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직폭력과 깡패소탕〕
시책 중 가장 확실하게 진행했던 사실은 조직폭력배 소탕이었다. 당시의 조직폭력배는 일반 상인들에게나 서민들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박정희 의장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질서를 잡아 나가기 위해선 매우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16 혁명을 주도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서 혼란을 야기하였던 부정부패 사범들과 조직폭력배 그리고 반혁명 분자 등을 척결하는 혁명재판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활개를 치며 뛰고 날던 이정재⋅시라소니⋅임화수⋅유지광⋅최인규등이 교수형을 당하면서 그 폭력배 조직들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오로지 땀을 소중히 생각하고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시대가 비로소 열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직후에 설치되었던 ‘국가최고통치의결기관’이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중심되어 이끄는 군(軍)의 일부 세력이 군사혁명을 일으켜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산과 제2공화국 헌정의 중단을 가져왔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를 조직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시켰다. 곧이어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國家再建最高會議)라 개칭하고 20일에 혁명내각을 조직함으로써 군사 정부가 수립되어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 정부의 최고통치의결기관이 되었다.
6월 6일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었는데 이 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가의 최고통치기관으로 규정되어 법적 뒷 받침을 가지게 되었으며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적 권리도 혁명 과업의 수행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하는 등 헌법의 일부 효력마저도 정지시켰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록 역사적인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시대를 넘어 입에서 입으로 쏠쏠하게 전해지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 과정이 없이 박정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의 이 안정된 치안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직을 이끌어 가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해 나갔던 이정재는 공수 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그 당시의 못난 깡패들과 함께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를 쓴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서울 시내 한복판을 행진하며 조리돌림도 당했었다. 사형당한 8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무부장관 최인규⋅경무대 경무관 곽영주⋅정치깡패 이정재⋅정치깡패 영화계 임화수⋅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사회당 간부 최백근⋅폭력배 신정식⋅밀수범 한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