도착되었다. 조선민중은 거족적으로 환영하여 경성 천지는 환희 속에 잠기었다. 우선 덕수궁으로 회장을 정하고 선거준비사항을 의논하고 북선에도 선거구역을 정하고 소련에 통지하였더니 소련은 입국을 거절하여 조선 통일 정부수립이 가망이 없다.
위원회는 자의로 처리할 수 없어 국제소총회에 보고하였더니 소총회에서 소련이 입국을 거절하여 북방선거가 불능한 때에 가능한 지역에서 먼저 선거하고 북방의 자리를 비어두었다가 선거 가능한 때 채우자 하고 가결하였다.
조선인 측에서도 이론자가 있었다.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하면 국토는 영히 분열된다고 비난 자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은 몇 개인에 지나지 못하고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하자는 의논이 다수이다. 그런고로 오는 5월 9일로 총선거일로 정하고 선거 규칙과 주의사항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