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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다시 생각해 보는 복음의 의미
오늘을 위한 복음
3. 인생의 보물지도
요한계시록 20:1~3
설교 개요
1. 콜럼버스의 지도
2.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
① 새로운 이야기꾼, 예언자
② 동화, 권선징악의 이야기
③ 신화,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도
3. 예언,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
① 호세아의 예언
② 바울의 예언
③ 밧모섬 요한의 예언
④ 개혁주의자들의 예언
4. 오늘을 위한 복음
설교 목적
성경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의미를 생각해 볼 것이다. 이야기에는 신화와 민간설화 또는 동화도 있다.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 드라마와 영화, 소설이다. 사실 노래 속에도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는지 보여준다. 특별히 성경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이해하고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거기서 우리는 원죄론에 대한 근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 우리를 위한 복음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
1. 콜럼버스의 지도
지금부터 530년 전, 한 유럽인이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있는 황금의 나라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할 것이라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 시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아라비아해를 지나 아시아로 가는 머나먼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코 폴로라는 탐험가가 쓴 동방견문록이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많은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벨라 여왕을 찾은 이 유럽인은 아시아로 가는 더 짧은 길을 찾아내서 꼭 황금을 가지고 오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페인 여왕의 지원을 받아 120명의 선원과 세 척의 배를 타고 아시아로 가는 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이 유럽인의 이름은 콜럼버스(1451~1506)입니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에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항해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쪽으로 가는 항로와 지도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지만 서쪽에 있는 넓은 대서양 너머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곳에 대해서는 아직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콜럼버스는 지도 없이 이야기를 듣고 항해를 떠난 것입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을 간직하고 그 이야기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 인도 제국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탐험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두달의 항해 끝에 10월에 콜럼버스 일행은 마침내 대서양을 건너 육지에 도착했습니다.
콜럼버스는 너무 기쁜 나머지 배에서 내려 그 땅에 입을 맞추며 그곳의 이름을 산살바도르라고 불렀습니다. 미지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거룩한 구세주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유럽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탐험 성과를 보고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인 1499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임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 땅을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그 땅을 발견한 유럽인은 콜럼버스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하여 항해를 떠났을 때 그에게는 그리로 가는 지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다 끝은 낭떠러지가 아니며 지구는 둥글다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콜럼버스를 이끌어준 지도는 그가 마음 속에 진리로 받아들이고 꿈을 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는 인생이라는 여행과 탐험을 안내하는 지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보물지도처럼 인생에게 신대륙과 새로운 기회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2.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
이야기는 이처럼 인생의 보물지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선생님이 수업을 멈추시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런 날이면 무슨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신이 났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는 어떤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연애담을 들으면서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면서 선배들의 무용담과 군생활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는 글로 씌어진 이야기인 소설을 읽고 감동합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역사 소설을 상상과 더불어 들었습니다. 그 후에 텔레비전이 나와서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밤이 깊은 줄 모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야기는 노래속에도 담겨 있습니다. 어떤 노래에는 꿈과 희망이 들어있고, 어떤 노래에는 이별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린 시절에 듣고 배운 이야기들은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워갑니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도 장밋빛 사랑이 있기를 꿈을 꿉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도 하며 꿈과 희망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 이야기는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역사 이야기를 많이 편찬한 이유는 나라를 잃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나라를 잃었고 일본의 통치 아래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독립을 하여 빛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꿈을 심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발간된 역사 이야기들은 단군 이야기와 고구려의 주몽,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이야기 등 우리 역사에서 두드러진 공을 세운 인물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단군 이야기는 단지 우리가 곰의 후손이라는 것을 들려주고자 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은 하늘에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즉 단군은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입니다. 단군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것입니다. 그토록 존귀한 민족이니 어렵더라도 민족의 자존심을 잃지 말고 꿋꿋하고 떳떳하게 살아남아 반드시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뜻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발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도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들은 매우 단순합니다. 콜럼버스가 지도로 삼은 이야기는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40대의 콜럼버스를 흥분하게 했으며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도 매우 단순합니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 삼손과 다윗, 그리고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들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들려줍니다. 이런 신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나도 누구처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따르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야기라는 보물지도를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군 이야기에서 곰과 호랑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곰은 인내하고 호랑이는 인내하지 못했는가 하는 논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곰이 먹은 것이 몸에 좋다는데 마늘과 쑥이 어떻게 몸에 좋은가를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단군 이야기의 핵심이 아닙니다. 심지어 곰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허황된 것으로 그런 이야기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므로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가 인생을 인도하는 지도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잘못 이해하면 도리어 의미 없는 논쟁에 빠지거나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성숙하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차원도 발전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단군 이야기를 들으면서 곰과 호랑이가 100일 동안 견뎌야 했던 것을 재미있게 여겼다면,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단군 이야기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건국 이념에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배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운영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지침이 될 만합니다. 그 외에도 단군 이야기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침이 담겨 있습니다. 진리로 땅을 평화롭게 한다는 재세이화(在世理和), 바른 가르침으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도여치(以道與治), 그리고 밝은 덕으로 세상을 밝게 한다는 광명이세(光明理世)와 같은 국가의 건국에 대한 정신과 지혜가 단군 이야기에 배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성숙하면서 이야기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쓴 사람들의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사실 단군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입니다. 단군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서는 여러 권이 있지만 일연의 삼국유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사실 일연이 살던 고려시대에는 칭기즈칸의 나라 몽고가 여러 번 침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그룹에 있던 승려 일연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역사 이야기를 기록하여 펴냈습니다.
그렇게 하여 단군 이야기와 그것을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면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역사 이야기를 다시 출판한 것도 일연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 역사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들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지도입니다.
3. 예언,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
그러면 이제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인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처음 세 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지으신 후에 에덴동산을 별도로 만드시고 그곳으로 아담을 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기 형상을 입히시고 그 동산을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동산에는 많은 과실수가 있었는데, 특히 그 중앙에는 두 개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그 열매를 먹으면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였고,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부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기는커녕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부부를 그 동산에서 내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담은 땅을 일구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아담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지만, 교회 밖에서는 중학교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아담의 사과(Adam’s Apple)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남성들이 사춘기때 목소리가 걸걸해지면서 목부분에 돌출하는 후두돌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아담이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로 아담의 이야기는 ‘금단(禁斷)의 열매’라는 말로 다가왔습니다. 먹어서는 안된다는 열매로서 금지된 일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은 이야기는 이처럼 인류 전체에게 여러 모양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가 성경 안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호세아의 예언
창세기에서 아담의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가장 먼저 아담을 언급한 사람은 예언자 호세아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세아 6:4~7
호세아는 에브라임과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다스리던 시절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았고, 북쪽은 에브라임을 비롯한 나머지 열개의 지파가 뭉쳤습니다. 그래서 분열된 두 나라를 가리킬 때 성경은 에브라임과 유다라고 그 대표가 되는 지파를 불렀습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활동보다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를 보아도 에브라임을 보아도 그런 인애는 너무 적고 짧아서 아침 구름이나 아침 이슬처럼 금방 없어져 버리고 만다는 탄식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무자비하고 무정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소임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호세아는 지적합니다.
바로 그 메시지에서 호세아는 그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아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담처럼 본래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음을 일깨워줍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듯이 그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물려받아 거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면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에브라임과 유다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준수하면서 열방에 모델이 될 만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자기 시대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아담을 언급하면서 그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이는 호세아와 그 백성들이 아담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소임을 발견했음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에게 아담의 이야기는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언은 옛 이야기가 자기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예언자들은 옛 이야기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사도 바울의 예언
신약성경에서 아담의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야기도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시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오시리라 하던 바로 그분이라고 바울은 소개했습니다. 특별히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생명을 누리게 하시며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게 하실 것이라고 바울은 두루 다니며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하신 새로운 일은 마치 세상을 다시 새롭게 만드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그분을 따른다면 그는 마치 새롭게 지으심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 5:17).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그는 마치 아담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관리하라고 하나님이 위임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관리하는 새로운 대리인이 됩니다(엡 2:10).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복을 성취하실 분이라고 바울은 소개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부요함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 저주는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인류는 생명 안에서 왕노릇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메시지를 전할 때 아담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7~19
이렇게 사도 바울이 전한 새로운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안에서 아담의 이야기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새로운 임무를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로운 인간(아담)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들려준 아담 이야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을 저주와 낙심에서 건져내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이야기는 지난 2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인도하는 인생의 지도가 되었습니다.
③ 밧모섬 요한의 예언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계 1:3). 예언은 언제나 과거에 선포된 하나님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주는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설교가 예언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는 자기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겪고 있었습니다. 밧모섬의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시록 1:9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요한과 함께 요한의 편지를 받는 교회가 예수님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있으며 고통을 참아야 하는 형편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네로 같은 로마 황제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인 폭군입니다. 그런 가혹한 상황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요한은 창세기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풀어주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옛 뱀에 대해서 들려주었습니다. 그 늙은 뱀은 붉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는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꾀는 자입니다(계 12:9). 그가 자기 꼬리의 권세를 휘둘러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땅에 던집니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난 짐승과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시켜 여자의 후손들을 괴롭게 합니다. 늙은 뱀이자 붉은 용이 시키는 대로 땅의 짐승은 큰 권세를 받고 세상을 자기에게 경배하게 미혹하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세자들의 악행을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판타지처럼 그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계시록의 이야기에서 여자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계 12:17). 그들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짐승들과 더불어 땅에서 죽기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고 따르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린 양의 편에 서서 짐승과 싸우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결의를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이런 희망을 들려줍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계시록 20:1~3
밧모섬의 요한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용은 결박되고 무저갱에 갇히게 됩니다.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나고 세상은 새롭게 됩니다. 그처럼 새롭게 되는 세상은 에덴동산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 같은 생명수의 강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강 주위에는 열두 가지가 달마다 열매를 맺으며 그 나무 잎사귀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재가 됩니다(계 22:1~2).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합니다. 이 이야기는 밧모섬의 요한처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④ 개혁주의자들의 예언
아담의 이야기는 예언자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진실되고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 사역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와 대리인이 된다고 그 소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밧모섬의 요한은 창세기의 아담과 에덴동산, 그리고 뱀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요한의 계시록에서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비춰주는 이야기로 다시 제시되었으며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지도처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류를 새로운 희망을 품고 미래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회가 성경을 붙들고 그 이야기를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비추어주는 등불과 지도로 여기며 살아오는 지난 2천년 동안에 큰 도전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온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완벽하고 완전한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보이는 것의 원형이 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교회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고 어떤 분인가를 설명할 때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좋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시는 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그리스 철학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치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할지를 연구하던 중에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상제님으로 섬기는 분이 있음을 알고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제님이라고 소개한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기독교회는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임으로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 더 풍성한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이데아의 세계가 참이며 영원하고 변치 않는다는 생각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이론이었습니다. 그 이론은 현실을 더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지만, 교회는 이데아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며 영원한 세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부터 500년 전 기독교회는 인생 최고의 목표를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읽다 보니 인간이 이처럼 부족하고 문제가 많은 이유가 아담의 타락에서 기원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원죄론이 탄생합니다. 그 결과 영원하고 완벽한 세상에 비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부정한 존재이며, 이런 인간을 다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다시 낙원을 되찾게 해 주실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 이야기는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때 쓰여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입니다. 여기서부터 천국은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이며,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천상에 올라가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짧으며 속히 지나간다는 의미로 사용된 나그네의 이야기를 오해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천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의 기간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가장 큰 물결을 만든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 세상의 도성은 잠시 머물다 갈 나그네의 집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언자 호세아와 사도 바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과 그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대리인으로 부름 받은 인간과 교회의 소명은 점점 퇴색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적인 상태를 점검하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도 이제 천상의 세계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정화하는 대속제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더 폐쇄적이고 더 편협한 구원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다양한 활동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며 천국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종교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 결과 왜곡된 종말론과 편협한 구원론에 치우친 광신자들이 심심찮게 자주 일어나 사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신천지 집단의 미혹도 그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선택된 무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아니라 천상에 들어갈 세계에 대한 것으로 오해한 사상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은 모두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온 세상에 복이 될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한다는 포용적인 복음을 전한 바울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도시인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와 온 세상이 새롭게 된다는 요한계시록 이야기의 비전과도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종말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세상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2~4
이처럼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어긋나면 인생을 인도하는 지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삶과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게 되고 인생의 항로는 바른 종착지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바른 길로 인도할 등불과 지도가 될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4. 오늘을 위한 복음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생의 보물지도’입니다. 인생에게 보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는 지도는 우리가 듣고 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길을 찾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보물지도입니다. 특별히 그 보물지도는 예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언은 성경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풀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저는 예언자 호세아와 사도 바울, 그리고 밧모섬의 요한이 들려주는 예언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그 예언자들은 모두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소재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또한 500년 전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받아들인 중세 교회가 어떻게 창세기 이야기를 이해했는지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성경의 예언을 들려준 과거의 예언자들과 어떤 점에서 어긋난 것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교회는 자기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그 의미에 대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때로는 조금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모르다가 다른 시대에 그들의 과오가 드러날 수도 있고,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폐쇄되고 독단적인 사회일수록 오류를 바로잡기는 어렵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일수록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많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 그리고 종교와 문화가 잘 어우러져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위험한 까닭은 자기들 외의 다른 종교에 대하여 원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을 무시하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독재자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다양성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중국이나 북한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민족,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와 생각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질서와 상생을 위한 협력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기독교회는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과제에 대하여 대답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생육과 번영, 그리고 충만으로 이끄시는가를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에 비추어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16:13). 우리 모두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는 보물지도가 될 수 있도록 잘 다듬어 갑시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