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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웅변 40년 회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대전지역) 스피치 트렌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유행은 온갖 장르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의상의 시대적 변천이나 유행가의 시대적 변천이 그 시대의 환경이나 주어진 여건에 맞추어 변화하게 되고 그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문화의 트렌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민주화에 열망했던 7,80년대의 암울했던 그 시대에는 미니스커트나 장발 그리고 청바지와 통키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대세를 이루었고 영화나 음악까지도 시대 저항적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돌로 대변되는 한류가 문화의 컨텍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처럼 시대별로 유행이 변하는 것처럼 스피치도 각 정권이 탄생할 때 마다 조금씩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웅변을 통해 스피치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된 시기가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4월경 이었고, 줄곧 40여년 넘게 웅변계의 외길을 걷는 스피치의 전문가라고 자부 하고 있으니 시대에 따라 변하는 스피치의 유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5~60년대의 스피치
필자의 출생년월이 61년 4월생이고 보니 자유당 시절의 스피치 유형에 대해서는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접해볼 기회도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선배들의 이야기나 자료를 통해 가늠해 볼 수밖에 없는데 후배들을 위해 미천하나마 이야기를 하
고자 한다.
방송 매체로는 라디오가 유일했던 이승만 정권 시대 전후(1950∼60년대)에는 호흡이 길고 비장감
마저 감도는 유창한 스타일의 스피치가 인기였다.
말로 모든 상황을 묘사해야 했던 방송 아나운서들의 스피치에도 복문(複文)과 만연체[蔓衍體] 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웅변조가 많았다.
자유당 시절의 대중연설 자료를 당시 필자의 스승인 김공 (金功)선생님께서 닐 테이프로 보관을
하고 계셨는데 중학교 시절 2학년 때인가 귀한 자료를 들려 주셨다.
해공 신익히 선생님과 유석 조병옥 박사 그리고 서재필 박사의 선거 연설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
는데 대체적으로 말의 템포가 느리고 장황한 수식어가 많은 편이었으며 말을 길게 길게 늘여서 말
하는 식의 연설 이었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의 연설 경우 한강 백사장이나 학교 운동장을 빌어 유세를 하곤 했는데 라디오
가 방송 매체의 전부이던 시절 멀리서나마 후보자의 얼굴도 보고 목소리라도 들어야 되겠다 싶어
그야말로 유세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방송장비가 그리 좋지 않았던 시절 스피커도 나발 모양이었는데 말을 빨리 하면 전달력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에 말을 길게 하여 멧세지를 전달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7~80년대의 스피치
서두에도 밝혔듯이 74년 웅변에 처음 입문을 할 당시
유신 헌법 개정이후 관. 단체 주도의 계몽성 웅변대회가 주를 이루었고 웅변의 황금시대가 도래할
때도 이때이다.
새마을 4-H 웅변대회. 국민 총화합 웅변대회. 유신헌법 0주년 기념 웅변대회. 향토예비군 창설 기
념 웅변대회. 6,25 반공 웅변대회. 이승복 추모 웅변대회. 납세의무 웅변대회. 육영수 여사 추모 웅
변대회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웅변대회가 전국 각지에서 기관과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웅변대회에 나가 상장과 커다란 트로피를 받으면 학교에 가지고 가게 되는데
매주 월요일에는 애국 조회의 날이어서 전교생 앞에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다시 상장을 수여 받는
영광과 함께 시범 웅변을 했던 시절이니 공부는 좀 못했어도 영웅 부럽지 않았던 시절을
당시 웅변을 했던 동지라면 느꼈을 것이다.
60년대에 선배들이 스피치 1세대라고 한다면
70년대에 웅변을 했던 사람들이 웅변계의 2세대들인 셈이다.
대전에서 1세대를 호령했던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의 면면을 보면 조상환, 김광수, 최병일, 이용부,
김 공, 강희면, 이성권, 이헌성, 최병희 선생님을 뽑을 수 있고 이어 2세대를 평정했던 인물로는 김
용현, 김충남, 곽광옥, 이진태, 오남세, 심정수, 양주형, 유완식, 박덕수, 이병배, 김인식, 김문규,
박현호, 이진훈, 장창순, 김 진, 최한순 등을 열거 할 수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작고하신 선배님들도 많이 계시고 연로 하셔서 현역에서 은퇴를 하셨거나 전업
을 하셔서 웅변계를 떠난 분도 많이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웅변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40년을 넘게 웅변인의 자부심을 갖고 외길 인생을 살아온 필자도 나이 50이 넘었어도
선배님들의 재롱을 피워야 하는 막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많은 후배들이 양성이 되고 명맥
을 유지하는 스피치의 활성화에 작은 밀알이 되고 한다.
70년대 당시에는 학원의 개념이 아니라 당신이 차린 사무실에 연습생들이 일정부분의 교습비를
내고 연습을 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선후배의 위계질서와 의리만큼은 대단했었다.
은행동을 중심으로
라이카 예식장 옆 2층 건물에 이성권 선생님의 전국웅변협회가 있었고
대흥4거리 박산부인과 맞은편 건물 생문방 한의원 2층에 김 공 선생님의 국민언어심리연구원,
목척교 가기 전 가구 4거리 4층에 오남세 선생님의 한국 예술학원,
그리고 원동 상가 4층에는 최병일, 최병희 선생님의 중앙언어문화연구원,
중동 한약거리 4층에 이헌성 선생님의 고려웅변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당시 대전에 5개의 웅변 학원이 자리를 잡고 연습생을 훈련 시켰다.
필자가 처음 웅변에 입문을 할 당시에는 스승님이 누구냐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다 달랐는데
중앙언어문화연구원의 최병일 사단, 전국웅변협회의 이성권 사단, 국민언어 심리연구원의 김공
사단 등 스승의 이름자를 따서 000사단이라 칭 했는데
그중 최병일 사단의 원생들이 실력도 제일 출중했었고 대전의 베스트 연사를 가장 많이 배출을 한
명문 사단으로 이름이 높았다.
필자는 김공 사단의 연습생 이었다.
- 2편에 이어 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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