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에도 삶은 눈이 부시다.”
《100만 번 산 고양이 / 사노요코 글. 그림/김난주 옮김/비룡소》
2019. 4. 4. 목 / 김형애
앞표지부터 만나 본다.
빨간 색의 강렬한 책이름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서 있다.
쫑긋 선 귀, 할 말이 있는 듯 상대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 다부지게 쥔 주먹, 곧추 세운 꼬리, 힘을 주어 야무지게 오므린 발까지, 한 마디로 위풍당당하다. “난 100만 번 산 고양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책등에도 고양이가 있다.
이제 뒤표지를 본다. 앞표지와 사뭇 다른 달달한 분위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는 부드러워져 왼쪽으로 편안히 놓여 있고, 오른 손으론 핑크빛 귀와 꼬리를 가진 하얀 고양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이 봄에 어울리는 다정한 연인이다.
표지만 보면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연애 이야기!
표지를 넘겨 앞 면지를 본다.
무늬도 없고, 그림도 없고, 온통 하얗다. ‘편안하게 마음을 비우고 책장을 넘기라는 건가?’ 생각하며 속표지에 눈길을 준다. 책이름이 빨강에서 카키가 섞인 회색 톤으로 부드러워졌다. 앞표지에서 다부지게 쥐었던 손은 양쪽으로 활짝 펼쳤다. 꼬리는 살랑이고, 발은 마치 달리기를 할 듯하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 시작’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드디어 본문이다.
꼬리를 동그랗게 말고 두 손은 공손하게 마주잡고, 초록색을 띤 파란색 눈동자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얼룩 고양이야. 백만 명의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어.”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아난 고양이라니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궁금해 하며 다음 장을 넘겨본다.
백만 번의 삶 조각들과 그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전쟁을 좋아하는 위풍당당 임금님의 고양이는 화살을 맞아 죽었고, 주정뱅이 뱃사공의 고양이는 배에서 떨어져 죽었고, 서커스단 고양이는 마술사의 실수로 반으로 잘려 죽었고, 도둑의 고양이는 개에게 물려 죽었고, 홀로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는 나이가 들어 죽었고, 어린 여자 아이의 고양이는 포대기 끈에 목이 졸려 죽었다. 이렇게 백만 번을 죽은 그림 속 고양이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고, 세상일에 흥미가 없어 시큰둥하다. 주인들은 슬피 울었으나 고양이는 그들을 싫어했고, 죽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는 게 재미없어서, 주인을 싫어해서, 삶에 미련이 없어서, 언제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만약 내가 백만 번이나 죽고 살아나야한다면 어떨까? 불교의 윤회설을 믿으면 사람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도 수없는 생을 살아야한다. 전생의 기억을 안고 백만 번이나 죽고 살아나야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도깨비의 공유에게 주어진 무한한 생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홀로 지켜봐야하는 벌이었다.
다음 장으로 가 보자.
이제 고양이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오직 자기만의 도둑고양이가 되어 자신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도시의 빌딩을 배경으로 네 활개를 펴고 세상 편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쓰레기통 위에 누워있다. 빌딩위로 빛나는 조각달, 머리 위엔 가로등 불빛, 고양이는 자유롭다. 비록 거리에서 자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거리를 찾을지라도.
그래, 이제 고양이는 온전히 자신으로 살면서 행복하구나.
다음 장을 넘기니 수컷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그에게 온갖 방법으로 구애를 하는 암고양이들이 보인다.
고양이는 시크하다.
백만 번이나 죽어봤으니 오직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만 번이나 죽어 본 고양이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 오~ 뒤표지에서 다정하게 앉아 있던 그 고양이다. 파란색 눈동자에 살짝 고개를 젖히고 새초롬한 입매다. 몸은 동그랗게 말아 부드러운 곡선이고, 앞발은 가지런하다. 어떤 사내가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고양이도 옆으로 가서 말을 걸어보지만 사랑스럽고 도도한 아가씨를 얻는 일은 쉽지 않다. 백만 번 살아봤다고 자랑을 해도, 서커스단 생을 떠올리며 재주를 넘어 봐도 그다지 반응이 없다. 잘 보이려고 그녀를 바라보며 재주를 넘는 고양이가 낯설어 보인다. 시크하고, 잘난 척하던 예전과 달라졌다.
당연하다, 그는 사랑에 빠졌으니까.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낳고. 이제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를 꺼내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보다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를 더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에 둘러싸인 고양이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끼 고양이들은 독립을 하고, 아내와 둘이서 남게 된 고양이는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담장 밑에 나란히 엎드려 있는 고양이 부부는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 있다. 담장 안쪽에는 창문과 울타리가 있는 아담한 이층집이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그들만의 고양이로 살고 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그의 곁을 떠났다. 죽은 그녀를 안고 목 놓아 우는 고양이에게서 그의 슬픔보다 살아 있음의 강렬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고통보다 살아있음을 더 격렬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없다고 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이 생각난다. 이제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두 고양이가 묻힌 들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얀 하늘아래 풀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저 멀리에 고양이 부부가 그 바깥에서 살았던 이층집이 풍경처럼 자리하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니 뒷면지도 온통 하얗다. ‘이제 너의 삶을 그려봐.’ 하는 것처럼.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하다.
백만 번이나 죽고 되살아난 고양이가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본다.
처음으로 자신으로 살게 된 도둑고양이 시절, 하얀 고양이를 만났을 때 설레던 순간, 그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자신보다 아내와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되었던 순간이다. 고양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온전히 자신으로 살았을 때 처음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를 얻고, 새로운 관계를 맺었을 때 되살아나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어쩌면 온전히 나로 산다는 것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도 관계 속에서 녹아나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이 않을까?”
첫댓글 발제를 많이 늦게 올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