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의 창건 연혁
■ 창건
근대 제주불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관음사는 이처럼 신비로운 영산 한라산의 동쪽 기슭 아미봉
(蛾眉峰)에서 태동했으며, 1908년 해월굴에서 기도를 시작한 봉려관(蓬廬觀, 1865~1938)스님에
의해 창건되면서 부터이다.
안봉려관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지극한 신통력을 믿고 남은 생을 부처님 품안에서 살기를 발원,
출가 삭발을 결심하고, 1907년에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에서 12월 8일 성도절을 맞아 유장스님을
온사로 하고 청봉(靑捧)스님을 계사로 하여 산중에서 성대한 수계식을 치렀다.
출가한 이듬해인 1908년 봄 제주시 화북으로 돌아와 불사를 계획하여 같은 해 10월에는 지금
해월굴에 터를 잡고 백일간 관음기도를 시작으로 기유년(1909)음력 4월 8일, 김석윤 스님과 함께
초가 법당으로 관음사를 창건했으며, 경술년(1910)에는 경상남도 통영 용화사에서 용봉화상과
안도월 스님이 불상과 각 탱화를 이운해와 관음사에 봉안하였다.
이듬해인 병진년(1911)에는 서울에서 불경을 수 백권을 구입하여 왔고, 일본 오사카에서 금종을
가져와 일체의 병발이 완비됨으로 점차 근대 제주불교의 구심점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제주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초 이래 20세기
초까지 약 200여 년 간 이른바 무불시대(無佛時代: 1702년(조선 숙종) 이형상 제주목사의 훼볼로
승려도 사찰도 없는 무불(無佛)시대)로 한 때 불연(佛緣)이 끊길 위기에 처해 역사이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처럼 핍박받아온 제주불교가 새로운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됐으며, 제주도 내 다수의
사찰 창건과 불교중흥에 일생을 바쳐 제주사회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 창건 이후의 연혁
1911년 사찰령, 1915년 포교규칙이 선포되면서 일제의 보다 치밀한 감시 하에 많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창건 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관음사는 일제의 포교규칙에 따라 행정 구역상 전라남도에 속해있어 1918년 6월 11일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설치 허가를 받게 되었다.
1920년 중반까지 대흥사 주지였던 이화담 스님과 백취운 스님이 관음사 포교담당자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이시기 관음사의 활동은 중앙교단과는 별개로 제주지역 불교의 자생력에 힘입어
활동하였으며 그 배경에는 조선 불교 포교사 이회명(李晦明,1866-1952)스님의 포교활동의 영향이 컸다.
회명스님은 당시 포교사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분이며 관음사를 기반으로 제주지역
포교에 나서면서 근대 제주불교는 새로운 도약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관음사 창건 이후
급성장한 제주불교의 힘은 1924년 음력 4월 8일에 있었던 관음사 중창 낙성식에서 확실히 나타났으며, 이 행사는 근대 제주불교 역사에 한 획을 그어 놓은 일대사건이었다.
한편 이 날 관음사는 창건 초기부터 제주불교 중흥에 힘써온 안도월 스님을 초대주지에 임명했으며, 1924년 11월 제주불교협회를 창설하면서 포교활동은 커다란 진전을 했으며 1925년에는 현 제주시 중앙로에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大覺寺: 관음사를 대신하여 포교활동을 펼치기 위해 세워진 포교당)를 건립했으며, 이 같은 관음사의 포교활동은 제주불교의 질적, 양적인 발전을 동시에 가져왔다.
1936년에는 창건의 역사와 함께 초대주지 안도월 스님이 입적하고, 상좌 오이화 스님이 뒤를 이어 2대주지에 임명되어 1937년 대웅전 보타루 해월각 해탈문 이 낙성되었다.그러다가 1938년 음력 5월 28일 창건주 안봉려관 스님이 입적하고 이듬해 1939년 7월 29일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객실채가 소실되었다. 그후 1941년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을 완공 중창하였다.
1948년 제주 4.3항쟁 당시 관음사사 최대 격전지가 되어 정부의 무차별 민간인 토벌에 항의해 제 9연대 소속 하사관 11명을 포함한 병사 451명이 모슬포 부대를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그 당시 토벌대에서는 이들이 관음사에 집결하여 있다고 판단하여 토벌대 병력을 관음사에 투입 여러차례 교전하였고 그 결과 관음사를 장악한 토벌대는 1949년 2월 12일 당시 주지였던 오이화 스님을 모질게 고문하는 등, 관음사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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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30년 관음사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왼쪽부터 제2대 오이화 스님의 맏상좌인 성수스님, 장명윤, 장석상, 문성오, 김홍조스님. |
이듬해 1950년 음력 5월 25일 45세의 젊은 나이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입적했다. 스님은 살아생전 왜색불교와 구습에 물든 제주불교를 개혁하려는 혁신운동에 노력했다. 4'3 때 토벌대에 희생되었고,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의 아들마저 학련에 희생되었으며 법화사 초입에 그의 송덕비 있었는데 중창불사로 커지면서 없어져 버렸다고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관음사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인 국상원의 후원으로 그 해부터 대대적 불사를 시작으로 1937년에 대웅전,보제루,해월각,해탈문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20일 경내에 화재로 모두 소실 됐으며, 1941년 2월 5일 중건 불사에 착수 재도약에 나섰으나, 1949년 2월 12일(음 1월 15일) 군경에 의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 때에 일부 불상만 간신히 화를 면하였을 뿐 모두 소실되었다.
■ 관음사의 중창
1954년 7월 15일 제주시 도남동 856번지에 보현사 포교당을 창건하면서 재건 움직임이 시작됐으며, 1955년 4월 16일 봉불식을 거행하면서 관음사 포교당(옛 대각사)과 함께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관음사를 대신하여 시내 포교당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1962년에 관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로 지정되어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교구
본사로서의 역활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폐허가 된지 20여년이 지난 1969년에 이르러 대웅전 준공을 시작으로 복원해, 1970년 선방,
1971년 영산전, 1972년 해월각, 1973년 사천왕문, 1974년 일주문, 1975년 종각, 1978년 서향각과
삼성전을 완공하고 오이화 스님의 비석을 세워 비전을 마무리하고 1987년 제정된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1990년 6월 16일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제주의 과거와 현재가 온전히 숨쉬고 있는 한라산 관음사는 제주의 미래를 붙들고 있어, 제주불교의 버팀목 역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 관음사는 소중한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민족과 세계의 평화를 발원하기 위하여 대대적
성역화 불사를 진행 중에 있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사천왕문 앞까지 좌우와, 사천왕문에 들어서 경내까지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미륵대불과 초전법륜상의 대불이 모셔져 있다. 이와같은 성역화 불사는 현재 많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관음사 전경
일주문
사천왕문
현재의 사천왕문은 1948년 4·3사태 관계로 불타버린 것을 1973년 이재은 님의 화주로
김해정님이 시주하여 지은 것이다.
대웅전
대웅전 내부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6호
17세기 후반 목조로 제작된 좌불상으로서 관음사에 소장되어 있다.
불상의 복장유물을 보면 1698년 불상이 조성되어 전라남도 영암군 성도암에서 개금(改金)한 후,
전라남도 해남군 소재의 대흥사 남암에 봉안되었다가 비구니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1925년 대흥사의 말사인 관음사 중창을 위하여 이운(移運)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제작 수법은 17세기 후반기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단아한 형태, 부드러운 양감, 유연한 선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삼성각
삼성각 내부
미륵불과 만불상
미륵불과 만불상이 다른 각도에서 촬영
종 각
종 각(안개속에서,, )
사리탑
출처
카페: 제주불교문화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