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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클로즈업>의 줄거리:
접사라고도 하는 클로즈업은 사진 촬영이나 영화촬영에서 피사체나 연기의 일부를, 초점을 집중시키거나 확대해서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클로즈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감을 갖게하고 그러므로써 경쾌함을 더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도 이런 클로즈업의 기능이 있어서 모든 관계를 클로즈업 수행을 통해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 클로즈업에 의해 인생의 아름다움과 추함, 유쾌함과 불쾌함, 심지어는 생명과 사망까지도 결정 됩니다.
클로즈업(close-up)
(룻기 3장 1~18)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클로즈업(close-up)’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클로즈업(close-up)’
‘클로즈업(close-up)’은 사진이나 영화 촬영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우리말로는 접사(接寫)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꽃을 클로즈업하면 주변의 배경은 희미해지고 꽃만 또렷하게 나옵니다. 심지어 꽃 안의 꽃술에 있는 꽃가루나 꿀까지도 실감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한 장면에서 어느 한 대상을 확대해서 보여주므로 관객들에게 실감과 경쾌함을 더해줍니다. 꽃 같은 피사체를 클로즈업 했을 때에는 아름답고 유쾌한 기분이 됩니다. 배경은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꽃만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수술 장면 같은 것은 보통 롱샷으로 잡는데 클로즈업해서 열려있는 배 부분을 보여주면 섬뜩함을 느낍니다. 또는 사진작가들이 쓰레기통 안을 클로즈업해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그 안의 지저분한 것들이 자세하게 표현된 것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느끼고, 하수도를 클로즈업해서 밑바닥에 돌아다니는 쥐를 찍었다면 정말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이렇듯 어떤 것을 클로즈업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아름답게 느끼면서 유쾌하거나 굉장히 추하게 느끼면서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되는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클로즈업의 원조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클로즈업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나 사물 혹은 일 같은 모든 관계들에 대해서 망원렌즈나 접사렌즈처럼 늘 클로즈업을 시행하면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것도 클로즈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꽃을 클로즈업 할 때에 나머지 배경은 뿌옇게 처리되는 것처럼, 내 입장이 절대적으로 클로즈업되면 내 유익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므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뿌옇게 처리되면서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문 10절이 핵심 절인데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합니다. ‘인애(仁愛)’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은혜, 사랑, 자비와 같은 말로서 번역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합니다.
‘인(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공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의 모든 사상의 핵심이 인입니다. 그런데 이 인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공자도 정확하게 규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실천적으로 나라에 대한 관계에서는 충(忠)으로서 표현이 되고, 부모와의 관계에서 는 효(孝)가 되며, 형제에 대해서는 우(友)가 되고,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자식에 대해서는 제(悌)가 되고 그리고 신(信)이나 관(寬) 등이 됩니다. 공자 사상을 연구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도대체 인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의 얄팍한 지식으로도 공자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논어의 설명을 보면 ‘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 인(人)자와 두 이(二)가 합쳐진 글자로 ‘친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仁)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마음에서 클로즈업하고 있는 상태로 ‘친하다’는 것은 ‘가깝다’는 것으로 곧 ‘마음이 그 사람을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듯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인데 애인이나 돈이나 사업 무엇이든지 클로즈업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클로즈업 했기에 인이 충이나 효나 우 등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이지만 그 뿌리는 경천사상(敬天思想)에 있습니다. 즉 인(仁)은 하늘에 대해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하늘을 클로즈업하면서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나라에 대한 관계에서는 충으로 나타나고, 부모에 대한 관계에서는 효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인데 공자는 대단한 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공자에게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하늘이 인격적으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전까지는 발견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위치를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없고 그 하나님께 이르는 길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십자가로부터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길인데, 공자의 경천은 이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하늘을 클로즈업하여 살 때에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나타나는 인(仁) 사상 형식은 대단합니다.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10절의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하는데 오늘 이 장면은 인애라고 하는 깊은 사상성이 있는 단어가 나올 분위기가 아닙니다. 보아스가 추수를 하여서 기분이 좋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깊은 잠이 들자 룻이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자다가 발에 뭐가 걸리니 소스라쳐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낮에 보았던 룻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연유를 물으니 룻이 보아스를 고엘(Goel)제도와 계대결혼의 풍습에 의한 기업 무를 자로서 결혼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같으면 이 청혼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줏대도 없어 보이고 쉬운 여자처럼 보기도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아스가 승낙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요새 젊은 사람들 말로 썸타기가 진행되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한 말의 의미가 깊습니다.
‘고엘제도’는 형제가 가난해서 땅이나 집 등을 다 팔게 되었을 때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형제를 대신해서 집과 땅을 되찾아 주는 제도이고 ‘계대결혼’은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은 경우에 그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그 형수나 제수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첫 자식을 죽은 형제의 집안에 입적시켜서 대를 잇는 것입니다. 이 제도에 근거해서 룻은 청혼을 하였고, 보아스는 그러한 행동을 굉장히 놀랍게 생각하고 룻을 무척 좋게 평가합니다.
고엘 제도나 계대결혼은 율법에 정해져있는 것이었지만 의무적인 규정이 아닌 자발적 규정이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공개적으로 형제의 가정을 생각하지 않는 자로 인상을 주는 행사를 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일지라도 규정에 의해서 청혼을 한 것인데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냐는 것인데 이때는 사사시대로 기드온이 활동을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삿21:25절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합니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내 입장을 절대화해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인간관계나 대물관계나 사건에 대한 관계를 처리하며 살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항상 내 유익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타인을 만나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의무규정이 아니었던 고엘 제도와 계대결혼은 완전히 퇴색해서 명분이나 실질적 구속력이 없는 율법조항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세태는 자기 입장을 절대시하는 세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룻이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청혼을 합니다.
그리고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합니다. 나이가 차이 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보아스는 유력하고 명망이 있는 자였으니 나이가 많고 기혼자였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젊은 여성인 룻이 세태를 따라서 자기 입장을 절대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기입장을 절대시하면서 살고 있는데, 룻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케케묵고 의무적이지도 않고 한참 신앙이 좋다고 하던 시대에도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율법조항을 근거로 아버지뻘인 남자를 남편으로 삼겠다고 청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눈여겨 본 것은 이러한 고엘 제도나 계대결혼을 근거로 자기의 인생을 결정하려는 마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완전히 클로즈업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렷하게 보여야만 그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맡겨둔 고엘 제도나 계대결혼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룻의 마음에서는 내 입장이 희미하게 처리되고 형제를 클로즈업했기 때문에 형제의 기업 무르는 제도나 형제의 대가 끊기는 제도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클로즈업된 것입니다.
마치 경천사상에 뿌리를 두고 막연하지만 하늘을 클로즈업 했을 때에, 나라에 대한 관계에서는 충으로 나타나고 부모에 대한 관계에서는 효로 나타나는 공자의 인 사상과 마찬가지로, 고엘 제도나 계대결혼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이 뚜렷이 클로즈업되어야만 하는데 보아스는 이 사실에 놀랐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 입장이 클로즈업되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잘못해서 자기 기업을 잃었는데 왜 내가 그 집과 땅을 사서 돌려줘야 합니까? 아무리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더라도 형수를 내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형수 입장에서는 또 어떻겠습니까? 이 제도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가족 간의 관계에서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클로즈업 하는가를 보시는 제도였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이 자발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클로즈업해서 얼마나 뚜렷하게 받아들여지느냐를 보시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보아스도 룻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클로즈업한 사람이었기에 고엘 제도와 계대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이성간의 썸 타기가 아닌 이유는 11절에 보면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클로즈업하고 있었기에 시어머니의 말대로 계대결혼의 청혼을 하였지만, 자신이 보아스에게 어떻게 여겨질지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러한 룻의 행동에 대해서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겠다고 하며 그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남자나 여자가 자기의 입장을 클로즈업해서 사는 시대에서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클로즈업하여 고엘 제도나 계대결혼을 수용했음을 대단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는 말은 룻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클로즈업한 것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을 때였습니다. 자신의 입장은 희미해지고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클로즈업하여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자신도 죽겠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룻의 마음에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클로즈업되어서, 자신의 입장과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문제는 보이지 않고 볼 필요도 없어진 것인데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경향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꾸만 클로즈업합니다. 육체가 있어서 만나게 되는 것들을 클로즈업해서, 본래 하늘을 클로즈업하는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붙잡고 죄적 성향으로 세상을 클로즈업하려는 나의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동선을 따라 갈 때에 하나님이 내 마음에 클로즈업되어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입장에 대해 완전히 무시되고 희미해지고 둔감해질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 땅에 표현되고 선민의 삶이 진행될 수 있게 됩니다.
인애(仁愛)는 친한 것이고 클로즈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클로즈업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민이고, 이런 세태 속에서 보아스가 깜짝 놀랐던 룻의 하나님 클로즈업이 우리에게도 하루 종일 나타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클로즈업하는 죄의 경향이 죽게 하시고, 주님의 동선을 따라서 그 길로 확인되어지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클로즈업되어 다른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상태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