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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5일 주일 메시지
시리즈 제목: 진리의 빛, 사도신경
4.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설교 목적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다른 내용이 없다. 사도신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속성,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속성과 추가적인 설명이 있지만 성령에 대한 다른 설명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내용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 특히 20세기 미국의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태어난 우리 교단의 경우 성령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극복하고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성령의 본질적인 역할과 사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설교에서 지난 2013년에 발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의 선교선언문을 참조하여 성령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우리가 믿고 경험한 성령
2.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
3. 성령의 사역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
4. 판데믹 시대와 성령
5. 결론
1. 우리가 믿고 경험한 성령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세 번째 주제인 성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영어로는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이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크레도 인 스피리툼 쌍툼 (Credo in Spiritum Sanctum’이라고 합니다. 모두 성령(聖靈)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성령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속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 또는 ‘당신은 귀신이 있다고 믿습니까?’ 마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사도신경에서는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 교회가 속한 순복음교단은 본래 12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그 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공부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드리던 중에 방언을 말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세례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전에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장 분명한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언을 말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순절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주여!’를 크게 외치며 기도를 드리고, 기도 중에 황홀한 상태(ecstasy)에 들어가기도 하고 입신(trance)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춤(holy dancing)이나 거룩한 뒹굴기(holy roller), 거룩한 웃음(holy laugh)이나 쓰러짐(holy slain), 경련(jerks) 그리고 환상이나 투시 또는 예언과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성령이 더 강력하게 임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증거라고 오순절 신자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는 집회가 없어졌지만 전에는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이런 체험이 매우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라고 우리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집회를 준비하면서 성령충만과 은사를 받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성령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임한다고 우리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은 순복음 교인인 우리 선배들과 우리가 경험한 성령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은 100년 전에 일어난 그 오순절 성령운동이 앞으로도 세계기독교를 이끌어갈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지금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증인이 되며, 복음이 힘있게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들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통 때문에 우리 교단에서 목회자나 장로가 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1)당신은 침례를 받았습니까? (2)당신은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까? 받았다면 그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목사가 되고 장로도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우리 교단은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 교단의 헌법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성령 세례의 증거에 대하여 규정합니다:
성령 침례(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육체적 표적으로 증거되었다(행 2:4). 사도행전은 성령 세례 시 방언을 동반하는 것이 보편적임을 증거하고 있다(행 2:4, 10:45~46, 19:6). 이 경우에 방언 말함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 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기하성 교단 헌법, 제13조]
우리 교단의 성령에 대한 설명은 사도행전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를 소개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재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강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 있듯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사도행전은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역과 활동은 성경 전체에 걸쳐 고르게 나타납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역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소개하는 성령의 역사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성령에 대하여 더 온전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
우리는 보통 성령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교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성령은 그 전부터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마 1:18, 눅 1:35).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은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위에 임했습니다(막 1:10). 예수께서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실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3:16). 사도 베드로도 훗날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므로 그 모든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증거했습니다(행 10:38).
성령이 예언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포했습니다(사 61:1). 예언자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성령이 바람처럼 불어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주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37장).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29~30
사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람의 코에 들어간 하나님의 호흡은 생명의 숨결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은 이미 수면에 운행하셨습니다(창 1:2). 그것은 이제 곧 수면 위로 올라올 땅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기다리는 비둘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역(同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마다 성령이 역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생명을 살리는 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소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들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입니까? 그 백성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받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공동번역).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충만하게 공급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이며, 예수님의 사역 목표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살펴보면 성령은 생명을 주는 영이며,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롬 8:2).
3. 성령의 사역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사역을 알아갑니다. 성령은 창조의 아침부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동역자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령을 바람처럼 불어넣으심으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이 땅에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모든 사역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예수님의 일을 이어가며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까요? 성경을 살펴보면서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며 진리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13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를 얻습니다(요 8:32). 자유는 생명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무엇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 중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웃의 비난과 뒷담화를 뒤로 하고 마을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이단의 무리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으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신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셨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며 그 나라를 상속할 주인공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성령은 무엇이 진리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들이 믿고 바라는 바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행 4:20, 31). 성령은 그들을 진리로 이끌어 깨닫게 하심으로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한때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는 등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큰 감격과 기쁨 속에 살았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의 청년들과는 달리 그때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면서 뒷담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고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고 큰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이 옳았음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죄의 결과가 사망이듯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요일 4:18).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는 두려움을 쫓아내고 사랑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생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의 후렴인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성령이 계시네’라는 구절은 ‘성령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He abides)는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시며 그렇게 하실 때마다 우리는 살아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당당함과 기쁨과 평강이 하나님 나라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롬 14:17).
이처럼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예수님도 그 백성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고 더 충만하게 누리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것은 선이며 옳은 일입니다. 반대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악이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
이 구절은 율법 조문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성령을 좇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라는 권면입니다. 율법 조문을 들고 와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살리는 길을 보이셨습니다. 할례 전통을 들고 와서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다고 반박했습니다(고전 12:13).
가문의 전통이나 부모의 체면 때문에 자녀들의 혼삿길을 막아 불행을 자초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문자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문자는 마음에 새겨진 편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그 편견이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편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녀를 살리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성령이 아니라 문자에 갇히면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그 결과는 타종교인이나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배타성을 띠게 되고, 더욱 악화되면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인 종교인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성령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4. 판데믹 시대와 성령
그러면 생명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생명의 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은 부모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모는 늘 자녀를 생각합니다. 형제들도 부모의 생명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어우러진 세상을 생태계(生態系, ecosystem)라고 부릅니다.
지난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주제는 ‘함께 생명을 향하여’(Together towards Life)였습니다. 그 선교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습니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하나님 선교는 창조행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피조세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서로 얽혀 있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사실상 생태정의,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그리고 피조세계를 존중하는 영성의 발전 등의 캠페인들을 통해 사실상 우리 교회 안에서 이미 긍정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온 피조물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인 화해된 일치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고후 5:18~19). 우리는 피조물은 버림받고 오직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피조세계와 우리의 몸은 둘 다 성령의 은혜로 변화될 것이 틀림없다. 이사야의 비전과 요한계시록이 증언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은 새로워질 것이다(사 11:1~9, 25:6~11, 계 21:1~4).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은 어디까지 미치겠습니까? 성령은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에게만 역사하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은 인간에게만 해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은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합니다. 다른 생명들 없이는 인간의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인간과 피조세계의 모든 생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사막도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만국을 살리는 생명의 강이 흐를 것이며 생명나무가 무성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참고. 사 35, 계 22:1~2). 성령의 사역이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는 것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에 역사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창조이래로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의 모든 현장에서 있었던 것처럼 장차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충만하려면 자연의 생명이 온전하고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의 생명이 멸종될 때 인간도 멸종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년 7월 19일 월요일 우리나라 법무부는 민법 98조2항의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습니다. 그 내용은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선언적인 조항으로 시작하지만 앞으로 국민들의 의식이 성숙하면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세부적인 규정들이 마련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여 더불어 살아보자는 정신을 법에 담은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일찍부터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이 사슴을 향해 활 시위를 당기기 전에, 그 사슴에게 왜 사슴을 사냥해야 하는지 멀리서 설명해주었다고 합니다.
‘작은 형제여, 너를 죽여야만 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네 고기가 필요하단다.
내 아이들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단다.
작은 형제여, 용서해다오.
너의 용기와 힘 그리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마.
자, 이 나무 위에 너의 뿔을 달아 줄게.
그리고 그것들을 붉은 리본으로 장식해 주마.
내가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너를 기억하며 너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마.
너를 죽여야 해서 미안하다. 작은 형제여, 나를 용서해다오.
보라, 너를 기억하며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태운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갇히지 않는 성령이 인디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서 생명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하신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판데믹은 지구적 차원의 전염병을 의미합니다. 이 질병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은 판데믹 시대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생명의 범위가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민족을 포함하며, 더 나아가 모든 피조세계의 생태계를 아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방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방역은 모두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5. 결론
저는 오늘 성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경험했던 성령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평가해 보았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성령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예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과 같은 것이며, 그것을 완성하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옳은 일이며 생명을 죽이는 일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이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생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이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임은 당연합니다. 그것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민법의 신설 조항을 우리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생명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뜻에 한걸음 다가가는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기를,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고백하기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천지를 만드신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에게 맡기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인 피조세계를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도우시며, 언젠가 그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성실하게 살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자기 백성이자 몸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실행하시고 장차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다짐과 행동이 없는 고백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시며,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 곧,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이어가시는 분이므로,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고백이자 다짐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돌아보며 상부상조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가 세상의 생명과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축복의 통로임을 자각하고 지역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 건설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단합니다.
성령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명을 해하는 일을 막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드립니다. 불의하고 불공정한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생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공평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더 투명하고 더 안전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약자가 더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며, 강자는 더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회는 돌보아야 할 생명의 영역을 매우 넓게 생각합니다. 성령이 생명을 주는 영이며 생명을 살리는 영이시므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하는 편견을 장애물로 여기시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장애물에는 인종적 문화적 우월의식과 종교적 교리적 배타성을 들 수 있습니다. 세계를 어지럽게 한 독일과 일본은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는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 넣은 종교전쟁은 자기 종교나 교리가 옳다는 독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일으킨 비극입니다. 문자는 생명을 죽이고 성령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리고 성령은 살려야 할 생명이 인간과 동물을 넘어 이 생명의 푸른 별 지구 전체라고 우리를 일깨워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이해하고 그 사역과 목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는 어떤 길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습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두려움을 털어버리고 이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자신의 본분을 수행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 충만의 증거는 은사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고전 12:7). 그 유익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당당하고 기뻐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령의 힘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행 1:2). 우리는 사도 바울이 권면한대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갈 5:25). 우리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엡 5:18). 우리는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간절히 기다린 제자들처럼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행 1:14).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백성을 성령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사역이 생명 살리기이며,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흘러넘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할 때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창세기 41:38
다음 주에는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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