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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때에 맞는 홈런과 안 맞는 홈런>의 줄거리:
4점짜리 만루 홈런이라고, 배팅을 동시다발로 4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솔로 홈런의 경우처럼 단 한 방을 칠뿐인데, 다만 '때'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요. 어떤 때에 발생하는지의 여부가 동일한 한 방의 가치를 하늘과 땅 차이로 벌려 놓습니다. 또한 팀이 이기고 있을 때의 만루 홈런과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의 가치는 역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때'가 가치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때에 맞은 적시타일까요 아니면 병살타의 남발에 불과할까요.
때에 맞는 홈런과 안 맞는 홈런
(전도서 3:1~22)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때에 맞는 홈런과 안 맞는 홈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때에 맞는 홈런과 안 맞는 홈런’
사실 야구에서 홈런은 때에 맞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홈런은 좋습니다.
그런데 이 홈런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솔로 홈런이 있고 2루 홈런, 3루 홈런, 만루 홈런도 있습니다. 똑같은 홈런 한 방인데 솔로 홈런은 1점이고 주자가 꽉 찬 상태의 만루 홈런이라면 4점이 나옵니다. 여기에 더해 만루 홈런은 가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팀이 7대 0으로 이기는 상태에서 만루 홈런을 쳤을 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7대 0이나 11대 0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미국의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는 추신수 선수가 메이저리그 통산 세 번째 만루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4대 3으로 이기고 있는 가운데 터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지고 있는 가운데 역전 만루 홈런이었다면 가치는 더욱 높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지고 있는 상태에서 9회 말 홈런이었다면 이 값어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정도가 됩니다.
또한 영국에 있는 손흥민 선수가 멀티 골을 넣을 때가 있습니다. 한 게임에서 두 골이나 넣었대서 찾아보니 상대 팀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 넣는 것보다는 무조건 좋지만 큰 감흥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고 있다가 한 골을 넣어 동점으로 만들고, 또 후반전이 끝난 다음 로스 타임에 한 골을 더 넣어서 역전승을 했다면 그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벌어지는 때에 따라서 그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때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7장 31~32절에서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울어야 할 때에 웃고 있고, 웃어야 할 때에는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칠 때에는 울어야 할 때였지만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은혜의 시간에는 웃어야 할 때인데 울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누가복음 23장 28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고 4장 9절에서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때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처럼 때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시작해서 ‘때가 있다’라는 말이 28번 반복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라는 말은 모든 일에는 이루어질 적당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는 말도 같은 말인데 천하만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천하’라는 말이 ‘하늘 아래’라는 말은 맞습니다. ‘만’이라는 말은 ‘모든’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뜻이 앞에서 본 범사의 ‘사’가 의미하는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사의 ‘사’는 히브리어 ‘헤페츠’라는 단어로 ‘기쁨이나 즐거움’을 뜻합니다. 즉 ‘천하 만사’라는 말은 ‘하늘 아래의 모든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모든 기쁨에는 다 때가 있나니’라는 말이 됩니다.
1절을 다시 번역해보면 보다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범사에 때가 맞으면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즐거움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때가 맞지 않으면 어떤 일도 기쁨과 즐거움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본 전도서 1장 3절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헛됨을 강조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용도가 변경 될 때에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가치를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용도변경을 시킵니다. 그러나 세상가치는 절대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해 아래의 일들은 사업이든 자녀이든 마음 채움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비록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이라도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을 치듯이 때만 잘 맞추면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령 울더라도 때를 잘 맞추면 그것이 즐거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 아래의 모든 일의 때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9~10절을 보면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기껏 때를 맞추면 기쁠 수 있다고 해놓고는 일하는 자의 수고가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수고는 하지만 전혀 때를 못 맞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거두기도 하고 거두지 않기도 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통곡하기도 합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면서 때를 맞추지 못하니 모든 일들이 헛수고로 지나갑니다. 울더라도 합당한 때에 운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웃더라도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를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살면 살수록 헛된 수고만 늘어갑니다. 거둘 때에 거두고 놔둘 때에 놔두고 앉아 있을 때에 앉아 있고 갈 때 가고 머물 때에 머물러야 하는데 때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맞출 것이냐가 됩니다.
홈런에는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홈런이라도 솔로 홈런은 1점이고 만루 홈런은 4점입니다. 만루 홈런이라도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과 순조롭게 이겨가는 도중에 일어난 만루 홈런은 가치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나 생각과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때를 맞출 때에만 만루 홈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홈런이면 다행이겠지만 때를 못 맞춘 대부분의 일들은 병살타로 끝나버립니다. 즉 때를 맞추기만 하면 똑같은 말이라도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이 세상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를 맞추기만 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지으셨으니 우는 것조차 때에 맞으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때를 못 맞추면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열매도 없고 헛된 수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시종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대신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제2의 창조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업을 하도록 하셨다면 나는 사업의 시작과 끝을 모릅니다. 그런데 사업 중에 때를 따라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도록 예비하셨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사업장에서 사업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업 진행의 계획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고 그 시작과 끝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알맞은 말과 행동을 위해서는 영원을 사모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고 있을 때에 사업장에서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예비하신 계획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때로는 울어야 될 일일 수도 있고, 혹은 웃어야 될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이루어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극단적으로 세상기준대로 망했다는 상황이 벌어질지라도 그것이 아름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사업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작업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업이 망하면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의 때임을 안다면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영원을 사모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때에 맞춰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때에 맞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녀의 형통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배우자를 대할 때에 서로에게 기대하고 사모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배우자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할 때에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때에 적합한 것이 됩니다. 배우자 앞에서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과 같은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때가 어긋나면 배우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영원을 사모함으로써 배우자에게 기쁨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때를 맞춘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2000년 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당면한 시점이고,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당면한 시점입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을 사모하는 자들을 향해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이 지금이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에서 ‘구원’은 지금 구원을 받는 것이고, 내일도 지금 구원을 받으며 모레도 지금입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는 약속의 티켓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영원을 사모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도 때를 맞추라는 말입니다.
지금 돈이 없습니까? 자녀가 말썽입니까? 암에 걸렸습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때가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대출을 받고, 자녀를 비싼 학원에 보내고, 이 병원 저 병원에 뛰어다닐 때가 아니라 지금은 바로 영원을 사모해야 할 때입니다. 걱정이 되는 이유는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돈이나 자녀의 형통 혹은 건강 등의 일시적인 세상가치들로는 마음은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 중에서 무엇을 추구하더라도 그 일시적인 것들조차도 때가 어긋나버리고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오직 헛수고만 하는 삶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지금은 영원을 사모할 때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면 지금의 형편은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 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구약에서 상번제가 드려졌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더라도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스스로를 죽은 자로 여겨야 했습니다. 이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는 마음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영원을 사모하는 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먼 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일지라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를 기억하며 농사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농부는 많은 추수로 기뻐하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성전에서 죽는 어린양과 동일시하며 지금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겠노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주시므로 농사를 아름답게 해나가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의 때는 지금 하늘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모할 때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우리의 마음은 영원을 사모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 이 땅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 상태가 구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는 동안에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계획하신 일들이 때를 따라 정확하게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처럼 기가 막히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영원을 사모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주님과 더불어 갖게 되면 내 입과 생각과 판단과 행동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장갑이 됩니다. 이 놀라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금 제게 허락하신 처지가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영원을 사모할 때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주어진 세상에 대해 날마다 죽음을 시행하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자답게 마음이 하늘로 가게 하셔서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게 해주시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일들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가나안 복지의 삶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