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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맥원조] 튀김닭발원조 "영동슈퍼"가맥-28년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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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전주여행 스크랩 전주 호남제일성 풍남문에서 객사까지
튀김닭발원조 영동슈퍼가맥 추천 0 조회 62 12.08.24 15: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천교에서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  풍남문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본다.

 

 

저멀리 전주를 상징하는 옛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의 옆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풍남문 주위는 차가 복잡하게  다니고 있어서 가까히 가지를 못해서 정문을 담지 못했다.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

이 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1905년에 동, 서, 북문은 철거되고  지금은 이 문만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제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洪樂仁)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문 현재의 모습은  1980년 옹성과 함께 복원하였으며 문 안쪽으로는 '호남제일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성이란 현판은 1842년(헌종 8)에 부임한 감사(監司)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라고 한다.

 

 

「풍남」이란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漢)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위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심에 단아한 성문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풍남문은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측문루(重層門樓)의 팔작지붕이다.

일반적인 성문건축과 같이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양측에는 포루와 종각이 있고,

 석축기대(石築基臺)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하층 내부에 앞뒤 두줄로 4개씩 세운 고주(高柱)가 그대로 연장해서

상층의 변주(邊柱)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둥구조는 한국 문루건축에서는 드문형식이다.

하층 전후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한 공포 하부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객사를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특이하게 지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구경도 할겸해서 풍남문 시장쪽으로 걸어서 객사까지 가기로 하였다.

 

 

가다가 전라감영과 전주관아 표지석이 눈에 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전라감영은 전남북과 제주도를 통괄했던 관아로 옛 전북도청으로 쓰던 건물자리가 옛 전라감영터다.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은 목조건물로 1951년 폭발사고로 불에 타 없어졌다.

선화당은 옛 전북도청사 본관 건물 뒤에 있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정확한 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옛 도청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회화나무만이  시멘트건물에 둘러싸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풍남문 시장 끝까지 가니 큰길이 나오고 객사길이 보인다.

그 왼편으로 눈을 돌리니 도심에 단청을 한 큰 한옥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전주 풍패지관(객사, 보물 제583호)

조선초기에 세운 객사는 전주를 찾아온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주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걸어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곳에서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

 

 

주관의 현판에 쓴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풍패」는 중국 한(漢)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비유한 말이다.

현판글씨를 쓴 이는 명나라 재상을 지낸 주지번으로 주지번이 어린시절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표옹 송영구 선생이

 자신을 도와준 일을 잊지못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그를 찾아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남긴 현판이다.

풍남문 이라는 이름도 풍패의 남쪽 문을 뜻한다. 전주부성의 서문도 패서문이었다.

 

 

 전주객사는 1473년(성종 4)에 전주서고를 짓고 남은 재료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주관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붙어져 있다.

 툇간에는 툇마루를 깔았으며 칸마다 띠살문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있다.

 

 

 서익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지붕집으로, 건물이 주관에 붙어 있는 모습이다.

 

 

원래는 전주부성 안에서 가장 직지인 감영(이전 도청자리)의 북쪽에 넓은 대지에

주관과 그 좌우에 동익헌 . 서익헌 .  맹청 . 무신사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1914년 북문(고사동 문화의 광장-옛날 역전 오거리)에서 남문에 이르는 관통도로의 확장공사로

 좌측의 동익은 철거되어 오랫동안 주관과 서익만 남아있다가 1999년 동익을 복원하였다.

 

 

서익현은 낮은 막돌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위에 공포를 올린 주관과 흡사한

 주심포집이다. 공포는 외일출목으로 헛첨차를 내어 행공첨차를 받치고,

살미첨차는 그 끝이 날카로운 앙서[仰舌]로 되어 이익공(二翼工)집같이 보이기도 한다.

 

 

서익현의 평면은 양통집으로 중앙에 3칸의 넓은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정면 1칸과 측면 2칸의 방을 배치하였으며,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뒤로 돌아가서 서익현에서 바라본 모습

 

 

뒷쪽으로 돌아가서 바라본 주관 건물에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그러나 동익헌과 서익헌에는 문이 나 있다.

 

 

태조 이성계의 본향을 상징하는 풍패지관, 전주객사는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객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또한 가장 큰 현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객사 앞마당 서쪽 뜰에는 수직사 건물이 남아 있다. 이곳은 객사의

 경비와 관리 엄무를 맡은 관원들이 거처했던 건물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객사는 전주를 찾은 여행객이나  

전주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쉼터로서도 사랑을 받고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가는 날도 객사 툇마루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아 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러나  시민 각자가 훼손하지 않고   관리도 잘 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객사 옆으로는 전주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객사길이 있다.

이곳은 이름은  고풍스러워도  젊음이 넘치는 그런 길이었다.

 카페, 식당, 옷가게,  노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볼거리가 많은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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