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으로 향하는 길 임고서원 안내판이 보인다
예전 TV에서 주의깊게 보았던 것이 생각나 옳커니하며 들렀다
이 서원은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시작하였다.
1554년(명종 9)에는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사액 된지 불과 5년 만에 사액되었으므로 초기 서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장현광(張顯光)과 1787년(정조 11)에 황보 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장현광이 근찬한 상량문 글이 강당에서 보인다
최근에 제향을 올렸는지 제향의식 거행자들도 보인다
1965년에 복원되어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庖舍)·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 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유설 芝峰類說》 목판 71판, 《포은집》·《어사성리군서 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엔 최근 만들어진 것 같은 정몽주 신도비가 있는데 서인학맥 중심인물 김수항 전 김수증 서 송시열 찬으로 되어있다
남인의 고장에 왜 서인들 흔적을 거대하게 세웠는지 아마도 정부의 권력을 추종해서 이런 모습이겠다
서인들의 행태가 사림의 도와 어긋났다 생각한다면 이는 포은에게 또다른 치욕이 될 수 있다 서인들은 포은을 이용만 할 것이다
사실 정몽주(鄭夢周)의 화상을 모시는 가묘(家廟)를 지어 봉사하도록 한 이는 영남 남인의 원을 수리해 관철시킨 우리 수촌 오시수 공의 업적인데 그런 역사는 일반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
서원 밖 오른쪽 한 귀퉁이에 임진왜란 때 포은의 영정과 위판을 피안시킨 한 선비의 기적비가 있다
그리고 그 오른편 산으로 원래 만들어졌던 서원의 모습이 있다 지금까지 모습은 임고서원 성역화로 옮겨 새로 만들어진 서원이다
역사가 깊은 이 서원이 훼철된 것은 개경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포은 선생을 향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정화 하였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 선생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서원 은행나무가 웅장하게 있다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현재의 위치에 1600년경에 복원하고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는 5.95m이다. 가지는 동쪽으로 9.6m, 서쪽으로 1m, 남쪽으로 9m, 북쪽으로 9.5m로 퍼져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이다.
서원 앞 개성 선죽교(선지교)를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에 의한 이 선죽교 사건이 없었으면 정몽주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몽주 후손 정호인이 개성유수로 있을 때 선조유허지인 선죽교에 우마차가 다니는 것을 막기위해 난간을 설치한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선죽교 글씨는 한석봉 글씨를 탁본해 쓴 것이란다
서원 왼편엔 포은유물관이 있다
정몽주는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이다.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며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그런 그가 간신에서 절의지사로 바뀌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역사란 것으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극과 극으로 바꾸게 하는데 이 역시 사람의 힘이니 역사란 무엇인가?
유물관을 나오면 그 오른편 동산으로 오르는 곳에 조옹대가 있다
조옹대는 선생이 낚시를 즐긴 곳이라는데 세월을 낚았던 낚시인가?
또 무괴정이란 현판이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뜻이다
퇴계 이황의 시판등 여러 인물들의 시가 현판화되어 있다
임고서원 둘레길도 있어 조금 올랐다
조옹대 밑 연못도 보인다
이곳의 암질이 퇴적암 같지 않게 지층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깍아지른 주상절리 같은 절벽들이 보인다
둘레길에서 내려오면 주차장 옆 계현재가 있다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 선생의 부 일성부원군 운관(云瓘) 묘와 어머니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이유이다. 그 제실이 계현재이다
조옹대 앞 연지 근처에 오래된 성당도 있어 들렀다가 포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