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것
옥따비오 빠스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
해설 민용태
* 굳이 불교의 ‘만물무상’이나 플라톤의 “현실 세계는 가짜다”(즉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모방이다)를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문득,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램프가 진짜 여기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램프를 바라보는 나의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를 의심한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항상 거울을 통해서나 무엇에 비추어서 본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훨씬 확실하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 본다는 것처럼 불확실한 건 없다. 그 보는 주체인 눈의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두 불확실할 뿐, 그러나 우리는 의심없이 이 램프는 분명히 존재한 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 “하얀 불빛”도 지금 책상을 비추고 있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물론 글을 쓰는 이 손도 의심할 나위 없이 여기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 이 불확실한 나의 눈이 바라보는 실체는 실제 있는 것인가?
우리가 말을 하고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참 신기하다. “사랑해!”라는 말을 말과 동시에 동가치로 알아듣지 못한다. 반드시 말한 뒤, 즉 그 말소리가 사라진 뒤에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군요!” 라고 알아듣는 이 말뜻의 이해는 정말 네가 한 말의 뜻인 것인가, 아니면 그 겉껍질이나 흔적뿐인 것인가? 도대체 지금 내가 알아들었다고 하는 네 말의 뜻은 네가 한 말과 구체적으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닌가?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믿을 뿐. 이 사실만은 증명할 수 없어도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기보다 확실해야만 하는 실존의 보루다. 다만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이 말조차도 허상과 실상 사이 어딘가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 철학은 시가 아니다. 사고나 관조의 깊이가 곧 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철이 들고 책을 읽고 강의를 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소위 지성인이라는 위치에서 옛날 가곡을 부르듯 서정을, 시를 읊어서는 어딘가 진솔하지 못한 데가 있다. 삶에 대한 느낌과 영혼의 파동을 넘어, 존재의 불확실성, 그 가벼움에 대한 관조가 오히려 진정한 시취로 육박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옥따비오 빠스를 만난다.
책 - 태양의 돌 - 라틴 아메리카 현대대표시선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