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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
세 번째 철문을 지나면
시멘트 긴 복도의 액자에 담긴
그림과 글귀를 만난다
'낙타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낙타는 발자국도 없이
사막의 모래언덕을 넘는다
나도 뒤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따라 가면
교도관의 엄지손가락이 인식한
또 하나의 철문이 철그럭 열리고
거기, 나를 기다리는 낙타가 있다
푸른 수의를 입은 점잖은 낙타
나는 가시가 없는 선인장이 되어
다소곳이 그들에게 다가가 강의를 한다
무슨 시를 공부하랴
나는 발자국 없는 낙타 이야기를 하다가
사막에서 길을 잃는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정문으로 나가 집으로 가고
낙타는 민들레 씨가 되어
교도소 담장을 넘어
먼 오아시스로 날아간다
긴 복도의 액자 안에는 아직도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는
사막의 낙타가 있다
ㅡ「낙타」전문
시적 화자가 겪은 객관적 경험을 주관적 상상을 통하여 서사적으로 전개시켜 나간 것이 특징이다. 내용상 첫 연(1행~7행)은 시의 발상 단계로 기 부분에 해당된다. 시적 화자가 수인들의 독서지도를 위하여 교도소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 세 개의 철문을 지날 때, 긴 복도 벽에 붙어있는 액자와 만나게 된다. 액자에는 끝없는 사구의 그림과 '낙타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글씨가 그림과 어울리지 않게 굵은 견고딕체로 쓰인 것은 낙타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 같다. 그 복도는 많은 수인들이 드나드는 통로이기 때문에 액자의 내용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시적 화자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시적 화자는 수인들에게 독서지도를 하며 시를 공부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자가 보여주는 의미에 또 하나의 상징을 나타내는 "낙타는 발자국도 없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며 사구를 넘는 낙타는 과거의 흔적을 고행으로 지워가며 미래로 걸어가는 수인들의 모습이다.
2연(8행~13행)에서는 다른 시상으로 이어지는 승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철문이 열리고 "거기 나를 기다리는 낙타"와 대면하는 곳은 긴장의 공간이다. 그런데 왜 "점잖은 낙타"라 했을까? 시적 화자에게서 시를 공부하는 수인들은 형량이 많은 수인들이다. 그들에게서는 조급함과 경망스러움을 볼 수 없다. 인내하며 자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점잖은 낙타의 이미지가 말없이 사막을 가는 낙타와 연결되어 있다.
3연(14행~18행)에서는 시점이 시적 화자에게로 돌아오는 승 부분이다. 화자를 '선인장'으로 비유한 것은 낙타의 고향이 사막이고 선인장의 고향도 사막이라는 동류의식 때문이다. 가시가 없는 선인장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친밀감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막상 그들 앞에 서면 '나'라는 사람의 인격이 무엇인지 회의가 앞선다. 그리고 강의할 때마다 조심해야 할 말들이 많다. 불행, 죄, 과거, 응징. 행복...등 아슬아슬한 말들을 피해가다 보면 언어의 질서는 흩어지고 길을 잃게 된다. 낙타가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된다고 해놓고 시적 화자가 먼저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수인들은 조용히 듣는데 횡설수설하게 된 꼴이다.
4연(19행~23행)은 전에 해당된다. 이 시의 정점에 이른 부분이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안내하는 교도관과 다시 그 복도를 지나 정문을 나와 집으로 온다. 내가 왜 굳이'정문'이란 말을 썼을까? 정문은 '인간의 도시'로 나가는 문이다. '인간의 도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자칫 죄를 태어나게 하는 위험한 현실로 들어간다는 역설도 될 것이다. 강의하러 갈 때마다 정문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문이 되었다.
또한 강의실에는 영어囹圄의 몸인 그들이 남아있다. 그들은 민들레 씨처럼 날개를 달아야 오아시스로 갈 수 있다. '민들레 씨'와 '오아시스'는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들의 푸른 하늘은 늘 담장 밖에 있고 그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민들레 씨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이상향이다. 이것은 순전히 시적화자가 만든 상상의 산물이지만, 시가 경험[사실]에서 출발하여 상상[허구]을 거쳐 진실[창작]에 도달한다는 평범한 원리를 가져온 것이다.
5연(24~끝)은 결이다. 나는 이 시의 발상을 액자 안의 글에서 얻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이 아니었더라면 이 글귀는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4년 동안 이곳에 강의를 나오면서 나는 한 편의 시도 건지지 못하다가 이 글귀를 본 뒤 이 시를 썼다. 이곳에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는 사막의 낙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여기에 담겨 있다.
네 어미가 뭍으로 기어 올라와
선인장이 된 뒤
바다는 너를 잊었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바다
그래도 바다가 키워낸
마디마디 발톱엔 가시가 돋쳤다
바닷물이 네 발에 닿으면
까무러지듯 숨이 끊긴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바다가 그리우면
모래톱을 헤집던 발톱마다
꽃을 피운다
갈 수 없는 마음의 바다
뭍의 꽃
사랑하는 집 창가에서
붉게불게 꽃을 피우며
홀연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어 눈을 감는다
ㅡ「게발선인장」전문
시에 있어서 유추는 두 사물의 사이의 상관관계의 길을 열어주는 물꼬와 같다. 이 물꼬의 흐름이 넘칠 듯 넘치지 않으며, 보일 듯 보이지 않아야 시의 생명은 가치 있는 것으로 살아난다. 넘치면 너무 깊어 의미를 헤아리가 어렵고 , 보이면 너무 맑아 오묘하고 그윽한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발선인장이라는 이름은 선인장의 생김새가 게의 발과 같이 마디가 있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그 단순하고 평범한 발상에서 한 단계 높은 유추관계를 발견하여 새로운 상관관계를 맺어놓는다. 바다에 사는 갑각류 절지동물인 게가 육지로 기어올라와 게발선인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다와 거리가 먼 뜨거운 모래가 깔린 열대지방의 식물이 되었다는 데서 원초적 그리움에 깊이를 더한 것이다. '바다와 열대"라는 간극이 크면 클수록 원초적 생명에의 그리움은 크고도 절실한 상황으로 변하여 감동에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인장의 꽃들이 피어난 모습을 게발톱에 피어난 붉은 꽃으로 형상화하여"바다가 그리우면/ 모래톱을 헤집던 발톱마다/ 꽃을 피운다"로 표헌함으로써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해원을 향한 간절한 향수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에서의 귀착점이 결국은 인간 탐구의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변용이라 할 때 이 시에서의 내용상 마지막 연 "사랑하는 집 창가에서/ 붉게붉게 꽃을 피우며"는 게발선인장과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 자연스런 사랑의 관계로 사무치게 형상화 되어 있어 이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어 눈을 감는다"는 너무도 오랜 옛날 뭍의 꽃이 되어 이제는 조상과 바다를 잊어버리고 태양과도 익숙한 식물이 되었음에도 그의 마음의 바다에는 원초적 생명에의 그리움이 간절하게 남아 있음을 감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응숭깊은 곳에는 지우려 해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게발선인장의 붉은 꽃 같은 본연의 그리움이 있어 잠 못 들고 시를 쓰기도 한다.
봄비는 우산도 받지 않고 내린다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자꾸 내려오다가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강물이 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봄비라는 것을 안다
소리가 날까 봐
맨발로 장독대를 씻다가
마늘밭 알뿌리를 깨우다가
들녘으로 가서 보리밭을 적신다
그리고 사람 곁으로 다가와
숨소리를 듣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려올 때
비로소 향기로운 생명이 되어
가난한 노파의 눈물샘에서
이름 모를 풀꽃이 피어나게 한다
ㅡ「봄비」전문
봄비라는 자연현상을 아름다운 인간생활로 상징하여 표현 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과연 무엇인가를 봄비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봄비는 겨울에서 봄으로 길을 열어주는 촉매제이다. 봄비가 와야 산꼭대기에 쌓여있는 눈도 녹고 동면하는 미물들도 깨어나고 온갖 식물들도 싹을 틔운다. 그렇다고 해서 봄비는 자랑이라도 하듯 소란스럽게 내리지 않는다. 아니 자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땅 위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강물의 흐름이 되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봄비라는 것을 안다. 자기 일에 대한 의도성이 없이 그저 순수 그 자체로서의 무작위적 행위가 진정 아름다운 일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행여 누가 보고 들을까봐 우산을 받지 않고 조용조용 맨몸으로 내리는 비야말로 순수한 인간과 가까워지기 위한 봄비의 친화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첫 행의 "봄비는 우산도 받지 않고 내린다"는 이 시 전체의 시상을 지배하고 주제를 형상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첫 행은 2연과 3연으로 이어져 시상과 주제의 통일성을 일관 되게 이끌어내고 있다. 우산도 받지 않고 내려오기 때문에 '장독대를 씻고, 마늘밭 알뿌리를 깨우고, 보리밭을 적시는 ' 인간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되어" 가난한 노파의 눈물샘에서/ 이름 모를 풀꽃이 피어나게 한다"라고 하여 주제의 핵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 치의 군더더기도 허용하지 않고 주제를 향하여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짧은 시에서는 '모른다' 라는 시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이는 분명 시인의 의도일 것이다. 단순한'不知'의 뜻이 아니라는 내포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밥장수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을 불우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하고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름 알리기에 급급한 요즈음 자기의 적선과 공로를 감추는 일이야말로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려와서 만물을 적시는 봄비와 무엇이 다르랴.
이 추운 밤
누가 내 창문을 엿보고 있을까
늙은 항아리에 달빛은
겹겹히 쌓여 가는데
뜨거운 불에 구워낸
백자같이 차디찬 살결
창호지에 일렁이는 그림자
발자국마다
꽃잎 벙그는 소리
나를 잠 못 들게 할까
문 열지 않으리
그냥 달빛 아래 서 있게 하리
시려오는 이부자리
가난한 시로 덥히고
이 밤 새우리
ㅡ「매화」전문
표현하고자 한 대상을 안으로 끌여들여 시적 화자의 마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사물을 보는 눈을 현상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관념의 상태에서 시각과 촉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끌어들여 매화의 속성을 나타내었다. 매화를 사군자의 필두로 꼽는 것은 봄이 오기 전 추운 계절에 피기 때문이다. 대부분 의 꽃들은 따뜻한 계절을 택해서 핀다. 그러나 매화는 이러한 속성을 거스르고 다른 꽃들이 싫어하는 추운 계절에 피기 때문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화를 찾아 길을 나서고, 매화 곁에서 꽃향기에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올곧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새롭게 다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특징은 우리의 일반적 관행을 깨뜨렸다는 점이 다. 사람들이 꽃을 찾으러 가지, 꽃이 사람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시적화자가 매화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추운 밤 매화가 시적 화자의 방문에 찾아와 엿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매화와 시적 화자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교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화자는 오히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발자국마다 꽃잎 벙그는 소리에 잠 못 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과 반어의 반전 묘미가 숨어 있다.추운 밤 그냥 달빛 아래 서 있게 하여 매화가 지닌 빙자옥질의 속성을 간직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시려오는 이부자리를 걸치고 엎디어서 밤 깊는 줄 모르고 시인도 매화를 닮으려고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은행나무 한 그루 물들고
늑대가 한 번 울고
이 산 저 산 늑대가 울고
골짜기마다 은행나무 물들었다
그리고 둥근 달이 떴다
ㅡ 「보고 싶어서 」 전문
시의 생명이 압축과 상징에 있다고 한다면 「보고 싶어서 」는 이러한 예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이 시는 전문이 3연 6행으로 된 짧은 시이다. 이 짧은 시 속에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된 세계를 그려 넣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썻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언어의 조탁과 절제된 표현이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의미 전달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를 읽어보면 자연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 달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이 시에서의 제재는 '은행나무, 늑대, 달'이다. 이 제재들의 속성이나 모습에는 어느 것 하나 닮은 것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이 대자연 속에서 공존해간다는 당연한 사실에서 공통점을 찾고 있다. 이 세상에 제 홀로 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척박한 땅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길가의 풀 한 포기,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도 우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범우주론이나 인연설을 들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보이던 보이지 않던 서로와의 관련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시인의 착안점이 여기에 있다. "은행나무 한 그루 물들고/ 늑대가 한 번 울고"에서의 은행나무나 늑대는 인고의 과정을 거친 성숙된 모든 자연물들을 의미한다 . 이들의 공통점은 '그리움'이라는 상관관계로 맺어져있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생성하는 것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2연의 "이 산 저 산 늑대가 울고/ 골짜기마다 은행나무 물들었다" 에서는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절제된 표현을 위하여 점층법과 반복법으로 시상의 깊이를 한층 더하고 있다. 다른 시어들의 동원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극도로 언어를 절약하여 환상의 공간을 넓혔다. 그리움의 모습이 짧은 형식속에서도 시각(노란 은해잎, 둥근 달), 청각(늑대의 울음)을 통하여 두 가지의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둥근 달이 떴다'는 이 시의 절정이자 대단원인 셈이다.
이 세상에 제 홀로된 것이라고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 속에서 상관관계를 갖고 살아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리움에 대한 화답으로 둥근들이 떠오른 것이다. 둥근달은 우리 마음에 자리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보고 싶은 대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까딱하면 죽어 없어지는 목숨을
이슬이라고 한 시인은 다시 써야 한다
동트는 가을 들녘에 나가 보아라
콩꼬투리 하나라도 풀씨 하나라도
어디 이슬 내리지 않은 곳이 있더냐
들녘 저편으로 한참을 걷고 나면
내 몸은 젖어
사색하는 풀잎이 되나니
죽어 넘어지는 가을풀을 슬퍼하지 않는다
스며들어 이슬은 제 목숨을 버리고
마른 눈물로 생명을 키우나니
영그는 가을 들녘 어디에
이슬 내리지 않은 곳이 있더냐
해를 먹고 스러지는 이슬은
해의 뜨거움을 사랑할 줄 안다
동트는 가을 들녘을 걷는 일은
나보다 빨리 죽어 넘어지는
반짝이는 이슬에 젖기 위해서다
ㅡ「이슬 」전문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발상의 전환이 시의 의미를 얼마나 깊게 하는 가를 알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은 '일상적인 생각 뛰어 넘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슬의 관념은 '약함', '단명', '허망'등으로 쉽게 치부되지만, 시인은 이와는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위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 그것도 세상에 골고루 은전을 내리는 포용을 내포하고 있어 의미가 확충되었다.
또한 이슬의 요절해버리는 속성에서 그의 상징적 가치가 상승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시적 화자의 삶이다. 이슬을 닮으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이기 위하여"해를 먹고 스러지는 이슬은/ 해의 뜨거움을 사랑할 줄 안다"로 표현하였다. 이는 '낯설게 하기'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역설과 반어가 공존한다. 해는 만물을 키워내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다. 반짝 해 한 번 뜨면 이슬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시인은'해를 먹고 스러지는 이슬'이라고 표헌함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자기의지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해의 뜨거움을 사랑할 줄 안다'는 이슬이 어쩌면 해보다 위대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음모가 숨어있다. 이러한 이슬을 노래한 것은 이슬처럼 유한한 인간의 삶의 방향을 암시한 것이다. 이슬이 주는 이미지에 맞게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주제의 실체가 눈에 보이듯 순수하게 드러나 있다.
이 봄날
누가 내 몸에서 열꽃을 뜯어내는가
생살을 꼬집힌 듯 열꽃 따낸 자리마다
상흔이 선연하다
봄볕이 내려앉아 진물이 흐르는 곳을
감싸고 있다
아낙들의 웃음소리
웃음소리 아래에 떨어진 복사꽃이 낭자하다
붉은 주검을 밟고
또 복사꽃을 따낸다
나는 열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지만
아낙의 손톱은 무자비하다
꿈이길 바랐지만
열꽃은 땅에 떨어져 잔인하게 시든다
어느 봄날의 사랑처럼
봄날의 과수원에는
솎아낸 복사꽃이 죽어가는데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비닐조각처럼 나부끼는데
열꽃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내 몸에는
흔하디흔한 꽃무덤 하나 오롯이 돋아났다
ㅡ「꽃무덤 」전문
이 시는 표면적으로 상상적 정서를 질서 없이 늘어놓은 것 같지만, 엄연한 시적 질서를 의식하여 쓴 시다. 1연, 2연, 3연은 현재로,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감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복사꽃이 핀 과수원의 잔인함을 형상화아였다. 4연은 과거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과 끝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잔인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5연, 6연은 현재로, 봄날 과수원에서 슬픔으로 남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성숙한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봄날 시적 화자는 과수원 길을 가다가 아낙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아낙들은 복숭아 열매를 크게 자라게 하기 위하여 복사꽃을 솎아주는 인부들이다. 그들은 꽃을 솎는 단순노동의 힘듦을 잊기 위하여 가벼운 농담으로 웃음소리를 지어내지만, 그들 손에서 떨어져 나간 꽃들은 땅바닥에서 두려운 죽음을 맞는다. 그들은 떨어진 꽃을 밟고 또 꽃을 딴다. 떨어진 꽃은 가지에 남아있는 꽃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떨어진 꽃들은 태어나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수정을 기다리는 꽃들이다. 그 처절하게 드러누워 생죽음을 맞이하는 꽃을 보며 화자는 운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간다.
젊은 날 그의 몸에 사랑의 열꽃이 피었다. 그때가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자기 몸에 돋아난 열꽃을 복사꽃으로 환치시킨다. 그리고 그 복사꽃을 사정없이 솎아내는 아낙들을 운명의 판관으로 받아들인다. 또 하나는 화자가 젊은 날 그 복사꽃 핀 과수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너무도 쉽게 운명처럼 죽었고 화자는 이를 긍정하려 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으려고 온갖 정성과 희생을 바쳤지만 죽음은 현실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시적정서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아낙들에 의하여 무참히 뜯겨간 복사꽃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이처럼 또 하나의 경험을 가정해서 이 시를 감상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열꽃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내 몸에는/ 흔하디흔한 꽃무덤 하나 오롯이 돋아났다"로 끝을 맺다. 이는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온 자신의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구절이다. 사랑의 슬픔이 가고 난 뒤 젊은 날의 사랑을"흔하디흔한 꽃무덤"이라고 평범함을 가장했지만, "오롯이 돋아났다"에서 "오롯이"는 평범하지 않다는, 화자만이 지닐 수 있는 진실한 아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성숙함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창포꽃 속에서 여인이 걸어나온다
바가지물을 하늘만큼 길어 머리에 붓는다
연못 속 하늘이 작아졌다
창포꽃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하늘이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 안의 여인은 둥글다
이마 가슴 어깨
보이지 않은 곳도 둥글다
한아름 안아보고 싶은 꽃
오월이 가면 여인은
단오의 풍속도 속으로 들어간다
ㅡ「단오 」전문
단오는 설, 추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명절로 꼽힌다. 단오에는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있는데, 이 시에서는 여인들이 창포가 있는 연못에서 머리를 감는 관능적 모습을 가장 큰 제재로 삼았다. 상반신을 드러내고 머리를 감는 여인들을 몰래 훔쳐보는 혜원의 그림처럼 시적 화자는 연못에서 머리를 감는 여인을 시적 정서를 통하여 낭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적 화자가 그려낸 여인은 오래도록 그의 머리에서 시의 샘물을 마르지 않게 길어주는 시의 여신이다.
전주의 덕진연못에는 많은 창포가 자라 단오 무렵에 꽃을 피운다. 전주의 세시풍속을 보면 단오에 많은 여인들이 원근에서 몰려와 이곳에서 머리를 감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단오에는 덕진연못에서 할머니들이 저고리를 벗고 머리를 감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시의 정서로 어우러져 ' 단오'라는 시가 이루어졌다.
이 시에서 주조를 이루는 정서는 '둥글다'는이미지다. '연못, 하늘, 바가지물, 파문'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둥근 선의 이미지로, '이마, 가슴,어깨'가 머리 감는 여인의 둥근선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이 시이 주인공은 창포꽃 여인이다. 이 여인이 가시적인 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도 둥글다는 비가시적인 이미지가 있어 상상의 깊이를 더해 준다.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숨김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 시는 1연 11행의 비교적 짧은 시지만, 여덟 개 문장을 서술형종결형으로 맺음으로써 집중된 시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또 첫행과 마지막 행을 수미상관법으로 대조시킴으로써 '창포꽂 여인의 등장과 사라짐'이 단오의 '시작과 끝'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듯 형상화하였다.
하늘을 향하여 치솟다
너는 곤두박질쳐 제자리로 온다
네 머리의 끄트머리에서
끝 내 부서져 내리는 환호를 위하여
너는 다시 하늘로 오른다
날개를 갖고 태어나는 물의 비상이
가늠할 수 없는 물의 야망이
신의 노여움을 산다 해도
폭포는 알 수 없는 그 길을
너는 오른다
시시프스의 바윗돌이 굴러 떨어져도
물의 의미를 거부하여
네 삶의 전체에서 찬란하게 부서진다
ㅡ「분수噴水 」전문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났다. 물은 삶의 근원을 이루는 선한 것이다.
이 시의 모티브는 성현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물의 속성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런하 이율배반의 모순은 상승과 하강의 구조로 이루어져 더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공에 의하여 하늘로 치솟은 분수는 물이 지닌 지선至善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이다. 그러나 끝내 추락하는 , 그러다가 다시 하늘로 비상하는 인공의 역리를 보며 시적 화자는 거부할 수 없는 욕망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슬픈 모습을 그려낸다. 분수는 감정이입에 의하여 의인화된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에게는 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야망이 있다. 이 보이지 않은 야망이 불가능에 도전하다 좌절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추락의 처절함을 '환호'와 '찬란'으로 표현함으로써 역설에 함축된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신이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은 신을 거역하고자 하는 운명을 지닌 슬픈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시시포스처럼 떨어지는 바윗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인간이 순간의 환호를 위하여 분수를 만들어낸 것은 시시포스에게 주어진 운명보다 더 큰 형벌을 지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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