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나오는 영주 순흥지역의 단종과 금성대군
그리고 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던 지역 백성들의 충절 이야기
백일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국내 1200만 명을 돌파하고 이제는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어 K-문화의 기치를 더 높이고 있다. 이렇게 치열한 삶의 생생한 현장인 영주(풍기,순흥) 지역의 역사와 그 현장을 돌아보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는 말처럼 올곧은 선비의 고장 영주 지역의 ‘선비정신’이 세계인들의 마음 속에 되새겨지기를 희망한다.
□ 순흥과 단종복위거사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대신과 사육신 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 계유정란에 반발한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이 순흥땅에 유배 온 이후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 거사(정축지변)를 위해 단종과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 하여 조정을 바로 세우려고 분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거사 직전, 순흥부 관노(노비)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여 순흥고을은 피바람이 일었다.
세조는 즉시 군대를 보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이보흠을 참형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순흥 도호부는 역적의 고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폐부(廢府)되었으며, 수많은 향민이 참혹하게 학살하였다. 죽계천 주변에서 죽은 이들의 피가 멈추지 않아 흘러갔다 하여, 현재 영주시 순흥면 동촌 일대를 '피끝마을'이라 부르게 된 유래가 되었다.
정축지변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금성대군과 순흥 선비들의 충절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순흥 지역의 중인들과 향리들이 보여준 충절은 지금의 순흥초군제 속에 녹아 5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영월에 있었던 단군과 순흥도호부에 있었던 금성대군 사이에는 백두대간 125리길(50킬로) 충북 단양군, 영월군, 영주시 단산면이 만나는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인 고치령(串峙嶺)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된 금성대군(단종의 숙부)과 단종의 영혼을 모시는 곳 사당이 있어 지금까지도 제례를 지내고 있다.
□ 단종복위거사 관련 지명과 이야기
1457년(세조 3년) 정축지변 당시 영월 청령포의 단종과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 사이의 밀약과 관련된 영주·순흥 지역의 지명, 전설, 민담은 비극적인 역사만큼이나 짙은 슬픔과 충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락리 (馬落里 - 영주시 단산면):
단종과 금성대군 사이의 비밀 편지를 전달하던 연락관들이 험한 소백산 고치령을 넘다가 말이 굴러떨어졌다는 곳입니다. 이들 밀사가 죽계천을 통해 오갔던 비운의 통로로, '말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습니다.
2. 피끝마을 (피끝 -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관노의 밀고로 실패한 후, 순흥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때 처형된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흘러내려 와, 멈춘 곳이라 하여 '피끝'이라는 지명이 남았습니다.
순흥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억울한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약 90년 후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이들을 달래기 위해 근처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3. 고치령(古峙嶺) 산령각(山靈閣)과 단종/금성대군의 슬픈 이야기
산령각(山靈閣)은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에 있는 고개로, 소백산맥을 넘어 영주 순흥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단종과 금성대군이 비밀리에 소식을 주고받던 주요 길목에 있습니다.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과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은 숙부와 조카 사이로, 고치령 산맥 하나를 사이에 두고 50여 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고개는 금성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만나기 위해 그리움을 안고 올랐던 고개, 혹은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던 비극적 장소로 전해집니다.
현재 고치령에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산령각(山靈閣)이 있으며, 고치령 산령각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호랑이를 탄 금성대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영주시와 영월군이 합동으로 이들을 소백산의 산신령으로 추앙하며 위령제를 봉행합니다.
4. 죽계천 (竹溪川)
영주시 순흥면을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 앞을 지나갑니다.
정축지변 당시 순흥 주민들이 도륙되어 흘린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여 리(약 4km) 떨어진 현재의 안정면 동촌마을까지 흘러갔다고 하여, 그곳을 '피끝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청다리 (백운동교)는 죽계천 위에 놓인 다리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 근처에서 처형되어 시신이 물에 떠내려가고 피가 냇물을 붉게 물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순흥을 흐르는 시내로, 정축지변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5. 경자바위 (敬字岩 -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 맞은편 죽계천변에 있는 바위입니다.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조선 중기 풍기군수 주세붕이 그들을 달래고자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 자를 새겼다는 유래가 있습니다.
6. 금성대군 신단 (錦城大君 神壇)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내죽리에 위치한 영주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호)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금성대군(이유)과 순흥부사 이보흠, 지역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제단입니다. 숙종 때 복권되어 1719년(숙종 45년)에 건립되었으며, 품(品)자형으로 배치된 3개의 단이 특징입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1457년 순흥에서 처형당한 후, 18세기에 이르러 단종에 대한 의리가 강조되면서 제단이 설치되었습니다.
사주문을 지나면 제청이 있고, 토석담장 안에 3개의 단이 있습니다. 중앙의 금성대군 단, 동쪽의 이보흠 단, 서쪽의 순절 선비들을 위한 단이 있습니다.
인신(人神)을 위해 설치된 제단의 대표적 사례로, 조선 후기 충절을 기리는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유적입니다. 소수서원 인근에 있으며, 매년 봄·가을로 향사(제사)를 지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성대군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그 일대에서는 밤마다 곡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유배지에서 금성대군을 사모했던 한 여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불렀다는 노래나, 금성대군이 죽기 전 한양에 있던 세조를 향하지 않고, 단종이 있는 영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며 충심을 다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7.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위리안치處)
위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소수서원 인근)
내용: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1456년 순흥으로 유배되어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고 갇혀 있던 곳입니다.
위리안치는 가장 무거운 유배형으로,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되었으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했습니다.
8. 순흥 청다리 (제월교 霽月橋,백운동교)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인근의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입니다.
정축지변 당시, 거사가 내부 고변으로 발각되어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체포된 후, 이들의 모의에 가담했던 순흥 지역의 토착 세력(향리, 선비)과 백성들이 관군에게 참형을 당한 장소입니다.
'청다리'의 비극: 이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피가 너무 많아 죽계천을 따라 10리(약 4km) 떨어진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렀다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그곳은 '피끝마을'이라는 슬픈 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의 유래: 정축지변 당시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이 이 다리 근처에서 서성이다 관군에 의해 구조되어 서울 등지로 보내졌는데, 이 슬픈 사건이 민간에 전해져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원조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현재: 이곳은 퇴계 이황 선생이 제월교(霽月橋)라 명명하였으나, 현재는 주민들에게 '청다리'로 불리며 정축지변의 비극을 기억하는 장소로 남아있습니다.
9. 압각수 (鴨脚樹, 은행나무)
금성단 근처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입니다. 정축지변 당시 선비들이 학살당할 때 스스로 말라 죽었다가, 200여 년 뒤 금성대군이 복권되자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어 충신수(忠臣樹)로 불립니다.
10. 추원단 (追遠壇)
순흥 안씨 문중이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쌓은 제단입니다. 멸문지화 수준의 참화를 당해 묘소가 실전(失傳)되는 등 고난을 겪은 후, 숙종 때 복권되면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 충정과 관련된 예화 및 일화
1. 안씨 일가의 멸문지화와 불타버린 서책
순흥 안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으며, 안향 선생 이후 수많은 서책과 기록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축지변 당시 모든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며 서책이 불에 타 수많은 자료가 유실되었습니다.
2.순흥부 폐지(閉府)와 충절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순흥을 '역적의 고장'이라 하여 폐지하고, 그 땅을 인근 영천(지금의 영주), 풍기, 봉화로 분할했습니다. 이는 220여 년간 유지되다가 숙종 때 이르러서야 복구되었습니다.
3. 학살(虐殺)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지조(志操)
정축지변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가장 잔혹한 양민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순흥 안씨 가문은 죽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것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으로, 목숨을 내놓고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4. 금성대군을 사모했던 시녀 김련의 배신과 격문 밀송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며 격문(檄文)의 초고를 작성하여 품속에 숨겨두었는데, 이를 알게 된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시녀 김련은 금성대군을 사모했으나 거사를 앞둔 대군이 이를 냉철하게 거부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거사를 배신하여 격문을 훔쳐 달아났다고 전해집니다.
김련은 격문을 들고 도망쳤고, 당시 풍기 현감이었던 김효급이 이를 추격하여 빼앗은 뒤 서울의 판중추원사 이징석을 통해 세조에게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거사는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고, 세조는 즉시 군대를 보내 순흥부를 초토화했으며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사사(賜死)당했습니다.
□ 정축지변과 영주 순흥지역의 역사적 의미
정축지변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을 '목숨을 걸고 충절과 의리를 지킨 선비정신의 본향'으로 만들었습니다.
1. 올곧은 절의(節義)
금성대군과 뜻을 함께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지역 향리, 품관, 백성들은 왕위 찬탈이라는 불의에 맞서 어린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참변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역모'가 아니라 '충절'로 재평가되었습니다.
2.사학(私學)의 중심, 소수서원
정축지변 후 약 86년 뒤인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금성대군이 모의했던 숙수사 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워 선비정신을 학문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참혹한 역사의 극복: '역적의 땅'이라는 오명을 200여 년간 감내하다가 숙종 때 복권되면서, 이곳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충신과 선비들의 넋이 서린 고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3. 진정한 선비의 고장, 영주 풍기 순흥 지역
순흥·풍기·영주 지역은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세 번의 유배에도 굴하지 않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영주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충절과, 이를 이어받은 유학적 전통(소수서원)이 어우러져 대한민국 대표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면서
화엄종으 조종 부석사의 화엄사상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충의사상, 평은면 왕유리의 예수 사도 도마상의 기독교 박애사상이 어우러져 있는
한국인의 정신문화의 원류로서 영주지역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