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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論語』의 시대적 배경과 의미
『논어』의 글이 나오게 되는 시대적 배경은 春秋(춘추) 말기 戰國(전국) 초기이다. 곧 공자와 그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논어』의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불안정해진 속에서 천하를 고르고 안정되게 經綸(경륜)하기 위해서는 武力의 强權정치가 아닌 堯舜(요순)과 夏殷周(하은주) 삼대 삼왕이 폈던 德治를 실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二帝三王의 정치대법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현실의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직시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이것이 군자의 공부를 강조하는 學而편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堯曰편에서 二帝三王의 도덕정치의 핵심을 밝히면서 三不知三無也로 마치는 『논어』 구성의 핵심이다.
그 내용을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 가운데 『詩』 『書』 『易』과 『春秋』를 펴낸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는 것이 급선무이다. 司馬遷(사마천)의 『史記・孔子世家』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공자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논어』가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본다. 다음 내용은 졸저 『논어역해』 제1권의 ‘주자의 『논어집주』 서설 해설’을 근간으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공자의 탄생
공자는 魯나라 襄公(양공) 22년 경술년(서기전 551년) 11월 庚子일에 昌平 鄒邑(창평 추읍)에서 아버지 叔梁紇(숙량흘)과 어머니 顔徵在(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선조는 본래 송나라의 귀족으로 6대조인 孔父嘉(공보가)가 宋華督(송화독)에게 피살되자 4대조인 孔防叔(공방숙) 대에 화를 피하여 노나라로 피신해왔다.
공방숙의 아들이 伯夏(백하)이고, 백하의 아들이 공자의 아버지인 紇(흘)이다. 字가 숙량이라 흔히 숙량흘이라고 부른다. 숙량흘은 귀족집안의 후손이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변변한 지위도 없었고, 부유하지도 못했다. 결혼하여 첫 아들을 두었으나 절름발이인지라 남들 앞에 떳떳이 내세울 수가 없자 나이 60이 넘어 안징재를 재취로 맞아들였다. 훗날 사마천은 이를 野合(야합)이라고 하였지만, 이들 부부는 尼丘山(니구산)에 올라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정성 덕분이었는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 萬世師表(만세사표)이자 聖人으로 추앙받게 되는 공자이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었기에 이름을 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이었기에 字를 仲尼(중니)라 하였다. 다 자란 뒤에 공자의 키는 9척6촌(九尺有六寸)의 長身으로, 당시 사람들은 공자를 ‘長人’이라고 부르면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공자의 탄생년도에 대해서 춘추좌전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여름 4월 기축일에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두예(杜預:西晉사람, 222~285년, 春秋左氏傳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은 춘추좌씨경전집해 저자)는 공자가 노나라 양공 22년(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73세를 살았다고 하고, 춘추공양전(公羊傳)과 춘추곡량전(穀梁傳)은 모두 공자의 출생을 양공 21년 을유년(己酉年:서기전 552년)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공자의 생몰년대(서기전 551년~서기전 479년)는 사마천의 史記・孔子世家에 의거하고 있다.
공자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추읍을 떠나 지금 山東省 曲阜(곡부) 곧 공자의 고택이 있는 闕里(궐리)로 이사하였다. 공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에는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흔히 ‘俎豆禮容(조두예용)’의 시기라고 한다.
공자 나이 17세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돌아가시자 공자는 아버지의 장례 때 수레를 끈 사람을 통해 노나라 서울 동쪽의 방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내어 어머니와 함께 합장하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난과 주변의 멸시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공자는 20대초에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대부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었는데 저울질과 회계 관리를 공평하게 잘하여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뒤 나라의 종묘제사에 쓸 犧牲(희생)을 기르는 일을 맡아서 잘 번성시킴에 따라 사람들의 공자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졌다.
참고로 세간에서 논어를 인용하여 공자가 창고지기와 가축 기르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맹자(만장하편 제5장)와 『孔子世家를 근거로 한 얘기이지, 실제 논어 본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子罕편 제6장을 보면 “나는 젊어서 미천하였으므로 비루한 일에 재능이 많다(吾少也賤故, 多能鄙事)”라는 내용을 미루어 委吏(위리, 창고지기)와 司職吏(사직리, 종묘제사에 희생으로 쓸 가축을 맡아 기르는 관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창고지기인 委吏(위리)가 되었을 때 저울질과 회계관리를 철저히 했다.
文獻考證(문헌고증)에 철저한 공자의 학문체계
聖人의 道를 배우기를 좋아한 공자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고, 좋은 스승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 배웠기에 공자 자신도 마침내 좋은 스승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학문은 관부에 있다(學在官府)’고 하여 귀족 관료들이 교육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처음으로 민간 차원에서 講學(강학)을 시작하여 최초로 私學제도를 도입하여 학문의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杏亶講學(행단강학)’이다. 공자가 집 뜰 안에 있는 은행나무 밑에 강단을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한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는 성인의 도를 가르치면서 당시 사회제도의 불합리한 점들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투쟁에만 관심있는 당시의 실권자들은 이를 외면하였다. 공자는 의견 開陳(개진)과 후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뒷받침해줄 성현의 말씀이나 전해져 오는 실증자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많은 자료를 보관하고 있고, 당대 현인으로 일컬어지는 老子가 柱下史(주하사, 왕실도서관을 맡아보던 관리)로 있다는 周나라의 왕실도서관을 방문하고자 했다. 이에 34세의 공자는 노나라 昭公(소공)의 승인을 받아 제자인 南宮敬叔(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를 찾아갔다. 노자를 만나 옛 성인들의 禮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를 ‘老子問禮(노자문례)’라 하며, 이름을 따서는 ‘問禮老聃(문례노담)’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禮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제도와 법 등을 말한다. 공자는 얻고자 하는 자료들을 찾지 못했고, 노자로부터도 구하고자 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八佾(팔일)편 제9장이다. “하나라의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가 족히 증거하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송나라가 족히 증거하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니, 족하다면 내가 증거할 수 있느니라(子曰 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이 不足故也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고 한 내용이다.공자가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 왕실도서관에 가서 노자와 예를 논하였다.
또한 『중용』 제28장에서 “내가 하나라 예를 설명할 수 있으나 기나라가 족히 증거하지 못하고, 내가 은나라 예를 배웠으니 송나라가 있기는 하지만 증거하지 못하고, 내가 주나라 예를 배웠더니 이제 쓰이는지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子曰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요 吾學殷禮하니 有宋이 存焉이어니와 吾學周禮하니 今用之라 吾從周하리라)”고 한 뜻이다. 이와 같이 공자는 文獻考證(문헌고증)에 철저했다.
여기서 文이란 圖書資料(도서자료)이고, 獻이란 賢人(현인)으로부터 口傳되는 내용이다. 공자는 문헌고증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게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더할 것은 더하여[損益] 쓰고자 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제자인 顔淵(안연)이 나라를 위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問爲邦) 답하신 내용으로 “(책력으로는) 하나라의 때를 행하며, (교통수단으로는)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관복으로는)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곧 소무(순임금의 음악)이고, 정나라 노래를 추방하며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 할지니, 정나라 노래는 음탕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위태로우니라.(子曰行夏之時하며 乘殷之輅하며 服周之冕하며 樂則韶舞요 放鄭聲하며 遠佞人이니 鄭聲은 淫하고 佞人은 殆니라 - 衛靈公편 제10장)”고 하였다.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일관되게 詩書와 易의 이치와 원리가 관통되고 있다. “吾道一以貫之”는 구절이 그것이다. 따라서 『논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詩書와 易의 이치와 원리를 알아야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노나라 정치에 실망한 공자, 제나라에 가다
공자가 35살 때(서기전 517년) 노나라의 군주인 소공이 사소한 일로 권력실세인 季平子(계평자)를 처벌하려 하다 오히려 쫓겨 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鬪鷄(투계)에서 계평자는 닭의 머리에 가죽 투구를 씌우고, 가신인 후소백은 닭의 다리에 쇠발톱을 끼워 닭싸움 내기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때 후소백의 방식을 괘씸하게 여긴 계평자가 무력으로 후소백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소공이 계평자의 행위를 불법으로 몰아 처벌하려다가 소공이 오히려 계평자에게 당하여 제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군주가 망명하자 대부들의 전횡이 더욱 심해지면서 노나라의 정치질서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실망한 공자 역시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공자의 명성을 들은 제나라 대부 高昭子(고소자)가 공자를 가신으로 초빙하였다.
제나라는 음악이 매우 발달하였기에 공자는 고소자의 가신으로 지내면서 음악담당 관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공자는 순임금이 만든 韶曲(소곡)에 깊은 감명을 받아 3개월 동안이나 침식을 잊고 순임금 음악을 배웠다. 述而(술이)편 제13장에 “선생님께서 제나라에 계실 적에 韶(소)를 들으시고 석 달이나 고기 맛을 느끼지 못하시면서 ‘음악을 함이 이에 이를 줄은 헤아리지 못했노라’고 하셨다.(子在齊聞韶하시고 三月을 不知肉味하사 曰不圖爲樂之至於斯也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제나라 군주인 景公(경공)이 공자를 불러 음악과 정치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일례로,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사를 물었을 때(齊景公, 問政於孔子) 공자가 “인군은 인군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나이다(孔子對曰君君臣臣父父子子).”고 대답했다. 그러자 군주가 “훌륭하도다! 진실로 만약 인군이 인군답지 못하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며,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으나 내가 얻어먹으랴?(公이 曰善哉라 信如君不君하며 臣不臣하며 父不父하며 子不子면 雖有粟이나 吾得而食諸아 - 顔淵편 제11장)”고 했다.
제경공이 공자에게 감명을 받고 등용하려고 하면서 공자의 대우를 “(노나라의 권력 최고실세인) 계씨같이 하는 것이라면 내 능치 못하거니와 계씨와 (노나라의 두 번째 권력실세인) 맹씨의 사이로 대우하리라.”했다. 하지만 재상인 晏嬰(안영)을 비롯한 제나라 대부들이 반대하자 다시 “내 늙었노라. 능히 쓰지 못하노라.”고 했다. 공자는 미련 없이 제나라를 떠났다.(齊景公이 待孔子曰若季氏則吾不能이어니와 以季孟之間으로 待之하리라하고 曰吾老矣라 不能用也라한대 孔子行하시다 - 微子편 제3장) 제경공에게 발탁되려다 무산되자 하직 인사를 하며 떠나는 공자
당시 제나라 재상인 晏嬰은 “대개 유학자는 공리공론을 일삼고, 허례허식으로 거창한 장례식을 지내 이것이 일반의 관습으로 되면 큰일이다. 또한 유학자들이란 입으로만 벼슬을 구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니는 무리여서 책임 있는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구실로 공자의 등용을 반대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공자의 등용을 반대하는 제나라 대신들의 분위기와 공자에 대한 암살위협까지 있어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家臣들의 발호와 공자의 出仕 거부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지만 정치상황은 더욱 혼미해졌다. 군주를 축출한 계평자가 죽고 그 아들인 季桓子(계환자)가 대를 이어 권력을 쥐면서, 노나라는 대부인 三桓氏(삼환씨, 노나라 桓公의 庶子 후손으로 孟氏・季氏・叔氏를 말함)의 家臣들이 政事를 전횡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계씨의 가신인 陽貨(양화, 陽虎라고도 함) 역시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게 되었다. 대부가 군주를 축출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일어나자 가신도 권력투쟁 대열에 나서서 대부를 축출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양화는 공자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계손씨의 초청으로 잔치에 갔을 때 공자를 문전박대하여 내쫓은 적이 있는 인물이다. 후에 공자의 명성이 높아지자 양화는 공자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려고 공자를 누차 만나려 하였으나 공자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이에 양호는 공자가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를 폐백으로 보냈다. 당시의 예에 의하면, 주인이 있을 때 선물을 가져오면 그 자리에서 답례품을 보내고, 주인이 없을 때 선물을 가져오면 그 주인이 직접 선물을 갖고 답례로 그 집을 방문해야 했다.
양호를 좋게 보지 않았던 공자 역시 양호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폐백을 갖다 주려다가 길에서 양호를 만나게 되었다. 양호는 공자에게 “오시오. 내 그대와 더불어 말하리라. 그 보배를 품고서 그 나라를 혼미케 한다고 말함이 가히 仁이라 이르겠소?”라고 했으나 공자는 “불가하다.”고 했다. 다시 양화가 “종사하기를 좋아하면서 자주 때를 잃음이 가히 지혜라 이르겠소?”했으나 공자는 여전히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자 양화가 “해와 달이 가는지라, 세월이 나와 더불어 하지 않느니라.”며 설득하자 공자는 “알겠소. 내 장차 벼슬하리라.”고 말했지만 공자는 끝내 거부하였다.(陽貨欲見孔子어늘 孔子不見하신대 歸孔子豚이어늘 孔子 時其亡也而往拜之러시니 遇諸塗하시다 謂孔子曰來하라 予與爾言하리라 曰懷其寶而迷其邦이 可謂仁乎아 曰不可하다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아 曰不可하다 日月이 逝矣라 歲不我與니라 孔子曰 諾다 吾將仕矣하리라 - 陽貨편 제1장)
그리고 공자는 시서예악 연구와 제자 교육에 매진하였다. 이른바 ‘退修詩書(퇴수시서, 물러가 시서를 닦다)’의 시기로 공자 나이 43세 때의 일이다.
공자, 마침내 노나라 군주에게 발탁되다
현실정치에 몸담아 爲民정치 곧 德治의 이상을 펴고자 했던 공자에게 좀처럼 출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씨를 배반하고 費(비)땅을 점거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가신인 公山不狃(공산불뉴)가 공자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는 ‘周나라 문왕과 무왕도 작은 땅에서 출발하여 주나라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룩하였다. 나도 이제 그곳에서 한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며 초빙에 응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극구 만류하여 가지 못했다.(公山弗擾以費畔하여 召어늘 子欲往이러시니 子路不說曰 末之也已니 何必公山氏之之也시리잇고 子曰夫召我者는 而豈徒哉리오 如有用我者인댄 吾其爲東周乎인저 - 陽貨편 제5장)
그 후 노나라 군주인 定公과 실권자인 계환자는 대부들과 가신들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정권 보호와 권력독점을 위해 공자를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공자의 능력을 비롯해 공자가 내세우는 정치적 명분과 공자를 지지하는 세력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공자가 中都(중도) 땅의 재상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정사를 펼치게 되었다. 탁월한 정사를 펼친 공자는 중도 땅을 다스린 지 일 년 만에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이를 ‘化行中都(화행중도, 중도에서 덕화가 행해지다)’라 한다.
백성들은 생업에만 전념하게 됨으로써 생활이 윤택하고 편안해졌다. 백성들이 자기 일을 즐겨하며 각자가 할 바를 알아서 했다. 노인은 존경 받고, 어린이는 사랑받으며, 강자가 약자를 욕보이지 않고, 남녀 간에는 음란하지 아니하였으며, 장사꾼들은 담합하며 물가를 조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사방의 나라에서 공자의 政事를 배우려 하였으며, 아울러 공자의 지위도 높아져 司空(사공:건설부장관)을 지내고, 이어 司寇(사구:법무부장관)가 되었다. 정사에 참여하고자 했던 공자가 “진실로 나를 쓰는 자가 있으면 1년만이라도 가하니, 삼 년이면 이룸이 있으리라.(子曰苟有用我者면 朞月而已라도 可也니 三年이면 有成이리라 - 子路편 제10장)”고 말씀하신 내용이 증명된 것이다.
제나라와의 회담에서 보인 공자의 외교 업적
공자는 사구로 재임하는 동안 외교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하나가 ‘夾谷會談(협곡회담, 혹은 夾谷會齊)’이다. 제나라 대부인 黎鉏(여서)가 막후에서 노나라 가신들을 조정해 제나라의 이익을 취하려다가 일이 여의치 않자, 제 경공으로 하여금 노 정공과 회담을 갖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노 정공을 무력으로 누르고 굴복시킬 속셈이었다. 제나라의 속셈을 짐작한 공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수행대신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제 경공은 안영을 대동하였다. 양국이 협곡에서 만나 회동을 축하하는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제나라측은 축하 가무를 한다며 기를 든 사람, 패를 잡은 사람, 창과 검을 들고 춤추는 사람들을 노 정공에게 접근시켜 제압하려 했다. 공자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양국의 군주가 우호적으로 만나는 자리에 야만스러운 가무가 웬 말이냐’며 항의하였다.
협곡회담에서 무장한 제나라 가무단을 禮로 물리친 공자
공자의 준엄한 항의에 제 경공은 가무를 멈추게 하였다. 그런데 또 제나라 측에서 궁정음악을 연주하겠다며 칼과 창으로 무장한 배우들과 난쟁이들로 하여금 시끌벅적하게 북을 치며 魯 정공에게 접근하게 하였다. 이에 공자가 이는 평민이 제후를 희롱하는 행위로써 참수형에 해당한다며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분위기가 평정되고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으로 양국이 神에게 맹약하는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제나라는 ‘제나라가 출정할 때 노나라가 300승의 병거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맹약은 무조건 파기된다.’는 조항을 추가로 협정문안에 넣자고 요구하였다. 이는 강대국인 제나라가 노나라를 속국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당시 양국의 국력으로 보아 노나라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공자의 기지와 임기응변으로 노나라는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켰다. 과거 제나라가 노나라로부터 빼앗았던 세 곳의 城(성)을 반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제 경공이 이를 허용하면서 공자는 큰 외교적 업적을 이룩하게 되었다.
군주의 통치권 강화를 위한 공자의 노력
예전에 정공이 “인군이 신하를 부리며 신하가 인군을 섬기는데 어찌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가 “인군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써 인군을 섬기나이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定公問 君使臣하며 臣事君하되 如之何잇고 孔子對曰君使臣以禮하며 臣事君以忠이니이다 - 八佾편 제19장) 이에 정공은 군주가 신하를 예로써 대하면 신하는 군주에게 충심을 다하게 되어 곧 군주의 통치권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협곡회담’으로 정공의 공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자 공자는 마침내 국정을 전횡하던 삼환씨 등의 세력을 꺾을 것을 정공에게 건의하였다. 즉 공자가 “家臣은 사적인 군사를 소유하지 못하고, 大夫는 백치의 성(百雉之城, 四方3百丈)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周禮(주례)의 규정에 근거하여 대부의 성(城)을 허물도록 정공에게 건의한 것이다.
이는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를 지목하여 한 말인데, 이들이 각각 성(郕), 후(郈), 비(費)성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정공이 이를 받아들이자 삼환씨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계손씨 또한 동조하고 나섰다. 계손씨의 가신인 공산불뉴가 비성을 점거하고 계손씨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계손씨 역시 공산불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공자는 제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자로를 계손씨 가문의 총책임자로 파견하여 이른바 ‘三都城 打倒(삼도성 타도)’라는 대과업을 시도하였다(서기전 498년). 삼환 중에 가장 힘이 약한 숙손씨의 후성을 철거하고 공산불뉴가 점거하고 있는 비성도 몇 번의 각축전 끝에 철거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맹손씨의 성성만은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다. 노 정공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성성을 포위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참람한 가신 권력을 응징하고 군주의 통치권을 세우며 전통적인 정치질서[忠君尊王]를 재건하려 했다는 상징적인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기에 이를 ‘禮墮三都(예휴삼도)’라 부른다.
공자, 노나라의 재상 일을 맡다
정공 14년(서기전 496년) 공자는 나이 56세에 드디어 노나라의 재상 일을 맡게 되었다. 이때 공자는 노나라의 정치를 혼란시킨 대부 少正卯(소정묘)를 처벌하고 본격적으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고 남녀가 길을 가도 따로 걸었으며,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어졌다.
또한 노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일일이 관리에게 허가받지 않더라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노나라가 안정되어 국력이 강해지고 있다는 소문이 제나라 경공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천하통일을 꿈꾸는 제 경공은 장차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큰 위협이 될 것에 대비해 미인계를 써서 노나라 군주를 교란시키고자 하였다. 미녀 80명을 선발하여 관능적인 가무를 배우게 한 뒤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 30대에 태워 노 정공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 계책을 파악한 공자는 제나라가 보낸 여악사들을 도성의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계환자가 몰래 나가 훔쳐보더니 미녀들에게 흠뻑 빠져 버렸다. 계환자는 노 정공과 함께 순시라는 명목으로 종일토록 남문밖에 머물며 미녀들의 가무를 관람하였다.
노 정공과 계환자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미녀들의 가무공연에 빠지면서 마침내 郊祭(교제)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신하들에게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할 祭物을 나눠주지 않고 여악사들에게 가버린 일이 벌어졌다. 이는 공자의 정치세력이 커지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계환자가 공자를 정치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노 정공에게 실망한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이른바 ‘因膰去魯(인번거로, 제사고기로 인해 노나라를 떠나다)’이다.
공자, 56세에 철환주유에 나서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곳을 찾아 나선 이 때 공자의 나이는 56살이었다. 이로부터 68세까지 13년간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그 유명한 轍還周遊(철환주유)의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먼저 衛(위)나라로 가서 어진 대부인 顔濁鄒(안탁추, 맹자에서는 顔讎由, 안수유라 함)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衛 靈公(영공)은 친히 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고[靈公郊迎:영공교영], 6만두의 녹봉(祿俸)으로 공자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위나라 가신세력의 공자에 대한 비방이 잇따르고 나아가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공자는 10개월 만에 위나라를 떠난다. 공자 일행이 陳(진)나라로 가던 도중, 송나라의 匡(광)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광 땅의 주민들이 공자에 대해 자기들을 괴롭힌 계손씨의 가신인 양호를 닮았다며 공자일행을 잡아 가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공자가 신변위협을 느끼는 제자들의 동요를 무마하며 한 유명한 말이 “주나라 문왕은 이미 없으나 주나라의 문(文)이 나에게 계승되고 있다. 하늘이 이 문(斯文)을 없애는 게 아니라면, 저들이 나를 어찌하랴!(子畏於匡이러시니 曰文王이 旣沒하시니 文不在玆乎아 天之將喪斯文也신댄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시니 匡人이 其如予에 何리오 - 子罕편 제5장)”이다. 여기서 후대 유학자들이 斯文(사문)이라는 말을 존숭하게 되었고, 斯文이란 말은 이후 유학을 상징하게 되었다.
5일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匡人解圍:광인해위) 공자 일행은 위나라의 蒲(포) 지방에 잠시 머무르다가 위나라 서울로 돌아와 대부인 蘧伯玉(거백옥)의 집에 의탁하였다. 거백옥은 위나라의 어진 대부로 공자가 史魚와 함께 곧은 사람이라고 늘 칭찬한 인물이다(子曰直哉라 史魚여 邦有道에 如矢하며 邦無道에 如矢로다 君子哉라 蘧伯玉이여 邦有道則仕하고 邦無道則可卷而懷之로다 : 공자 가라사대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음에 화살과 같으며, 나라에 도가 없음에 화살과 같도다. 군자라,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가히 거두어서 감추도다.” - 衛靈公편 제6장).
이때 공자는 南子(남자)라는 위 영공의 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南子는 송나라 공자를 위나라로 불러들여 공공연히 정을 통하여 바람둥이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터였다. 이런 南子를 공자가 알현하였다. 제자인 자로가 매우 못 마땅히 여기자 공자는 “내가 그릇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싫어하셨을 것이라고 거듭 맹세하였다.(子見南子하신대 子路不說이어늘 夫子矢之曰 予所否者인댄 天厭之 天厭之시리라 - 雍也편 제26장). 군주를 만나고 그 나라에서 벼슬하게 되면 小君인 그 부인을 알현하는 것은 예였다. 공자는 예로써 만났을 뿐이다(禮見南子). 광땅 사람들이 孔子를 양호로 오인하여 공격했다.
그러다 공자 일행이 위나라로 들어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위 영공의 초대를 받았다. 위 영공은 공자를 뒤 수레에 환관과 함께 태우고 시내를 다니면서 부인과 함께 손을 흔들고 다녔다. 위 영공의 무례한 태도에 실망한 공자는 곧 위나라를 떠났다.
살해 위협 속에서도 계속된 철환주유
공자 일행은 송나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송나라 무관인 사마환퇴가 병력을 이끌고 와서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며 공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른바 ‘宋人伐木(송인벌목)’ 사건이다.
宋人伐木(송인벌목)’ 사건
제자들은 빨리 피할 것을 권유했으나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셨으니, 환퇴가 그 나를 어찌하겠는가?(子曰天生德於予시니 桓魋 其如予何리오 - 述而편 제22장)”라며 天道를 후대에 전할 召命(소명)의식을 분명히 했다. 사마환퇴는 ‘永生(영생)’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3년이 넘도록 석관에 화려한 조각을 하고 있었기에 공자가 이를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이에 사마환퇴가 공자에게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공자 일행이 사마환퇴의 위협을 피하기는 했으나, 이때 공자는 일행을 잃고 그 유명한 일화인 ‘상갓집의 개(喪家之狗)’같다는 얘기까지 듣게 된다. 이후 陳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사성정자)의 집에 머무르면서 3년을 지냈으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갔으나, 위 영공 역시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7일간을 광야에서 헤매다
공자가 광 땅에서 풀려난 후 晉나라에 들어갈 생각으로 잠시 변경에 머물 때였다. 계손씨가 노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듯이 晉나라는 대부 趙簡子(조간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조간자의 가신인 佛肸(필힐)이 中牟 땅을 점거하고 반란을 도모했다. 이는 노나라의 공산불뉴가 비성을 점거하고 계손씨에게 반란한 것과 같았다. 필힐은 공자가 조간자를 좋게 보지 않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공자는 응하려고 하였으나 제자인 자로가 극구 비난하며 만류하였다.(佛肸이 召어늘 子欲往이러시니 子路曰昔者에 由也聞諸夫子하니 曰親於其身에 爲不善者어든 君子不入也라하시니 佛肸이 以中牟畔이어늘 子之往也는 如之何잇고 子曰然하다 有是言也니라 不曰堅乎아 磨而不磷이니라 不曰白乎아 涅而不緇니라 吾豈匏瓜也哉라 焉能繫而不食이리오 : 필힐이 부르거늘 공자가 가고자 하셨더니, 자로가 가로대 “옛적에 유가 선생님께 듣기를 ‘친히 그 몸에 불선을 하는 자이거든 군자가 들어가지 아니한다.’고 하셨으니, 필힐이 중모로써 배반하거늘 선생님의 가심은 어째서입니까?” 공자 가라사대 “그러하다. 이런 말이 있느니라. 단단하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느니라. 희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검은 물을 들이려 하여도 검어지지 않느니라. 내 어찌 포과이랴! 어찌 능히 매었다고 먹지 아니하리오.”- 陽貨편 제7장) 공자는 황하강가를 거닐며 고민하다가 끝내는 중모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衛나라로 다시 들어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위나라 태자가 바람둥이 계모인 南子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晉나라로 도망간 사건이 있었다. 위 영공은 태자를 처벌하고자 晉(진)나라를 무력으로 치는 계책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제사에 관한 일이라면 잘 알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며, 다음날 위나라를 떠나(衛靈公이 問陳於孔子한대 孔子對曰俎豆之事는 則嘗聞之矣어니와 軍旅之事는 未之學也라하시고 明日에 遂行하시다 - 衛靈公편 제1장) 陳나라로 가셨다. 공자의 나이 환갑이었다.
하지만 陳나라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陳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자 남쪽에 있는 蔡(채)나라로 피신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행은 도중에 吳(오)나라와 楚(초)나라의 병사들에게 잡혀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렀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광야에서 양식도 다 떨어져 굶주림에 지쳐 병자마저 생겨났다. 이에 자로가 성내며 군자도 궁함이 있느냐고 따져 묻자, 공자가 군자는 진실로 궁하고 소인은 궁하면 이에 분수에 넘는 짓을 한다고 하였다.(在陳絶糧하니 從者病하여 莫能興이러니 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잇가 子曰君子固窮이니 小人은 窮斯濫矣니라 - 衛靈公편 제1장) 이른바 陳蔡絶糧(진채절량 또는 在陳絶糧)의 시기이다. 7일간 극도의 상황을 겪은 공자는 만년에 이때 함께 한 열 명의 제자를 거론하는데, 孔門十哲(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계환자,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고 유언하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季桓子가 죽으면서 후계자인 季康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불러 함께 정사를 의논하라고 유언하였다. 가신들이 나서서 모두 반대하자 계강자는 공자 대신 제자인 冉求(염구, 字는 子有, 혹은 冉有)를 등용하였다.
염구에 이어 자공도 계강자에게 발탁되어 가고 공자 일행은 방랑을 계속한다. 앞서 진채절량의 시기를 겪다가 葉公(섭공)이라고 부르는 초나라의 장군 반제량(潘諸梁, 일찍이 섭읍의 長을 지냈기에 흔히 섭공이라 부름, 당시 초나라는 스스로 稱王을 하였으므로 그 아래의 관직도 한 단계씩 올려 호칭하였다.)을 만난다. 섭공은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묻기도 했는데, 자로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돌아와 그 사실을 알렸더니 공자는 “너는 어찌 ‘그 사람됨이 분남이 일어나면 먹을 것을 잊으며,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장차 이름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아니했는가?(葉公이 問孔子於子路어늘 子路不對한대 子曰女奚不曰其爲人也 發憤忘食하며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 述而편 제18장)”라면서 好學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공자를 섭공은 군주에게 추천하지 않았지만 초 昭王은 書社의 땅 7백리를 封地(봉지)로 주어 공자를 중용할 뜻을 가졌으나 令尹인 子西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子西는 공자가 초나라 도성에 들어오는 것까지 막았다. 공자는 여러 제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떠나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 길에서 長沮(장저)와 桀溺(걸닉)이라는 道家의 隱者(은자)들을 만나기도 했다(微子편 제6장, 제7장).
공자 나이 63살 때인 기원전 489년, 공자는 위나라에 도착했으나 위 영공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손자인 出公 輒(첩)이 군주가 되어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출공은 과거에 바람둥이 계모를 죽이려다 도망간 아버지가 귀국하면 양위를 해야 할 처지였다. 이때 위나라에서는 공자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도 궁금해 했지만 직접 묻지 못하고 자공을 통해 물었다. 자공이 공자에게 伯夷・叔齊(백이・숙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공자는 옛날의 현인이라고 답했다. ‘원망했습니까?’라는 자공의 물음에 공자는 ‘仁을 구하려다 仁을 구했으니 또한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고 하자 자공이 나가 선생님은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알려주었다.(冉有曰夫子爲衛君乎아 子貢이 曰諾다 吾將問之하리라 入曰伯夷叔齊는 何人也잇고 曰古之賢人也니라 曰怨乎잇가 曰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出曰夫子不爲也시리라 - 述而편 제14장)
반면 子路는 단도직입적으로 스승에게 위나라 군주가 등용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공자는 이름부터 바로잡는다는 正名論으로 답했다. 출공 첩이 靈公인 할아버지 사당을 아비사당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고,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맞지 아니하고, 형벌이 맞지 아니하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이름을 붙일진댄 반드시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말을 할진댄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 하니, 군자는 그 말함에 구차한 바가 없을 뿐이라.(名不正則言不順하고 言不順則事不成하고 事不成則禮樂이 不興하고 禮樂이 不興則刑罰이 不中하고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이니라 故로 君子名之인댄 必可言也며 言之인댄 必可行也니 君子於其言에 無所苟而已矣니라 - 子路편 제3장)”
어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正名論과 聖人의 도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도덕정치는 춘추시대의 현실정치에 발을 들이기가 어려웠다. 공자는 다시금 벽에 부딪혔다.
철환주유 13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와 강론과 집필에 몰두하다
이때 계강자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는데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마침내 공자를 노나라로 부른다. 공자는 고향땅인 노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공자 나이 68세.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와 집필에 몰두했다.
계강자는 冉求, 子貢, 有若을 대표로 파견하여 예를 갖추어 공자를 후하게 영접하였으니, 애공 11년(서기전 484년) 공자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를 끝내 등용하지 아니하였고, 공자 또한 말년의 나이에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며 집필에만 몰두하였다.
공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역사기록을 정리하였고(書:후대에 尙書 書經이라고 일컬음), 禮에 관해 기록하였으며(中庸에 따르면 禮儀三百편과 威儀三千편을 지었다고 했으나 그 양이 워낙 방대한지라 한나라 때에 禮記로 간추려져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노래 3천여 편을 모아 지나치게 음란하거나 어지러운 내용들은 깎아내고(刪詩, 산시) 생각함에 삿됨이 없는(思無邪, 사무사) 시 311편을 정리하여 詩를 편찬하고, 음악을 바로잡았으며(樂經으로 전해지지 않음), 후학들을 위해 易을 해설하였다.
공자는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韋編三絶, 위편삼절] 易을 읽었지만 문왕과 주공이 지은 글에 더 이상 손댈 수 없음을 깨닫고, 후학들을 위해 상세히 설명을 붙이니[述而不作] 이것이 十翼傳(십익전)이다. 공자의 十翼傳으로 완성된 周易은 황하문명의 철학과 함께 유학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역작들을 완성해가면서 공자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이 날로 많아졌는데 공자에게 배운 제자들을 대략 3천여 명으로 꼽는다. 그중 六藝인 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에 능통한 제자가 72명이다. 이들을 ‘身通弟子(신통제자) 72인’이라 한다.
春秋筆法(춘추필법)을 낳다
공자는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혔다(西狩獲麟, 서수획린)는 소식을 듣고 최후의 역작인 춘추를 짓기 시작했다. 노나라 隱公 원년(서기전 722년)부터 시작하여 哀公 14년(서기전 481년) 봄 西狩獲麟까지 12公 242년간의 역사를 정리하고는 자신의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붓을 놓았다. 이로부터 후대에서 죽음으로 인해 붓을 놓는 것을 獲麟絶筆(획린절필), 麟筆(인필)이라고 한다.
맹자의 말을 빌린다면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사설과 폭행이 또 일어나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는 자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 있으니 공자가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으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나를 알아 주는 것도 그 오직 춘추이며 나에게 죄를 묻는 것도 그 오직 춘추일 뿐이다(子曰知我者도 其惟春秋乎며 罪我者도 其惟春秋乎인저 - 맹자 등문공 하편 제9장)”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라 춘추는 역사를 평가하는 한 지표가 되었으며, 春秋筆法(춘추필법)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다.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히다(西狩獲麟, 서수획린)
공자 夢奠(몽전)하시다
이듬해 스승을 그림자 같이 따르던 子路가 위나라 蕢聵(괴외)의 내란에 휘말려 전사했다. 子路는 孔門十哲의 한 명으로 武勇에 뛰어났으나 무모함으로 인해 가끔 공자에게 책망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품이 호방하면서도 솔직하여 공자와 가장 마음이 통했던 제자로 꼽힌다. 괴외의 난으로 자로가 죽임을 당하여 소금에 절여졌다는 얘기를 듣고 이후 공자는 일체 젓갈을 잡숫지 않으셨다고 한다.
때론 실의와 좌절의 방랑세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불굴의 공자도 天命에 불려가니 73세였다. 노나라 哀公 16년(서기전 479년), 周나라 역으로 4월 己丑일이었다. 돌아가시기 7일 전에 공자는 두 기둥 사이에서 祭物을 받는 꿈을 꾸셨다. 이에 공자의 죽음을 夢奠(몽전)이라고 하는데, 『예기』 단궁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공자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진채 마당을 거닐면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허물어지려는가? 철인이 시들어 떨어지려는가?(歌曰泰山其頹乎아 梁木其壞乎아 哲人其萎乎아)” 노래를 다 부른 공자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마주보고 앉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子貢이 노래를 듣고 “태산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장차 무엇을 우러를 것이며, 들보가 허물어지고, 철인이 시들어 떨어진다면 우리는 장차 무엇을 따를 것인가? 선생님께서 곧 큰 병이 나실 것 같구나(泰山其頹면 則吾將安仰고 梁木其壞하고 哲人其萎하면 則吾將安放고 夫子殆將病也라)”라고 탄식하며 빠른 걸음으로 선생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너는 왜 이리 늦게 왔는고? 丘는 殷나라 사람이다. 내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제물을 받더구나. 세상에 밝은 임금이 일어나지 아니하셨으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높여줄까? 나는 곧 죽을 것이라(賜아 爾來何遲也오 …丘也는 殷人也라 予疇昔之夜에 夢坐奠於兩楹之間이라 夫明王不興하시니 而天下其孰能宗予오 予殆將死也라).”고 하셨다. 그리고 병상에 누우신지 칠일 만에 돌아가셨다.
당시 노나라 哀公은 弔辭를 통해 “높으신 하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고 또한 한 늙은이를 남겨 두시어 나 한 사람이 재위에 있는 것을 지켜주지 않으시는구나, 외롭고 외로운 내가 오랜 병에 있으니, 아아, 슬프도다. 니보여! 진실로 법삼을 바가 없도다!(公誄之曰旻天不弔하사 不憖遺一老하시고 俾屏余一人以在位로다 煢煢余在疚하니 嗚呼라 哀哉로다 尼父여 無自律이로다)”며 공자를 잃은 슬픔을 표했다.
이 弔辭를 본 子貢은 섭섭함이 앞섰다. “군주께서는 노나라에서 돌아가시지 못하겠구나! 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를 잃으면 어두워지고 명분을 잃으면 어그러진다고 하셨으니, 이미 뜻을 잃어 어두워졌고, 실수에 어그러지게 될 것이라. 살아서는 능히 쓰지 않고, 죽어서 弔辭를 했으나 예가 아니고, (천자만이 쓰는) 一人이라 칭함은 명분에도 맞지 않으니 군주는 두 가지를 잃었도다(子貢曰君其不沒於魯乎로다 夫子之言曰禮失則昏하고 名失則愆이라하니 失志爲昏하고 失所爲愆이라 生不能用하고 死而誄之하니 非禮也요 稱一人은 非名也니 君兩失之로다 - 『춘추좌전정의』 애공16년편).”고 하였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의 슬픔 속에 오늘날 山東省 曲阜의 孔林에 장사지내니, 제자들은 마치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心喪三年을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르기에 服喪三年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마음으로 삼년상을 치른다는 뜻이다. 心喪三年이 끝난 뒤 제자들은 각자의 길을 떠났으나 자공만은 공자의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을 더 侍墓(시묘)살이를 하였다. 제자들, 스승의 몽전(夢奠)에 心喪三年하다.
한편 공자의 행단강학을 洙泗之敎(수사지교) 혹은 洙泗之學(수사지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공자가 산동성 곡부 곧 수수(洙水, 곡부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와 사수(泗水, 곡부의 남쪽으로 흐르는 물)의 부근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족과 후손
공자는 19살에 基官氏(기관씨)와 결혼하고 1년 뒤 아들을 낳았다. 이때 이미 공자는 박학다재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소문은 궁궐까지 전해져 노나라 군주인 昭公이 득남을 축하하며 잉어를 보내왔다. 공자는 은혜에 감격하여 아들 이름을 잉어라는 뜻의 鯉(리)라 짓고, 첫째를 뜻하는 伯(백)자에 고기 어(魚)를 넣어 字를 伯魚라 하였다. 공자는 伯魚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다. 그 딸은 제자인 公冶長(공야장)에게 시집보냈다(子謂公冶長하시되 可妻也로다 雖在縲絏之中이나 非其罪也라하시고 以其子로 妻之하시다 : 공자가 공야장을 이르시되, “가히 사위 삼을 만하도다. 비록 옥에 갇혀 있으나 그 죄가 아니라.” 하시고, 그 자식을 시집보내셨다. - 公冶長편 제1장).
伯魚의 얘기는 季氏편 제13장에 나온다. 공자의 자식은 얼마나 좋은 가르침을 받을까 하고 궁금히 여기던 陳亢(진강)이 백어에게 물었다.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는가(子亦有異聞乎)하는 물음에 백어는 “아니라. 일찍이 혼자 서 계시거늘 鯉가 종종 걸음을 치며 뜰을 지났더니, ‘시를 공부했느냐?’ 하시기에 ‘아닙니다.’고 하였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이로써 말하지 못하리라’고 하시거늘, 鯉는 물러가서 시를 배웠노라.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시거늘, 鯉가 종종 걸음을 치며 뜰을 지났더니, 말씀하시기를 ‘예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아닙니다.”고 대답하였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이로써 서지 못하리라’고 하시거늘, 鯉는 물러가서 예를 배웠노라. 이 두 가지를 들었노라.(未也로라 嘗獨立이어시늘 鯉趨而過庭이러니 曰學詩乎아 對曰未也로이다 不學詩면 無以言이라하시거늘 鯉退而學詩호라 他日에 又獨立이어시늘 鯉趨而過庭이러니 曰學禮乎아 對曰未也로다 不學禮면 無以立이라 鯉退而學禮호라 聞斯二者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진강이 물러가면서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나를 물어 셋을 얻었으니,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가 그 아들을 멀리함을 들었노라.(陳亢이 退而喜曰 問一得三하니 聞詩聞禮하고 又聞君子之遠其子也라)”고 하였다. 聖人의 자식에 대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伯魚는 공자보다 앞서 갔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지 1년만이었고 伯魚의 나이가 50살 되던 해였다. 伯魚의 아들이자 공자의 손자인 伋(급)이 바로 중용을 지은 子思이다.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안연을 잃고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天喪予, 天喪予)’고 통곡했던 위대한 스승 공자, 아들을 먼저 잃고 아버지로서의 비통함을 겪었던 공자, 시대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위대한 유산을 남긴 공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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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상 단순히 봉건시대 지배이념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황하문명권의 정치역사와 관련한 오해와 편견의 대표적인 사례는 소위 '봉건시대'라는 용어다. 유교문명권의 나라들이 서구의 침탈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식민지 국가들의 봉건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근대화가 뒤처진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시대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국이나 한국은 자신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중국 공산당은 유교를 봉건시대의 인습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보고 한때 심하게 탄압했으나 지금은 복원과 복구를 넘어 부활시키고 있다(제8강 참고). 반면에 한국은 여전히 조선시대와 유교(유학사상)에 대해 봉건시대의 지배이념으로 단정하고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는 자신의 봉건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앞서(참고부록1) 유럽 지식인들의 공자 칭송에서 보듯이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봉건시대에는 중화문명권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서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아시아보다 먼저 부국강병을 이룩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거꾸로 서구의 봉건시대가 아시아보다 더 나은 시대였다는 평가 또한 지배적이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가 심하다.
우리는 식민지를 겪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유달리 서구가 더 우월하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무참히 짓밟았다. 자신의 역사와 전통마저 부정하면서까지 오로지 영어와 미국식만을 최고로 여겨 맹목적으로 쫓아갔다. 그 덕분에 엄청난 실적을 이루긴 했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공동체 규범이 붕괴되고 마침내는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가 되는 등의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2016년)이 터졌을 때 당시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회답변에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원종 실장이 쓴 ‘봉건시대’라는 용어야말로 앞서 거론한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라는 이미지로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즉 이원종 실장은 ‘봉건시대(조선왕조)’는 군주가 법치를 초월해 제 맘대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시대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인이나 관료계, 경제계를 비롯해 대부분이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야말로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짓밟고 無知한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발언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이후 전개되어온 한국의 정치권력의 행태로 보아 이들이 조선시대의 정치권력 행태보다 퇴행적이고 후진적인 면에서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낫지 않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정병석, 2016년)를 보면, 봉건시대인 조선시대에 현대 민주주의 시대보다 더 나은 국정운영 제도가 있었음을 잘 밝혀 놓았기에 간략히 살펴본다.
“조선은 정책결정에서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한 개방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 모든 권력을 독단적으로 행사하도록 방치하지 않았고 권력의 견제와 분산을 위한 여러 제도를 갖추었다.
① 임금은 매일 편전에 나가 의정부, 육조판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예문관, 승정원 관료들과 만나 주요한 정책을 토의하고 결정했다. 이 논의 기구를 常參(상참)이라 불렀다. ② 輪對(윤대)라는 회의는 (왕이) 매일 다섯 명 이내의 6품 이상 문관과 4품 이상 무관을 관청별로 교대로 만나 논의하는 기구였다. ③ 次對(차대)는 (왕이) 매달 여섯 차례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고급관리와 전직 관료들을 만나 정책건의를 듣는 회의였다. ④ 왕이 매일 치루는 經筵(경연)에서는 유학경전을 공부하면서 현안 정책을 토론하였다. ⑤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올리는 上疏(상소)는 어전회의에서 다루어졌다.
이렇듯 봉건시대의 조선의 정치제도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들이 다양한 채널로 정책 협의를 거듭하는 체제였다. 즉 (근대국가의 민주정치제도 못지않은) 원할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치제도였다.”(『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161쪽에서 발췌) ☯
출처 : 『論語 大觀』2019 출간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읽었읍니다 군자불기 기욕난량이란 가르침을 실천하기힘든 세태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