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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머무는 느낌 | 간드레 시 03
이윤학 (지은이) 간드레 2024-07-31
기본정보
116쪽 120*205*9mm 180g ISBN: 9791197155956
주제 분류
책소개
시집을 다 읽고도 고개를 들 수 없다. 작은 틈이라도 내어달라,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들숨과 날숨 사이가 너무 좁다. 여느 시와 같이 편안하게 시를 읽을 수 없다.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묘사와 이미지로 현재화(現在化)한 이윤학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곁에 머무는 느낌』이 간드레 시 03번으로 출간되었다. 풍경이 말하는 시, 풍경의 연구가, 풍경의 투시자, 숙명적인 상실의 독을 말갛게 걸러낸 치유의 시집. (박형준 시인) 그의 시는 카메라 렌즈를 갖다 댄다. 조리개를 돌린다. 낱낱의 잠자고 있던 사물이 언어에 의해 되살아난다. 단어 하나, 한 문장도 함부로 쓰이지 않고, 그냥 스쳐 가는 법이 없다. 마치 시인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쓰인 듯한 시는 정체불명의 뜬금없는 어휘나 문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와의 고군분투는 오직 언어와 결탁하고, 언어와의 대면 속에서 시어의 조탁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집중하고, 문장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묘사의 힘이 이런 것인가. 시인은 굳이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눈으로 본 것만 치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묘사로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럴 때 시는 그림이 되고, 사진이 되고, 풍경이 되고, 한 사람의 처절한 삶의 장면으로 프린팅된다. 거기 시가 존재하고, 시가 완성되기까지 그는 시인으로서 존재한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 보고자 하는 그것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감촉으로 당신을 건드리는 듯할 때, 또한 보는 방식 그 자체가 일종의 감각적인 접촉일 때, 그리고 보는 것이 거리를 둔 접촉일 때,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거리를 둔 접촉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미지며, 매혹은 이미지에 대한 정열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세계의 내면으로 은둔해 우리를 그곳으로 끌어당기고...... 이 공간은 말하자면 절대적인 공간인데...... 그것은 이미지의 배후에 있는 무제한적인 깊이이다...... 물체들이 의미에서 멀어져 이미지 속으로 무너져내릴 때, 물체들은 바로 이 깊이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매혹의 장소에서 우리가 보는 것, 그것은 시선을 붙들고 그 시선을 끊임없는 것으로 만든다.” -모리스 블랑쇼
이윤학 시인의 시가 위의 문장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 이미지 글쓰기. 이미지로서 의미를 숨겨두는 방식,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이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의미가 되는 방식. 그러므로 그의 시는 자세히 관찰하듯 집중해서 읽어야 이미지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루시제(祭)/ 거기 앉은 섬/ 철둑/ 집 근처 수목장/ 내륙 등대/ 웃는다/ 메밀들길/
소한(小寒)/ 장엄한 상고대/ 흑장미 꽃꽂이/ 꽃기린/ 엄동(嚴冬)/ 소국(小菊)/ 아직,
파란, 밤송이/ 가을 저녁 빛/ 꽃씨 받는 사람/ 가는잎오이풀, 꽃피다
2부
초록 잉크를 기억해요/ 갓길/ 원형 돔 하우스/ 퍼걸러/ 대숲/ 파리는 왜 촛농에
빠지는가/ 혼인관계증명서/ 뻐꾸기 날다/ 장박(長泊)/ 종점낚시 민박/ 심방(尋訪)/
고개를 끄덕거린다/ 째깐한 코스모스들, 피어난 새시/ 목을 조이는 잠이 찾아와/ 한낮의 태양은/ 원형 탁자 깔판 유리/ 웃는다 2/ 졸망제비꽃
3부
서부 –부루쌈/ 서부 –뱃머리 슈퍼/ 서부 –미정/ 서부 –오디/ 서부 –모과/ 서부 –사
철나무 열매/ 서부 –댓잎에 폭설/ 서부 –댓잎에 폭설 2/ 서부 –풀새밭/ 서부 –붉은
벽돌집/ 서부 –폐다리/ 서부 –정금/ 서부 –살구꽃/ 서부 –옴(싹)이 난다/ 서부 –밑
불/ 서부 –두더지/ 서부 –사슴농원/ 서부 –돼지감자꽃
4부
수선화/ 바다제비/ 부엉이/ 붉은 구름/ 캠핑/ 맨드라미/ 스토커/ 스트라이크 존/ 첫 장미/ 칠면조 목울대/ 요새/ 타구(唾具)/ 사금(砂金) 채취 동호인/ 솔숲이 보이는 단독/ 너구리/ 그리마/ 방음/ 진공상태/ 배추 뿌리/ 붉은 매화
에필로그 l 호수의 한 점 섬에서
책속에서
너는 나를 온전히 나로 지켜내는 의지의 발로였지 내가 어쩌지 못할 아픈 신경세포였지 언제나 과분한 현재 사랑이었지 둘이 가고 싶어 안달한 미래의 여름 수국 핀 언덕의 전망 좋은 전원주택지였지 접이식 카약을 주문해야겠지 돌아앉은 섬 앞으로 접이식 카약의 뱃머리를 몰아야겠지 두 손으로 잔물결을 몰아내는 기도를 드려야겠지 밤마다 거기 앉은 섬을 보고 와 눈을 붙여야겠지
-「거기 앉은 섬」에서
초배지(初褙紙) 발린 벽에 걸린 사진 액자
유리 안에 들어간 빛을 태운 원이 번지지
번갈아 떠오르는 갈아 끼운 사진
사라진 커서가 뒤로 밀리는 밤이 있지
턱관절이 오도독뼈를 씹는 밤이 있지
사지(寺址)의 별빛과 마주친 밤이 있지
-「내륙 등대」에서
불러오는 배를 감싼 여자가
감꽃 아래 등받이 벤치에 앉는다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린 여자가
책을 펼친다 천사는 얼굴을 감추고
얼핏 웃는다 압화 책갈피를 쥔 여자가
책장을 넘긴다 천사는 얼굴을 감추고
죽은 사람 애를 가진 여자가 웃는다
-「웃는다」에서
누구도 감당 못 할 사람이라
그는 샛강 변 갈대 부들을 눕히고
번들거리는 몸으로 울부짖었다
-「소한(小寒)」에서
현재와 과거는 같이 산 세월에 지나지 않았다 나 같은 게 어디 또 있을까 싶었다 그는 자책하는 사람이었다 저지른 만큼 소유하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내 눈빛을 내가 볼 수 없었다 물그릇 얼음을 쪼아먹는 닭과 핥아먹는 개 사이에 끼어 그는 혼잣말하였다 들이 분 술이 깨지 않는 아침나절이었다 잡목숲 풍절음 마를 갈던 전처의 속울음도 섞여 지나가고 있었다
-「엄동(嚴冬)」에서
당신도 나도 어디론가 떠나
다시 한번 활짝 피어날 때
어디서 본 듯 어디서 본 듯
고개를 갸웃거릴 날 있겠지요
결국엔 생각이 안 나
이 세상까지 못 미쳐
다시 꿈을 꿀 때까지
꿈을 꾸듯
어딘가를 보고 웃겠지요
-「꽃씨 받는 사람」에서
우는 사람 눈을 비벼준
사람은 아직 없다 하였다
이 세상에 올 수 없는
어떤 사람을 대신해
눈을 비비며 우는 사람
곁을 지키고 있다 하였다
-「가는잎오이풀, 꽃피다」에서
그녀는 또다시 태엽을 감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도금이 벗겨진 시계추가 안으로 햇살을 꽈 감는 한낮 복숭아 핵할(核割)의 열매들 닭의장풀 숲에 떨궜다 뻐꾸기 울면서 날았다
-「뻐꾸기 날다」에서
손차양한 남자 미루나무 잎 사이 바글거리는 빛의 소용돌이 죽은 엄마 자궁 같은 물웅덩이 살진 송사리 떼 바라본다 말을 붙여볼 데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째깐한 코스모스들, 피어난 새시」에서
이 세상의 중심에는 그녀의 방 책상
원형 스탠드가 있었다 그녀의 방 동향의 쪽창 흙벽을 따라
서로 엇나가 피는 흰 접시꽃들 벌써 귀천(歸天)한 그녀의 방
쪽창 밑을 기웃거렸다 흰 접시꽃대들 끝까지
꽃봉오리를 달고 흔들거렸다
-「서부 –미정」에서
언제부턴가
들숨의 언어를 사용하였지 하룻밤
둥지를 찾아 날개를 펴는 일이 잦았지
그때는 손아귀에 우물을 쥐고 다녔지
이 세상 못지않은 내면을 갖고 있었지
(…)
그는 늘 고독한 사람이었지
이 세상에 남은 쾌감
그의 몫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지
-「붉은 구름」에서
한결 희어진 침대보를 털어 너는 그녀의 허벅지 높이로 시추 수컷 입김을 뿜는다 새벽까지 침대보와 이불 홑청을 삶아 빠는 결벽과는 상관없이, 전원주택 단지 샛강 물안개 속으로 유성이 꼬리를 감춘다 웃자란 잔디정원에 멈춰선 그녀의 기도 소리 이어진다 이슬방울을 맺은 잔디꽃 수술들 허파 꽈리로 들어가 번지면서 떨림을 전도한다
-「솔숲이 보이는 단독」에서
누군가의 방충망 모눈 칸을 벌려줘야 할 때가 있지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밤 신음을 먹는 사람이 있지 등 돌릴 시간을 통증이 먼저 알아채는 밤이 있지
-「방음」에서
낡은 SUV 차량에서 내린 노인 부부
붉은 매화가 맞는다
허물어진 흙집 뜯어낸
작년 이맘때도 그랬다
집터 양옆에 자리한 붉은 매화
열매가 없다 하였다
열매가 없는 꽃이
각혈한다 하였다
집터를 갈아엎은 노인 부부
복합비료를 시비하고 두둑을 만들었다
검은 비닐을 씌우고 구멍을 뚫었다
붉은 매화가 지고 찾아온 노인 부부
조로에 도랑물을 길어와 구멍에 부었다
올해도 제대로 거두지 못할 참깨 모종을 심었다
얼마 뒤면 참깨 꽃이 피어날 것이었다
장마 지나가면 살진 비둘기 참깨를 쪼므로
떼로 몰려올 것이었다
끝까지 전향 안 한 사상범이
말년에 돌아와 잠깐 살던 고향 집이라 하였다
-「붉은 매화」에서
추천글
그의 시는 삶의 비애를 노래하지만, 우리를 어떤 슬픔 속으로 금방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 풍경 속으로 삶 속으로 서서히 이끌려간다. 그리고 삶의 풍경 속에 가라앉아 그 낱낱의 모습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다. 감정적으로 되지 않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자신과의 대치 속에서 시인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밀어내었겠는가. 마치 이성의 극단까지 가서 쓴 시 같이 그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감정을 배제한다. 자신의 시적 자산을 내걸고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이 느껴지는 문장. 함부로 책임 없이 남발하지 않는 문장 속에서 오래 글을 써온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시는 마치 철심을 박은 듯 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부드러워서 말랑말랑한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그의 시가 무척 따듯하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유머까지 곁들인다. 풍미가 장난이 아니다. 시적 표현으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묘사의 관점에서 쓴 시는 세계관이 따듯해서 우리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을 따듯한 시선으로 연민으로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만큼 시인의 세계관은 따듯하되, 그가 얼마나 묘사로서 이미지를 불러오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사물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그 자신이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시집 전편에 흐르는 따스함에서 알 수 있다.
-윤희순
저자 및 역자소개
시인.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그림자를 마신다』『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나를 울렸다』『짙은 백야』『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곁에 머무는 느낌』, 산문집『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장편 동화 『왕따』『샘 괴롭히기 프로젝트』『나 엄마 딸 맞아?』 등을 썼다. 김동명문학상 지훈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동국문학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 2022년 김동명문학상, 2017년 지훈문학상, 2014년 불교문예작품상, 2008년 동국문학상, 2003년 김수영문학상, 1997년 대산창작기금,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최근작 : <곁에 머무는 느낌>,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 총 00종
이윤학(지은이)의 말
묵정밭을 갈아엎고
뭉텅이 흙을 고르고
온돌방에 들어왔다
고정창을 통해
그런대로 꼴을 갖춘 밭뙈기를 바라보았다
몸집이 작은 새부터 날아들더니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용히 먹이를 쪼아먹었다
젖은 흙이 말라가고
비로소 기름져 보이는 밭뙈기에도
어둠이 내렸다
자리를 옮겨 다니는
새들이 남았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는 더는 연인이 아니니
연인의 눈빛을 상상하는 밤이 있지”
부재(不在)라는 존재(存在)의 흔적을 마주할 때
함께 가고 싶던 돌아앉은 섬 앞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는 묘사의 힘. 그 초자연적 신비를 보존한 시가 여기 있다.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 2021) 이후 3년여 만에 펴내는 이윤학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곁에 머무는 느낌』이 간드레출판사 시집 시리즈 ‘간드레 시 03’번으로 출간되었다. 자연과 일상의 이미지를 초월적인 언어로 옮겨내는, 이제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묘사의 시인 이윤학은 이번 시집을 통해 죽음의 끝에서 삶을 되살리는 경이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4부로 나누어 73편의 시를 실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상실이 꼭 유실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차원에 있을 뿐이며 그리움이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젠가 함께 목격했던 ‘거기 앉은 섬’을 확인하러 노 저어 가는 일. 그리하여 당신과 나는 영원한 이별이 아닌 영원한 동경 속에 머무른다.
1부. 상실과 그리움
블라인드를 걷고 슬라이딩도어를 접어 열었지 새벽 어스름의 정원에 엎드린 거위 한 쌍 잔설의 섬이 보였지 반 아름의 뽕나무 밑 자갈이 드러난 맨땅에 엎드려 서로의 날개에 머리를 맞교환한 엊저녁의 일을 알아차리곤 하였지 (중략) 너는 나를 온전히 나로 지켜내는 의지의 발로였지 내가 어쩌지 못할 아픈 신경세포였지 언제나 과분한 현재 사랑이었지 둘이 가고 싶어 안달한 미래의 여름 수국 핀 언덕의 전망 좋은 전원주택지였지 접이식 카약을 주문해야겠지 돌아앉은 섬 앞으로 접이식 카약의 뱃머리를 몰아야겠지 두 손으로 잔물결을 몰아내는 기도를 드려야겠지 밤마다 거기 앉은 섬을 보고 와 눈을 붙여야겠지 땅굴을 파고 들어앉은 당신 문을 열고 나와 눈 감고 입 다물고 바위에 앉을 때까지, 초혼(招魂)의 피아노 연주 이어갈 수 있겠지 -「거기 앉은 섬」
장편 소설의 막장을 쓰는 당신/ 한쪽 눈을 상상하는 밤/ 비 그친 사지(寺址)의 별빛이 있지// 여분의 눈이 있다고/ 상상해 보는 밤이 있지// 긴 머리를 말아 올려/ 볼펜 비녀 꽂은/ 당신의 뒷모습이 있지// 초배지(初褙紙) 발린 벽에 걸린 사진 액자/ 유리 안에 들어간 빛을 태운 원이 번지지/ 번갈아 떠오르는 갈아 끼운 사진/ 사라진 커서가 뒤로 밀리는 밤이 있지/ 턱관절이 오도독뼈를 씹는 밤이 있지/ 사지(寺址)의 별빛과 마주친 밤이 있지// 우리는 더는 연인이 아니니/ 연인의 눈빛을 상상하는 밤이 있지 -「내륙 등대」
우리는 모두 생의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을 품고 있다. 그 섬은 “…나를 온전히 나로 지켜내는 의지의 발로”인 ‘너’가 존재하는 곳이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삶의 위로, 노스탤지어이자 그리움의 실체가 머물러 있는 너라는 섬은 나를 나로 살아가게 하는 물결이 된다.
만약 어둠이 깊어져 그 섬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방황할 때 “비 그친 사지(寺址)의 별빛”이 내려앉은 내륙 등대가 추억을 잃은 모든 존재를 기억으로 회귀하는 빛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2부. 온기 어린 시선
꽃사과가 익어가는 935번 지방도/ 딸내미가 짰지 싶은 벨벳 모자를 쓴 할메/ 전동스쿠터 뒷자리에 영감을 태우고 간다/ 중절모를 쓴 영감 할메 어깨께 인견 블라우스/ 살짝 쥐고 간다 약 타러 도립병원에 간다// 커브길을 돌아 나온 덤프트럭/ 쌍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친다 잽싸게 할메 허리를 감고/ 찰싹 등에 붙은 영감 꼼짝하지 않는다/ 벨벳 모자 날아가 굴러가다 멈춘다// (중략) // 시내버스 비상등 켜고 멈춘다/ 선글라스를 끼고 내린 버스 기사/ 할메 벨벳 모자를 주워 씌워준다// 공터에 전동스쿠터 세운 버스 기사/ 할메와 영감을 부축해 태운 버스 기사/ 고마 걱정 붙들어 매고 있으소/ 이따 요기 내려줄 꼬마/ 룸미러로 뒷자리 바라본다 -「혼인관계증명서」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점은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의 모습 등 사랑의 대상을 위해 타자화되는 인물에 대한 연민이다. 둘 중 하나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온전함을 극대화시키며 그리움의 간극을 보여준다. 이윤학은 때로는 능청스럽게, 때로는 집요하고 진득하게, 그리움의 옹이가 된 간극을 예리한 시의 언어로 메꾸어준다. 「혼인관계증명서」에서 전동스쿠터에 올라탄 노부부의 안정감과 틈 없이 밀착된 관계를 시인은 따듯한 시선과 유머로 그리고 있다. ‘룸미러’로 바라보는 노부부의 모습은 삶의 뒤란으로 밀려난 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꽃사과처럼 서로의 향기가 되어준 세월의 깊이를 담아낸다.
염색한 지 한참 지난 당신의 반백 머리 원형 탁자 깔판 유리에 볼을 대고 눈을 감았다 얼음이 언 저수지 약방 가는 지름길 얼음장 속에서 머리를 치받았다 서둘러 출구를 휘저어 찾는 손길 무뎌졌다 무녀리가 된 마음 나가 죽지 못한 마음 원형 탁자 깔판 유리에 달라붙은 당신의 웃는 모습 도착할 때까지 깔딱 숨을 쉬었다 -「원형 탁자 유리 깔판」
원형 깔판 유리가 얼음장이 되어 그리움이 투과될 때 그 반대편에 맺힌 상은 무녀리가 된 사랑의 대상이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맞대 보고픈 차가운 뺨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린 자에겐 현실마저도 얼음의 도가니 속임을 깨닫게 한다.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대상을 시인은 원형 탁자 깔판 유리를 매개로 표현하며, 죽음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데칼코마니와 같은 만남을 성사시킨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삶을 기억하듯이 시인은 처절한 몸부림과 같은 사랑의 열병을 삶이 끝난 데에서 수면으로 실어 올린다.
3부. 서부에서의 관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몸인 풍경
낮 전 밭일을 마치고 하우스/ 적부루를 뜯어 샘에 앉아 씻은 부부/ 쌈을 싸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밥상을 물린 부부 대청마루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곯아떨어졌다/ 부룻잎 따이고 입가에 침이 고였다// 적부루 물기를 털어내듯/ 마당에 빗방울 떨어졌다// 처마 및 풍경(風磬)/ 나일론 끈에 묶였다/ 제자리를 맴돌았다 -「서부 -부루쌈」
3부는 서부 시편으로 채워졌다. 시인의 고향인 충남 홍성의 서부와 현재 생활 공간인 안동의 오지 서부, 얼마 전까지 살았던 가평의 산골 마을 서대길이 시공을 초월해 혼재하는 장소이다. 3부의 첫 시는 시인의 부모님이 젊었을 적 한순간을 찍어 뒀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인화해낸 작품이다. 힘을 내려놓고 쓰는 한 줄의 묘사에 꽉 들어찬 풍경은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정감이 있어 허기진 추억에 침이 고이도록 한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젖병을 흔들어 물렸다/ 우유를 빠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어주었다/ 잠이 든 아이를 안고/ 마른걸레를 집어 들었다 평상에 떨어진 오디들/ 구석에 모아 두었다 강보(襁褓)에 싼 아이/ 레이스 달린 모기장 밥상보를 펴 덮었다/ 오남매 젖을 물려 키운 마누라 떠난 하늘/ 오디가 까맣게 익은 하늘 입을 벌려 마중/ 나갔다 뒤집어 들기름 두른 가마솥 뚜껑/ 솔걸에 불붙여 철질하는 소리 간장/ 불고기 굽는 냄새 마누라 산소까지/ 외길을 걸어갔다 -「서부 -오디」
슬픔의 여울목으로 남는 풍경을 옮긴 시편들은 가슴 먹먹한 통증을 전이한다. 「서부 -오디」에서 사내는 젖병을 흔들어 손자 아이의 입에 물려주고, 오남매에게 젖을 물려 키운 아내를 떠올린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아이를 돌보며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아내의 기일에 생전의 아내가 좋아한 간장 불고기를 굽는다. 이별은 모든 오감을 되살아나게 하기에 그녀를 기억하는 호흡마저도 오디처럼 새까맣게 가슴에 멍울이 되어 맺힌다.
4부. 시인의 특권이자 과업 응시.
숨넘어가는 할아버지/ 손목시계를 끌렀다/ 아버지 사타구니에/ 냅다 집어던졌다 -「부엉이」
당신에게 소중했을 손목시계가 혹시라도 유품이 될까 서둘러 아버지의 사타구니에 던진다는 이 시는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준다. 예로부터 부엉이는 부를 상징하는 새였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야말로 재물보다 더 값진 의미임을 한 시구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탁월한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사랑하는 3대 독자 아들에게 손목시계를 던져주는 아버지의 마지막 한 호흡, 그 순간에도 지나갔을 찰나의 시간은, 우리에게 남은 사랑의 순간이 이토록 간절하고도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바위 동굴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새끼 셋을 낳아 키웠다 동굴 언저리 밀사초 군락 바람이 자랐다 바위 절벽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잃어버린 새끼들에게로 먼저 간 아내 시신을 뗀마에 안치한 남자 노를 저었다 지그재그로 나는 바다제비 먹이를 채 가는 바다제비 허공을 제치며 날았다 바위 절벽 틈 밀사초 군락 땅굴에 알을 낳고 먼 바다와 둥지를 오갔다 풀꽃을 꺾어 아내 시신을 덮은 남자 가족사진을 올렸다 평생을 어부로 산 남자 노를 저었다 -「바다제비」
4부는 이전의 1부로 돌아가 시인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에 마저 힘을 싣는다. 시집의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기 반성적이며 고독하고 연민을 자아낸다. 현재(現在) 부재중인 시인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따라 읽으면 그리움은 과거가 아니며 언제나 현재화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어떤 누추한 인간일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한 생의 뜨거움이 스며 있을 거라는 사실, 그 진실을 이윤학은 관찰자이자 증인이 되어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에게 있어 사진이란 머리와 눈과 그리고 마음을 하나의 축에 놓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처럼 이윤학은 그의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하나의 축에 놓아 시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렌즈를 통해 세상으로 나온 시에선 불필요한 피사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짜임새 있고 빈틈없이 정갈하며 감동이 있다. 이윤학의 시집 『곁에 머무는 느낌』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기댈 수 있는 따스한 곁이자 흔들리지 않는 축이 되어 줄 것이다.
-성민주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목부터 곁을 내어주네요.
아름다운 시가 또 탄생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