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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알카포네식의 십자가 종신형>의 줄거리:
'밤의 대통령' 알카포네가 11년 형을 언도받고 알카트라즈 감옥에 수감되었던 상황은 고스란히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오버랩 됩니다. 알카포네가 감방 쇠창살 밖으로 보이는 샌프판시스코의 야경 앞에서 밤마다 좌절감에 짖눌렸던 것처럼, 참 신앙인은 십자가 쇠창살 밖으로 세상을 보면서 날마다 죽음을 삶의 과제로 안고 살아갑니다. 십자가 너머에 갇혀 살도록 스스로에게 언도한 종신형의 삶에 나타나는 기막힌 복락의 역설을 파헤쳐 봅니다.
‘알 카포네’식의 십자가 종신형
(역대하 4:1~22)
1. 솔로몬이 또 놋으로 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십 규빗이며
2. 또 놋을 부어 바다를 만들었으니 지름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길이의 줄을 두를 만하며
6. 또 물두멍 열 개를 만들어 다섯 개는 오른쪽에 두고 다섯 개는 왼쪽에 두어 씻게 하되 번제에 속한 물건을 거기서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더라
7. 또 규례대로 금으로 등잔대 열 개를 만들어 내전 안에 두었으니 왼쪽에 다섯 개요 오른쪽에 다섯 개이며
8. 또 상 열 개를 만들어 내전 안에 두었으니 왼쪽에 다섯 개요 오른쪽에 다섯 개이며 또 금으로 대접 백 개를 만들었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알 카포네식의 십자가 종신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알 카포네식의 십자가 종신형’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알 카포네는 온갖 흉악한 범죄에도 불과하고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 다녔습니다. 드디어 1931년에 한 국세청 말단 직원에 의해서 탈세 혐의가 드러나게 되고 결국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8만 달러의 벌금형과 1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탈옥이 불가능한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에 수감이 됩니다.
그러나 이 교활하고 악한 범죄자 알 카포네가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지내게 되자, 11년 중에서 4년을 감형 받아 7년 감옥살이를 하고 1939년에 풀려나게 됩니다. 풀려난 알 카포네는 당연히 밤의 대통령으로서의 재기를 노리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출소 할 때에 이미 폐인의 상태로 매독 폐렴 뇌출혈 합병증으로 앓다가 1947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 카포네의 병은 교도소 안에서 생긴 마음의 병에 기인했다고 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7년 동안 단 하루도 빼지 않고 밤마다 마음의 고문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가 수감된 감방은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쇠창살 밖으로 샌프란시스코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밤만 되면 쇠창살 바깥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야경은 밤의 대통령이었던 알 카포네가 인생을 살아왔던 모든 기쁨의 이유가 총 집결된 곳이었습니다. 그 야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알 카포네의 마음은 좌절했습니다. 극도의 열망을 가졌지만 쇠창살에 가로 막혀서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바라만 보아야 했던 것이 마음의 고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악몽과 환청에 시달리는 등 정신병적인 증상까지도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 고통으로 인해서 알 카포네는 사람 자체가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알 카포네와 똑같이 수감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알 카포네가 강제로 수감된 상태였다면 믿음의 수감 생활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예 종신형 수감생활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기에 거북할지 몰라도 이것은 복음과 연관된 영적인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경계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세상과,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던 이 세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십 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시간은 예수님의 죽음 이전의 이 세상과 부활 이후의 시간이 공존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경계가 되어서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몸은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하여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세계로 들어가 있는 상태가 곧 믿음의 상태입니다.
이때에 십자가는 마치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내 마음에 대해서 알 카포네를 가두었던 교도소의 쇠창살처럼 작용합니다. 내 몸은 이 세상에 남아있으면서 세상 것들을 오감으로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 너머 부활의 세계로 들어간 마음에도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 것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에 십자가를 무시하고 세상의 매력을 붙잡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매력이 자녀나 사업일 수 있고 병든 사람이라면 건강일 수 있습니다. 자녀의 형통, 건강한 몸, 회사에서의 고속 승진 같은 것들은 열망할만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의 매력적인 것들을 놔두고 부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창살너머에 세상적으로 좋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무시하고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와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것들을 좇는 것이 신앙생활인줄로 착각하며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알 카포네가 쇠창살 밖으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보면서도 갈 수 없었던 것처럼, 매력적인 세상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얻고 싶더라도 십자가 쇠창살에 수감된 사람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쇠창살 안쪽으로 수감된 사람의 마음에는 어떠한 만족과 기쁨도 없는 것일까요?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갇혀있는 죄수들에게도 제한된 휴식시간이 있어서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것처럼, 십자가 쇠창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 카포네는 7년 만에 출감했지만 십자가를 믿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종신형을 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은 십자가 안에서만 얻는 것입니다.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운동장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뜰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뜰이 바로 주님이 가신 하늘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의 보좌가 펼쳐져 있는 하늘 정원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에게 이것을 운명 지우는 것입니다.
십자가 쇠창살 밖으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야경 같은 세상을 향해서 알 카포네는 갇혀서 갈 수 없었지만, 우리는 가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나를 십자가 쇠창살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두어진 상태에서 오로지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에서만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을 운명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십자가로 결론지어 집니다. 나무 두 개를 열 십(十)자로 엮어놓은 형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우리는 단순하게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고 이해하지만, 구약 성전의 기록들을 살펴봄으로서 십자가 사건 안에 숨겨진 은혜와 복의 내용물들을 풀어 헤쳐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전에 관한 모든 기록들은 십자가 사건 속에 감추어진 복락의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풀어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앞장에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쳤던 장소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얘기와 연관 지어서 성전을 건축하는데 낭실이 55m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거짓도 아닙니다.
에스라가 이것을 기록할 때에는 성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를 가지고 성전을 건축한 의도와 목적을 복음과 관련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55m 낭실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디에서든 성전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세우는 목적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에서 성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지성소 얘기를 하면서 법궤 뚜껑인 속죄소위의 두 천사 외에, 지성소 안에 입상(立像)으로 두 천사가 날개를 펼쳐서 지성소의 벽과 벽을 완전히 막는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이 이국 땅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던 것처럼 성전을 언제 어디서나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지성소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써야 삶이 진행되고 보살핌이 가능하고 책임과 의무가 가능한데, 마음이 성전에 오면 내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에,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를 보면서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야긴은 ‘그가(하나님) 세우신다.’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의(하나님) 능력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놓고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떼어내서 성전으로 보내므로 마음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이 성전에 갇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짐과 동시에 이스라엘 나라 영역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성전이라는 교도소에 종신형을 언도받고 갇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도소의 종신형을 언도받은 사람처럼 항상 성전에 와 있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을 성전에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여러 가지를 붙잡고 스스로 잘 해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세우심의 나타날 기회가 상실되고 마는데 그게 아깝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내가 붙잡지 않고 내 마음을 성전으로 보내면 그 배우자에게 하나님의 세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두 번씩이나 이방 왕들에게 보내졌지만 지켜졌습니다. 그리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으면 하나님의 세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의 기회가 상실됩니다.
십자가 너머의 부활의 세계는 죽어서만 갈 수 있는 곳인데 그곳을 내 교도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십자가 너머 주님이 부활하신 그 공간 안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죄수다’라고 스스로에게 종신형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에게도 생활이 있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놋 제단이 나옵니다. 성전에 마음이 갇혀 있는 것은 우리로 말하면 십자가 쇠창살 안쪽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 쇠창살 안쪽에 갇혀서 수감생활을 할 때에 가장 많이 하게 되고 즐겨하는 게 놋 제단의 삶입니다.
알 카포네가 교도소 쇠창살 밖으로 샌프란시스코 야경을 볼 때에 ‘야! 내가 저 야경 속에서 활보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을 했을 것인데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쇠창살 안에 있으면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마음이 있는 자리와 몸이 보는 자리가 다릅니다. 쇠창살 너머 몸이 보고 있고 몸이 듣고 있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이런 마음이 죄악이다. 그것들을 원하는 대로 얻는다 할지라도 결코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이 그것을 갖고 싶어 했구나.’라고 마음이 갖고 싶어 한 상태를 놋 제단에서 어린양이 번제로 타죽을 때에 내가 죽는 것으로 고백을 합니다. 이게 바로 수감자들의 생활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쇠창살 바깥으로 몸의 눈과 몸의 귀로 몸의 입으로 접하는 것들에게 마음이 끌려갑니다. 이것을 가졌으면 좋겠고 저것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마음은 십자가 너머에서 기쁨을 찾는 자가 아니고, 내 마음은 십자가 쇠창살 안쪽의 하늘 정원에서 기쁨을 찾는 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늘 정원으로 이끌어져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놋 제단의 삶입니다.
그리고 바다(sea)가 나오는데 원주가 13.6m정도로 컸습니다. 그리고 열 개의 작은 물두멍을 만들어서 바다의 좌우편에 두었습니다. 바다는 놋으로 만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에 몸을 씻었고, 물두멍은 번제물과 번제와 관계된 물건들을 씻었습니다.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면 그 양이 나와 동일시됩니다. 즉 나를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올려놓고 태웁니다.
제사장도 물로 씻고 나도 물로 씻는데 이 물로 씻는 의미는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을 뜻합니다. 놋 제단의 죽음은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채택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인데 이게 영적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물로 씻어서 죽는 것은 ‘나’라고 하는 자의식은 그릇과 같아서 여러 가지 내용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제 아내의 남편입니다. 아이의 아빠입니다. 교인들이 있으면 목사입니다. 설교를 하고 있으니 설교자이고 전도자입니다. 자의식의 그릇에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는데 물로 씻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갖게 되는 자의식의 내용들을 싹 씻어서 다 비워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을 나로 하여금 의식을 갖게 하는 유일한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을 찾을 때에 누구의 남편으로서 찾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구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로 나갈 때는 이미 많은 자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기도를 하고 관계를 맺는데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자의식의 그릇이 완전히 씻겨서 첫 번째 관계를 맺는 대상이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너머에서 해야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는 기쁨거리를 세상에서 찾지 않겠다는 것이고 동시에 나의 자의식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오면 놋 제단과 물두멍에서 씻는 것으로 뜻합니다. 이 놋 제단의 죽음과 물두멍의 죽음의 내용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맺어집니다. 하나님이 나의 우리가 됩니다. 이제까지는 우리는 가족이 우리이고 나라가 우리이고 회사가 우리였는데, 마음이 성전에 가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강제적으로 갇혀있듯이 나 자신을 교도소에 가두는 마음이 없이는 십자가 너머의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체질은 끊임없이 밖으로 뛰쳐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감생활 속에서 이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려는 내가 끊임없이 죽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내가 죄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죄송스러워서 자꾸 죽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것은 다 가짜 기쁨인데 마귀에게 속은 것이 체질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 것이 있으면 기쁠 것이라고 믿는 성향이 나타나는데 끊임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개념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해서 배우자 앞에 자식 앞에 부모 앞에 직장에서 하나님과 먼저 맺어진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다음에 떡상과 등대가 나옵니다. 떡상은 하나님으로 배 부르는 것이고 등대는 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세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등대는 밝음인데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마음이 떠나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결론은 알 카포네가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십자가 쇠창살 안쪽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수감생활을 할 때에 몸이 아직 세상 바깥에 있으므로 몸으로 접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과 같이 매력적인 이 세상의 것들을 만납니다. 이럴 때에 놋 제단에서 죽고 이 세상에서 몸 때문에 주어져 있는 자의식의 내용물들을 물두멍에서 끊임없이 씻어 가면서, 오직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에 매진하는 동안 육체가 있는 이 세상의 삶은 그가 세우실 것이고 그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알 카포네의 교도소 생활이 우리에게 그대로 오버랩 되어서 자발적인 수감자로서 십자가 쇠창살 너머로 이 세상의 야경을 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