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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오바댜 1장 17-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심판하리라
지난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에돔을 진멸하시겠다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형제 민족인 야곱에 대하여 포학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지각 있는 자들 그리고 용맹한 자들을 의지하였고, 그들이 거주했던 지리적 위치나 성을 의지하였습니다. 심지어 동맹국도 그들의 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힘으로 그들을 무엇을 했느냐 하면 형제 나라인 야곱에 대하여 포학을 행했습니다. 형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선을 행하고 덕을 행해야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원수의 편에 서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원수의 편에 서서 행동할 뿐만 아니라 원수보다도 더 잔인하게 행동했던 것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만큼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조차 실행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런 에돔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장은 그들이 부국강병한 나라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는데, 단지 에돔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이며, 그런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오바댜서의 마지막 부분인데,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교훈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돔의 심판, 그리고 만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고 난 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약속도 하시는데, 17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외적으로 보자면 남유다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바댜서의 배경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 49장과 동시대라고 한다면 유다가 멸망해 가고 있는 가운데 이 말씀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앗수르에 의해서,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 사정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형제 나라라 할 수 있는 에돔까지 가세하여 괴롭히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습니까!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하실 뿐만 아니라 만국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에돔을 멸하시고 만국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괴롭힘을 받고 있는 너희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겁니다. 심지어 구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문은 회복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저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이겠습니까?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하시되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공의로서 심판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혹 선악 간에 심판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고,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두려운 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에게는 그 심판이 결코 두려움의 날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라면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있는 이상, 그리스도께 피하는 이상 그분을 믿는 신실한 자들은 결코 두려움의 날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곧 회복의 날이요 완성케 되는 날입니다. 여기에 위로가 있으며,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에돔인들은 유대인들의 탈출구를 막아서서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는 일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시온 산에 피난처를 마련해 두셔서 그리로 피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그 죄 때문에 일시적인 심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앗수르를 통해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바벨론을 세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심판만 행하실 뿐 반드시 피난처를 마련해 두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때로는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항상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다가 때로는 징계하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피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함이 되시기 때문에(고전1:30), 점과 흠이 넘치지만 그리고 점과 흠이 넘치기 때문에 우리 자체로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로 피하기만 하면 우리는 안전히 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거룩이 구별을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한 장소를 구별해 놓으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 때문에 앗수르나 바벨론을 들어 침략하게 하시고 그런 침략을 통해 그들이 살던 곳이 황폐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처를 마련해 두신 그곳은 그들이 침략할 수 없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사27:13) 시편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99:9)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하나님께서 시온 산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피난처로만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할 목적으로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멸망한 원인 가운데 한 가지는 거짓된 예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 부분인 형제 사랑, 이웃 사랑도 문제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나 하면 하나님 사랑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의도 없고 공의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지 못한 것, 오히려 형식만 남아 있는 것, 그리고 그런 형식 안에서도 거짓된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얼핏 보면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의와 정의라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예배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사는 드리면서도, 예배는 드리면서도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분명한 것은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멸망한 원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대적했다는 데 있습니다. 즉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원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 거짓 된 예배, 그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시온 산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구에 의해 징계를 받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을 있게 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결국 그들이 이전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또한 예배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이 다시금 회복하도록 해 주실 것인데, 주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빼앗겼던 땅을 회복해 주실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후 본문에 보면 땅을 회복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회복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야곱의 집이 다시 회복된다, 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유업으로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는 해석도 하고 있고, 기업이라고 할 때 국토 전체라는 의미에서 해석하고 있지만 만국을 벌하실 날이 가까이 왔다고 할 때 좀 더 넓게는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만 보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야곱 족속이 자기 기업을 누리는 일은 이 땅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야곱 족속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항상 어려움과 고난 끊이지 않는다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인 해석으로만 머무는 것은 주의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야곱 족속은 남은 자들, 다시 말해 단순히 유대인만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온 산으로 피한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피한다는 그런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기업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자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서 12지파에게 땅을 기업으로 줄 때 레위인에게 만은 땅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레위인들은 12지파 전체에 흩어져 살게 하셨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의 성읍 가운데 사십팔 성읍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 역시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지금 야곱 족속이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란 말씀은 이전에는 하나님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만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는, 아니 유일한 상급으로 여기는 그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정리해 두어야 할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 나라, 다시 말해 천국의 가치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린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받게 될 상급도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슬픔을 거두는 곳, 그리고 영원한 행복만 있는 곳! 물론 실제로 그런 곳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최고 상급으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가 과연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그것, 그리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상급이라는 그 사실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되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의 가장 복된 분으로 계십니다. ‘가장’이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합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될 그런 분으로 계십니다. 유일한 복이요, 유일한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이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러한 내용을 어디서부터 누리도록 하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땅에서부터 누리도록 하십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롬7: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아니하며(롬8:1), 결국에는 완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그 누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상급이요, 기업인 이상 삶의 모습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결코 합당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가장 복이요 기업이라면 그 나머지 세상적인 내용은 비교 불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용 때문에 어떤 형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었기 때문에, 학벌이 좀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해서 살 수 없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가난할지라도, 병들었을지라도, 학벌이 좀 모자랄지라도, 아니면 그 반대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요, 기업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누리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우리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 죄 때문에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그런 징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진노를 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려움과 고난의 내용을 주시되,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 택한 백성만큼은 그냥 내버리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피난처를 예비해 두십니다. 왜 그런가? 시편 103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8).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기 때문이요(9),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0).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가 아니라,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속히 돌아서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로만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시온 산을 거룩하게 하셨는가? 그곳으로 피하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생도 보면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매를 드는 이유는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돌이켜 잘 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가운에 점과 흠이 없을 수 없을 수는 없지만 인생으로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점과 흠이 없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떻겠습니까?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여기 보면 야곱 족속, 요셉 족속이라고 나와 있어서 하나는 북이스라엘, 또 다른 하나는 남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의미에서만 볼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무엇에 비유하느냐? 불과 불꽃으로 비유합니다. 반면에 에서 족속에 대해서는 무엇에 비유하느냐? 지푸라기로 비유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망하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반면 에돔은 번창하는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하게 하실 때 에돔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지푸라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푸라기를 태우는 불과 불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비유를 통해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시는데, 14절의 남은 자, 그리고 17절에서 피할 자가 있게 하시는 모습과는 정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살핀 말씀을 통해서는 에돔이 야곱을 치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도 남은 자가 없을 것 같은 모습으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할 길을 예비해 두시고 남겨 두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게 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는 에서 족속에게 남은 자가 있게 하시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로 꺼져가는 불과 불꽃처럼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상 완전히 꺼져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꺼져야 하고 재가 되어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광경을 본 것입니다. 떨기나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면 사라지지 않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은 어떤 자들이냐?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불이 붙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꺼져버리고 완전히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에돔에 의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으로 있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신다고 하실 때 18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우리도 그들을 심판하는 자로 있다는 것까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1절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실제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여기 보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나오고 둘째 사망에 대한 표현이 나오는데,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이란 중생된 자를 말합니다. 즉 부활이란 죽음이 전제된 표현이기 때문에 영적인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둘째 사망이란 영적으로 죽은 것이 첫 번째 사망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죽음, 즉 영원한 죽음, 다시 말해 영원한 형벌에 대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 다시 말해 중생된 자들은 첫째 사망은 맛보았지만 둘째 사망, 다시 말해 영원한 형벌은 맛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첫째 부활에 참예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첫째 부활에 참예할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으로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가 온 세상의 왕으로 계시다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는 의미가 지금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천년 동안’이란 말은 실제적인 연대가 아니라 비유적인 숫자에 불과한데,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이라는 수는(계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도리어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한다(마25:41,46).”(1559, 3권 25장 5) 그러니까 천 년이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교회가 겪었고 겪게 될 고난의 때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이지만 그때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의 몸 된 교회는 견딜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면 우리도 또한 다스리는 자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언제부터냐?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모든 시대 동안 그분의 우리의 머리인 이상 몸 된 교회도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에돔의 교만과 그들의 포학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두려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본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요 불꽃인데 지푸라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고 있는 자들인데 마치 저들이 왕인 것처럼 그렇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한시적으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연단케 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자로 있다는 사실을 연단 가운데서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모든 고난의 때 속에 우리를 연단하시는데, 연단하시는 것 때문에 두렵다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연단시키는 도구들은 지푸라기입니다. 우리는 불과 불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 가지고 있는 것, 소위 세상이 힘이라고 하는 것들이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세상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다 사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우리의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교만할 수 있었던 것, 즉 그들 안에 있는 지각 있는 자, 용맹한 자, 그리고 그들이 거주했던 지리적 위치, 그리고 그들 주변에 있던 동맹국들, 이런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우리의 최고 상급이라는 사실에 가치를 두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이 많다고 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와서 19절과 20절도 보시면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앞서 17절 말씀에서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해석을 참조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남은 백성들만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불러 모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랑민들을 회복시켜 그들이 넓고 멀리 통치하며 그들의 위치를 과거보다 더 좋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실제 역사를 통해 유다 백성들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다 회복 했는가 했을 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결코 거짓된 말씀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외적으로는 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바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내용이며, 칼빈도 역사적인 해석을 하다가 이런 의미로서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7절 이하는 단순히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다니엘서의 예언이 바로 이러한 내용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분명 바벨론, 메데와 바사 그리고 헬라, 로마 제국들이 서게 되지만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것을 확인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이외에는 모든 나라가 무너질 것입니다. 거기에는 육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 외에는 결코 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회복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많은 박해와 고난, 어려움이 넘칠지라도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몸 된 교회는 마치 사라지게 한 듯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몸 된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숨겨두시는 일이 있는 것이고, 때가 되기까지 감춰두시는 역사가 있는 겁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가 참 신이 누군가에 대해 대결하는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게 되고 마치 자기 혼자서만 남은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남은 자가 있도록 숨기셨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통해 교회는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 년이 그러한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사라지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관하시는 이상 결코 사라지거나 무너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 그들은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1절도 보시면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여기 보면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18절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분명 심판하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그분과 교회는 하나라는 차원에서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왕 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왕 노릇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 마음대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왕이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리되 아무렇게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법도를 세우고서 다스려야 합니다. 법 없이는 결코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라고 할 때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무렇게나 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기 원하셨습니다. 그 입의 말씀으로 유일하고 참된 법도를 세우셨고, 그 법도를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시119:56).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일하고 참된 법도로 알고 그 법도를 세워나가는 것이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이미 그런 삶이 하나의 잣대가 되어 그들을 정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시간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을 살핀 바 있지만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주께 하듯 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미 정죄하고 심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인류에게 주신 도덕법, 양심의 법으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핑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자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원하시며,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착한 행실을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영원 전 우리를 향하여 작정하실 때부터 거룩의 목적을 가지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의 자리요, 세상과는 구별된 자리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것만 있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것처럼,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것처럼, 그분 안에 있는 우리가 거룩한 자 구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점과 흠이 있고 부족함과 연약함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될 때까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한다고 할 때 공의로서 심판하기 때문에 그 공의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21절 마지막에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결국 이 땅에서 왕 노릇하든 아니면 마지막에 가서 왕 노릇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으로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씀인데,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과 같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제네바 요리문답의 내용으로 하자면 주기도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 안에 근거한 것이지 우리 안에 근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 찬양을 받으실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광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심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그만큼 높여주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이지, 높여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주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주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도 심판하는 자로 있지만, 그것도 이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는 여호와께 속할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 대한 참된 주인은 누구냐?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인 우리도 그분 안에서 함께 다스릴 수 있는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을 하나님의 작정과 그분의 실행으로 정의했는데, 모든 만물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완벽하신 의지로 친히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대상에 있어서 택자와 유기자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하여 누구는 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의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하여 누구는 버리셨습니다.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셨다고 해서 불의함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바댜서를 처음 말씀 말씀드릴 때 유기의 원인과 정죄의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불의함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다스리고자 하시는 대상은 다른 자가 아니라 선택하신 자들, 바로 자기 백성들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뜻과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어떤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라도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때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끝까지 인내하는 자로서, 아니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견인의 은총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 안에서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