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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미리 증언하여 상고하니라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시험으로 말미암아 자주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에 대하여 잠깐의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생은 우리의 본향에서 살아갈 영원한 생과 비교해 볼 때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런 순간의 생을 살아가면서도 누가 지키시고 보호하시느냐?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까지 알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는 일이 없으며, 또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고전10:13) 잠깐의 시험인 것입니다.
이런 시험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시험은 믿음의 시련이고, 믿음의 시련인 만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성도를 단련하시면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순금 같이 되어 나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욥23:10).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냄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들고자 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약1:3-4).
사도 베드로의 경우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정도로만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장차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인데, 그때 믿음의 시련을 겪은 자들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크게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난주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혼의 구원이라는 표현과 관련해 잠시 언급하자면, 영혼의 구원이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 영혼만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제유법입니다. 일부분을 통해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인데, 우리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사람의 구성 요소가 육체와 영혼이라고 할 때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영혼은 한번 창조된 이후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두 장소 중 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으로 가든가, 아니면 지옥으로 갑니다. 이때 천국으로 간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썩어 흙이 되었던 몸이 다시금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체와 영혼이 다시금 하나가 되어 천국으로 갈 때 그것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이때를 영화로운 단계라고 말하는데, 영혼의 구원이란 영혼만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함께 몸까지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구원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증거 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것이 너희를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우선 10절을 보시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말하는데, 구원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 즉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은혜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수신자인 흩어진 나그네에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기를 소원한다고 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은혜란 인간의 열심, 인간의 노력, 인간의 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제공하시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구원이 은혜라는 말은 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해 주심으로 받은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은혜를 누가 예언했는가? 그리고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이 은혜의 대상이 누구인가? 구약 선지자들이 신약 백성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얼핏 구약 선지자들이 신약 백성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구약 백성에게는 그런 은혜가 없었다는 것으로 들리기 쉬우나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도 복음이 들려졌고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 백성들 역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구약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지 않았습니다. 오실 것을 내다보아야 했습니다. 반면 신약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구약 시대보다 좀 더 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 시대의 말씀보다 신약 시대의 말씀이 좀 더 부요하고 풍성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이런 면을 염두 해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살피겠지만 12절에서는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으로 섬길 때 자기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차적으로 자기 시대의 백성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12절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즉 신약 시대 백성이든 구약 시대 백성이든 동일한 복음이요, 동일한 은혜의 내용을 보고 듣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는 자로 있습니다. 저들이 듣지 못한 것을 더욱 분명하게 듣는 자로 있습니다. 구약 시대보다는 신약 시대가 더 풍성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자기 시대를 향하여 전하였지만 어떤 면에서 그림자와 같은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 신약 시대에서는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말씀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느냐?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주의 백성을 위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였다고 할 때 구약 시대 백성들에게는 그런 은혜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은혜가 주어질 때 효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저들보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더 부요하게, 더 풍성하고, 더 판명하게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강조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다음 주에 보게 될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 즉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의 구원을 주실 것인데,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서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구약의 백성보다 더 풍성한, 그리고 더 부요한, 그리고 더 판명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구원이 은혜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인간의 모든 열심과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설명합니다. 간혹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는 것으로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강조하되 그런 열심과 노력의 결과가 무엇을 만들어내는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할 때 선지자들이 연구하지 않았고 부지런히 살피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하여 저들이 연구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살폈기 때문에 아는 것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교리는 결코 사람의 연구, 사람의 부지런함의 결과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11장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말하면서도 이어지는 11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다시 말해 선지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증언하게 하심으로 구원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알 수 없습니다. 계시한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하여 드러내시면서 알리신바 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들의 연구와 부지런히 살핀 것은 계시에 의존한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인가? 계시가 먼저입니다. 계시하신 바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선지자들은 예언을 했던 것이지, 계시 없이 단지 저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결과로 구원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고 할 때 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성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이신 것이지 사람이 주체로 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딤후3:16).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또한 기록하게 하신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입으로 내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여러분, 성경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모세오경을 기록한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시대 속에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정경으로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이고 그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의 참된 저자는 오직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물론 각 위격으로 성경의 참된 저자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에서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면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신약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 성부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하면서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성자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표현에 방식에 있어서는 각 위격에게 돌리면서 성경의 저자를 때로는 성부 하나님으로, 때로는 성자 하나님으로, 때로는 성령 하나님으로 말씀하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의 참된 저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기록하게 하셨는가? 십계명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셨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외에는 다 사람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면서 기록하라고 위임하시거나(신31:19, 계1:19), 성경 기록자로 하여금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딤후3:16). 사람의 경우 누구도 예외 없이 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모습 가운데 있지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실 때는 그런 모든 오류로부터 지키셔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오류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지금 사도 베드로는 구약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마음속에 감동하셔서 구원에 대하여 예언했다고 하는데,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되, 특별히 그의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할 때 그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할 때 그의 부활을 예언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미 구약 선지자들조차 그리스도와 관련된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까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는 어려움이 없지 않으나, 고난과 고통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고난은 영광을 위한 필수 과정처럼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에 대하여 인내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영광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이 어떻게 해서 보장될 수 있었는가?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을 다 채우셨기 때문에 자신도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몸 된 교회를 위해 영광을 보장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약에 와서야 비로소 증거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선지자를 통해 증거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서도 이미 알리신 말씀이었는데, 누가복음 22장 25절 이하 27절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 성경의 기록이 누구에 대한 것인가?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 구절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한 부분만 언급해 보자면 이사야 53장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이사야 53장 3절에서 5절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의 고난을 설명하고 있는데,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이어 10절에서 12절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특히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긴다고 말씀하는데, 그의 고난과 관련된 모든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헛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유익을 받는가? 많은 사람이 유익을 받습니다. 택자요, 하나님께서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른 자들요,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만이 아니라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특별히 그의 고난, 고난 이후 영광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고난은 결코 헛된 고난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을 위한 고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사도 베드로를 통해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런 표현까지 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있어 뭔가 부족함이 있는가?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그의 고난은 불완전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속과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완전하게, 그것도 단번에 완성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요19:30).
그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하지 않지만, 아니 충분하고 완전하지만,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참함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유익하게 한 것처럼 자신도 그리스도와 동일한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의 모든 지상에서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고난 이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을 생각합니다. 고난은 빼고 영광만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반드시 고난을 통과하고 영광에 이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을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고난이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모든 영광을 우리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위로가 있는 것이고,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11절 마지막 부분에서 누구를 또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한다고 되어 있는데, 개역한글번역에서는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되 언제, 어떤 때를 지시하시는지 조사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알려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경우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다면 신약의 경우는 오신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할 수 있는데, 오신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오실 날, 다시 말해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도 성경은 알리신 바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경우 지금까지 계시되어 온 내용, 그리고 자신이 받은 계시를 근거로 상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점은 우리도 성경 앞에서 본 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풀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계시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할 때 상고하는 자세, 연구하는 자세, 부지런히 살피는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 17장 11절의 말씀의 자세와 같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그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은 받는 자세, 그러면서도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자세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런 구약 선지자의 구원에 대한 예언에 대하여 오늘 본문 12절은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선지자들의 예언은 당시 백성을 일차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구약 백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구원의 복음과 관련된 예언과 관련해 섬긴 일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 다시 말해 신약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까지 알게 된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계시가 없었다면 그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드러내시고 알려주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조금 더 설명하기를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를 알게 하신 이가 누군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이라는 것이고, 바로 성령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 전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에게 알리심으로 너희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에 대한 예언, 복음의 소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사도 베드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천사조차 살펴보기를 원할 정도로 구원에 대한 예언, 복음의 소식은 귀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을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부요하게, 더 풍성하게, 더 판명하게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선지자들도 복음의 소식,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 고난을 받으셨지만 결국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고 고난 후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선지자 당시 구약 백성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의 복음이 마치 그들 자신보다 우리를 위한 것으로 있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는 복음을 부요하게, 풍성하게, 판명하게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까지 깨닫는 것도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의 지혜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약 백성보다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 더 부요하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고 한 것처럼 지금도 성령 하나님의 조명의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13절의 내용을 앞서 언급했지만 이런 구원의 은혜 때문에, 그리고 구원의 확실함 때문에, 7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있는 자로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래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상에 살지만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인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가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의 내용들을 사모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이 있도록 하셨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소망하며 사모해야 할 것이 지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몸 된 교회의 머리조차 고난을 받고 난 뒤 영광을 받으셨다고 할 때 그 영광은 결코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소망해야 할 영광 역시 지상에 있지 않으며 그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구약 선지자들조차 알았고, 우리를 위하여 예언하였다고 한다면 그만큼 부요하고 풍성한 내용으로 우리는 구약 백성보다 더 나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지난주에 잠시 언급했지만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원망과 불평만 하다가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시험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고통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실 뿐만 아니라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