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간 경주
제4편-불곡마애여래좌상(佛谷磨崖如來坐像)과 서출지(書出池)
삼국유사에는 남산(南山)과 지금의 경주(慶州)를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이라 하였습니다. “절이란 절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이 서있는 모양은 기러기가 줄지어가는 듯 하다.” 참으로 절묘하게 남산과 경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유치환 시인도 “신라인들은 남산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부처를 찾아냈다” 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경주 남산(南山)은 후백제 견훤의 침입을 받아, 포석정에서 통일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신라가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니, 남산(南山)은 신라의 개국에서 흥망까지를 함께 한 역사의 산(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룡암(玉龍庵)과 보리사를 둘러보고 같은 길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아서, 남천 옆 문천길을 따라 해맞이 마을 가기 전, 좌측으로 농로(農路)를 따라 끝까지 가서, 차를 좁은 공터에 세우고 절터 골 능선으로 올라 다시 좌측으로 가면, 산죽(山竹)이 있는 데크 길이 아래로 계단처럼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 테크 계단을 내려서면 불곡마애여래좌상 (佛谷磨崖如來坐像)이 있습니다. 일명 ‘할매 부처”라고 불린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첫눈에 이것은 잘못된 이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단정적인 사견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남산(南山)의 불적지(佛蹟地)를 너무 많이 보아서, 그 옛날 누군가 일반적인 마애(磨崖) 조각도 무조건 마애여래불(磨崖如來佛)로, 착각하여 부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불곡마애여래좌상(佛谷磨崖如來坐像)은 신라 7세기 초에 조성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 26대 진평 왕에서 32대 효소 왕 사이에, 누군가 이곳의 바위를 다듬어 감실(龕室)을 만들고 좌상(坐像)을 조성 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어 민간신앙과 접목하던 시기여서, 죽은 어머님이나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누군가 만든 마애조상(磨崖彫像)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일순간 불곡마애여래좌상(佛谷磨崖如來坐像)의 모습을 보고 지극히 객관적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런 독특함으로 불곡마애여래좌상(佛谷磨崖如來坐像)은 보물 제198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시간이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어, 인근의 맛 집을 찾아 갔습니다. 오후 1시까지 개점을 하는 젊은 부부의 특이한 시당 경영 방법에, 그저 고마움으로 마지막 손님이 되어 식사를 하였습니다.
배가 부르는 눕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식당 앞의 무량사(無量寺) 절간이 소박하고 아담하게 생겨, 멋이 있어 보여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다음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이 무량사(無量寺)에 작은 연밭 연못이 있어 올라보니, 이곳이 사진가들에게 유명한 경주의 서출지(書出池) 였습니다. 저는 우리 야생화만 찍으러 다녔기 때문에, 사실 풍경 사진의 장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곳이 없습니다.
서출지(書出池)는 구전 설화(說話)가 있는 곳입니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 주어서 왕에게 그것을 올렸습니다. 왕은 봉투 속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는 “거문고 집을 쏘아라”라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 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왕비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여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任勣)이라는 사람이 연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하며. 추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2020년 올해 여름에는 이곳으로 출사(出寫)를 와야 할 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