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방첩 부대장 김 재춘은 강 성원 그룹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내사 를 중단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 강 성원. 정 지원 을 중심 으로 한 7 명이 충무로 1 가 사보이 호텔 옆 카네기 홀 2 층에 사무실 냄. 영업 대상 각계 인물 50 명 추려내고 종로 2 가 제일 전당포 건물로 옮김. 건물 2. 3 층을 빌려 ‘ 동양 화학 주식 회사로 위장 함. 위장한 중정 조직팀은 간부급 인사 영입 시작. 뉴욕 타임스 서 인석. 국민대 강사 이 호범. 서울 문리대 교수 황 성모. 대학 강사 이 용남. 민의원 의장 비서관 신 광순. 증권 거래소 이사장 대리 박 동섭. 연세대 강사 박 동윤. 경향신문 논설위원 소 두영. 경향신문 논설위원 장 용 영입.
1962 년 3 월 에는 관리부. 조직부. 조사부 설치. 사무실을 부서별로 분리. 관리부 사무실은 종로 2 가 제일 전당포 건물 사용. 사무 총장은 이 영근. 관리부장 정 지원. 조직부 사무실은 제일 전당포 건너편 건물에 입주. 조직 부장은 강 성원. 조사부장은 을지로 2 가에 사무실 마련. 서 인석 부장. 영입인원 100 명 육박.
군. 검. 경, 합동 수사 본부장 김 재춘 육군 방첩 부대장 에게 올라온 이런 보고 가운데는
’ 낙원동 춘추장 을 1 년간 전세 내어 특수 정치 교육을 하는데 그 방법이 공산당의 남파 간첩 밀봉 교육과 흡사 하다 ‘ 는 좀 과장된 보고도 눈에 띈다. 가족 에게는 말할것도 없고, 훈련생 끼리도 접촉 할수 없도록 비둘기 집처럼 칸막이 를 하고 요강 까지 가지고 들어가 방안에서 볼일을 본다는 식이었다. 이런 교육 방식은 간첩이 관계하고 있을 것 이라면서 황 태성의 이름이 새삼 거론 되었다. 춘추장은 자유당 시절에 정치 깡패 임 화수의 집 이었다. 대지 약 300 평에 양식 과 한식을 혼합한 80 평의 이 건물은 임, 의 몰락 후 한때 고급 요정 으로 쓰인적도 있다.
여기서 재건 동지회 요원 교육을 맡은 사람은 훈련 원장 윤 천주(문교부 장관 역임) 고려대 교수 였다. 윤, 이 황 태성과 관련설 등 남파 간첩과 같은 밀봉 교육 운운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 라고 했다.
재건 동지회 부산지부 책임자 로 뽑혀 춘추장 에서 교육을 받았던 예 춘호(공화당 사무총장 역임)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윤 천주에 따르면 교육은 5 일간의 합숙 - 단체 - 강연, 식 이었다고 한다.
1962 년 6 월 김 재춘은 그동안 입수된 정보를 종합 하여 박 정희 의장 에게 정식 보고 했다.
< 다른 사람 들에게는 정치 활동을 금지 시켜 놓고 비밀리에 이런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각하 ! 장차 혁명군이 민정에 참여하여 정권을 잡겠다는 것 입니까 ? 아니면 김 종필 부장이 단독으로 하는 것 입니까 ?
박 : 그게 무슨 소리야 ? 나는 전혀 모르는 말인데…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 하시오 ! >
박 정희 는 자신이 김 종필 에게 허가한 비밀 동지회 비밀 조직을 전혀 모른척 하고 방첩 부대장 김 재춘 에겐 “ 철저조사 ”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때만 해도 혁명 주체 세력 안에서 민정에 참여 해야 한다는 점, 에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인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는
‘ 양심적 이고 참신한 정치인 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에 복귀 한다 ’ 는 것이 공식적인 대 국민 약속 으로 되어 있었다.
김 재춘은 군. 검. 경, 을 통합 지휘하여 재건 동지회 조직 활동에 대한 내사를 계속 했다.
이사실을 알게된 중정도 대응책을 취해서 양쪽 요원 들은 잦은 충돌을 빚기도 했다. 김 형욱(중정 부장 역임) 길 재호(공화당 사무총장 역임) 등 육사 8 기 최고위원 들이 찾아와
“ 왜, 혁명 동지 끼리 이러느냐 ” 고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김 재춘은
“ 무슨 소리인가 ! 혁명 공약 대로 해야지 ” 하며 원칙론 을 앞세웠다. 김 재춘은 중정이 공수단 출신 차 지철 대위(당시 중정 감찰실 소속)를 팀장 으로 하는 특공조 를 자신의 주변에 배치하여 위협하고 있는데 화가 났다.
< 나(김 재춘) 는 박 병권 국방장관. 김 종오 육참총장. 김 동하 최고회의 재경 분과 위원장. 김 진위 수도 방위 사령관. 유 양수 외무국방 위원장. 유 병헌 장군. 박 태준 장군. 등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 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김 종필의 독주를 개탄 하면서 이런 일은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 했다.
혁명 주체가 두동강 난 것이 바로 김 종필 계의 민정 참여 추진파 와 혁명공약 준수파의 대립이 본격화 되면서 부터 였다.
우리는 수시로 김 종오 총장 관사에서 만나 그동안 입수된 정보를 토대로 사태를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모색 하였다.
중정 행정관 강 성원 등이 재무부와 농협 등에 압력을 가하여 거액의 국고금 을 동원 증권시장을 조작하여 구액을 만들어 그 일부를 재건 동지회에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낱낱이 보고 되었다. (미 발표 회고록) 김 종필을 핵심으로 하는 육사 8 기 출신 영관 장교 들은 군 내부에서 연대장. 작전 참모 등 실병 지휘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고 5.16 쿠데타 에서는 두뇌 그룹으로 등장 했다. 이들은 박 정희 란 항성의 가장 가까운 궤도에 돌고 있는 위성 그룹 이였다. 이들 처럼 혁명에 주도적 으로 관여 하지는 못했지만 계급이 높은 장성 그룹은 하급자 인 김 종필 그룹의 일방적 독주에 기분이 상당히 상해 있었다. 김, 그룹은 민정 참여 쪽이 였고 장성 그룹쪽 은 군 복귀파 가 더 많았다. 이런 식으로 갈라진 두 세력의 갈등을 폭발 직전으로 몰고가 김 종필 에겐 최초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증권파동. 시장 조작 사건 이었다.
박 정희. 김 종필 혁명 주체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고 정권을 흔들어 놓게 되는 그 1962 년 증권시장 조작 사건은 윤 응상(1997 년 작고) 이란 매우 흥미 있는 인물이 주연한 드라마 였다.
1916 년생 인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 이었다. 독학으로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 를 졸업했다. 광복 후 서울에 정착한 그는 귀금속상 을 운영 했다. 교제 범위가 꽤 넓었던 그는 6.25 전쟁 중에 쌍용 그룹 창립자 김 성곤 이 세운 동양 통신 전무. 발행인 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군 의 실력자 이던 원 용덕 헌병 사령관. 김 창룡 특무 부대장 과도 친했다. 윤씨 는 강원도 속초가 전쟁 전엔 전기가 보급 되었는데 수복 후 촟불 신세를 면치 못하는 걸 보고는 사태를 빌려 미군용 발전기 를 구입하여 전기를 공급하고, 동해 전기(주) 를 설립 했다. 1955 년 그는 동해 전기를 이 동근 경향 여객 사장에게 넘기는 대신 한일 증권을 인수 하면서 일약 증권업계에 뛰어 들었다. 그 뒤 6 년간 윤 응상 은 증권시장(당시는 주로 국채를 거래 했다)에서 떼돈 벌이 와 파산 을 거듭하는 파란 만장 한 생활을 하면서 증권시장 의 생리를 체득해 갔다. 증권에 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