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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망교회 2023년도 시리즈 설교1>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주안점:
비영리단체인 ‘바이블 프로젝트’가 제공한 성경연구 동영상으로 설교를 시작할 계획을 가지고 2023년을 출발했다. 그 첫번째 시리즈는 성경에 대한 소개다. 이것은 11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8과까지만 하고 시편은 나중에 별도로 해도 될 것이다.
설교 일정:
시리즈 주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11과
② 01. 15 - 성경 이야기
③ 01. 22 - 성경의 문학양식
④ 01. 29 - 고대 유대 묵상문학
⑤ 02. 05 - 성경 속 이야기의 줄거리
⑥ 02. 12 - 성경 속 등장인물
⑦ 02. 19 - 성경 속 이야기의 배경
⑧ 02. 26 - 성경 속 이야기의 구성패턴
⑨ 03. 05 - 성경 속 시의 기법
⑩ 03. 12 - 성경 속 시의 은유
⑪ 03. 19 - 시편
<시리즈 설교: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2과 성경의 이야기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설교 목적:
나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영을 말한다. 그리고 그 경영은 대리인을 통한 위임통치다. 여기에 세상을 맡은 대리인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 중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대리통치국가로 부름을 받는다. 제사장 나라를 말한다. 그리고 그 통치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오셨으며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심으로 그 사역을 다하셨다.
그런데 바이블 프로젝트가 들려주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대리인인 인간이 그 소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는 존재로 세움을 입었음을 나타낸다. 인간은 선악을 정의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여 자유와 번영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선악을 재정의하는 잘못을 범하여 혼돈과 공허로 돌아갈 것인지를 선택한다. 성경은 인간의 선택이 결국 바벨탑 사건으로 대표되는 바벨론 문화를 낳았다고 소개한다.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삶은 결국 동쪽의 끝인 바벨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바벨론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대리인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들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선악을 재정의하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자유를 잃고 터전을 잃은 황량한 곳에서 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창조 이전의 공허와 혼돈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한 지도자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여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이라고 바라본다.
그 후에 세월이 흘러 나사렛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다시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새롭게 가르치셨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지혜와 능력이었다. 그러나 악한 세력에 붙들린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사방에 전해졌다.
사도들은 부활 사건을 경험한 후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심을 깨달았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종의 모습이라고 제자들은 설명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예수를 만인보다 높이 세우시고 하늘로 올리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높이신 분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며 다시 언약을 맺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사도들은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한 교회는 예수를 본받아 용서받은 대로 용서하고, 은혜를 받은 대로 은혜를 베풀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운동’이며 복음전파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교회는 사방에 퍼졌으며, 때로는 외적인 박해가 있고 때로는 내적인 갈등과 타협이 있었지만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는 요약된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바탕을 두며, 그 계획을 실행하는 방식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다. 그것이 율법의 핵심이며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진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이 땅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핵심 줄거리를 구성하는 소재다.
설교 개요:
1. 성경 이야기의 핵심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
2. 성경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는 무엇인가?
3. 바벨론과 하나님 나라
1. 성경 이야기의 핵심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
지난 주에 우리는 성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나온 책이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적인 고난을 겪은 후에 조상 대대로 섬기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 39권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록한 글이 모여 신약성경 27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가진 성경은 모두 66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셋으로 나누어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각각 토라, 네비임, 케투빔이라 하는데 그 첫 글자를 모아 ‘타나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타나크는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39권을 부르는 유대인들의 명칭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움으로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깨닫습니다. 또한 성경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이며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를 배웁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인류에게 정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인생의 길을 찾고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성경은 정말 소중합니다.
저는 우리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으로부터 참된 유익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껏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을 설교했는데 지금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 두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의 이야기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즉,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진 작은 도서관과 같은데 그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이야기(스토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2년 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의 부제는 ‘성경이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서사, 내러티브)를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고 익힌다는 말은 성경 이야기를 배우고 그 핵심을 이해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배웁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떤 이야기인지에 대하여 바르게 배우지 않는다면 성경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그릇된 이해를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적인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 이야기를 잘못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 시절에는 성경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구도자인 신자들에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의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경의 해석에 대하여 어떤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오해는 이런 것입니다: ‘성경이란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떤 본분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어요. 이 설교자는 이렇게 설교하고 저 설교자는 저렇게 설교하잖아요!’ 라는 식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결국 성경말씀이 가지는 권위 자체가 흔들리게 되어 결국 아무 말씀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고 그 감동과 깨달음을 나누다 보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처럼 다양한 빛을 비추는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빛을 비추어줍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과 주장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이단을 경계한 까닭은 그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그릇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건전하고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면 이단의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생에서 그릇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마음을 기울이는 부분은 위의 그릇된 두 가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모호한 신자로 살아갑니다. 이런 저런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결국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자는 그 어떤 결단이나 헌신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가 아닙니까!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 신앙인은 맛을 잃은 소금이며 꺼져버린 등불과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이해는 신앙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제입니다.
신앙인이 빠지는 두번째 함정은 이단 사상입니다. 예컨대 신천지 집단에 빠진 사람들은 이만희 씨가 가르치는 성경해석이 가장 옳으며 그들의 가르침과 필적할 수 있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맹신하는 신자들도 자신이 배우는 교훈에 대하여 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때에 이런 함정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반석이 아니라 함정인 이유는 그런 집단에 빠지면 반듯한 시민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비인간적이 되고 비윤리적이 된다면 그 신앙은 도리어 우리에게 해로운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신앙을 가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서 분명한 가치관과 신념이나 본받을 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례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신앙이나 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길을 찾고 묵묵히 걸어야 하는 구도의 길입니다. 그런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진지하게 연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요? 그 핵심이 되는 줄거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성경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는 무엇인가?
성경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공허하고 혼돈한 세상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란 ‘황량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농부나 목자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 창조 활동을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세상을 인간에게 관리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하는 관리자요 대리인입니다. 그런 임무를 맡기시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인간을 들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그 소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비결을 두 나무 이야기를 통하여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얻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참 특이합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과 악을 결정하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 10, 12, 18, 21, 25, 31). 선한 것과 악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8).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고 먹음직하다고 생각하여 따먹으면 그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여 많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가 그랬고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3:6, 6:2).
성경이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대리인인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마음대로 선과 악을 정하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악의 기준을 외면하고 자기가 선악을 결정하는 행동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는 세상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대신에 혼돈과 추함을 발생시킵니다. 그 결과 사람 사이에 의심이 생기고 자기방어적이 되고 분열하고 마침내 서로를 해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 바벨론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그곳은 악을 선이라고 재정의하는 혼돈과 흑암의 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바벨론의 땅에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혼돈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하여 한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그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면서 온 세상을 위한 새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옛날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두 나무 앞에서 온 세상을 위한 대리인으로 일을 맡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산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따른다면 그들은 온 세상을 위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선악을 재정의하라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민족을 흩어버리셨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이런 반복은 그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면, 세상을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가꾸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그 대리인의 연약함으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울한 이야기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선악을 마음대로 정하라는 악한 자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새롭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질병과 가난, 그리고 죄로 고통을 겪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욕심에 묶여 살던 사람도 자유를 얻고 사람답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설명하심으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악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에게 속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을 싫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시며, 하나님이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하늘로 높이신 주님이시라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용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그것이 온 세상에 흩어져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제 교회는 새 아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지음을 받아 다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교회는 새 사람으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대신에 나무 십자가 앞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또한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산에 서서 그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 온 세상을 위한 빛나는 모델 공동체를 세울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새로운 이스라엘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동역자, 그리고 자녀이자 상속자로 새로운 길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교회로 이어지는 길고 긴 이야기이지만, 우리들이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걸어간 바로 그 대열에 서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성경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받고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교회도 성경 이야기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이 유혹과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교회도 동일한 유혹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를 가로막는 세력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날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합니다. 이것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3. 바벨론과 하나님 나라
성경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반면교사가 되는 이들은 역시 신천지 집단입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집중하면서 마지막 날에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는 곳이 신천지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언의 성취는 ‘신천지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투쟁과 여러 활동’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신천지는 자신들의 집단을 신천지라고 부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축소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롭게 고쳐지고 회복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던 바로 그 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땅이 공허하고 혼돈할 때에 그곳에 질서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아름다운 땅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그것은 한 집단의 이야기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한때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빠져 폐쇄적인 종교적 우월의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계시하시고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새 창조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방식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삶으로 나타납니까? 그 삶은 선악을 정의하는 권세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삶입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다만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성경은 선악과를 먹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가 바벨론이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라고 소개합니다. 바벨론은 바벨탑으로 대표되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벗어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온 갈대아 우르 땅은 바벨론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쫓겨나서 포로로 끌려간 곳이 바벨론입니다. 그곳에 끌려간 삶은 공허와 혼돈,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무너지는 이 세상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바벨론으로 인식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당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바벨론의 땅에서 불러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신 까닭은 그들을 자기 아들, 곧 자기 상속자로 삼으셔서 열방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열방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말은 공허하고 혼돈하게 된 세상을 다시 질서와 생명으로 가꿀 대리인과 관리자로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준행할 때 세상에 복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어디가 지옥입니까? 바벨론의 문화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어디가 바벨론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선하다 하신 것을 악하다 말하고, 하나님이 악하다 하신 것을 선하다고 재정의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겸손하게 섬기는 것을 어리석고 바보같다고 여기는 곳이 바벨론이며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경험합니다. 교활하게 사람들을 속여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을 재주가 있다고 하고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곳이 바벨론이며 그런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럽고 사람들이 쉽게 목숨을 끊습니다.
어디가 천국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그곳에서는 지식이 많고 힘을 가진 사람이 가장 약한 사람을 섬기고 자기를 내어줍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먼저 대우를 받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잡도록 배려됩니다. 천국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경력자만 우대 받는 세상이 아니라 오후 늦게 포도원이라는 일터에 와서 일한 사람도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세상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자기 생각과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의 직업과 성격과 외모 또는 출신 배경과 취향에 대하여 판단하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모든 사람의 인격이 존중받는 이유는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높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배우고 그 이야기가 어떤 줄거리이며 무슨 교훈과 희망을 들려주는지를 알아갈 때 우리는 바벨론과 같은 혼돈의 세상을 점차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일을 하기에 너무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되지만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꿋꿋이 일어나 구도의 길을 걷습니다. 그럴 때마다 겨자씨 같은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정말 부지런히 배우고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결국 지옥 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 자손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입니다(사 44:3~4). 그래야 우리의 가정이 복을 받고 우리나라와 세계 만국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희망과 꿈을 가지게 하는 영감이 있습니다. 성경이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의 책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경의 '문학양식'(Literary Style)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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