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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장>
2 그들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
3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라고 명하리니, 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고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도록 지으신 것이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니,
5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
6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리라.
7 불경스럽고 늙은 부녀자들의 꾸며 낸 이야기들을 버리고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8 몸의 훈련은 유익이 적지만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여 현재와 미래에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하느니라.
9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10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함이니 그분은 모든 사람들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주이시니라.
11 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
12 아무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13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
14 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 예언에 따라 너에게 주어진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15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이 일들에 전념하여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
16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
'마지막 때'(the latter times)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인데 "마지막 날들"(last days)(딤후3:1-7)이라고도 묘사됩니다. "훗날들에"(latter days)라고 표현하지 않고 바울은 라오디케아 시대가 아닌 A.D.100년 이후 어느 때에나 해당되게 언급합니다. 그것은 신약이 완성된 A.D.90년 이후 어느 때라도 해당합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계시된 신약의 믿음 안에 있는 진리 전체를 말합니다. 믿음의 근본 사항(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중 몇 가지에 의문을 가진 것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체계 전체'를 언급합니다.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데 신약 교회를 흉내낸 마귀의 신부 교회(로마 카톨릭)가 제시하는 구원을 위해 지켜야 하는 교리들을 포함합니다. 카톨릭 성직자들은 로마카톨릭 체제에 속한 사람들에게 성직자 계급에 순종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가르치는데 그 거짓 교리를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많은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영들과 마귀들은 종교 분야를 관장하는 악령들(적그리스도의 영)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분이 아닌 숭배 도구를 통해 상징화시키는 일(미사 포도주와 빵, 십자가와 성상, 성화)을 주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핵심적인 마귀들의 교리들은 계시록에 몇 가지 고유 명사로 제시되어 있는데 "발라암의 교리"(계 2:14), "니콜라파의 교리"(계 2:15), "이세벨의 교리"(계 2:24)로서 발라암의 교리는 이방인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반유대주의 교리이며 니콜라파는 카톨릭 성직 계급, 이세벨의 교리는 "하늘 여왕 숭배(성모 마리아)와 카톨릭 체제에서 행해지는 독신 성직자들의 많은 음행들"과 관련 있습니다. 이들 하나하나는 전부 로마 카톨릭과 깊숙히 관련있고 신약 시대에 차례로 등장했다가 대환란 때도 나타납니다.
2 그들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
3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라고 명하리니, 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고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도록 지으신 것이라.
2절, "양심이 화인을 맞아", 카톨릭 교회 안에서 종교 생활하며 계속 머물면 "선한 양심"(딤전 1:19)이 파괴되는데 인간의 양심에 어긋나는 죄악들을 교리로 가르치지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미사 의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는 것을 구원의 교리로 가르칩니다(화체설). 그들은 십계명이 유효하다 하면서 우상숭배 금지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성상과 성화들을 경배합니다. 그들은 교황이 여느 죄인과 마찬가지로 구세주가 필요한 줄 알면서 교황들이 하는 말이 성경과 마찬가지로 권위있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로마의 권세자들의 국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카톨릭"(범우주적) 교회라고 상상하며 그곳에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두셨다고 어거지로 고백합니다.
3절,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라고 명하리니",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교리를 성직자의 의무 사항으로 명시해서 실행하는 집단을 지적하는 것인데, A.D.65년 당시에 로마 카톨릭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사도 바울이 가리키는 대상은 분명히 로마 카톨릭 독신 성직제도입니다.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곳은 로마 카톨릭이고 안식교도 율법 때문에 음식을 삼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독신 사제 제도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동방 정교회(Orthodox)는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삼가하라는 교리는 있지만 동방 성직자들은 결혼합니다. 결국 이런 이단교리를 둘 다 실행하는 곳은 정확히 로마 카톨릭입니다.
4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니,
5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
4-5절,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니"(행 10:11-15), 신약 성도가 음식에 대해 정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면 버리지 말고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채식에 적합한 위를 갖고 있고 채소가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체질에 따라서 선호하는 음식은 다릅니다. 안식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레위기 11장을 지키도록 만들려고 분주하지만 우리는 율법 하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지된 것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음식을 정결케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느니라.”고 하시니라(마 15:11).
6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리라.
7 불경스럽고 늙은 부녀자들의 꾸며 낸 이야기들을 버리고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8 몸의 훈련은 유익이 적지만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여 현재와 미래에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하느니라.
9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6절, 어떤 음식과 기호식품이 명백히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실 게 아니라면(술, 담배, 마약 같이 유해한 것들)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에 따라 그것을 먹고 마시기 전에 하나님께 거룩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해 자유를 누립니다.
7절, "불경스럽고 늙은 부녀자들의 꾸며 낸 이야기들"은 늙은 부녀자 메리 베이커 에디의 "크리스찬 사이언스", 늙은 부녀자 엘렌 화이트의 "안식교", 늙은 부녀자 에밀리 캐디의 "유니티", 늙은 부녀자 마담 블라바츠키의 "신지학"(교령, 접신) 등이 해당됩니다.
또 현대 로마 카톨릭의 예언들은 공중에 나타난 불경스러운 여인들(파티마, 루르드의 마리아)이 지시한 마귀적인 것들입니다.
8절, "몸의 훈련은 유익이 적지만", 몸의 훈련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유익이 적다고만 했습니다. "몸의 훈련"은 올림픽 선수촌에서 땀흘리며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이나 축구, 농수 선수들의 훈련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몸을 훈련할 시간이 있을 때 단련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9:26-27). 바울은 일생 아팠고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일생 분주히 일하며 운동 선수보다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고전 9:24-27).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경건함에서 오는 유익은 현재의 생명 뿐 아니라 다가올 생명에까지 유익합니다. 경건함은 모든 문제로부터 지켜 줄 수 있습니다. "경건"은 영에 씨를 심게 하는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함이니 그분은 모든 사람들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주이시니라.
11 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
12 아무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13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
14 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 예언에 따라 너에게 주어진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15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이 일들에 전념하여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
16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
10절, 칼빈주의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 구절이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제한적 속죄"와 "무조건적 선택"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그리스도는 "선택된 백성들"만의 구세주라고 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의 구세주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선택된 자들을 말하지 않는데 본문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믿는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기만 하면 즉시 "믿는 사람들" 부류로 들어가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십니다.
여기서 두 개념을 분리해 적용해야 하는데, 하나는 "속죄"(atonement), 다른 하나는 그 속죄의 "적용"(application)입니다.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 속죄가 죄인 개개인에게 적용되자면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입니다. 그분의 피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요 1:9, 29). 제한적 속죄라는 말은 신학적 공상과 철학이 결합된 신화이고 성경은 그런 개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감당하는 것은", 참된 성경적 기독교는 "치욕을 먹고 자라는데", 우리가 마귀의 종교들에 동의하지 않는 한, 즉 교황과 주교들, 힌두교 구루, 모슬렘 이맘, 달라이 라마가 가르치는대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착한 사람이 되라"는 유치한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는 한 세상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위협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나 형제들아, 만일 내가 지금껏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느냐? 그랬더라면 십자가의 거침이 그쳤으리라(갈 5:11).
12절,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가령 이십대의 젊은 목사가 산전수전 다 겪은 회중들 앞에서 목자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회중들 앞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3). 본이 된다는 것은 견본, 실례가 된다는 말로서 살전 1:7, 살후 3:9에도 나와 있습니다.
1. 말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경을 가르칠 때 본이 되어야 합니다.
2. 행실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방식과 예절에 있어(벧전 3:2-4, 갈 1:13) 본이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하는데 목사는 편협한 마음을 품지 말고 개인적으로 잘못한 사람과 모욕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4. 영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에 대한 태도, 양무리, 박해, 만나는 문제들, 성공, 승리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5.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것, 믿는 자들에게 주실 유업을 기도 가운데 주장하는 것, 성경에 발견되는 약속들을 주장하는 것,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등을 보여줘야 합니다.
6.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딤전 5:22).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더러움을 피해야 합니다.
13절, "읽는 것과", 사역자는 성경을 읽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시 119장, 신 11:18-21). "권고하는 것", 회중의 결단을 이끄는 법, 회심, 통회하는 자를 초청하는 법, 거리에 나가서 설교하는 법, 열변을 토하고 사자처럼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들을 보이라(사 58:1).
"교리", 목사는 교리에 전념해야 하는데 시대와 세대들을 올바로 나눠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거듭남에 대해서,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은혜 아래 구원의 차이점을 성경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천년왕국 때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14절, "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 목사를 안수할 때 선임들이 안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습은 사도행전 14:23에 나와 있는데 이것은 "계승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음으로 "권위"가 옮겨진다는 옛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신 34:9). 죄도 이렇게 옮겨지고(레 1:4; 4:15), 그러나 안수하는 일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고 자격을 검증한 후에 해야 합니다(딤전 3:10).
15절, "이 일들을 묵상하고", 은사, 읽는 것, 권면하는 것, 교리를 "묵상하고", 여기에 전념해서 집중해야 하며 그만큼 헌신되어 있어야 합니다(고전 16:15).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고(롬 12:1-4)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드려야 합니다. 순서는 항상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헌신하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는 이 순서를 지키며 그러면 "계속해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행 6:4).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 "너의 진전"은 라오디케아 사역자들이 가르치는 성공적 목회의 증거(거대한 교회 건물, 자선사업들,기독교 학교, 병원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진전"은 개인 구령의 열매들, 거듭난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기도 응답, 회심자들이 증가하는 것, 지역 사회가 복음으로 뒤덮이는 것 같은 것입니다.
16절,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교리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 자신입니다. 이것은 "인격"(personality)을 먼저 함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욕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여기서의 "구원하리라"는 것은 영원한 형벌을 면하고 하늘 나라에 갈 것이라는 의미의 그 구원이 아닙니다. 디모데가 자신을 올바로 유지하는 데 주의하고 자신의 믿음을 올바른 상태로 두는 데 주의하는 것을 계속 한다면 디모데는 자신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믿음 안에 건전하게 살 수 있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고린도전서 9:26-27, 롬 12:7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어지는데 어떤 사역자들의 사역이 온전하다는 것(골 3:17)과 그 회중의 영적 건강이 양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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