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대기 ##### #708090 ######### ■ 성정기의 천재성 베토벤의 부모는 요한 판 베토벤(1744~1787)과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1744~1787)이며, 그의 이름은 첫째인 루트비히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한때 콜로뉴 선거후이자 대주교인 바바리아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궁정의 악장 이였던 할아버지인 루트비히(1712~1773)의 이름을 따랐다. 베토벤은 1770년 본의 콜로뉴 궁정음악가 집안에서 아버지 요한의 일곱 자녀 중 에서 둘째로 태어났으며, 단지 그와 두 동생만이 살아남았다.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생일은 확실치 않고, 그의 가족은 12월 16일을 생일로 기념한다. 본 궁정악단의 테너로 있던 요한은 그의 아버지만큼 재능이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던 악장 자리를 넘볼 처지가 아니었다. 가족을 거느리고 수입이 변변치도 않은데도 요한은 곧잘 술에 빠져있었다. 그는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다.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아버지는 이를 이용하려 들었다.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와 어깨를 겨룰 신동은 아니었지만, 1778년 3월 26일에 이미 첫 연주회를 가질 정도 였으므로, 아들의 재능이 남의 눈에 더욱 두드러지도록 나이를 6살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베토벤의 최초의 스승은 그의 아버지 요한 이였으나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느낀 그는 아들에게 좀더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자 궁정에 있는 친구 음악가들에게 눈길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궁정악단의 테너이자 여러 악기를 연주하던 파이퍼(Tobias Pfeiffer)가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베토벤의 이종사촌으로서 훗날 궁정음악가 되는 로바티니(Franz George Rovatitni)와 프란츠 리스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이 때 아버지와 파이퍼는 저녁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자고 있던 아들을 깨워서 아침까지 연습시켰다 전한다.(하지만 최근 들어서 아버지 요한이 그의 자식들에게 펼친 음악교육에 대한 긍정적인 재조명 작업이 서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러다가 베토벤은 11살 때 중학교를 중퇴하고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그 전해(1780)에 파이퍼가 본을 떠나고 1781년에 로바티니가 사망하자, 아버지가 선택한 베토벤의 스승은 파이퍼와 함께 본에 왔다가 1781년에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하던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1748~98)였다. 네페는 바흐의 신봉자였으며, 그는 베토벤에게 특히 바로크 대위기법과 피아노 즉흥연주에 대한 기법을 전수했다. 그 밖에 네페는 1783년에 함부르크에서 출간되는 크라머의 <음악 매거진(Magazin der Musik)>에 베토벤이 작곡한 몇몇 작품의 출판을 의뢰하며 어린 베토벤이 바흐의 평균율을 얼마나 잘 치는지 소개하는 유명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이 키보드 변주곡 모음은 현재 WoO 63[WoO:Werk ohne Opus Nummer(작품 번호없는 작품)이다] 베토벤은 네페에게 입은 은혜를 숨김없이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편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한통에는 베토벤이 네페에게 자기의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는 대목이 있다. 「하느님이 제 예술의 발전을 위한 선생님을 통해 내려주신 그 많은 충고에 감사 드립니다. 만약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그 성공은 선생님 덕택이라 믿습니 다.」 네페 자신도 1783년 3월 2일자 크라머의 <음악 매거진>에서 베토벤이 지금까지와 같이 성장하면 틀림없이 제2의 모차르트가 되리라고 단언했다.
젊은 베토벤의 재능이 본에서 크게 주목을 받게 되자 스승인 네페는 본이라는 좁은 바닥에서 그의 재능을 꽃피울 수 없음을 꿰뚫어보고,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려고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4년 뒤인 1787년에 발트슈타인 백작의 후원으로 모차르트를 만나 피아노 레슨을 받으려고 빈으로 떠났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연주에 한 번 격찬을 보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베토벤은 노자가 떨어져 돌아오는 길에 아우스부르크에서 돈을 벌어야 했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으며 집안 살림은 참담했다. 그가 16살이 되던 1787년 7월 17일에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알코르중독으로 직장을 잃어서, 그는 두 동생을 돌봐야 되는 가장이 되었다. ■ 빈으로 이주 그 후 1792년에 다시 선거후의 장학금과 함께 본으로 유학하여 하이든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모차르트에 사사하려던 그의 꿈은 모차르트가 1년 전에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이때 그의 후원자인 발트슈타인 백작은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에서 받아오다”라는 유명한 기념문을 작성해준다. 빈에서 그는 순식간에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살리에리(A. Salieri)에게서 이탈리아 가곡의 성악예술을 그리고 알브레히츠베르거(J.G. Albrechtsberger)에게서 대위법을 배운다. 베토벤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다. 「 이 세 사람의 스승은 모두 베토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공부태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동일한 의견 이였다. 베토벤은 언제나 고집불통이었으며 , 자기 스스로 만족 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몇몇 사항에 대해서는, 이전에 결코 수 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 던,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경험을 통해서 습득해야할 정 도 였다.」 1793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의 대가로 그 명성을 확고히 하였고, 1794년에 베토벤은 칼 리히노프스키 공작에 살면서, 공작이 매주 금요일 오전 중에 여는 연주회에서 많은 연주자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감사의 뜻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3 중주곡 세트, Op.1>을 비롯한 몇 곡을 바쳤는데, 1795년에는 공작의 보조금으로 아르타리아사가 출판하여 123명의 예약자들이 241부를 샀다. 이 무렵에 베토벤은 그 이전의 대부분의 작곡들이 교회나 귀족들을 위해 일해왔던 종속적인 삶을 과감히 버리고, 년금과 귀족들의 후원금 및 기부 연주회, 연주, 레슨 그리고 작품의 판매수입등으로 살아가는 자유 작곡가로서의 생활 패턴을 확립했고, 그의 생애 동안 줄곧 지켜왔다.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그의 음악을 좋아했으나 그를 쉽사리 도우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킨스키 공작, 로프코비츠 공작 및 리흐노브스키 후작등의 후원자에 의존하였으나, 이 후원자들이 사망하거나 약속한 후원금을 내지 않게 되어서 빚을 지게 되었다. 1807년에는 로프코비츠 공작의 권고로 제국극장의 작곡가에 지원하였으나 새로 극장의 운영을 맡은 귀족으로부터 거절당하자 그는 빈을 떠나려 했다. 그러던 중에 1808년 가을에 악장으로 오라는카셀의 베스트팔렌왕 제롬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동생)의 제의를 받자 고민하다가 결국 받아드려 빈을 떠나려 했다.
이해 12월에 열렸던 테아테 안테르 빈에서 열렸던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과 환상곡을 직접 연주했는데, 그 평이 좋지 못하자 베토벤은 주위 사람들의 동기에 점차 의심을 품고 자기는 음모의 희생자이며, 빈에서 강제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수많은 그의 팬들이 베토벤의 위협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크게 놀랐고, 의논한 결과 베토벤이 빈 또는 오스트리아 영토 안에 머무른다면 한 평생 연금을 주기로 뜻을 모았다. 1809년 3월 1일 베토벤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으며, 로프코비츠와 킨스키 두 공작 그리고 베토벤의 제자 루돌프 대공이 서명하였는데, 매년 연금은 4000 플로린으로 결정 되였다. 그러나 루돌프 대공만 정해진 날짜에 연금액 중의 자기 분담금을 지급하였을 뿐이며, 킨스키 공작은 계약 직후에 곧바로 장교로 군에 입대한 후에 낙마하여 사망하였고, 로프코비치 공작은 1811년 9월까지 지급한 후에 중단해 버렸다. (1809년 말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 이후에는 아무런 후원자도 없었고, 오직 작품의 판권과 1815년 이후부터 나온 소액의 연금에 의존 했다. ■ 성격 베토벤의 사생활은 고난스러웠다. 그는 점차 귀가 들리지 않게 되자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베토벤은 성을 잘 내었으며, 정신병 증세와 납 중독 때문에 20대부터 시작된 만성 복통에 의한 신경과민성에 시달렸다. 베토벤의 생활양식은 그가 실제로 처한 상황보다 훨씬 검소했다. 베토벤은 그의 집주인과 자주 다투었고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해야만 했다(빈에서의 25년간 23번이나 이사함). 그가 어떠한 상태로 방을 쓰고 있었는지 알만하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절약했지만, 친구들에게는 평생 동안 결코 인색하지 않아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말년에 그가 청각장애등으로 고생할 때 친구들은 서로 앞 다투어 그를 도왔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그는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몹시 경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피아노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서로 잡담을 한다거나 그의 연주에 집중하지 않으면 연주를 중단하곤 했으며, 또 야간 연주에서 계획에 없이 갑자기 연주를 청하면 그는 거절해 버렸다. 이런 일이 주주 일어나자 결국에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에게는 통상적인 궁정예절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 연애 베토벤은 서로 ‘자네’라 부르는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브룬스비크 백작의 사촌 여동생인 줄리엣타 귓차르디(1784~1856)를 17살부터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뜨거운 사랑에 빠져 <월광>소나타를 바치고 결혼을 약속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그녀는 귀족과 결혼하였다. 이 후로 베토벤은 일생동안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불행했고, 1822년에 헤어지게 되자 그녀는 다시 베토벤에게 돌아오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또 다른 기록에 남은 연애사건은 1805년부터 시작된 다임 백작의 미망인인 요세피네 브룬스비크(1779~1821,브룬스비크 백작의 누이동생)이다. 베토벤은 그녀를 깊이 사랑해 왔으나 1799년에 그녀의 어머니가 다임 백작의 아내로 보내 버렸다. 그러나 베토벤의 우유부단함과 귀족인 요세피네 집안의 반대로 1807년에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다. 1812년에 베토벤은 세통의 연애편지를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에게 보냈다. 몇몇의 수신자가 거론되지만, 아마도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1780~1869) 일 것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알려져 있다. 베토벤은 이 다정한 친구에게 <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Op.120을 바친바 있다 ■ 후견인 싸움 1815년 11월에 베토벤의 동생인 칼 안톤 카스파르가 죽으면서 자기 아들 칼의 후견인으로 베토벤과 자기 아내 요한나를 지정하는 유언을 남긴다. 그런데 단독 후견인이 되려던 베토벤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자기에게 유리한 온갖 법률을 끌어대어 제수와 싸웠다. 긴 법정 투쟁 기간 동안에 베토벤은 작곡을 중지하고, 자기의 명예가 걸린 후견인 소소에 매달렸다. 당시 오스트리아 법원제도는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여, 귀족은 각 주에 공통되는 보통법원 그리고 평민은 관할구역의 민사법원에서 소송을 처리했다. 베토벤은 오스트리아의 폰(von)과 같이 네델랜드의 판(van)도 귀족에 속한다며 보통법원에 회부한 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승소한다. 그러나 제수인 요한나가 불복하여 다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베토벤의 부주의로 평민들의 법정인관할 민사법원으로 이송되어 요한나에게 패소한다. 그러자 베토벤은 다시 제소하여 완전한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조카 칼은 베토벤의 돈은 기꺼이 받으면서도 베토벤의 사랑은 거부하는 배은망덕한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1826년에는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베토벤은 칼을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 주웠다. ■ 질병과 사망 조카 칼의 후견인 자격을 잃은 베토벤은 의기소침하여 감기에 걸려 1826년 12월 1일 빈에 있는 그의 거처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수종이 생기고 12월 20일에는 위에 물이 고여 1월과 2월에도 했던 물을 뽑아내는 수술을 했으며, 182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번이나 물을 뽑아 내었다. 그의 병병은 간경변이였다. 그의 사후에 그의 죽음에 대해 빈의 병리학자이며 법의학 전문가인 라이터(빈 의과대학 법의학과 과장)는 베토벤의 내과의인 바우루흐가 부주의로 베토벤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주장도 있으나, 믿을만한 의학적 기록자료가 없어, 하나의 가설로 남아있다. 장례식은 3일 뒤 오후 3시에 있었다. 빈에서 거행된 장례식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였다.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 앞 광장에는 2만 여명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의 관은 가운데 마당에 놓여졌다. 1812년 베토벤이 린츠에서 4 개의 트롬본을 위해 작곡하고, 자이프리트가 “불쌍히 여기소서”의 가사를 붙였던 3 곡의 <에쿠알리>중 하나를 합창단이 노래 불렀다. 8명이나 되는 악장들이 그의 관을 메었고, 그 속에는 베토벤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아내와 함께 바이마르에서 달려온 훔멜이 섞여 있었다. 횃불잡이에는 슈베르트, 뵘, 체르니, 슈판치크, 홀츠, 그리고 조사를 쓴 그릴파르처도 들어 있었다. 베링의 묘지 안에서는 연주나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어 있어, 배우 안쉬츠는 하는 수 없이 묘지 입구에서 그릴파르처의 조사를 읽었다. 몇 년이 지나는 사이에 무덤이 황폐해져서 결국 그의 유골은 1888년 빈의 중앙묘지에 이장되었고, 그 보다 한해 뒤에 숨을 거둔 슈베르트와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 신념과 음악에 미친 영향 베토벤은 계몽주의의 이상과 당시에 유럽에서 태동하여 점점 성장해가고 있던 낭만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민주 공화정의 이상을 견지하려는 줄 알고, 그에게 교향곡 제3번 영웅(Eroica/heroic)을 헌정하였다. 그러나 1804년에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분명해지자 그는 제목이 적힌 페이지를 잡고 보나파르트란 이름을 세차게 찢어내 종이에 구멍이 뚫렸다 한다. 후에 그는 그 제목을 “한 위인의 추억을 기념하기 위한 영웅적 교향곡”이라 붙이고, 그것을 그의 궁정에서 최초로 연주했던 후원자인 프란츠 요셉 로브코비츠에게 다시 헌정하였다. 제9번 교향곡의 4악장은 실러의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텍스트로 하여 정교한 합창으로 특색 있게 그려냈는데, 그것은 인류의 형제애를 옹호하는 낙관적인 찬송가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제4악장의 합창부분을 편곡하였고, 유럽회의가 1972년부터 유럽국가로 선포하였으며, 1985년에는 유럽공동체의 국가로 채택 되였다. 학자들은 베토벤의 신앙에 대해서는 서로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다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프리메이슨 이였다고 주장한다. 베토벤은 그 이전의 작곡가인 헨델과 마찬가지로 교회나 귀족의 궁정에 영구적인 고용직 보다는 연주회와 작품을 출판자에 의한 작품의 출판 수입 및 부유한 귀족들의 후원금으로 살아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였다. ■ 음악 베토벤은 고전음악의 거장들 중의 한사람으로 종종 전통적 고전음악의 전형인 “세명의 B"(Bach, Brahms and Beethoven)중의 하나로 불린다. 또한 그는 18세기 고전주의에서 19세기 낭만주의에 걸친 중추적인 인물로, 후세의 작곡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 개략 그는 긴 작품에서 악장간의 일관성을 이루기 위해 주제의 모토 또는 주요동기(germ-motifs)를 체계적으로 사용한 르네상스 이후의 최초의 작곡가이다.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여러 작품에서 되풀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소스 모티프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장르에서 혁신을 일으켰는데, 예컨대 그는 종전의 잘 결정화시킨 론도형식에 신축성을 가미하여 소나타형식에 더욱 근접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기타 소나타(바이올린 등), 현악사중주, 기타 실내악, 미사곡, 오페라 및 가곡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작곡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을 작곡함에 있어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를 계승했으나 그 구조를 확장하거나 한층 느슨하게 함으로서 점점 동기의 전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 음악의 세 시기 베토벤의 음악의 시기는 초기, 중기 및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이 분류에 의하면 초기는 1802년까지로 베토벤이 당대의 음악 언어와 장르를 습득하고 점차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중기는 1803년부터 1814년까지로 새로운 차원의 드라마와 표현성을 통해 엄청난 대중성을 획득하는 시기이다. 1815년경부터 1827년 세상을 뜰 때까지의 후기는 점점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연주하기도, 듣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음악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초기(고전시기)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히는 시기이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처음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역시 보통 초기 현악 사중주곡으로 불린다), 처음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든다. 여기에는 비창(Pathétique)과 월광(Moonlight) 소나타도 포함된다. 중기(영웅기)는 서서히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투쟁적인 면모를 나타내는 대규모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3번부터 8번까지의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들,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Waldstein)과 열정(Appassionata)을 포함), 또 크로이처(Kreutzer)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있다. 후기(낭만기)는 1815년경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할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9번 교향곡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 밖의 이 시기 다른 작품으로 장엄미사(Missa Solemnis), 마지막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후기 현악 사중주곡, 여기에는 대 푸가(Grosse Fuge)도 포함)과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함머 클라비어(Hammerklavier)와 마지막 세 소나타가 유명하다)가 포함된다.
<>아래 참조 개작 1.Wikipedia 번역 2. 그라우트,"서양음악사" 제7판(하),pp.27~47
베토벤의 Best 10 『박준용 <세상의 모든 클래식>,pp.85-102 에서』 1. Symphony * Nos. 3,5,6 &7 (제1악장 + 제2악장) * No.9 (제4악장) 2. Piano concerto * No. 5 <황제> * No. 3 & 4 3. Violin concerto in D,op.61 4. Triple concerto : Concerto for Piano,Violin and Cello in C,op.56 5. Piano sonata * No.14 in c#,op.27,no.2 "Moonlight"(월광) * No. 8 in c ,op.13 "Pathetique"(비창) * No.23 in f ,op.57 "Appassionata"(열정) 6. Sonata for violin and piano,No.9,op.47 "Kreutzer"(크로이처) 7. 레오노레 서곡 (Leonore Ovrture) _ 유일한 오페라 작품 "Fidelio" 의 서곡인데 공연이 실패할 때 마다 서곡을 다시 작곡하여 모두 4개가 되었다. - 처음 3곡: “레오노레 서곡” 제1번,제2번 및 제3번 & 마지막 : ‘피델리오 서곡“ 8. String Quartet (현악사중주) No.13,op.130 9. Egmont Overture,op.84 10.Missa Solemnis(장엄미사) in D,op.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