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회》
[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첨부: 사람을 입체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않다.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재단되기때문. 김창룡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어있다. 안하무인, 권한남용, 월권등등. 그러나 김창룡과 오제도검사의 활동이 없었다면 6.25전쟁시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후 3일간 기다렸던,
남한내 남로당 봉기에 의하여 남한 스스로 붕괴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작금의 일부 정치 흐름도 염려스러운면이 있기도 하여 시의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부터 월곡 문병순씨의 글을 저장해두었다 땡감에게 보내주신 벗 전영수대인께 고마움 전하면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대한 내용을 연재하겠습니다. ]
최근 몇년 동안 대한민국에는 희한한 풍조가 벌어지고 있다.
잡아 놓은 간첩을 풀어주고 편 들어 주고, 그들이 법정에 출정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강제소환을 해서 재판에 세워야 하지만, 어쩐일인지 사법당국은 슬그머니 봐주어 버린다.
그러다 "충북 동지회"라는 간첩단을 잡아서 기소한지가 2년이 지나서야 1심 판결이 났다.
옛날 같으면 3개월이면 끝나는 재판인데 2년을 끌어온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간첩들이 유엔 고등판무관실에 자기들의 재판을 중단하고 국가정보원과 국가보안법 폐지, 그리고 자기들을 제3국으로의 망명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서를 보내는 등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고 있다.
또 창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준연동형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는 위험천만한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는 판이다.
이는 본인이 얼마전에 1949년 국회 푸락치 사건을 막으려면 이번 선거에서 주사파들의 출마를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증거다.
현실이 이 모양인데, 간첩잡는 국정원의 임무가 경찰청으로 넘어갔으니, 간첩을 제대로 잡을 수나 있을지가 의문이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간첩 잡는 타공전선(打共戰線)의 선봉이었던 김창룡 특무대장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1. 김창룡은 누구인가?
특무대장 김창룡은
군 내부의 좌익성 군인들 4,749명을 잡아 숙청하고 남로당 거물 간첩 김삼룡과 이주하, 여간첩 김수임 등을 검거하여 처단함으로써 6.25전쟁 기간동안 군 내부는 물론, 사회혼란을 막고 후방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916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영흥농잠학교를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잠깐 근무하다 만주 신경 철도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던중 일본군에 징집되어 관동군 헌병대에서 간첩 잡는 활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1947년 4월17일 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전신) 제3기생으로 임관하여 태릉의 제1연대 정보과에 보직되어 군 내부의 좌익세력 소탕에 선봉이 된 이후 1956넌 특무대장(현, 방첩사령관)으로 재직중 운명할 때까지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간첩 잡는 일에 일생을 바친 타공전선의 제1인자였다.
-2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