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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풀이를 들어가면서
글쎄, 신문 게제글인 임옥균 풀이도 담백해서 좋고, 언뜻 골랐지만 논어론(신동준) 풀이 전문서도 대충 좋은 듯 싶은데, 최경열의 유투브 상의 강론 풀이가 가장 도움될 듯 하다. 최경열(논어 강론)은, 노자에 대한 글에서 매료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글쎄, 모든 게 편하고 믿음이 가고 무어랄까 정겹다. 게다가 한문풀이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같은 오리무중의 초보한테는 그저 도움이 되는 강의들.
노자, 장자 풀이할 때처럼 좌충우돌 난맥상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노자 풀이하듯이, 장자 풀이하듯이,
귀한 마음으로, 어려운 마음으로, 탐험하는 마음으로, 수천년전 스승과 제자간의 귀한 대화를 대하고자 한다.
어떤 것들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이 책에 있을까? 나는 과연 그에 얼마만치 매료될 수 있을까?
이 대화들에 기막히게 이해를 하고 적절하게 풀이를 해놓는 게 관건이 아니라,
그 대화(Analects)에 얼마나 공감하느냐 그게 유일하게 귀한 것이리라.
20편 중 3편을 풀이하고 이 글을 쓰는데, 글쎄, 아직까지는 아 많이 좋다 그런 느낌을 못받고 있는 듯.
달리 얘기한다면, 이천오백년 전 그 공자를 아직은 느끼지 못한다 할까?
그 체험의 시간, 그 시작이 지금.
9편이 좀 지루했고, 18~20편에 가서는, 글쎄, 더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다. 노자를 풀이할 때 매 장마다 설레임으로 이어졌다면, 장자를 풀이할 때 가끔씩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논어 풀이 대부분에 걸쳐 지루하다는 느낌? 다만, 가끔씩, 아 이건 정말 귀하다 했던 듯. 20편의 1장을 볼 때는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마치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접하는 느낌? 20편 2장, 3장은 급하게 마무리한다는 느낌. 아무리 봐도, 나는 공자과는 아닌 듯.
그럼에도, 논어가 이런 책이구나 하는 나름의 느낌을 받았지 않았나? 익히 들어 알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공자, 논어 관련하여 그러리라 싶었던 것들의 많은 부분이 공자가 실제 지향하는 것과 상당 부분 궤리가 있다 싶을 정도. 또한, 풀이를 통해, 공자의 그 애뜻함, 그 정성스러움을 언뜻이나마 느꼈다고 하나? 왜 공자가 동양 사고사에 있어 그리 지대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지에 대해 이제 이해할 듯.
한번의 풀이로 논어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우문에 불과하겠지만, 장자나 노자에서 느낀 것처럼, 마치 성경에서 예수의 족적에서 느낀 것처럼, 공자에게도 이리 엄청난 게 있구나 하는 인상은 분명히 각인된 듯. 줄여 말하면, 사람들이 공자, 공자하고, 논어, 논어하는 그 이유를 느끼다. 많이 정성스러운 사람, 많이 애뜻한 사람.
3. 논어 저자와 해지사항
(1)성명:공구(孔丘)(공자(孔子)). 공자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B.C. 551년이라는 설(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과 B.C.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 있다. 《논어》에는 공자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저자는 그 문하 제자들인 복상(卜商)(B.C. 507~B.C. 420?), 염옹(冉雍)(B.C. 522~?), 언언(言偃)(?~?), 증삼(曾參)(B.C. 505~B.C. 435), 악정자춘(樂正子春)(?~?), 민손(閔損)(?~?), 공급(孔伋)(B.C. 483?~B.C. 402?) 등으로 추정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2)자(字)·별호(別號):공자의 자는 중니(仲尼)이다. 복상(卜商)의 자는 자하(子夏), 염옹(冉雍)의 자는 중궁(仲弓), 언언(言偃)의 자는 자유(子游), 증삼(曾參)의 자는 자여(子輿), 민손(閔損)의 자는 자건(子騫), 공급(孔伋)의 자는 자사(子思)이다.
(3)출생지역:공자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현 중국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궁은 노나라, 자유는 오(吳)나라, 자사는 노나라, 민자건은 노나라, 자하는 위(衛)나라 또는 진(晉)나라 온(溫) 출신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공자의 조상은 은(殷) 왕실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周公)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微子) 계(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의 제6대 양공(煬公) 희(熙)에게는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는데,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부터 무공(武公)·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었는데, 그 아들 공보가(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려 피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가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면서,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고손자(高孫子)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인데, 하급 무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공자는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숙량흘이 돌아갔으므로 그 뒤로는 매우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19세 때 노나라의 위리(委吏)(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 벼슬을 하였고, 그 해에 기관씨(丌官氏) 집안 딸에게 장가들어 다음 해에 아들 리(鯉)를 낳았다. 21세에는 승전리(乘田吏)(가축을 기르는 낮은 관직, 《사기(史記)》에는 사직리(司職吏)라 함)가 되었다. 24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돌아갔다. 51세에 노나라 중도재(中都宰)라는 벼슬에 올랐으며, 이어서 사공(司空)에 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사구(司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정공(定公)과 계환자(季桓子)에게 악무에 능한 미녀를 보내자, 정공 등은 이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공자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모든 벼슬을 버리고 55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를 찾아서 국외로 떠났다. 그 뒤 노나라로 되돌아오기까지 13년 동안 공자는 여러 나라의 임금을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설득을 하였으나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후세에 전할 전적(典籍)으로써 육경(六經)을 편정(編定)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교육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69세 되던 해 외아들 리(鯉)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죽었으며, 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기대를 걸었던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다. 다음 해인 B.C. 481년 공자 71세 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麒麟)이 잡혔다. 기린은 예부터 어진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이 때 공자는 《춘추》를 저술하고 있었는데 이 책도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맺고 있다. 다음 해 B.C. 480년 공자 나이 72세에는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내란에 휩쓸려 비명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겹친 불행을 겪고서 B.C. 479년 공자는 향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제자는 3천 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
공자가 생존했던 춘추(春秋)시대는 B.C. 770년 주(周)나라가 동천(東遷)한 이후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위(魏)·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최초로 철제(鐵製) 농기구가 사용되고 우경(牛耕)이 시작되는 등 경제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으며, 이러한 경제 발전은 사회구조에 변화를 가져와 은(殷)·주(周)로 대표되는 씨족 사회가 사라졌다. 한편 사회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결국 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분립 항쟁을 되풀이하며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霸)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과 뛰어난 능력을 패자가 등장하였다. 혼란이 가중되던 이 시기에는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신분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학문·사상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는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공자 역시 당시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약했던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공자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 바로 《논어》라고 할 수 있다.
(5)주요저작: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었고, 《시경(詩經)》을 산삭(刪削)하였으며 《서경(書經)》의 편찬 및 정리에 관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주역》의 십익(十翼)을 지었다고 한다.
(5)논어 해지사항
《논어》는 공자의 어록(語錄)으로써 사서(四書) 중의 하나이며, 유가(儒家) 최고의 성전(聖典)이다. 《논어》는 ① 공자의 말 ②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③ 공자가 당시 위정자들 혹은 은자(隱者)들과 나눈 대화 ④ 제자들의 말 ⑤ 제자들끼리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인데, 이 중에서도 공자의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대화나 제자들의 말도 대개는 공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논어》란 공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공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놓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에 문인(門人)들이 서로 모아 논찬(論纂)하였으므로 그것을 ‘논어’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논어》란 공자와 관계가 있는 말[語]을, 후대에 문인들이 모아 논찬[論]하여 이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논어》라는 서명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적은 《예기(禮記)》이다. 《예기》 〈방기(坊記)〉에, “《논어》에 이르기를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① 자하(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② 자하·중궁(仲弓)·자유(子游) 등이라는 설, ③ 증자(曾子)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라는 설, ④ 증자와 유자(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⑤ 민자건(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은 그의 〈별록(別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남조 양(梁)나라 오군(吳郡) 사람 황간(皇侃)은 《논어의소(論語義疏)》에서 공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撰錄)한 것이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말기의 정현(鄭玄)은 《논어서(論語序)》에서 《논어》가 자하·중궁·자유 등의 찬정(撰定)이라고 하였으며, 진대(晉代) 부휴(傅休)의 《부자(傅子)》에서는 ‘중궁(仲弓)의 무리가 공자의 말을 추론(追論)한 것’이라고 하였고,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은 《논어변(論語辨)》에서, 공자와 증자의 나이 차이와 논어에서 증자와 유자만이 존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을 제시하였다.
한편 주희(朱熹)는 《논어서설(論語序說)》에서 정자(程子)의 말이라 하면서, “《논어》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자(子)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南宋)의 홍매(洪邁)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공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민손(閔損)만은 자건이라는 자(字)로 부르고 있으므로, 《논어》는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 밖에 청(淸)나라 말엽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文史通義)》 〈시교 상(詩敎上)〉에서, 《논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이설(異說)이 있는데, 어쨌거나 《논어》는 대략 전국시대 중기에 공자의 제자들이나 제자의 제자(再傳弟子)들이 편찬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에는 《제논어(齊論語)》, 《노논어(魯論語)》, 《고논어(古論語)》 등 세 가지 논어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노논어》(혹은 《노론(魯論)》)를 보면 《노(魯)》 20편, 《전(傳)》 19편과 《노하후설(魯夏侯說)》 21편, 《노안창후설(魯安昌侯說)》 21편, 《노왕준설(魯王駿說)》 20편의 4가(家)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노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이다. 이 《노론》 20편은 현전하는 논어의 편수와 합치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를 《제론(齊論)》이라고 하는데, 이 《제론》에 대하여는 《한서》 〈예문지〉에 《제(齊)》 22편, 《제설(齊說)》 29편의 2가(家)가 있었다고 한다. 《제논어》는 22편인데, 그 22편 중의 장구(章句)도 《노론》보다 많다고 한다. 또 《제론》에는 〈문왕(問王)〉과 〈지도(知道)〉라는 두 편이 《노론》보다 더 있는데, 《고논어》에도 이 두 편이 없다고 한다. 《고논어》는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이다. 《고논어》는 〈자장(子張)〉편이 두 개이므로 21편이며 《제논어》·《노논어》와 비교하면 서로 편차(編次)가 다르다. 이와 같이 《논어》는 세 종류의 형태로 달리 전해오다가 서한(西漢) 말에 장우(張禹)(?~B.C. 5)라는 사람이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을 만들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이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동한(東漢) 이후 정현이 이를 기초로 하고 《제논어》와 《고논어》를 참고로 해서 주석을 붙였으나 지금은 없어져 집본(輯本)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전해지는 주석서(註釋書)로는 위나라의 하안(何晏)이 쓴 《논어집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를 고주(古注)라고 한다. 이 《논어집해》는 양나라의 황간이 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통하여 후세에 전해졌다.
한편,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는 형병(邢昺)의 《논어주소》의 경문을 바탕으로 고인(古人)들의 여러 해설을 참고하여 지은 것인데, 이로부터 《논어》의 해설은 이 《논어집주》가 단연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하던 유학이 사서(四書)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사서집주가 나온 뒤로 《논어》는 더욱 존중되고 널리 읽혀,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통해 보면 그 뒤로 송대에 나온 《논어》의 주해서가 10여 종이며, 원대(元代)에도 다시 10여 종이 나왔고 명대(明代)에는 30여 종이 넘고 있다. 청대(淸代)에는 더욱 많아 100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주희 이후로 유가의 경전이 오경에서 사서 중심으로 옮겨갔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논어》가 존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원대 이후로는 과거(科擧)에 있어서도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어 《논어》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청대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함에 따라 진전(陳鱣)의 《논어고훈(論語古訓)》, 반유성(潘維城)의 《논어고주집전(論語古注集箋)》,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등 많은 연구서가 나왔다.
4. 논어 편제와 내용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5. 논어 역사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의 6대 경제(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인다.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 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논어 주석서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의 《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이토 진사이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7. 영향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광동의 과거 시험장(1873년)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A.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엄 수딜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볼테르는 계몽철학자로서 '《논어》'야말로 당대까지의 허황된 형이상학이나 신학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철학서라고 칭송하며 자신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둘 만큼 공자를 존경하였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몽 레스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논어》는 오늘날 중국인의 사상과 문화 및 역사, 나아가 동양의 사상과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유교경전이다. 또한 21세기 중국의 눈부신 경제적 발전 역시 《논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부각됨에 따라 세계에서도 《논어》의 핵심 내용에 주목을 하고 있다. 유럽에 《논어》가 처음 알려진 것은 16세기 말엽 스페인 J.G.de Mendoca가 《중국대제국사(Historia del Gran Reyno dela Chinas)》에서 공자와 《논어》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최초의 완전한 번역은, 1687년 Philipp Couplee와 Prospero Intorcetta, Christiani Herdricht, Francisci Rougemont 네 사람이 《대학》·《중용》·《논어》의 라틴어역(譯)에다 《공자전(孔子傳) 》까지 붙여 《중국의 철인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란 책을 낸 것이 그것이었다. 1885년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꾸브뢰르(S. Couvreur)가 사서를 번역했는데 이것은 중국고전의 뛰어난 유럽어 번역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1938년 영국인 아더 웰리(Arthur Waley)의 《논어》 번역이 심화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서구적인 번역으로서 알려졌다.
《논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된 책이며,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논어》는 한 개인의 저작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논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및 동남아의 전통 사상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논어》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682년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이 《논어》에 토를 달았다. 조선시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논어의 첫 간행은 문종(文宗) 10년(1056)의 일로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고 한다. 이어 인종(仁宗) 12년(1134)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한 가운데 주희의 해석에만 매몰되지 않은 주석들도 저술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고, 이익(李瀷)이 《논어질서(論語疾書)》, 박세당(朴世堂)이 《논어사변록(論語思辨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지었다.
8. 참고 문헌
9. 논어 원문
≪論語≫
<學而 第一>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2 有子曰, “其爲人也孝悌,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5 子曰, “導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6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8 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9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11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爲政 第二>
1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2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3 子曰, “導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導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5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6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7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8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先生饌, 曾是以爲孝乎?”
9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10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11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12 子曰, “君子不器.”
13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而後從之.”
14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15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16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17 子曰, “由! 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18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19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20 季康子問, “使民敬忠以勸, 如之何?”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擧善而敎不能則勸.”
21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22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23 子張問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24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八佾 第三>
1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2 三家者以雍撤.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4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寧儉, 喪, 與其易也寧戚.”
5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6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汝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7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8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9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10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11 或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12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13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14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15 子入太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太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16 子曰,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17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18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19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20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21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 使民戰栗.”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22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然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23 子語魯太師樂, 曰, “樂其可知也, 始作, 翕如也, 從之, 純如也, 皦如也, 繹如也, 以成.”
24 儀封人請見, 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25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26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里仁 第四>
1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
2 子曰, “不仁者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智者利仁.”
3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4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5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7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9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10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11 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12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13 子曰, “能以禮讓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
14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15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16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17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18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19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20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21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22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23 子曰, “以約失之者鮮矣.”
24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25 子曰, “德不孤, 必有隣.”
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公冶長 第五>
1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2 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3 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汝, 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4 或曰, “雍也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5 子使漆彫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悅.
6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7 孟武伯問子路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8 子謂子貢曰, “汝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汝弗如也.”
9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10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慾, 焉得剛?”
11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12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13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14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15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16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17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智也?”
18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19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曰, “再, 斯可矣.”
20 子曰, “甯武子, 邦有道則智, 邦無道則愚. 其智可及也, 其愚不可及也.”
21 子在陳, 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22 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23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鄰而與之.”
24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25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26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27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雍也 第六>
1 子曰, “雍也可使南面.” 仲弓問子桑伯子. 子曰, “可也簡.” 仲弓曰,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太簡乎?” 子曰, “雍之言然.”
2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3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子曰, “與之釜.” 請益. 曰,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不繼富.”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
4 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捨諸?”
5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 季康子問, “仲由可使從政也與?” 子曰, “由也果, 於從政乎何有?” 曰, “賜也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乎何有?” 曰, “求也可使從政也與?”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7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8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 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9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10 冉求曰, “非不悅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汝劃.”
11 子謂子夏曰, “汝爲君子儒! 無爲小人儒!”
12 子游爲武城宰. 子曰, “汝得人焉耳乎?” 曰,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
13 子曰, “孟之反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14 子曰, “不有祝鮀之佞, 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
15 子曰, “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
16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17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18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19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20 樊遲問智.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智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21 子曰,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22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23 子曰, “觚不觚, 觚哉! 觚哉!”
24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25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叛矣夫!”
26 子見南子, 子路不悅.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27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28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述而 第七>
1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2 子曰,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3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4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5 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6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7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8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9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哭, 則不歌.
10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捨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11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12 子之所愼, 齊, 戰, 疾.
13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14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15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16 子曰, “加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
17 子所雅言, 詩 書 執禮, 皆雅言也.
18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汝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19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20 子不語怪力亂神.
21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2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23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24 子以四敎, 文, 行, 忠, 信.
25 子曰, “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 子曰, “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恆者, 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恆矣.”
26 子釣而不網, 弋不射宿.
27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28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絜己以進, 與其絜也, 不保其往也.”
29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30 陳司敗問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娶於吳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32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33 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34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35 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子路對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子曰, “丘之禱久矣.”
36 子曰, “奢則不遜, 儉則固. 與其不遜也, 寧固.”
37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38 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泰伯 第八>
1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2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3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4 曾子有疾, 孟敬子問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背矣. 籩豆之事, 則有司存.”
5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6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7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8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10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11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12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13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15 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 盈耳哉!”
16 子曰, “狂而不直, 侗而不愿, 悾悾而不信, 吾不知之矣.”
17 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18 子曰, “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
19 子曰, “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 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
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21 子曰,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子罕 第九>
1 子罕言利與命與仁.
2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3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4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5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6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子聞之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牢曰, “子云, ‘吾不試, 故藝.’”
7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8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9 子見齊衰者冕衣裳者與瞽者, 見之, 雖少必作, 過之必趨.
10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未由也已.”
12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13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價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價者也.”
14 子欲居九夷. 或曰, “陋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15 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16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17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18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19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20 子曰,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
21 子謂顔淵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22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23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24 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悅乎? 繹之爲貴. 悅而不繹, 從而不改, 吾未如之何也已矣.”
25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26 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27 子曰, “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 而不恥者, 其由也與? ‘不忮不求, 何用不臧?’” 子路終身誦之. 子曰, “是道也, 何足以臧?”
28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29 子曰, “智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30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唐棣之華, 翩其翻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鄕黨 第十>
1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2 朝, 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君在, 踧踖如也, 與與如也.
3 君召使擯, 色勃如也, 足躩如也. 揖所與立, 左右手, 衣前後, 襜如也. 趨進, 翼如也. 賓退, 必復命曰, “賓不顧矣.”
4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立不中門, 行不履閾.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其言似不足者.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似不息者. 出, 降一等, 逞顔色, 怡怡如也. 沒階, 趨進, 翼如也. 復其位, 踧踖如也.
5 執圭, 鞠躬如也, 如不勝. 上如揖, 下如授. 勃如戰色, 足蹜蹜如有循. 享禮, 有容色. 私覿, 愉愉如也.
6 君子不以紺緅飾, 紅紫不以爲褻服. 當暑, 袗絺綌, 必表而出之. 緇衣, 羔裘, 素衣, 麑裘, 黃衣狐裘. 褻裘長, 短右袂. 必有寢衣, 長一身有半. 狐貉之厚以居. 去喪, 無所不佩. 非帷裳, 必殺之. 羔裘玄冠不以弔. 吉月, 必朝服而朝.
7 齊必有明衣, 布. 齊必變食, 居必遷坐.
8 食不厭精, 膾不厭細. 食饐而餲, 魚餒而肉敗, 不食. 色惡, 不食. 臭惡, 不食. 失飪, 不食. 不時, 不食.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肉雖多, 不使勝食氣. 唯酒無量, 不及亂. 沽酒市脯不食. 不撤薑食, 不多食. 祭於公, 不宿肉. 祭肉, 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食不語, 寢不言. 雖疏食菜羹, 必祭, 必齊如也.
9 席不正, 不坐.
10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11 問人於他邦, 再拜而送之. 康子饋藥, 拜而受之. 曰, “丘未達, 不敢嘗.”
12 廏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13 君賜食, 必正席先嘗之. 君賜腥, 必熟而薦之. 君賜生, 必畜之. 侍食於君, 君祭, 先飯. 疾, 君視之, 東首, 加朝服, 拖紳. 君命召, 不俟駕行矣. 入太廟, 每事問.
14 朋友死, 無所歸, 曰, “於我殯.”
17 朋友之饋, 雖車馬, 非祭肉, 不拜.
18 寢不尸, 居不容.
19 見齊衰者, 雖狎, 必變. 見冕者與瞽者, 雖褻, 必以貌. 凶服者式之. 式負版者. 有盛饌, 必變色而作. 迅雷風烈必變.
20 升車, 必正立, 執綏. 車中, 不內顧, 不疾言, 不親指.
21 色斯擧矣, 翔而後集.
22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
<先進 第十一>
1 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 則吾從先進.”
2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 子游子夏.
3 子曰, “回也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悅.”
4 子曰, “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
5 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
6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7 顔淵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8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9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10 顔淵死, 門人欲厚葬之. 子曰, “不可.” 門人厚葬之. 子曰, “回也視予猶父也, 予不得視猶子也. 非我也, 夫二三子也.”
11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12 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 “若由也, 不得其死然.”
13 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 如之何? 何必改作?” 子曰, “夫人不言, 言必有中.”
14 子曰, “由之瑟, 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15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16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17 柴也愚, 參也魯, 師也辟, 由也喭.
18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 而貨殖焉, 臆則屢中.”
19 子張問善人之道. 子曰, “不踐迹, 亦不入於室.”
20 子曰,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21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22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汝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
23 季子然問, “仲由冉求可謂大臣與?” 子曰, “吾以子爲異之問, 曾由與求之問.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今由與求也, 可謂具臣矣.” 曰, “然則從之者與?” 子曰, “弑父與君, 亦不從也.”
24 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 “賊夫人之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禝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 “是故惡夫佞者.”
25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求! 爾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赤! 爾何如?”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點! 爾何如?” 鼓瑟希, 鏗爾, 捨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 三子者出, 曾晳後. 曾晳曰, “夫三子者之言何如?”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曰, “夫子何哂由也?”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 “唯求則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如五六十而非邦也者?” “唯赤則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顔淵 第十二>
1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2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 “雍雖不敏, 請事斯語矣.”
3 司馬牛問仁. 子曰, “仁者, 其言也訒.” 曰, “其言也訒, 斯謂之仁已乎?” 子曰, “爲之難, 言之得無訒乎?”
4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已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5 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6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7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8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猶犬羊之鞹.”
9 哀公問於有若曰, “年饑, 用不足, 如之何?” 有若對曰, “盍徹乎?” 曰, “二, 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對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
10 子張問崇德辨惑.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誠不以富, 亦祗以異.’”
11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12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無宿諾.
13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14 子張問政. 子曰, “居之無倦, 行之以忠.”
15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叛矣夫!”
16 子曰,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17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18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19 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20 子張問, “士何如斯可謂之達矣?” 子曰, “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21 樊遲從遊於舞雩之下, 曰, “敢問崇德, 修慝, 辨惑.” 子曰, “善哉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修慝與? 一朝之忿, 忘其身以及其親, 非惑與?”
22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智.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曰, “曏也吾見於夫子而問智,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23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導之, 不可則止, 毋自辱焉.”
24 曾子曰,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子路 第十三>
1 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 曰, “無倦.”
2 仲弓爲季氏宰, 問政. 子曰,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曰, “焉知賢才而擧之?” 曰, “擧爾所知. 爾所不知, 人其捨諸?”
3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4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5 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6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7 子曰, “魯衛之政, 兄弟也.”
8 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
9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10 子曰, “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11 子曰, “‘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 誠哉是言也!”
12 子曰, “如有王者, 必世而後仁.”
13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14 冉子退朝. 子曰, “何晏也?” 對曰, “有政.” 子曰, “其事也. 如有政, 雖不吾以, 吾其與聞之.”
15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16 葉公問政. 子曰, “近者悅, 遠者來.”
17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 則不達, 見小利, 則大事不成.”
18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19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20 子貢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子曰,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曰, “敢問其次.” 曰, “宗族稱孝焉, 鄕黨稱悌焉.” 曰, “敢問其次.” 曰, “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曰, “今之從政者何如?” 子曰, “噫! 斗筲之人, 何足算也?”
21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22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恆,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恆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23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24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25 子曰, “君子易事而難悅也. 悅之不以道, 不悅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難事而易悅也. 悅之雖不以道, 悅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26 子曰,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27 子曰, “剛 毅 木 訥 近仁.”
28 子路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
29 子曰, “善人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30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憲問 第十四>
1 憲問恥. 子曰, “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2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 子曰, “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3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4 子曰, “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遜.”
5 子曰,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6 南宮适問於孔子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 然禹稷躬稼而有天下.” 夫子不答. 南宮适出, 子曰,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
7 子曰, “君子而不仁者有矣夫, 未有小人而仁者也.”
8 子曰,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9 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
10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 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11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12 子曰, “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
13 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智,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冉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 曰, “今之成人者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14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15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16 子曰, “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17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糾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18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未管仲, 吾其披髮左袵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殌於溝瀆而莫之知也?”
19 公叔文子之臣大夫僎與文子同升諸公. 子聞之, 曰, “可以爲文矣.”
20 子言衛靈公之無道也, 康子曰, “夫如是, 奚而不喪?” 孔子曰, “仲叔圉治賓客, 祝鮀治宗廟, 王孫賈治軍旅. 夫如是, 奚其喪?”
21 子曰,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
22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23 子路問事君. 子曰, “勿欺也, 而犯之.”
24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
25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26 蘧伯玉使人於孔子. 孔子與之坐而問焉, 曰, “夫子何爲?” 對曰, “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使者出. 子曰, “使乎! 使乎!”
27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28 曾子曰, “君子思不出其位.”
29 子曰, “君子恥其言而過其行.”
30 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智者不惑, 勇者不懼.” 子貢曰, “夫子自道也.”
31 子貢方人. 子曰, “賜也賢乎哉? 夫我則不暇.”
32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33 子曰, “不逆詐, 不臆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
34 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者與?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
35 子曰, “驥不稱其力, 稱其德也.”
36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37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38 公伯寮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以告, 曰, “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猶能肆諸市朝.”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
39 子曰, “賢者避世, 其次避地, 其次避色, 其次避言.”
40 子曰, “作者七人矣.”
41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42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己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未之難矣.”
43 子張曰, “書云, ‘高宗諒陰, 三年不言.’ 何謂也?” 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以聽於冢宰三年.”
44 子曰, “上好禮, 則民易使也.”
45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人.”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46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遜悌,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
47 闕黨童子將命. 或問之曰, “益者與?” 子曰, “吾見其居於位也, 見其與先生並行也. 非求益者也, 欲速成者也.”
<衛靈公 第十五>
1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2 子曰, “賜也, 汝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3 子曰, “由! 知德者鮮矣.”
4 子曰, “無爲而治者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5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子張書諸紳.
6 子曰, “直哉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君子哉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
7 子曰, “可與言而不與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智者不失人, 亦不失言.”
8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9 子貢問爲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10 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11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12 子曰, “已矣乎!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13 子曰, “臧文仲其竊位者與! 知柳下惠之賢而不與立也.”
14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
15 子曰, “不曰如之何, 如之何者, 吾未如之何也已矣.”
16 子曰, “羣居終日, 言不及義, 好行小慧, 難矣哉!”
17 子曰,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遜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18 子曰,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19 子曰,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20 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21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
22 子曰,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23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24 子曰, “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
25 子曰,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26 子曰, “巧言亂德. 小不忍, 則亂大謀.”
27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28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29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30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無益, 不如學也.”
31 子曰, “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32 子曰, “智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智及之, 仁能守之. 不莊以涖之, 則民不敬. 智及之, 仁能守之, 莊以莅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33 子曰, “君子不可小知而可大受也, 小人不可大受而可小知也.”
34 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也.”
35 子曰, “當仁, 不讓於師.”
36 子曰, “君子貞而不諒.”
37 子曰, “事君, 敬其事而後其食.”
38 子曰, “有敎無類.”
39 子曰, “道不同, 不相爲謀.”
40 子曰, “辭達而已矣.”
41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然, 固相師之道也.”
<季氏 第十六>
1 季氏將伐顓臾. 冉有季路見於孔子曰, “季氏將有事於顓臾.” 孔子曰, “求! 無乃爾是過與? 夫顓臾, 昔者先王以爲東蒙主, 且在邦域之中矣, 是社稷之臣也. 何以伐爲?” 冉有曰, “夫子欲之, 吾二臣者皆不欲也.” 孔子曰, “求! 周任有言曰, ‘陳力就列, 不能者止.’ 危而不持, 顚而不扶, 則將焉用彼相矣? 且爾言過矣, 虎兕出於柙, 龜玉毁於櫝中, 是誰之過與?” 冉有曰, “今夫顓臾, 固而近於費. 今不取, 後世必爲子孫憂.” 孔子曰, “求! 君子疾夫捨曰欲之而必爲之辭.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夫如是, 故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旣來之, 則安之. 今由與求也, 相夫子, 遠人不服, 而不能來也, 邦分崩離析, 而不能守也, 而謀動干戈於邦內. 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 而在蕭牆之內也.”
2 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 自諸侯出, 蓋十世希不失矣, 自大夫出, 五世希不失矣, 陪臣執國命, 三世希不失矣. 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3 孔子曰, “祿之去公室五世矣, 政逮於大夫四世矣, 故夫三桓之子孫微矣.”
4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
5 孔子曰, “益者三樂, 損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晏樂, 損矣.”
6 孔子曰, “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謂之躁, 言及之而不言謂之隱, 未見顔色而言謂之瞽.”
7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8 孔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9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10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
11 孔子曰, “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吾見其人矣, 吾聞其語矣. 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吾聞其語矣, 未見其人也.”
12 齊景公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其斯之謂與?
13 陳亢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對曰,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禮乎?’ 對曰,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陳亢退而喜曰, “問一得三, 聞詩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14 邦君之妻, 君稱之曰夫人, 夫人自稱曰小童, 邦人稱之曰君夫人, 稱諸異邦曰寡小君, 異邦人稱之亦曰君夫人.
<陽貨 第十七>
1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智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2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3 子曰, “唯上智與下愚不移.”
4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者!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5 公山弗擾以費叛, 召, 子欲往. 子路不悅, 曰, “未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6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7 佛肹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叛, 子之往也, 如之何?”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8 子曰, “由也! 汝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居! 吾語汝.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智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9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羣,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10 子謂伯魚曰, “汝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11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12 子曰, “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
13 子曰, “鄕愿, 德之賊也.”
14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15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16 子曰, “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古之狂也肆, 今之狂也蕩, 古之矜也廉, 今之矜也忿戾, 古之愚也直, 今之愚也詐而已矣.”
17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18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
19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20 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
21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汝安乎?” 曰, “安.” “汝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汝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22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23 子路曰, “君子尙勇乎?” 子曰, “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爲亂, 小人有勇而無義爲盜.”
24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子曰, “有惡,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而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曰, “賜也亦有惡乎?” “惡徼以爲智者, 惡不遜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25 子曰,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遜, 遠之則怨.”
26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微子 第十八>
1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2 柳下惠爲士師, 三黜. 人曰, “子未可以去乎?” 曰, “直道而事人, 焉往而不三黜? 枉道而事人, 何必去父母之邦?”
3 齊景公待孔子曰, “若季氏, 則吾不能, 以季孟之間待之.” 曰, “吾老矣, 不能用也.” 孔子行.
4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5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避之, 不得與之言.
6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避人之士也, 豈若從避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7 子路從而後, 遇丈人, 以杖荷蓧.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雞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明日, 子路行以告.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子路反 子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8 逸民, 伯夷, 叔齊, 虞仲, 夷逸, 朱張, 柳下惠, 少連. 子曰,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 叔齊與!” 謂柳下惠少連, 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 其斯而已矣. 謂虞仲夷逸, 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9 太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少師陽, 擊磬襄, 入於海.
10 周公謂魯公曰, “君子不弛其親, 不使大臣怨乎不以. 故舊無大故, 則不棄也. 無求備於一人!”
11 周有八士, 伯達, 伯适, 仲突, 仲忽, 叔夜, 叔夏, 季隨, 季騧.
<子張 第十九>
1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2 子張曰, “執德不弘, 信道不篤, 焉能爲有? 焉能爲亡?”
3 子夏之門人問交於子張. 子張曰, “子夏云何?” 對曰, “子夏曰, ‘可者與之, 其不可者拒之.’” 子張曰, “異乎吾所聞, 君子尊賢而容衆, 嘉善而矜不能. 我之大賢與, 於人何所不容? 我之不賢與, 人將拒我, 如之何其拒人也?”
4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
5 子夏曰,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6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7 子夏曰, “百工居肆以成其事, 君子學以致其道.”
8 子夏曰, “小人之過也必文.”
9 子夏曰, “君子有三變, 望之儼然, 卽之也溫, 聽其言也勵.”
10 子夏曰, “君子信而後勞其民, 未信, 則以爲厲己也. 信而後諫, 未信, 則以爲謗己也.”
11 子夏曰, “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
12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洒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如之何?” 子夏聞之, 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唯聖人乎!”
13 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14 子游曰, “喪致乎哀而止.”
15 子游曰, “吾友張也爲難能也, 然而未仁.”
16 曾子曰, “堂堂乎張也, 難與並爲仁矣.”
17 曾子曰, “吾聞諸夫子, 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
18 曾子曰, “吾聞諸夫子, 孟莊子之孝也, 其他可能也, 其不改父之臣與父之政, 是難能也.”
19 孟氏使陽膚爲士師, 問於曾子. 曾子曰, “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20 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21 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22 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子貢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23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 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闚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
24 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
25 陳子禽謂子貢曰, “子爲恭也, 仲尼豈賢於子乎?” 子貢曰, “君子一言以爲智, 一言以爲不智, 言不可不愼也. 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夫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導之斯行, 綏之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
<堯曰第二十>
1 堯曰, “咨! 爾舜! 天之歷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舜亦以命禹. 湯曰, “予小子履 敢用玄牡, 敢昭告于皇皇后帝, 有罪不敢赦. 帝臣不蔽, 簡在帝心. 朕躬有罪, 無以萬方, 萬方有罪, 罪在朕躬.” 周有大賚, 善人是富. “雖有周親, 不如仁人. 百姓有過, 在予一人.” 謹權量, 審法度, 修廢官, 四方之政行焉. 興滅國, 繼絶世, 擧逸民, 天下之民歸心焉. 所重, 民食喪祭. 寬則得衆, 信則民任焉, 敏則有功, 公則悅.
2 子張問於孔子曰, “何如斯可以從政矣?” 子曰, “尊五美, 屛四惡, 斯可以從政矣.” 子張曰, “何謂五美?” 子曰, “君子惠而不費, 勞而不怨, 欲而不貪, 泰而不驕, 威而不猛.” 子張曰, “何謂惠而不費?” 子曰, “因民之所利而利之, 斯不亦惠而不費乎? 擇可勞而勞之, 又誰怨? 欲仁而得仁, 又焉貪? 君子無衆寡, 無小大, 無敢慢, 斯不亦泰而不驕乎? 君子正其衣冠, 尊其瞻視, 儼然人望而畏之, 斯不亦威而不猛乎?” 子張曰, “何謂四惡?” 子曰, “不敎而殺謂之虐, 不戒視成謂之暴, 慢令致期謂之賊, 猶之與人也, 出納之吝謂之有司.”
3 孔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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