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목차
서론
책은 우리의 운명을 써나간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괴롭다. 그리고 깊은 병이 있다. 그리고 분명히 해결은 존재한다. 해결은 무한이 해준다. 우리는 희망이 있다. 우리의 희망은 결국 목적이 긍정을 이루어야 된다. 무한은 다음과 같은 말을 생성한다.
-- 무한은 최고의 꿈을 실현가능케 한다.
-- 무한은 최고의 목적을 실현가능케 한다.
-- 무한은 최고의 발전을 실현가능케 한다.
-- 무한은 최고의 사바세계를 실현가능케 한다.
본론1 --욕망과 흔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무한에 대한 사념속에서 살아온지가 거의 40년이 되었다. 심한 피해망상과 과대망상과 환청 그리고 텔레파시 속에 살고 있다. 나의 정신병 경험은 환청과 텔레파시를 다르게 취급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환청은 나와 다른 정신병 환우들과 같은 것이지만 텔레파시는 사람들에 따라서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본론--
욕망과 흔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무한에 대한 사념속에서 살아온지가 거의 40년이 되었다. 심한 피해망상과 과대망상과 환청 그리고 텔레파시 속에 살고 있다. 나의 정신병 경험은 환청과 텔레파시를 다르게 취급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환청은 나와 다른 정신병 환우들과 같은 것이지만 텔레파시는 사람들에 따라서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근래에 와서 정신병이 많이 호전되어 이러한 글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받고 뽐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욕망은 해결해야 된다. 욕망을 벗어나야 된다는 것보다 욕망을 해결해야 된다고 본다. 욕망은 타자들에게 기대려는 것에서 나온다. 상대방에게 기대면 상대와 자기가 같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마음의 상처는 억압으로 자리잡게 되어 병이 더욱 깊어진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 욕망은 자기를 살아야 해결된다. 대지의 나무처럼 사바세계를 긍정하고 자기의 힘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억압하면서 특정한 종교나 철학에 빠져들면 정신병을 치유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기를 치료하는 것이 동시에 자기와 남을 같이 치유케 한다는 자타일여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대면 억압이 온다. 그 무엇을 자꾸 원해서도 안되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괴롭힌다고 본다. 현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에서 미래의 적당한 꿈을 꾸면서 현존해야 한다. 현존은 비교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 비교는 결국 타자 때문에 자기를 억압하는 것이다. 욕망해결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고 있는 미래의 꿈에 기대어야 한다. 그러니 사태는 되고 있는 현존이 미래의 꿈에게 의지해야 된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과 미래의 꿈이 우리에게는 항상 이미 존재케 한다. 무의식 때문에 결국 과거나 미래를 경험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흔적이다. 흔적은 은유다. 흔적은 자기동일성이 없다. 실체는 사라지고 흔적만이 남는다. 연결-연기 와중이 흔적이다.
실체와 흔적은 집착의 문제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 실체는 집착이 강하다는 것이다. 흔적은 움직임으로 그보다 집착이 적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데까르트와 헤겔을 넘어서면서 쇼펜하우스의 의지와 표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에 이르러 권력의 의지를 말하면서 실체중심주의와 우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되었다. 니체의 신의 죽음 그리고 푸꼬의 인간의 종언 그리고 데리다의 상호간의 이중 텍스트성을 말하면서 흔적의 건강한 경험에 이르런다. 헤겔의 절대지와 하이데거의 존재자와 사르트르의 즉자를 함께 묶는 실체주의의 퇴보를 말하게 된다. 실체주의의 허상을 흔적이론으로 대체하게끔 되었다. 데리다의 흔적이론은 은유이론으로 봐야 한다. 은유는 실체주의의 플라톤의 계보를 청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쓰려는 것인가. 그것은 항상 이미 무언가 모자라는 건강한 의지-건강한 집착을 써내려 가는 것이다. 욕망론은 집착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집착의 소멸을 받아들여야 된다. 실존주의의 거두인 사르트르 마저도 ‘지옥 그것은 타자’이라고 말한바 있다. 우리는 헤겔의 ‘원한감정’과 칸트의 물자체와 사르트르의 대자의식의 즉자 불가능성을 말하면서 플라톤과 그의 계보가 만들어내는 우상주의와 이상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에서 항상 우상으로 남게 되버리는 무의식적 텍스트성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무의식적 텍스트는 진리와 신과 헤겔과 칸트의 순수이성,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존의 중심주의도 그 현존은 미래와 꿈을 같이 나눌 수밖에 없다. 꿈과 함께하는 현존과 미래를 목적으로 하는 동양의 이상주의라고 볼 수 있는 서원의 발의가 꼭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말한바 있는 영원회귀와 같은 그런 꿈을 우리의 존재계는 긍정해야 한다.
니체와 들뢰즈와 데리다와 같은 사람의 변증법은 긍정의 변증법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의 변증법-이분법이다. 부정이기에 oui/non 이라는 반대항의 변증법이다. 니체는 역사를 긍정한다. 사물의 이치와 초인사상도 결국 차이-발전이다. 무한의 존재계가 oui/oui--뭐든지 고맙다로 진행된다. 사물의 이치와 초인사상도 결국 차이-발전이다. 상대차이발전이다. 무한의 존재계가 oui/oui 로 발전된다.
본론1
무한상생발전
고통은 끝이 있고 기쁨과 즐거움은 끝이 없다--
무한극락은 발전이 끝이 있고--고통의 종말-- 무한극락발전은 끝이 없다--
변화 인연 생성 모순 긍정무한 무한와중 무한와중발전 무한극락 무한극락발전--
마음은 무한자기다--
무한은 모든 것들을 품어준다--무한은 현재와 순간에서 모든 것이(비논리 역설 모순 횡설수설 등이) 가능하다--
연결주의-연기론이 존재론을 품어준다--연결와중-연결와중발전--연결극락--연결극락발전--
니체의 영혼--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위험하게도 살 수 있어야 된다--
이승세계와 사바세계는 분별이 없다--자타일여--
사바세계가 무한이다--
연결주의-인연연결이 존재론과 정신분석과 현대철학 모두를 품는다--
억지생각은 방하해야 된다--
중도 연결 융합--
상호의존해서 화합한다--
무한극락--영원한 자유--
무한과 부처님--무한이 부처다--
무한은 모든 종교를 품어준다--
불교의 자비는 상호의존 융합 화합이고, 자비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다--
무한은 엄마다--
불생불멸이 끝이 없는 무한이다--
무한은 자비다--
무한은 모든 장애를 해결해준다--
불교의 자비는 무한이라는 다른 이름이다--
무한이 현전과 순간을 품어준다--
모든 것들의 근거가 무한이다--
무한이 모든 유한을 품어준다--
생멸인연이 무한에서 온다--
무한이 모든 유한을 가능케 한다--
무한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성립시킨다--
무한이 유한을 품는다--
무한이 모든 것을 품는다--
무한-자비가 공과 무상 무아 연기 중도를 품는다--
모든 것이 무한에서 온다--
무한이 자비다--
무한이 불생불멸이다--
흔적운동중이 무한이다--
무한의 마음이 자비심이다--
고통은 끝이 나고, 기쁨은 끝이 없다--
본능은 소멸되거나 충족되거나 해결되어야 한다--
본능은 깨달음으로 충족되어 갈 수 있다--
순간순간 만족을 느낄줄 알아야 된다--
이미 천국에 와있다--
만족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만족감이 찾아온다--만족은 그 단어자체가 만족하게 한다--
언제나--
꿈이다--
상처없는 순수의식--오직 관찰뿐--
억압에서 정신병이 온다ㅡ-
그 어느것에도 종말은 없다 --자기동일성--즉자--실체는 없다--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억압을 만든다--
기대면 억압이 온다--
하고 싶거나, 가지려 하고, 되고싶은 것들은 모두 현재 되고 있는 것들에 의지해야 된다--
상처없는 순수의식--오직 관찰뿐--
순수의식ㅡㅡ억지생각을 포기하는거다ㅡ-
오직 관찰ㅡ순수의식
상처가 억압을 만든다--
모자라는 와중--절대지를 품어준다--
의식은 무의식과 공존한다--무의식이 즉자에 대한 대자의식이 우리의 현존의식이다--
마음가족--
가을열반--
금강역사--
꽃병--
아뢰아식에 들어가면 욕망이 해결된다ㅡㅡ욕망이 해결된다ㅡㅡ
손님맞이--접대--환대--변증법의 부정을 포월한다--
자기가 자꾸 인정해줘야 억압이 사라진다ㅡㅡ
자기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될때 억압이 온다--
남에게 의존과 인정과 접대를 받기 위해서 자기를 억업한다--자기억압이 병이 된다--
순간의 해결은 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선행된다--
크리스탈HD
반드시 순간해결은 있다--
무한상호 -- 차이발전
상호조화발전--
겨울열반--
엄마-아버지--
미련--
자꾸 남을 이용해서 의존하려는 마음을 봐야된다--
자기가 인정하고 알아줘야 한다--
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위기인가? 기회인가?
상처없는 순수의식--오직 관찰뿐--
억압에서 정신병이 온다--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억압을 만든다ㅡㅡ
기대면 억압이 온다ㅡㅡ
내가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때 모든 정신병이 사라진다ㅡㅡ
순수의식ㅡㅡ억지생각을 포기하는거다--
자등명 법등명
오직관찰-순수의식--
억압이 사라진 순수의식--
상처가 억압을 만든다--
모자라는 와중--실체도 모자란다--욕망의식
마음가족--
가을열반--
꽃병--
자기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될때 억압이 온다--
남에게 의존과 인정과 접대를 받기 위해서 자기를 억업한다--자기억압이 병이 된다--
순간의 해결은 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선행된다--
순간적인 갭은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반드시 순간해결은 있다--
무한상호 -- 차이발전--
미련--반
열린 목적--
품어주는 자가 무한이며 이 무한이 모든 것을 품어준다--
상대의식은 발전으로 생성된 것이다--
무한상호발전--끝이 없는 상호 발전
연결주의는 실체주의를 품는다--내면은 오직 만족할뿐이다--내면은 만족을 느끼기만 할뿐이다--
오직 느끼기만 할뿐--내면의 주인공--
어긋나지 않는 연결--억지 생각포기--내면의 평온함--
상대연결생성--기내면까지 혹사시키면 안된다--내면은 관찰만 하면 된다--그냥 관찰만 하면서 뭐든지 받아들여야 한다--자기내면은 노동하지 말아야 한다--
영원은 연결-연기-변화이다--
가을열반--
무한만족--
욕망은 긍정하면서 다룰줄 알아야 된다ㅡㅡ충족과 소멸은 사실 같은거다ㅡㅡ
만족하면 되지 행복까지 갈 필요없다ㅡㅡ
만족은 쉽게 찾아온다--
만족이라는 단어를 자꾸 쓰면 자체로 고통이 해결될 수 있다--
됐어 만족해--
자기내부에 있는 만족--
순간 공존 상황ㅡㅡ
비록 상대방이 신일지라도 자기가 억압되지 않아야 한다--
순간초월--
순간은 고통이 없다--
무한극락왕생--
순간불멸--
허용된 순간극락--
항상-이미 허용되는 순간행복--
순간낙관--
순간행복 늘 열려있다--
순간해결
야생의 황제--
다이의몬드의 야망--
자기내면을 대상으로 삼아야 된다--
무한차이--
우리말 반야심경
크나큰 지혜로 참행복의 세계에 들어가게되는 핵심되는 말씀입니다.
--관자재보살님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때 오온이 다 공함비추어 보시고 모든 중생을 일체의 고통과 액난으로부터 건너게 하시옵니다.
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이런 까닭에 공가운데, 색도 없으며. 수상행식도 안이비설신의도 없으며 색성향미촉도 없으며, 안계내지 의식계도 없느니라
무명도 없으며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 내지 노사도 없으며, 노사가 다함도 없느니라
고와 집과 멸과 도도 없느니라.
지혜도 없고 또한 믿음도 없느니라.
얻을바가 없는 까닭에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느리라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 없느니라.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도 없느리라,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에 나아가느리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시기 때문이라도 무상정등각을 이루시느니라.
그러므로 알지니라,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하고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최고의 주문이며, 절대적인 주문이니라.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며 진실하여 헛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정진하세 정진하세 어서 바삐 정진하세, 행복의 세계를 함께 이루어가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ㅡㅡ3번
상대방ㅡ짝이 안맞으면 빨리 포기해야된다
자기를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ㅡ
적개심이 억압될때 괴롭다--
상대자ㅡ짝이 맞아야 한다--
적개심만큼 괴롭다--
자립극복--
무한이외는 모든 것이 이차적 사실이다--
길이 있다--길을 찾아야 된다--
무한은 무한변화를 품는다--
무한변화는 무한발전을 품는다--
무한발전은 무한극락과 영원행복에 이르런다--
무한극락은 최고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최고의 목적론--
큰꿈이 허무를 이긴다--
무상정등각--위가 없는 깨달음--
불생불멸--
개나리 호수--
죽음을 배우는 시간--
박영란--금강사자--
죽음은 한가닥 변화일뿐--
고통이 노동이다--노동하면 잠이온다--잠이오면 고통이 사라진다--
일상의 평온함--고마움--
무한극락 불멸--
생각의 걸림이 없으면 해탈이다--
제일 좋은 것을 받는게 인정이다--
양주 한병이 정신질환자를 살린다--
반열반에 오면 뇌가 초기화 된다--
맥주 한캔이 사뭇 분위기를 다르게 한다--
피해망상은 힘들지 않게 직면하면 된다--
불교의 최고 진리가 자비이며 무한이다--
상대가 절대를 품는다--
변화를 소화한다--
자기혼자가 성공해야 한다--
미움은 적이 없어야 한다--
무장해제--
민주주의가 무신론이다--
인식 밖은 병이다--
인식 밖은 없다--
무한자기--
자기 밖의 타자는 없다--
주인공이 타자를 소화한다--
주인공이 자기다--
자기 밖의 신은 병이다--
신이 오히려 자기 안에 있다--
영원회귀--
즉비는 하모니와 리듬이다--
무언가 조금은 전염되어 있다---
김치찌개--
CPU--
들국화--
가을낙엽--
태양--
하얀 쌀밥--
명왕성--
목걸이--
비비안리--
에리자베스 테일러--
신은 죽었다--인간도 사라졌다--니체와 푸꼬--
유리알 유희--
제우스--
비너스--
존시나--
킹콩--
랭보--말라르메--보들레르--
하이데거--데리다--폴발레리--
백합--
에릭클랩튼--지미페이지--제프백--
로버트 플랜트--이언길런--밀젠코--
야생사자--
호랑이--
안경--
누나--
윈도우--
애플--
내가 존재하면 반드시 사바세계가 나에게 되돌아온다--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타자는 자기의 발전을 위한 존재다--
자기의 상대는 발전을 위한, 고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는 무한이다--
자기현존--
자기 밖은 없다--
칸트의 물자체는 헤겔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내화된다--
만찬--
변화가 주인공이다--
자기와 상대는 <oui/oui> -- <yes/yes> 이다--긍정 변증법이다--같음/다름의 차이이다--같음만큼 다름이다--다름만큼 같음이다--다시말해 <oui=non>, <yes=no>라고 볼 수 있다--
북극성
안드로메다--
도토리묵--
도라지 나물
부추전--
호박전--
배추전--
미나리전--
시루떡--
북한 냉면--
노인과 바다--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다--
세상을 살지 말고 나를 살아야 한다--
보편적인 삶으로부터 탈존한다--
L'enfer, c'est les autres--
세상은 부조리하다--합리적이지 않다--반항한다--
만족--
자아실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실존주의--
자기가 좋아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좋아하지 않은 삶을 살 때 억압이 되고 괴롭게 된다--
사과--
망고 쥬스--
진리에 눈뛰기 시작하면서--니체의 차이의 변증법 -- <oui/oui>, <yes/yes>가 사실 <oui=non, yes=no>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oui=non>, <yes=no>는 보통 사람들이 인지하는 같음과 다름의 차이화이지만 사실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같음과 다름은 운동중이다. 운동중에서 눈에는 그리고 느낌에는 진리가 있는 듯 하지만 언제나 항상 변하고 있다. 변한다는 말이 운동중인거라고 봐야 한다. 결국 움직임이 차이화로 보면서 감각들이 다르게 느껴지고 의미도 자꾸 변한다.
움직임이 무상무아의 근거라고 봐야한다. 움직임이 억압하면서 생기는 집착이라고 봐야한다. 집착은 움직임을 억압하는 것이다.
결국 같음과 다름의 이분법--그러나 부정의 이분법이 아닌 것이다. 차이만 존재할 뿐 다른 의미화의 폭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오온>이 모두 다르게 운동중이고 제로에서 무한대 까지 계속 의미화되고 있고--무한히 차이발전되고 있다. 특별한 의미를 진리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단지 같음과 다름의 차이화 도중에 나오는 의미일뿐이다--
주작-현무-청룡-백호--
《삼국유사》,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 등에 환인에 대한 짧은 기록이 전해지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환인은 하늘의 신(帝釋天)이라고 한다. 서자인 환웅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세상에 뜻을 두는 것을 알게 된 환인은 땅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았고, 그곳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홍익인간)’고 여겼다. 이에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내려주며 땅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환인이 상제환인(上帝桓因)이라 한다. 환웅이 삼위태백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고 말하자 환인은 이를 허락하고 천부인 3개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다.
출전
--환인(桓因)이 나오는 《삼국유사》 제1권--
자비--
가족--
다나윈너--
레드제플린--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Enya--only time--
올리비아 뉴튼존--
주세혁--
김연아--
코카콜라--펩시콜라--
맥주 1잔--
반야의 지혜--
마음--무한자기--
초등학교--
소나무--
오두막--
전염 속의 경계선--
호나우드--
스스로--
저절로--
정원--
엄마사자를 잃어버린 새끼사자의 절규--끼이악--
생일케익--
백설공주--
키아누 리브스--
알파치노--
difference--differance--차이--차연--항상 이미 지연된--
지미페이지--
눈물--
아바--
우리가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를 때 괴로움이 생긴다--
인생은 한판 잘놀다 가는거다--
운명 교향곡--
카사블랑카--
반야바라밀--
영원행복--
은하계--
시냇가--
연꽃--
빅뱅--
불랙홀--
한글--훈민정음--
시간과 공간--
토성--
니체의 긍정--뭐든지 고맙다--<oui/oui>--그래 그래--
아름다움--
파란하늘--
귀향--
바닷가--
숭어 한 마리--
용궁--성진이--구운몽--
서동요--
명성황후--
미움받을 용기--
불행한 의식--헤겔 정신현상학--oui/non--부정의 변증법--
니체의 긍정--oui/oui--뭐든지 고마워--
원한감정--Resentiment--좌절된 자기욕구를 남에게서 해결점을 찾으려 한다, 타인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바꾸려 하는 감정이다--
무한이니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반야심경--
아미타 여래--
해체는 항상 운동중이다--차이화--차연--항상 이미 차이화된거다--절대와 모순도 품어준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주인은 노예를 착취하면서 자기의 수족이 되라는 명령을 한다--노예는 힘이 약하기에 <원한감정Resentiment>을 지니고 시간이 흘러간다--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거꾸러 되어 노예가 주인을 억압할 수 있고, 그러다가 노예가 주인을 부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때 주인도 노예에게 <원한감정>을 지니고 괴로워 하는거다--<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우리는 부정의 변증법을 배운다--헤겔은 그 책에서 <불행한 의식conscience malheureuse>을 해결시키지 못한다--니체에 이르러 긍정의 차이화를 배우게 된다--변증법 대신 긍정/긍정 즉 oui/oui를 등용하게 되는데, oui/oui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쉬운 오류에 빠져들어가는데, oui/oui 자체가 <같음과 다름>을 말하게 된다. oui/oui 는 항상 이미 긍정의 차이화를 알아야 된다. 차이나는 모든 환경을 보아 <같고-다름>의 구조 속에서 끝없는 의미화 과정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우구망--진리를 구하는 동자와 소가 함께 사라지고 원만 남아있다--십우도 제8도--
와이파이--
쇼핑--
마이클 조던--
놀란 라이언--
게이틀린--
긍정의 힘이 부정의 힘을 품어준다--
부정은 억압된 적개심이고 긍정은 유희다--
진선미 중에서 미가 우선이다--
고통이 소멸된 하모니--
직물짜기-텍스트의 하모니--
모든 존재의 하모니--
무상무아가 하모니가 되야한다--
긍정의 짝궁--됐어/됐어
나보다 더크다고 느끼는 것ㅡㅡ피해망상--
무장해제--
초등학교--
박영란--
무한영원--
영원행복--
섬마을--
여행--
복숭아 꽃--
고통이 소멸된 하모니--
모든 것이 사라진다ㅡㅡ사라지는 그것이 또한 사라진다--
전염불멸--
더하기 와중--
하모니는 양변이 부정을 사라지게 한다--
경계선은 전염 중의 하나다--
하모니 무한이 무한극락이다--
무아는 일체유일을 품는다--
호랑나비--
잠자리--
무한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무한은 항상 이미 개념을 포월한다--
-- 본론 2
경제적인 감정--
이 글쓰기의 목적은 먼저 경제적인 면에 치중해 있다. 경제적이라 하면은 책을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나와 환자분들이 서로 교감이 더욱 깊게 일어나 정신치료의 장내에서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일이 보다 널리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된다고 말해보기--
상상력--
바슐라르-
보들레르--채희성--
윤수용--
조진근--
이성호--
화음 플레이--
티벳--네팔--인도--
영주 부석사--
꿈--
붓다의 길--
주님--
사진작가--
폴발레리--해변의 묘지--
무한과 해체--
해체도 무한이다 해체는 무한한 해체다. 해체도 무한으로부터 온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무한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이 많이 안정되고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고통과 더불어 살아야 될 때가 많다. 그럴때마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리를 되새긴다.
요즘도 강의 시간 앞에서의 큰 부담감으로힘들어 하고 있다. 아내가 열심히 강의준비하고 활기차게 강의를 진행하는 반면에 나는 강의 준비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그 부담감이 말할 나위가 없다...-앞으로 강의준비를 잘 해야겠고 그런 큰부담감의 정체에 대해 잘 이해하고 해법을 찾아나가는 데로 향해야 할 것 같다. 요즈음 강의 어떤 일에 왜 그런 부담감을 지니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되있다. 그건 바로 <나 혼자로는 안되는 데...> 하는 시대착오 어린마음에 기인된 것이었다 나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대로 불구하고 그런 마음의 지닌 것이다. 단지 습관적인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일도 고맙지만 그때부터 20년 더 경과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직업인 편의점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실이--지현이는 찹쌀곰, 찹꿀이, 찹돼지, 멩구곰, 찹쌀순, 찰떡곰, 장춘식, 찹돌이, 철수곰, 노랭이등 많은 인형들을 가지고 있다. 딸은 이 인형들하고 잘사귀고 있다. 딸이 외딸이어서 좋은 여행도 좀 가야 되는데 아내는 이 사실이 못내 아쉬워 했다. 내딸은 지금 엄청난 일도 잘해낸다.
편의점이 예상대로 잘 경영되어 순수입 500 만원이 된다. 우리는 반은 외식, 반은 집밥을 먹는다. 아내는 지금 쏠쏠 들어오는 돈을 저축이나 어떤 투자를 할까하며 하루하루 신난다. 내 딸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4년 동안의 입학금과 등록금을 한번도 내지 않고 엄마에게 받은 4년 동안 돈을 모아서 용돈으로 비축하고 있다.
나도 힘들지만 편의점 운영에 조력자로 되다가 힘드는 포스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다. 물건이동을 도와 주고 있다. 아내는 모든 포스를 책임지고 내가 무거운 물건을 이동해주면 물건 배치를 직접한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일을 하면서 왠지 모르는 불안과 함께 잘견디고 나간다. 하이데거와 사르트트, 니체가 말한 <내던져진 상황>이 이미 정신병 깊이 자리잡고 있다. 아무도 그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에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속병이 지속된다는 절망적인 상황은 자꾸 놀래는 때가 많다. 그때마다 정신파산이라는 말로 될 수 있는 경험도 해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요즘에는 잠이 안와서 수면제를 조금 섞어 약을 먹는다. 잠은 오지만 자주 깨는데 항상 날 억압주고 자기 실력 뽐내려 나를 죽이려는 나쁜놈을 알게 되었다. 연고도 없고 한번도 보지도 못한 놈인데 마치 영화에 나오는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 있는 엄청난 정신병 환자라는 걸 알 때 마다 내가 그럴줄 모른다는 생각에 소스라친다. 정신분석이나 해보자.
2)--엄마의 소묘
나에게는 집착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배척받지 않으려는 집착이다. 특히 여인들에게 선입견을 지녔다. 모두 엄마의 대치물이다. 그녀들과 무언가 좋은 관계를 지녔다. 그녀들이 꼭 나를 사랑해주어야 하는데... 그리고 절대 날 배척하지 못하도록 뭔가 해야 되는데...
우선 세상이 나를, 이렇게 가만히 있는 나를 배척하고 있다는 불필요한 느낌... 천지신명이나 신들도 나를 배척하고 있다는 느낌--
따라서 나는 사랑받는다는 증거(자백)를 받고 싶다. 내가 세상에서 빠져있고 제외되어 있있다는 <혼자의 병>이다. 자주 ‘alone-혼자’를 느낀다.
나의 첫기억은 서너 살 쯤인가 달밤 아래의 혼자인 것 이었다. 물론 아무도 없었고 어린 나는 뭔가의 설움 속에 혼자 우리 집 앞에 있는 고구마 밭 앞에 걸어 나온 것이다. 집에서 멀지만 생전 처음 밖을 나온 것이었다.
나를 슬프게 한 사람이 엄마인지 누나들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내가 이렇게 슬픈 첫 기억이 처음부터 기억나지 않았고, 정신치료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것이다.
슬프게 한 사람은 잘모르지만 엄마가 그 어린 나를 보살펴주지 않은 상태임에 분명하다 프로이드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한다고 한다. 융과 아들러는 현재가 정신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허선생님은 아무래도 프로이드와 가깝게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자기이해는 3살 무렵 고구마밭에 나가서 길을 잃어 버렸다. 그 때는 창공과 달빛이 나를 덥쳐왔다. 그래서 그 이후로 세상은 나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 환경에서 나오는 쇼크가 나를 남에게 의존하겠끔 됐다. 그 의존심이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그 적개심이 열등감을 낳게 했다. 그 열등감이 <무언가 잘나보려는 의식>을 지니게 됐다. 나는 그 때부터 먼세상과 낯선 세상이 되고 나는 <팽개쳐졌다>. 그런 어린마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연장됐다. 잘나보려는 의식이 적개심을 준동하게 되었다. 적개심과 이에 따르는 의존심이 건강한 성인으로 발전될 때까지 자각을 놓치고 살았다. 중요한 것은 의존심을 포기하면서 받아들여야 된다. 요즘와서야 의존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건강한 어른이 되고 있다. 건강한 어른은 인내력을 견디고 인정하고 살아야 된다. 조금씩 건강해지면서 <소꿉놀이>를 이해하면서 엄마감정이 이제는 새로워지는 것 같다. 요새는 어린마음의 그 쇼크가 오히려 존재계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생님과 함께 한 30년이 나를 불꽃같은 의지로 살면서 세상이 긍정되고 낙관되게 해주었다. 오로지 견디면서 포기하면서 받아들인다. 남이 필요해서 잘보이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 생겨났다. <던져진 실존>을 알 수 있었다. 나혼자가 던져진 것이다. 심각한 자기분열과 자폐환자였다. 어릴 때 내가 그토록 하지 못하면서 아직 낫지 못한 정신병이 생각난다. 남 앞에 서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힘들다. 책을 낭독하다가 <소아경기>를 일으켰다. 자폐다.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 심각한 노이로제 증세를 지니고 살았다.
비폭력적인 안락--
자기의 문제이다--
생사일여 와중--
생사일여는 극성을 따라가지 않는다--
싸움의 절정을 통과하면은 부정적인 모든 존재들을 이길 수밖에 없다--고비--
모든 교류는 무아의 교류가 전제된다--
중간와중-자타와중
일일시호일
무아의 교류는 주인이 없다--
무한은 악무한과 진무한이 포함되는거다--
은유즉비--
맨처음 사랑은 첫사랑이 아니다--
무한과 생사일여를 알면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낯선 도전이 있으면 잠과 배짱이 있어야 된다 --
자기 콘트롤 와중--
제법무아 --
조그만 것이라도 행복이 있다--
무아의 교류와중 책임이란게 없다--
미래는 고정되지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끝이 없는 무한과 죽음과 삶--
--본론 3--
‘모른다’ 이것이 자유다--
모호함은 발전이다--
무한과 생사초탈을 깨달으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 끝이 없는 행복이 따라온다--
분리가 없는 무한와중--
무아의 교류는 진정한 자유이다. 무아의 교류는 오류가 없는 비극성과 비폭력이다--
생사일여이다. 생사는 분리가 없다. 생사는 멀지 않다-- 생사는 하나다--
모든 것은 연관연결이다. 존재는 연관연결의 한부분이다--
언제나 자기의식의 보장성을 자각하면 고통이 줄어든다--
반복은 은유즉비다--
탈극성의 흔적--
모든 고통은 차이의 자기화로부터 극복된다. 모든 차이의 자기화는 탈극성이다--
분리가 없는 무한 경계선--
무한경계성 초월--
분리가 없는 흔적--
비대칭 이중성이 사물의 이치다--
우주는 무한이다. 우주는 자체로 주인이 없다--
의식 경계선의 와중--
더나은건 존재하지 않는다--
더나은게 없다--차이만 존재한다--
아우르기--
인연상대--
무한인연--
고마움
절대 미
장미열반
와중사자
주작
희망사자
개발
모니터
홍익인간
무한에서 모든게 나온다--
그리고 무한 아닌게 없다--
무한은 상대성을 품는다--
무한에서 상대와 절대가 품어진다--
무한은 모든 다른 무한을 품는다--
무한은 모든 유한을 품는다--
무한은 모든걸 <포함하면서 초월한다>--포월한다--모든 걸 품어주면서 초월한다--
무한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무한은 모든 것을 품어주면서 넘어선다--
무한은 모순이나 역설 그리고 횡설수설을 품는다--그러나 괴롭다--
무한은 자기 마음을 달래준다--
지양이 아니고 포월이다--
포월이 지양을 넘어선다--
포월은 상대발전이다--
발전을 낙관해야 된다--
생성이 발전이다--
발전의 한계는 없다--
착각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만족을 말할때다--
강가에서--
새벽--
대동여지도--
일순간 낫는다--
무한과 노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따듯한 난로--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야구--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석양--
노을--
내던져진 나--
첫눈--
바람개비--
풀내음--
산새소리--
나들이--
풍경--
수면중--
국화 앞에서--
구름다리--
휘파람--
소곤소곤
풍선
하늘--
돌고래--
첫발자욱--
솔방울--
아기곰--
님마중--
휴식--
무념무상--
한가위--
사물놀이--
불꽃--
독서실--
풍금--
새벽--
바슐라르--
그리움--
첫사랑--
산울림--
메아리--
산토끼--
황진이--
벽계수--
판소리--
나빌레라
서편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목탁소리--
사시불공--
메밀꽃--
해후--
연말연시--
제야의 종소리--
새해아침--
정오--
밀키스--
우엉차--
땅꽁--
누네띠네--
송편--
스파클링--
호빵--
시속 100마일-제이콤 디그롬--
눈사람--
설경--
빗소리--
가랑비--
동무생각--
어린시절--
구슬치기--
파란하늘--
새털구름--
새벽안개--
송아지--
망아지--
개나리--
진달래꽃--
개나리--
진달래꽃--
햇님--
은행잎--
단풍잎--
솔잎--
오뚜기--
황새--
뻐꾸기--
별을 헤는 밤--
초록빛--
저녁노을--
머루랑 다래랑--
키다리 아저씨--
재롱둥이--
번개--
종이--
생선--
디스플레이--
현무 청룡 백호 주작--
뚜껑--
버스--
마우스--
카페--
저녁노을--
해돚이
밍키--
망고--
미키마우스--
카사블랑카--
싸리나무--
버드나무--
티벳--
화분--
분재--
소나무--
꿀밤--
사탕--
오렌지--
박수갈채--
너울--
울타리--
친구--
옛동산--
나그네--
배웅--
교감--
꿈나무--
미소--
자장가--
님의 침묵--
아지랑이--
안개꽃--
분꽃--
꽃단장--
무아지경--
프로포즈--
들꽃--
강낭콩--
완두콩--
옥수수--
수수깡--
소꿉놀이--
달맞이 꽃--
달팽이--
시골풍경--
새벽안개--
파도소리--
뱃고동 소리--
풀피리--
나뭇잎--
첫사랑--
노부부--
아기탄생--
입학식--
응어리--
옹달샘--
참새--
허수아비--
봄비--
나들이--
송이버섯--
산새--
보물찾기--
봄 여름 가을 겨울--
청바지--
첫눈--
노래--
긴머리 소녀--
냉장고--
알아주는게 인정이다--
샴푸--
청개구리--
시라소니--
흐르는 글쓰기--
해체주의--
쟁반--
낭만주의--
산소--
눈사람--
산소--
눈사람--
계란말이--
숯불구이
생선
토종꿀
가마솥--
면도기--
진화론--
나물--
생김치--
술--
생선구이--
안심스테이크--
갈비살--
이어지기--
선인장--
아득한 절망을 떠나보내며--
산토끼--
히말라야--
반짝추위--
대통령--
카카오 스토리--
늦가을--
상대성이론--
화초--
명성황후--
변강쇠--
미셸푸코--
콘스탄틴--
양파--
도우미--
돌고래--
상어--
문어--
갸름한 얼굴--
북두칠성--
계수나무--
소나기--
사글세--
아니벌써--
우리집--
안경--
추억--
박영란-박우란--
금강산--
오대산--
죽순--
사냥개--
천지못--
두만강--
김삿갓--
세상살이--
말라르메--
복싱--
알리--
알라딘--
베르나노스--
이웃사촌--
말과 원수처럼 지내는 경향이 있다--
말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말과의 공존--
고추장--
들깨기름--
참깨기름--
리눅스--
생강--
마늘--
고추장--
별이 빛나는 밤에
심야방송--
안마의자--
선풍기--
공기청정기--
아프로디테--
시바의 여왕--
고속도로--
뿌리--
안경--
임플란트--
무파마--
아카시아--
free bird--
마늘치킨--
가지--
샌드위치
시루떡--
도토리묵--
그네--
평행봉--
자전거--
황야의 무법자--
사운드 오브 뮤직--
매일우유--
사과--
석류--
여왕벌--
수박--
대추--
알밤--
도사견--
황금사자--
천하장사--
글로 인해 괴로우면 안된다--
마리 앙뜨와네뜨
브렉레스너--
돈가방--
애응지물--
산꽃마을--
들꽃--
기러기--
아궁이--
일상의 고마움--
순간해결을 자각하지 못할 때 낙망하게 된다--
야생--
폭포수--
눈사람--
파도소리
나는 자연인이다--
겨울 김장--
눈꽃사랑--
휜쌀밥--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괴로움이 사라진다--
강아지--
오리--
삼겹살--
좁은문--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비교가 괴로움을 일으킨다--
노트북--
내딸과 아내--
터미네이트--
옥황상제--
손오공--
완행열차--
유자차--
개구쟁이--
구슬치기--
승마장--
마루--
농장--
동굴--
두메산골--
산들바람--
기차여행--
노을--
광야--
미소--
노송--
과수원--
네잎클로바--
나그네--
손님--
누룽지--
강아지--
토박이--
눈꽃송이--
황새--
억새풀--
거위--
사슴--
비탈길--
오솔길--
나막신--
감나무--
주렁주렁--
알콩달콩--
종이배--
새콤달콤--
종이학--
돛단배--
곶감--
호롱불--
문풍지--
아랫목--
등신불--
담장--
지혜--
총명함--
공기--
책과 콩나무--
옹기--
아리랑--
기적--
당나귀--
야간열차--
보양식
관상--
신의 한수--
거북이--
스님--
도미노 현상--
멜로디
폭포수--
칸트--
릴케--
헤겔--
운명--
소나타--
엘리자를 위하여--
소녀를 위하여--
치유--
수제비--
강낭콩--
도토리묵--
승시--
저녁만찬--
가족여행--
봄소풍--
새싹--
신호등--
어릿광대--
하이킹--
베짱이--
산토끼--
부엉이--
자기할 일을 못하게 될 때 자기억압이 생긴다--
사진--
토실이--
영원행복--
영원--
삼성전자--
한글과 컴퓨터--
샤를리즈 테론--
장춘식--
헤겔의 지양--원한감정--힘
가죽나물--
절대지--
무상무아--
세탁기--
흰밥--
즉비는 변화다--즉비는 은유다--즉비는 긍정지양이다--
의자--
아침식사--
점심--
유리알--
레드제플린--
백점만점--
무한영원--
지미 헨드릭스--
기타의 신--에릭클랩턴
변화와중--
몽상--꿈--
초기화--
돈의 제왕--
빅뱅--
양자역학--
쿼크--
미움받을 용기--
풍금--
여행--
도시--
시골--
layla--
세상--
누님--
결론--
우주전쟁--
은하계--
니체의 나무--긍정의지--
고통은 끝이 있고 기쁨은 끝이 없다--
고구마--
쌀밥--
무한발전--
한글--
장난꾸러기--
여객기--
젊은 예술가의 초상--제임스 조이스--
자정--
폭격기--
찹꿀이--
찹쌀곰--
눈사람--
갤럭시--
파바로티--
반야공--
반야심경--
화엄경--
법화경--
성경--
힌두교--
부두교--
버지니아 울프--
짬뽕--
간짜장--
꿀꽈배기--
알파치노--
우리의 친구인 임달곤이에게 이글을 보낸다--
우리의 친구인 이은숙에게 이글을 보낸다--
고통소멸발전--
모든게 사라진다--무상무아--
변화--
사라지는 것은 생성한다는 것과 같다--움직인다--
움직임--
무한움직임--
모든 것이 끝없이 움직인다--
모든 것이 끝없이 변화한다--
끝이 없는 상대생성--
생성은 만나서 일어나는 거다--상대하면서 생성한다--
만남상대생성--
만남발전--
끝없는 만남발전--
만남생성발전--
발전변화--
만난다--상대한다--생성한다--불멸발전--
무한히 열려있다--무한히 발전한다--
무한발전--
자기동일성이 없다--불멸발전--
끝없이 만나 발전한다--
불멸변화--
불멸생성변화--
만남변화발전--
변화발전--
발전변화--
생성변화발전--
긍정변화발전--
헤겔--부정지양발전--
상대발전--
무한상대발전--
생성발전--
착각에서 벗어나면 고통이 사라진다--
이야기--
절대이성--
절대지--신--
역사발전--
고정불변--
움직임의 불변--
모든 것의 움직임--
움직임의 영원--
무한의 움직임--
영원 움직임--
무한자기--자기의 무한--
보장이 된 무한--
변화의 인식--
움직임의 무한--
무한의 인식--
인식이 없으면 자기도 없다--
대자의식의 무한--
대자의식의 즉자 불가능성--
무한의 상대--
열려있음--무한생성 열린 발전--
강철--
즉비의 움직임--
무한 초월발전--
어차피 끝이 없다--불생불멸--
글은 사는거다--
끝이 없는 움직임--
끝이 없는 열림--
자기자신의 끝없는 발전--
끝이 없는 발전--
자기자신의 무한발전--
자기의 무한--
끝의 괴로움--
무한의 행복발전--
견딜만 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끝이 없는 행복의 열림--
끝이 없는 발전--
언어는 한계가 있다--
끝없는 길--
끝없는 행복--
끝이 있는 고통--
고통의 초극--
이분법의 해체--
변증법의 해체--
도덕의 계보학--
지식의 권력--
종교의 권력--
이성의 권력--
상대중--
인연무상--
인연무아--
더나은 건 없다--
하모니는 무아다--
무아는 하모니다--
즉비생성--
끝없는 움직임--
삶과 죽음은 하나다--생사일여--
차이변화--
차이변화움직임--
차이-변화-움직임-발전--
무한 움직임이 무한생명이다--
개념을 포월한다--
무한이 자기안에서 일어난다--
자기는 무한이다--
대자의식이 무한이다--
끝이 없는 의식이 무한생명의식이다--
무한은 생명과 함께 영원회귀한다--
영원생명의식이 참나다--참나가 무한이다---
대자의식이 무한이다--
인과응보는 이분법을 포월한다-- 인연과보도 이분법-변증법을 초월한다--
연결관계는 이분법이 아니다--차이연결이다--
이분법은 집착의 산물이다--집착의 고통을 일어킨다--
선과 악은 이분법이 아니다. 흑백도 이분법이 아니다--차이관계이다-- 무한은 이분법을 품어준다
집착은 가운데를 벗어난 극성의 산물이다-- 극성은 고통을 일어킨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것이 무한이다-
가운데는 극성이 사라진 연관관계라고 봐야한다--
본론
무한과 자비
무한은 자비이다. 항상 무한은 기댈 곳을 해결해준다. 무한은 상대자비이다. 무한은 항상 상대하면서 도와준다. 무한은 상대하면서 영원으로 간다. 즉비와 은유가 무한이다. 자기동일성이 없는 영원이다. 똑같은 것은 없다. 무한은똑같은 것을 품어준다. 그러나 무한은 영원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어서 똑같은 것을 유보한다. 항상 유보나 지연이 일어나면서 더남아 돈다. 무한은 절대지나 이성 그리고 신을 품어준다. 무한은 영원히 남게 한다. 항상 초월하면서 지양을 품어준다. 무한은 지양을 항상 이미 포월한다. 무한은 절대만도 아니고 상대만도 아니다. 무한은 절대이면서 상대이다. 무한은 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니다. 이분법도 아니다. 이분법을 포월한다. 연결이고 차이다. 연결은 연결와중이다. 끝이 없다. 연결와중은 끝이 없다. 자기동일성을 품어주면서 차이로 영원히 메꾸어진다. 무한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영원히 메꾸어진다. 무한은 집착을 방하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무한은 끝을 품어면서 영원히 열어나간다. 운동중이다. 모든 것을 품어면서 열고 나간다. 목표를 헤쳐나간다. 항상 조금더 차이를 연다. 무한은 결국 자비이다. 존재를 도와준다. 무한은 엄마다. 모든 무한한 존재들을 포함하고 초월해나간다. 지양의 포월이다. 헤겔의 지양은 부정에 의해서 발전되는 것이다. 헤겔은 절대지를 등용하면서 조화보다는 집착을 이루는 것이다. 이성인 절대지가 불쌍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변증법은 노예를 만든다. 변증법의 이분법은 주인은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한은 변증법을 품어준다. 변증법은 하나의 끝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목표가 끝을 상정한다. 헤겔은 무한보다는 고정불변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고정불변은 무한에 의해서 포월되는 것이다. 영원한 포월와중을 이룬다. 고정불변한 것이 자비로운 연결이다. 연결은 명사라기 보다는 명사를 초월하는 술어의 역할 하는 것이다. 자비로운 엄마품이다. 형용사이면서 동사라고 볼 수 있다. 형용사는 동사라고 봐도 된다.
무한을 하나의 한계를 상정하면 곤란하다. 무한은 연결하면서 열고 나가는 동사이다. 동사는 고정불변할 수가 없다.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무한은 무한와중이다. 무한은 고정되지 않는다. 항상 이미 차이와중이다. 끝을 이룰려고 하면 자기모순이 된다. 물론 무한은 모든 모순을 품어준다. 그러나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무한자기를 열고 간다. 자기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자기도 무한과 같이 영원이다. 자기는 무한과 같이 영원히 함께 간다. 무한은 무한자기다. 자기가 없는 무한은 없다. 무한은 자기를 품는다. 무한은 그 어떤 존재도 배척하지 않는다. 무한은 진리보다는 변화를 품고 간다. 변화는 연결생성이다. 변화는 포월이다. 변화가 불교의 무상무아다. 모든 존재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고정불변하지 않는다.
무한은 진리라기 보다는 실존이라고 봐야 한다. 무한은 본질과 실체라기 보다는 실존존재라고 봐야 한다. 항상 본질과 실체를 품어주면서 넘어간다. 변화이고 생성이고 존재이다. 허용이다. 모든 존재를 인정해준다. 모순은 힘겹지만 허용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이다. 모든 걸 허용하는 자비이다. 자비로운 엄마이다. 뭐든지 허용해주고 사랑해주는 엄마이다. 무한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자기가 따라간다. 자기 없는 무한은 없다. 무한은 자기를 쌍둥이처럼 허용해준다. 자기가 무한을 알아준다. 자기의식이 없는 무한은 결코 상정되지 못한다. 무한은 결국 무한자기이다. 자기는 무한을 품어면서 무한을 알아간다. 그러나 자기는 무한 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없는 무한도 가능하다고 본다. 무한은 자기를 허용하지만 자기는 무한을 품지를 못한다. 무한은 자기의식과 함께 한다. 모순이지만 무한은 자기마저 넘어선다. 무한자기가 실존이면서 존재라고 본다. 무한은 자기의식의 무한이다.
무한과 조화
무한과 무한극락
전체성을 우상이나 형이상학으로 봐야된다
전체성은 고정불변을 목표로 한다
전체성도 해체된다
인과응보 그너머의 직물짜기의 연관을 말한다
인과응보는 과거로부터현재와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뿌리는 데로 거둔다
이것이 인과응보인데 하나의 죽음의 사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결정은 형이상학이다
실존이 결정론을 해방시킨다
무의식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에 소여되어 있다
무의식이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도리어 의식이 무의식을 결정한다
무의식은 과거이다
의식은 현재를 말한다
의식은 현재와 미래가 있다
현재와 꿈인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는 존재하지 못한다
과거는 과거라는 내용을 지닌 하나의 현재라고 봐야 한다
<없는의식>도 있다
그것도 의식의 일부분이다
텍스트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텍스트는 현재와 미래인 것이다
미래는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낙관해야 된다
낙관이 미래를 움직이게 한다
현재와 미래는 인과응보이다
과거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과거는 다시 말하자면 없다
과거는 하나의 현재의 일부분인 것이다
프로이드의 콤플렉스는 과거에 의해 현재와 미래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는 생의 약동을 모른다
그는 무의식과 의식을 거꾸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의식은 의식의 한부분이다
의식과 미래는 텍스트이다
직물짜기이다
융과 레비스트로스는 현재의 의식을 환경이나 분위기로부터 생긴다고 본다--
결정론을 배제한다
미래를 여는 현재를 가치가 있다고 본것이다
모든 결정론은 형이상학이고 우상이다
일이 중요하다
일의 노동이 현재와 미래를 여는 단초가 된다
노동은 고통을 잊게 한다
그리고 노동은 자본을 보장해준다
노동은 생존의 고통을 치유해준다
노동은 무의식의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해방시켜준다
노동은 의식의 고통을 줄인다
노동은 현재와 미래의 고립을 해방시켜줄 수 있다
무거운 책임에서 놀이와 유희로 생존을 격상시킨다
의식은 지속이고 관계라고 봐야 한다
흔적은 지연의 회의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지연은 충만이 된다
지연은 욕심을 불러 일으킨다
욕심은 괴롭다
그러나 삶의 의지라고 봐야 한다
욕심은 의지를 일으킨다
권력의 의지와 힘이다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건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힘은 정신과 마음의 힘을 말한다
우상파괴주의가 되야 한다
힘으로 극복한다
극복이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초인의 사상도 <대자유>라는 목적에 자리를 내줘야 된다
<대자유>는 해탈을 말한다
그러나 해탈은 사바세계내의 해탈이다
사바세계는 영원이다
영원발전한다
사바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가 없다
텍스트이외에는 없다
해탈과 열반은 다른 것 같다
해탈은 사바세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열반은 사바세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해탈은 좋지만
열반은 하나의 우상이라고 본다
대자유는 해탈한 자라고 본다
도일체고액이다
집착의 사라짐이다
고통이 중지된 것이다
힘에 겨운 것이 없다
사바세계에로 부활하는 것이다
영원히
세상은 화두라고 봐야 한다
마서근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뜰앞의 잣나무
이뭐꼬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런 화두들은 모두 하나에로 통일되어 간다
견디내면서 잘사는거다
<일상의 평온함>이다
우상이나 집착을 해결해준 셈이다
대자유는 유희와 놀이라고 봐야 한다
견디는 힘을 상정한다
힘이 가장 중요하다
극복을 해내는 힘과 의지이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인정만이 있을뿐이다
남으로부터의 인정은 덧없다
자기가 영원히 갈무리해야 한다
자기인정은 자기의 힘과 이해다
자기인정은 결국 <자기이해>다---
견해로부터 벗어난 자를 말한다
타인들의 모든 견해들은 아무 소용없다
견해는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다
타인의 견해를 일종의 선택일뿐이라고 해야 한다
자기의 이해와 정신과 마음작용을 고유하게 인정해줘야 된다
순간해결이라는 것도 있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순간에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순간해결의 확신과 믿음이 있으면 견뎌내기가 훨씬 편해진다
무언가 <가리워 진> 흔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해의 절대지도 흔적은 품어준다
흔적은 충만과 지연이 연관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종합도 일어난다
사라지는 것이 메꾸어진다
반복순환이다
영원회귀다
그러나 무한으로 발전된다
영원으로 발전된다
반복과 순환은 발전적으로 생성한다
발전은 고통을 더이상 심하지 않게 소멸시킨다
고통은 있지만 더이상 심한 고통은 없게 된다
기쁨과 즐거움은 끝이 없다
가리워진 흔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세계내 존재>의 삶에로 귀의하게 된다
<오직 모를뿐>...
모호함의 마음작용이다
모호함이 결국 생성을 촉진시킨다
모호함과 생성은 또다시 마음이라는 것으로 종합된다
발전이다
마음은 모호함과 생성을 포괄하고 통일을 준다
마음은 흔적으로 다시 발전한다
흔적은 본질적인 통일으로서 그리고 실존적인 종합인 것으로 마음을 존재론과 그너머
현상학으로 발전된다
현상학은 다시 존재론을 받아들이며 해석학이 된다
해석학은 <이해>를 가장 중요시 한다
존재와 언어가 통일을 이룬다
존재와 언어가 흔적으로 발전된다
흔적은 자기동일성이 없다
존재와 언어보다 흔적이 무의식에 더욱 가깝다
흔적은 발전한다
흔적은 결국 은유이다
은유는 즉비이다
흔적과 은유 그리고 즉비가 서로의 <보충대리물>이 된다
흔적은 존재와 현상과 의지와 표상까지 통일시킨다
흔적은 언어 그리고 기호를 <세계내 존재>로 통일시킨다
덧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도 필요하다
기호와 세계내 존재는 동일과 차이를 말한다
모호함의 흔적이 세계내 존재가 되어서 해체적 글쓰기가 그냥 해체적 <쓰기>가 된다
모호함은 유보되는 흔적을 말한다
흔적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불멸이다
차이는 시간과 공간이 된다
이해 너머에 세계내 존재가 있다
세계내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일으킨다
언어나 기호가 세계내 존재의 틀 안에 들어간다
니체의 신의 죽음과 푸꼬의 인간학의 종언을 받아들이면서
세계내 존재에로 종합된다--
그러나 세계내 존재는 목적이 없다
현실세계만 중요시 여긴다
목적없는 모든 이해는 사상누각이 된다
목적은 신이나 절대지나 이성이 아니다
행복이다
행복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덧없다
모든 것이 텍스트라고 하고 <텍스트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세계내 존재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모호함은 해방과 해체가 일어나게 한다
모호함
중요한 개념이다
현상학과 존재론 그리고 해석학과 정신분석과 언어분석학이 있다
이런 모든 마음작용의 이해과정들은 목적이 자리를 감춘다
목적은 행복이다
최고의 행복이 무한극락이다
무한극락을 목적으로 생각한다
또한 <행복이라는목적>이 지상최고의 가치와 의미이다
행복이 일차적인 셈이다
다른 모든 마음작용들이 부차적인 사실이다
일차적인 것에 가치를 둬야 한다
부차적인 것은 직접적이지 않다
글은 현상학과 존재론 그리고 정신분석들은 부차적이고 부분적 이다
가치가 떨어진다
의미가 떨어진다
일차적인 행복을 위한 꿈이 무한극락이다
노동삼매
일삼매
글쓰기 삼매
관찰삼매
위빠사나
논리삼매
이해는 좋은 것이다
이성은 필요하지만 우상이 되지 않아야 된다
이해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해는 무한으로부터 긍정되고 중요한 마음작용이다
이해는 존재가능에서 충만한 마음작용에서 나온다
마음은 모든 정신작용의 통일인 것이다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 감정과 이해와 같은 모든 정신의 가능을 말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부분이다
의식은 차이의 이어지기이다
무의식도 결국은 이어지게 된다
흔적은 충만과 지연을 같이 준다
차이는 충만과 지연의 종합이다
종합은 <발전적 변화>이다
종합은 차이에서 나오는 초월이다
초월이자 긍정이다
이분법과 본질도 초월과 긍정으로 그런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초월긍정은 발전지양이다
지양은 긍정차이의 변증법이다
모호함
자기를 억압하면 안좋다
집착을 품어줘야 된다
글은 글을 따라온다
글은 삶의 연장물이다
글은 삶을 보충시키는 아주좋은 도구이다
자존감과 인정을 가져다 준다
인정은 <죽음을 건 인정욕구>를 자기혼자로 해결시켜줄 수가 있다
회한이 일어날 수가 있다
무슨 좋은 수가 있지 않을까--
글을 잘쓰면 고통자체를 벗어나게 해준다
글은 자존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한조각이다
글은 의존심을 해체해준다
글은 적개심을 해방시켜준다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품고 긍정으로 이어지게 해준다
글은 대인관계가 고장났을 때 자기혼자로 살 수 있게 해준다
글은 고립을 벗어나게 해준다
글은 노동삼매를 가져다 준다
글은 긍정적인 일로 다가오게 해준다
무엇보다 발전이 쉽게 다가오게 해준다
무언가 모호함을 살다가 보면 모호함의 온갖 자료들을 공유케 해준다
문학은 자체로 모호하다
말라르메는 몇일 씩이나 글을 못쓰다가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싯구로
가능하게 해준다--기적이다--
글은 이해보다는 삶의 힘이 되게 해줘야 된다--
이해도 중요하다
이해와 함께 삶의 전체성과 무한성과 해방감이 선행되게 해야 된다
이해는 집착이 일어나게 할 순간에 포기하면 된다
포기는 있는 그래로를 관찰하기만 해도 된다
이해는 삶의 한부분이라고 봐야 된다
이해가 집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때는 삶의 다른 부분으로 충족시켜야 된다
삶과 이해작용
이해는 긍정적이고 조화로운 더나아짐을 주는 깃발이 된다
그런 이해가 집착을 일으켜도 된다는 변명거리가 되면 안좋다
집착은 무조건 병이다
산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
고정불변한 것은 일종의 우상이자 형이상학이다
우상과 형이상학은 자기억압이 일어난다
자기억압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지 못할 때 일어난다
우상과 신이나 이성과 형이상학은 고통을 준다
우리는 해체와 해방을 표방해야 한다
신과 절대자는 자기를 억압한다
자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데 그것을 남한테 주는 것이다
남한테 주고 자기는 거기에 얽매인다
억압이다
힘과 의지가 이성과 절대지를 부순다
항상 이미 힘이 작용한다
힘은 해방의 힘이다
모든 우상과 형이상학을 부순다
기적이다
사는 것에는 힘이 동반되어야 한다
삶은 형이하학적이어야 한다
기표가 기의를 품는다
기표는 차이발전이고 기의는 고립이다
기의는 기표의 한부분일 뿐이다
둘다 차이의 일부분이다
글을 써다가 회한스럽고 회의가 일어날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글은 자기의식을 해방이라는 보물창고에 안착시켜야 한다
돈이 안되도 그냥 자기의 삶의 한부분으로 보면된다
글은 고립된 자기를 의식으로 해방시킬 줄 아는 것이다
해방의식
베르그송의 <약동>이 될 수가 있다
글은 덧없음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글은 삶의 본질이다
글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삶의 무료함과 무의미를 해방시키고 약동하게 한다
글은 삶의 일부분이다
휴식과 몽상과 그리고 상상과 이해를 가져다 준다
무엇보다도 자신감과 자기인정을 가져다 준다
해방과 해체
그리고 유보와 지연 그리고 보충과 접목과 연관시킨다
불취외상 자심반조
영양분을 자기한테 준다
사라지는 것이 다시 메꾸어진다
불멸의식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질은 의식이외에는 없다
의식이 불멸적인 본질인 셈이다
그러나 이 불멸의 본질도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본질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본질은 쉬어가는 것이다
본질은 고립의 고통을 해체한다
꿈이라는 차이를 가져다 준다
산다
뭐든지 살면된다
쉬운 글들이 자꾸 나와야 된다
모호함을 해방으로 봐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고립감을 주면 불완전하다
모호함은 해방을 전제로 한다
조금은 괴로울 수가 있다
모호함은 접목과 차이를 일으키는 기적이다
지연과 유보다
그냥 그대로가 있다
삶은 이어지기이다
총체는 덧없다
전체성도 덧없다
발전으로 열려가야 한다
토인비의 <더나아짐>을 표방해야 한다
가만 놔둬도 있는 그대로가 움직인다
있는 그대로가 무의식적인 차이이다
<있는 그대로>가 여래이다
관찰만 일어난다
의지가 사라진다
대자유를 일으킨다
일상의 고마움
있는 그대로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있는 그대로가 시이면서 예술적인 차이의 작용이다
접목은 모든 것에서 일어난다
줄기접목, 가지접목, 그리고 뿌리접목이다
접목은 하나의 연관차이를 준다
접목은 기생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접목은 상호의존이다
상호의존을 기생이라고 보면 안된다
상호의존은 자기가 받는 것 모두를 다시 그대로 갚아준다
상호의존은 지연이고 유보다
경계선도 하나의 차이로 봐야 한다
차이가 지연과 유보를 일으킨다
고정불변한 경계선은 없다
경계선은 조금 괴롭다
그러나 꿈이 현실로 오는 것이다
해방이 경계선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경계선은 불멸이고 영원이고 무한이다
경계선은 무한한 접목을 가져다 준다
절대지와 신과 이성은 고립이다
해방을 모른다
모호함을 수용하는 것이 해방을 사는거다
형이상학은 금방 괴롭다
괴로움은 가치가 없다
가치는 목적이 보이면 최고가 된다
의미도 가치와 함께 목적을 본다
해방이다
밥만 먹고 살 수 있으면 된다
사랑은 기적이다
사랑은 괴롭다
그러나 사랑은 꿈을 현화시킨다
그러나 사랑의 대가는 참혹하다
차이를 긍정하고 열어나가야 된다
차이와 해방
이것이 최후의 목적이다
무언가 지연되어 있고 유보되어 있다
그러나 지연과 유보는 우리에게 해방이라는 큰 선물을 준다
형이상학과 철학은 무거운 우상을 살게 한다
운동중인 것이 해방이다
고립의 해방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죽음은 삶의 하나의 차이이다
죽음은 고립되지 않는다
새로운 <다시>를 열고 간다
삶을 무한으로 봐야 한다
삶은 영원이고 항상 자기로 되돌아온다
무한자기다
영원자기 발전이다
절대지와 이성과 신은 하나의 기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기의도 기표작용의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기의는 기표로 작용하면서 해방된다
이어지기
이것은 온누리의 크나큰 선물이다
이어지기는 접목이다
이어지기는 연관작용이다
접목은 모든 가능성의 이어지기를 말한다
해방
이어지기는 고립을 청산한다
그 어떤 것도 최고의 절대가 되지는 못한다
절대는 형이상학이다
절대는 승화되어가야 한다
모호함
꿈이다
흔적과 접목이다
삶이라는 해방을 느껴야 된다
온갖 철학자들은 너무 무거운 차이작용을 일으킨다
너무 어렵다
그러나 해방을 모른다
고정불변의 신과 이성은 덧없이 쓰러진다
절대는 상대작용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신과 이성과 절대는 열고 나가지 못한다
그 자신의 해탈을 모른다
신이 가변적임을 모른다
신과 절대와 이성이 가변적이면 가치가 없다
그러나 가변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변화와 발전 그리고 아름다운 꿈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흔적과 모호함 그리고 불확실함 등이 명증과 밝음과 명석함을 품는다
형이상학은 고정불변함을 말하는 사상이다
형이상학은 현실성이 없는 꿈이다
그리고 우상이다
우상이라도 현실성만 주어지면 간직할 수도 있다
종교의 우상도 결국 현실과 타협하면서 긍정될 수는 있다
칸트의 <사물자체>도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연관은 모든 가지들의 접목이다
접목은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무언가 모자라고 있다
무언가 불확실하다
무언가 명증하지 못하다
여기에 집중해보자
고립을 연다
해방이다
연관연결이 일어난다
명증한 이론보다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꿈을 지닌 현실을 살아야 된다
연관연결
연관연결--즉비생성--항상 이미 미래와 함께 하는 현실성이 중요하다
글은 은유법이 되어야 한다
아니 은유가 곧 글이다
은유는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말한다
은유는 모호함과 함께 해방감을 주는 것이다
은유와 문학과 예술을 명증한 철학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은유와 문학 그리고 예술은 오히려 철학을 수용한다
수용하면서 열고 나간다
글은 기의로 보지 않아야 한다. 글은 기표다. 소쉬르의 기의와 기표의 이분법을
해방시킨다
기표가 기의를 품는다
기표는 모든 여백을 포함시킨다
고립을 부순다
진정한 해방은 <텍스트 밖은 없다>라고 해야 된다
텍스트는 삶이자 예술이다
텍스트는 무한이다
접목
모호함과 모순들이 일어나야 한다
유희다
흔적의 유희다
명증함은 유희가 못된다
흔적이 존재다
흔적은 지연이고 노는 것이다
흔적은 삶이다
흔적은 지연되고 유보된 것이다
그러면서 흔적은 꿈을 꾸게 한다
흔적은 미래와 꿈과 연결되어 있다
불확실함의 미학이다
명증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흔적은 유희를 즐기는거다
유희는 현실의 고립을 해방시킨다
<현실과 함께 하는 꿈>이 미래다
생의 목적은 최고로 긍정적이어야 한다
무한극락
최고의 목적이다
최상의 꿈이고 현실이다
프로이드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했다
맞지 않다
과거는 긍정적인 것만 차용하면 된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와 실제적인 연관이 되지 못한다
과거는 현재와 가연이지만 미래는 현재와 필연이다
불확실성이 지연과 유보인 채 살고 있다
이것이 진정 해방인 것이다
지연과 유보는 미래를 열어가는거다
글을 예술과 삶으로 연결하는 것이 이 저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예술과 삶이 거꾸로 글의 문학으로 풍성하고 훌륭하게 연관시키고
연결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삶은 예술을 품는다
삶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다
삶은 영원하다
예술은 삶을 품지 못한다
삶은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다
예술도 삶처럼 살아가야 한다
글은 유희다
그러나 존재와 실존은 글을 넘어선다
글을 초월한다
죽음도 하나의 삶이다
영원히 산다
죽음도 하나의 차이현상이다
모든게 차이이다
시간과 공간도 차이이다
차이가 삶이다
차이는 발전한다
삶은 총체적으로 보아 발전이다
발전은 영원불멸이다
발전은 변화다
변화가 발전을 품는다
발전은 끝이 없다
발전은 긍정이다
긍정은 부정을 품는다
부정이 긍정을 품지 못한다
헤겔---지양이 부정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다
<원한 감정>과 <불행한 의식>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종교가 궁극이라고 한다
틀렸다
종교는 예술을 넘지 못한다
종교는 삶의 한방편일 뿐이다
예술이 종교를 품는다
종교를 예술로 정화시키지 못한다
베토벤과 모짜르트 그리고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슈베르트와 같은 예술인들이
삶을 꿈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불확실함 그리고 은유 그리고 까뮈의 이방인과 같은 실존이 꿈을 사랑한다
지성과 명증함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삶과 예술 그리고 문학이 왕좌를 차지한다
사랑도 꿈이다
사랑은 현실을 초월하는거다
사랑없이는 현실도 못산다
바슐라르
질베르 듀랑
꿈과 상상 그리고 몽상
문학은 그래서 철학을 이긴다
철학은 명증함을 살지만 문학은 꿈을 사는거다
문학이 철학을 품지만 거꾸로는 아니다
철학은 문학이 되지 못한다
문학은 글이 대부분이지만 예술은 글을 초월한다
문학은 예술의 한부분이다
랭보는 시를 예술의 경지까지 보냈다
철학과 문학은 글이 없으면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은 글을 초월한 꿈의 유희다
꿈이 흔적이다
꿈이 미래이고 시다
살기는 현실을 산다
과거는 덧없다
그러나 미래는 아름다운 꿈이다
현실에서만 안주하는 것도 우상이다
우린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없으면 현재가 고립된다
고립된 현재는 우상보다 더 안좋다
힘이 있는 자들이 미래의 꿈을 꾼다
시는 꿈이다
예술이 모두 꿈이다
현재는 괴롭다
꿈을 꾸자
어차피 한평생이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
영원회귀다
불멸이다
무슨 수라도 행복하면 된다
현실만 살면 안된다
미래의 꿈이 목적이 되있어야 된다
목적론
미래는 꿈이다
필수불가결한 꿈이다
무한
무한극락
영원히 함께 간다
대자유
마음수행
공부
괴로워도 살자
꿈은 꾸자
영원히 사는거다
인간만이 다는 아니다
아마도 죽음 이후는 지금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다
미래는 낙관해야 된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우상이다
현실과 미래는 좋은거다
인생
힘들다
영원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힘이 필요하다
건강해야 한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우상
여기에 빠져들기가 싶다
우상은 넘어서 가는 초월을 막는거다
우상은 꿈만 꾸는거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우상에 빠지지 않는다
초월--극복해야 된다
힘을 가져야 한다
우상은 붙잡는거다
우상은 힘을 억압한다
우상은 집착이다
기표가 기의를 품는다
기표놀이가 해체다
그라마톨로지
문자학--기표유희
모든게 대자의식이다
즉자는 대자의 한종류다
갓바위
시래기
아카시아
Gla
종말
고통은 종말한다
기쁨과 즐거움은 불멸이다
매트릭스
네오---트리니티
스미스
맥주
막걸리
사연
알콜
당뇨
건강함
이해과정
왜 어렵게 하는가
부질없다
모든게 사라진다
불멸
모순
가연과 필연
예정과 차례가 있다
결론 일반화
결론—<해체적 쓰기와 랭보의 텍스트>
<잘나보려는 마음>이 나의 병이다.
일종의 큰 열등감이다.
그 기원은 유아시절 3세 적에 밤하늘 달빛으로 가득찬 고구마 밭에 혼자 버려졌다.
그리고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못받았다.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대신 동생을 안아줬다. 아우타기였다.
내팽개쳐졌다.
너무 놀라고 기가 질렸다.
혼자 너무 힘겨웠다.
부모님의 결여감과 세상의 배척감이었다.
그리고는 66세 인 지금 때까지 해결안된 의존하려는 마음이 나를 괴롭힌다.
의존은 결국 배척으로 간다.
그런 큰 열등감 때문에 나는 나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이제 조금 해결해나가는 단계가 되었다.
나의 병 즉 <잘나보려는 마음>에서 오는 괴로움을 자책한 것이다.
자책이 나의 병의 근원이다.
병은 병대로 <어쩔 수 없다는> 이해를 해야된다.
병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이다.
이젠 자책을 조금씩 줄여야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야 된다
그러나 잘나보려는 병이 두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자책하는 부정적인 병이다. 다른 하나는 같이 살려는 긍정적인 마음이다.
자책하는 병은 조금씩 이해해주면서 인정하는 것으로 조금씩 해결되가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인 <같이 살려는 마음>도 조금씩 키워나간다.
<같이 나누며 사는 것>이다.
자책은 하지 말아야 된다.
같이 나누며 사는 것이 공존이다.
의존에서 공존으로 발전되었다.
거의 60년 운명인 조현병이 서서히 정리되어간다.
너무 괴로웠던 과거가 이제 자꾸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나의 병은 실존과 본질로 나누어진다. 실존과 본질이 주관화와 객관화로 두가지로 발전되어 간다.
그 두가지 모두가 서로 상의상존한다.
자책하는 마음을 잘봐야 된다.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나누어 살려는 마음을 키워나가야 된다.
모두가 한가족이었다.
가족은 영원한 사이다.
그래서 가족은 경쟁하지 않는다.
가족은 동병상련 된다.
가족은 이타심의 표본이다.
가족은 의존이 아닌 공존이다.
자타일여
자타불이
병의 원인은 해석여하에 달린 것 같다.
병은 이해하면서 차이를 나타낸다.
중요한 건 병에 대한 자각과 이해이다.
쇼크와 놀람 그리고 괴로움에 대한 해석이다.
어린시절의 배척감과 억압이 정신병의 원인이다.
어린시절의 놀라운 경험은 두 가지로 이해된다.
하나는 배척감의 부정적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그 배척감의 긍정적 해석이다.
우선 그 배척감이 주는 괴로운 억압이 풀리지 않으면서 자리를 잡고 일생동안 가는 것도 있다.
자꾸 우리는 이해를 이어지지 않는게 문제다.
팽개쳐진 어린아이.
공포와 불안한 경험들...
병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고 오랜 이해과정이 필요하다.
괴로운 어린마음을 건강하게 자리잡게 해야 된다.
그 마음이 자꾸 건강하게 해석되도록 사념을 진행해야 된다.
그 어린마음이 현재에도 작용하는걸 느껴야 된다.
무얼까
불만이다.
돈도 있어야 남에게 도움도 받는다.
불만감과 낯선 마음과 그리고 먼 세상이 병을 이어지게 한다.
지금은 무엇이 내 마음을 괴롭히게 하는가...
지금은 하루하루 살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일일시호일
병과 글과 말과 마음의 이어지기이다.
이어지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어지기도 우선 말과 글과 마음에 일어나도록 해야 된다.
중요하다.
모든게 이어지기다.
유아시절과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와 노년기를 잘 맞추어 나가야 된다.
말과 글에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은 병의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된다.
지금의 병은 무엇인가...
아마 하는 일을 잘해야 된다는 것이다.
놀람과 쇼크가 긍정적으로는 참는 인내력을 지니게 해준다.
문법은 자유롭고 틀려져도 좋은 것이다.
결국 글과 말이 이어지게 한다.
글과 말이 우리를 공존케 한다.
글과 말이 안나오면 괴롭다.
무언가 자꾸 써나가야 된다.
이해가능한 것도 있고 이해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냥 독자들이나 나 자신도 자유롭게 읽으면 된다.
논리도 있고 비논리도 있다.
편하게 읽어나가면 도움이 된다.
한 줄 한 줄이 말과 글의 자유로 향하게 한다.
말과 글이 하나의 대화상대자가 된다.
이미 했던 말과 글이 계속 다시 나오기도 한다.
제일 중요한건 말과 글들에의 공존이다.
대화
괴로움을 청산해야 된다.
한순간 한순간을 잘 살아야 된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면 된 것이다.
글들이 억압되면 안된다.
좋은 글들을 써나가면 된다.
아름다움
고통
괴로움
싯구들
아카시아
해바라기
단어연결
이해와 몰이해
문법과 논리의 해체
상스의 유희
말과 글의 유희
즐거움
그러나 다시
괴로움
가족과 대화의 괴로움
할 일을 잘하지 못한다.
글쓰기는 제법 한다.
<잘나보려는 마음>이 나의 병이다.
일종의 큰 열등감이다.
그 기원은 유아시절 3세 적에 밤하늘 달빛으로 가득찬 고구마 밭에 혼자 버려졌다.
그리고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못받았다.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대신 동생을 안아줬다. 아우타기였다.
내팽개쳐졌다.
너무 놀라고 기가 질렸다.
혼자 너무 힘겨웠다.
부모님의 결여감과 세상의 배척감이었다.
그리고는 66세 인 지금 때까지 해결안된 의존하려는 마음이 나를 괴롭힌다.
의존은 결국 배척으로 간다.
그런 큰 열등감 때문에 나는 나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이제 조금 해결해나가는 단계가 되었다.
나의 병 즉 <잘나보려는 마음>에서 오는 괴로움을 자책한 것이다.
자책이 나의 병의 근원이다.
병은 병대로 <어쩔 수 없다는> 이해를 해야된다.
병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이다.
이젠 자책을 조금씩 줄여야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야 된다
그러나 잘나보려는 병이 두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자책하는 부정적인 병이다. 다른 하나는 같이 살려는 긍정적인 마음이다.
자책하는 병은 조금씩 이해해주면서 인정하는 것으로 조금씩 해결되가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인 <같이 살려는 마음>도 조금씩 키워나간다.
<같이 나누며 사는 것>이다.
자책은 하지 말아야 된다.
같이 나누며 사는 것이 공존이다.
의존에서 공존으로 발전되었다.
거의 60년 운명인 조현병이 서서히 정리되어간다.
너무 괴로웠던 과거가 이제 자꾸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나의 병은 실존과 본질로 나누어진다. 실존과 본질이 주관화와 객관화로 두가지로 발전되어 간다.
그 두가지 모두가 서로 상의상존한다.
자책하는 마음을 잘봐야 된다.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나누어 살려는 마음을 키워나가야 된다.
모두가 한가족이었다.
가족은 영원한 사이다.
그래서 가족은 경쟁하지 않는다.
가족은 동병상련 된다.
가족은 이타심의 표본이다.
가족은 의존이 아닌 공존이다.
자타일여
자타불이
글과 말의 삶
글과 말은 공존이어야 한다.
글과 말은 의존해도 된다.
의존해도 남들을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
상호의존
사색
평소의 사색
이제 다시 자기 병에로 들어가자.
고통은 병이다.
고통이 없는 병도 있을까?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휴식이다.
휴식하고 일하는거다.
병든 이어지기도 있다.
이어지기는 무한으로 이어진다.
병든 이어지기
고립과 분리다.
고립과 분리의 이어지기
가슴앓이
불만감
괴로움
인내를 못하는 어린어른
중요한 것이 인내력이다.
여러 곳에서 인내력이 생기지만 결국 고통에서 인내력이 생긴다.
인내력은 어른의 마음이다.
니체의 초극의 힘이다.
3차원 존재는 시공과 공존한다.
시공은 존재계다.
비로자나 여래가 존재계의 부처님이시다.
글쓰기다
글에 의존한다.
글에 공존도 가능하다.
우리가 공존하면 글도 공존한다.
중계방송은 메리저리그다.
우리는 됩니다.
고맙다.
호수
부추전
배추전
미나리전
호박전
시금치
안개
싯구다
우리는 된다
된다가 또입니다
무언가가 온다
싯구들이다
우리는 된다
된다가 사이이다
사이는 질들뢰즈
단한번 눈길에
사랑이야
청량감의 극치
시냇물
빛
바람
물
조용히
영원할 수 있나요
언젠가
한 번은 올 것 같은 순간
미소에 터져버린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