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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4
이사야 29장 16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우리가 살피고 있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에 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삶의 규범이요 규칙으로 선과 악의 기준, 의와 불의의 기준, 거룩과 불결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데, 모든 율법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에 대하여는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 없습니다. 절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는 미움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항상 어떤 방향으로 있는가? 미워하는 방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마음의 성향이 율법을 통해 나타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것으로 인해 억제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죄와 비참함은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탓이 아닌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문을 보시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6문.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창1:31), 또한 그의 형상대로(창1:26-27),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골3:10, 엡4:24).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삶으로써 그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시8:4-9, 고후3:18, 계4:11).
성경의 첫 번째 책이 창세기고, 창세기의 시작은 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그리고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1장 전체를 통해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모든 것을 지으시되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6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된 모든 만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선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의 역사 속에 죄가 있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모든 만물에 대하여 창조하셨다고 할 때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마지막 날에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창조될 때 사람은 악하고 패역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지금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 창조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상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특히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우리의 모양’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두 가지 표현 때문에 형상과 모양은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한 부분은 잃어버렸지만 한 부분은 남아 있어서 그 남아 있는 것으로 인간의 자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은 동의어입니다. 26절에서는 형상과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한 가지로 표현합니다. 26절의 두 가지 표현은 27절 한 가지 표현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 1절에 보면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절로 가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죄로 말미암아 사라졌지만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합니다. 형상과 모양이 다른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형상이라는 말은 쉽게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성 요소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보다는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영혼만 가지고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영혼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은 한 번 창조된 이상 소멸되지 않고 불멸합니다. 육체는 흙으로 지어져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불멸합니다. 또한 영혼은 지식과 의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선과 악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고 선과 악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영적인 불멸의 본질 그리고 지식과 의지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개혁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골로새서 3장 10절과 에베소서 4장 24절입니다. 우선 골로새서 3장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은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엡4:23)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과 의와 거룩과 같은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지식과 의, 거룩을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연결시켜 말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로서 지식을, 제사장으로서 거룩을, 왕으로서 의롤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 이런 직분을 나타낼 수 있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지식도 주셨고 이웃에 대한 지식도 주셨습니다. 이 지식 안에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자로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과 함께 의와 거룩도 주셨는데, 절대적인 의 절대적인 거룩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의 변하지 않는 거룩은 아니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성향이 의와 거룩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로 의와 거룩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다시 보면 하나님은 이런 내용에 따라 사람을 선하게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형상에 대하여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직접적으로 지식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는가? 요리문답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삶으로써 그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그런 앎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 결과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삶으로 그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다시 요리문답 6문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사람은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에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사람의 이런 부패성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문입니다.
7문. 그러면, 사람의 이런 부패한 본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답.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옵니다(창3:1-24, 롬5:12,18,19).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이 부패하여져서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출생하는 것입니다(시51:5, 창5:3, 요3:6).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무엇보다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타락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것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난 뒤 동방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지으신 사람을 두시면서(창2:8)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불멸하는 영혼을 육체 안에 두시고, 지식과 의지를 주셨습니다. 또한 의와 거룩도 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면서 모든 만물을 통치할 수 있도록 권한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통치권을 가지고 얼마든지 지식을 나타내고 의와 거룩을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통치권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기에 모든 만물을 통치하게 하셨지만,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라고 해서 그가 창조주인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려야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으뜸인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는가? 자기의 지위를 지켰는가?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의 유혹의 말에 근거하자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먹었습니다(창3:5-6). 그러므로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행위 자체는 고작 열매 하나 따먹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죄는 지극히 크고 사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과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불신앙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멸과 불순종도 있습니다. 받은 은덕에 대한 감사하지 않음도 있고, 그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고 할 때 그의 죄는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의 결핍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뱀을 도구로 한 마귀 편에 섰다는 점에서 배도(背道)의 죄도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죄의 원인을 추적해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은 마귀의 사주가 있었고 또한 인간의 자유 의지의 방치가 있었습니다. 먼저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에 여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말씀의 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여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씀을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마귀는 쐐기를 박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아지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마귀의 유혹에 대하여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마귀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았지만 말씀으로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식이 있었고, 자신에 대한 지식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지식이 있었고,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와 거룩함도 있었습니다. 다만 절대적인 의와 거룩함은 아니었습니다. 변할 수 없는 그런 의와 거룩함은 아니었습니다. 의지의 자유가 있다고 할 때 의지를 방치하기만 하면 의와 거룩함에서 이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탓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의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한 결과로 말미암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그 상태에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는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타락 이후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알리시며,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으로 보고 그 죄를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생명 존중의 원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고, 비록 타락 이후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3장 9절에도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혀의 사용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에 대하여 금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도 역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이해에서 보자면 저주하는 것도 사실은 살인과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그 근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인간이 타락했지만 타락 이후로도 인간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에 따른 개혁신앙은 이 사실을 철저히 거절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뿐이다.”(1559, 1권 15장 4) 벨직 신앙고백 14장도 다르지 않게 고백하는데, 사람의 창조와 타락에 대하여 언급하고 난 뒤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또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 완악하고 부패해져서, 자신이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시94:11, 롬3:10, 8:6), 다만 몇 가지 작은 흔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흔적들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합니다(롬1:20-21).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는 말씀으로 사도 요한은 인간을 어두움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은 변하여 어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엡5:8).”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그리고 그로 인한 타락은 요리문답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들만의 문제로 남는 게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이 부패하여져서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출생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시편 51편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다윗 스스로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모든 인류가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함께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맺은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언약으로 그가 순종하면 모든 인류가 순종하는 것과 같고 반대로 그가 불순종하면 모든 인류가 불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로마서 5장입니다. 우선 1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런 표현이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도 나타나는데, 15절 중간 부분에 보면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16절 중간 부분에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17절 상반부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18절 상반부에서는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19절 상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간단히 말하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 아담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 모든 인류가 잉태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가 바로 원죄입니다. 죄란 무엇인가 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은 이렇게 답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시누스는 죄에 대하여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의의 결핍이든 혹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성향이나 행동이든, 무엇이든 간에 율법을 대적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며, 피조물을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가? 이처럼 아담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원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사야 29장 16절입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아담과 하와가 첫 범죄 이후 자신의 죄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말했습니까? 탓을 했습니다. 창세기 3장 9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9-13) 내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심지어 하나님 탓으로까지 돌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문도 사실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은 그들의 비참함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교리를 말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이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과 야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받은 것으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왜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가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잉태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길 싫어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조차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자세들은 오늘 본문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는 말씀은 다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또 자신을 창조주보다 더 총명한 것처럼 말하는 그런 교만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함부로 입을 엽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는 것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 1,000분의 1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수치로 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그런 지혜와 지식이 유한한 뿐입니다. 무한한 지식 가운데 일부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셨기 때문에 알 뿐입니다. 과학에서는 거시세계 미시세계를 말하고 또 광활한 우주를 연구하기도 하고 원자보다 더 작은 물질에 대한 연구도 하지만, 그리고 이것을 발견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고 그런 피조물이 본래부터 있었지만 때가 되어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사람이 찾은 게 아닙니다. 과학이라는 발전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발전시켜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말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 편에 잘못이 있는 양 교만하게 말하는 모든 내용들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평가 외에는 남지 않습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11장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왔다고 할 때,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출생한다고 할 때 결국 모든 사람은 죄 아래 놓이게 됨을 말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문을 보시면 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문.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선은 조금도 행할 능력이 없고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녔을 만큼 부패해 있습니까?
답. 예, 정말 그렇습니다(창8:21, 요3:6, 창6:5, 욥14:4, 15:14,16,35, 사53:6).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요3:3,5, 고전12:3, 고후3:5).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설명하도록 하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타락했지만, 부패했지만 완전히 타락하고 완전히 부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우리가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고 할 때 어디까지를 인정해야 하는가? 선이라고는 조금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우리의 모든 것이 악에게로만 기울여 있을 만큼 부패함 가운데 있다는 것까지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어떠한 소망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