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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말씀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입니다. 골1:28,
29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
는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
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곧 제
말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성영님의 지혜로 여러분에게 전해드리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완전한 자로 세워지기를 너무나 원해서 성영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이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듣습니까?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사는 능력이
되기를 참으로 원해서 듣는다는 것을 제가 믿고 있습니다. 왜냐? 그동안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해
서 누누이 다루어 드렸으니, 그 믿음이 되었고 적용하는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능력이 되어 사는 것을 말한다는 것 다 아멘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이 자기의 레마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믿음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 봐라, 기도해
라 이런 간섭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고 말씀을 보는 것이
고 죄를 미워하고 세상에서 떠나 나오는 것이고 핍박을 기꺼이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사랑
하는 일이라는 것을 또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 하신 심영이 가난한 자부터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까지는 이제 삼위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고,
그다음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까지는 수직과 수평적인 관계 즉 하나
님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누가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가, 즉 수직적 관계를 이룬 자가, 수
평적 관계를 이루는 긍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면 긍휼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말에 대해서 이해가 돼야 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
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하신 것은 내가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께서도 나를 긍
휼히 여기신다는 그런 조건의 개념으로 들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듣고 행하는 것
은 그것은 율법 행위요 율법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겼으니까 그 대가로 너도 남
을 긍휼히 여겨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너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하는 식이 되는 것으로서 곧 율
법 행위라는 말입니다. 물론 긍휼히 여기는 것은 곧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데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나한테 베풀어 줬으니 나도 베풀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품앗이 같은 것이 아니에요.
율법 앞에 나를 비추니 하나님께 불의하고 죄를 범하여 형벌에 떨어질 흉악한 죄인이더라 말이지
요. 그런데 그 흉악한 죄인인 나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즉 내가 너의
죄를 대신 지고 죗값을 치러줄 것이니, 그 대신 내게 일생 몸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
라 이런 식이 어떤 조건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긍휼히 여기셔서 깨끗이 죗값을 치러주셨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형벌에 떨어질 내가 이 같은 긍휼을 입었으니 사람이 자기를 안다면 할 말이 없
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을 입었으니, 그 은혜를 안다면 하나님의 그 긍
휼하심이 그대로 내게서 나타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밭에 밀을 심었더니 보리가 난 것이 아니고 그대로 밀이 나와 열매를 맺는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되니 그 긍휼을 입은 내게서 나가는 것은 그대로 긍휼의 마음입니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왜 긍휼함이 없느냐? 답이 분명한 것 아닙니까? 긍휼하심의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느냐? 하나님께 죄를 지은
영혼이라는, 그래서 자신이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게 된 죄인임을 절감하지 못하니, 긍휼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영님의 도우심을 힘입고 말씀의 지식을
따라 믿음이 돼야지 교회 다녀도 '그냥 믿어''예수만 믿으면 돼"하고 나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긍휼의 은혜를 입은 그 감사를 아는 믿음인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과거에, 성영님께서 제게 일방적인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는데 그 중에 "너는 내가 거처하는 움직
이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너는 세상 자랑하지 말라, 세상 것은 자랑할 것
이 되지 못하니 오직 나 예수를 자랑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을 전하는 이 길에 서지 않
으면 안 되게끔 강권하셨기 때문에 처음엔 남편의 목회를 도와야 하는 줄 알고 그냥 마지못해서 하
는 수 없이 순종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목회 장소 등 건물이 있어야 하니, 그때 제 믿
음은 장소를 찾는다고 수소문하여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장소, 건물, 평수 이런 조건
들은 제겐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성영님께서 지시하시고 정해주시면 되지 다른 이유 없는 것이었어
요. 물론 "네 형제 지옥 보내겠느냐?"하셔서 목회지가 인천인 것은 알게 하셨습니다.
그때 인천에서 살고 있던 친정 오빠가 믿는 것은 거절하고 있습니다만, 동생이 목회 장소를 찾는
다고 하니 장소를 물색하느라 스스로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중에 현재 시설이 갖춰진 지하 75평의
지하 교회가 있어 조건적인 것은 당신 맘에는 썩 드는데 어떤지 한번 와보라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거처할 집도 없으면 차라리 텐트를 치고 살지언정 지하는 절대 원치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으로는 더더욱 그냥 준다 해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위한다
고 수고하는 오빠를 생각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없어서 주일을 지나서 가본다고 약속하고, 그
뒤 지하만 아니라면 그 외는 다 괜찮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 성영님은 나와 달리 허락이신가 해
서 며칠 동안 기도하였지만, 답이 없으셨습니다. 하여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월요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예배를 드리라는 생각이 번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예배
하며 기도를 하였는데 그때야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방법과 계획을 버려라, 돈이 얼마가 드
느니, 장소가 좋으니, 나쁘니 하며 방법을 구하는 인간의 계산을 버려라. 내 방법은 사람의 방법
에 두지 않는다. 사람의 방법을 따라 하려 하지 말라. 나의 말에 순종할 때 내가 할 것이다. 나의
일은 방법이 아니라 순종이다. 내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하고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오늘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한 말씀과 연관된 것으로서 제 개인에 해당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누구에게로 향하는가를 내게 가르치시는 뜻이었으며
또한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교회들에게 보이신 것이었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깨달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신 것은 구약 출33:19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
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이 '주여'를 부르고 외치고 외친
다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수는 있어도, 은혜는 은혜 줄 자에게 준다.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를 잘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신 것이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교
회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곳에 은혜 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나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
신다. 바로 은혜 줄 자가, 긍휼히 여길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 줄 자가 누구이며 긍휼이 여기실 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임
을 진정으로 알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용서받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마음에서 인정이 되
어 "아, 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죄인이구나!"라고 탄식하는 자가 은혜받을 자요, 긍휼을 입을 자
입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인 자기의 죄를 보는 자가 하나님의 은
혜와 긍휼을 입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구하는 자, 죄인의 삶을 살던 그 세상
에서 나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을 결단하는 자가 은혜 입을 자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입니다. 그렇기에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자가 심영이 가난한 자요, 심영의 가난을 이해하
게 되고 애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영혼에 깨달아져서 세상을 목적
하지 않는 능력이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았으므로 또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
다. 이같이 심영이 가난한 자에서부터 계속 복이 있나니 하신 천국의 특성들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삶의 예배요, 거룩한 제사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아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능력이 되고자 하는 뜻
은 없으면서, 속사람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열심히 모이기만 하면 뭐 하는 것입
니까? 듣고 안다는 것으로는 능력 아닙니다. 영혼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다는
이름은 있으나 죄인인 척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에
대한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여전히 옛사람으로 행하고 여전히 세상이고 여전히 육을 위한 것으
로 행하는 것이 돼 있습니다. 세상 복을 받고자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고, 인간 자기 생각을
말씀에다 덧붙이고 또 높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인 척만 하는 것에서 나오는 특징입니다. 그러
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이렇게
죄인인 척만 하는 자에게는 전혀 해당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줄 수 없는 종교인에
해당할 뿐입니다.
이 같은 종교인은 평소에는 누구보다 더 감사를 외치다가도 어려운 문제 앞에 놓이면, 자기 양심에
비춰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서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
여 원망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뭔 죄가 그렇게 크다고....내가 뭔 죄를 지었기에 나에
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하는 겁니다. 이것이 죄인으로 예수님께 나와 죄 용서를 받아 예수님
과 함께 있지 않은, 죄인인 척만 하는 자기 양심으로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
고 죄인이라는 말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습관처럼 나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도 그
외 종교들도 다 양심이 가진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신 것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하신 이 하나님의 긍휼은 나타낼 수가 없으니, 곧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 긍휼을 무엇으로 나타내는가 하면, 인간 양심이 가진 자기의
긍휼함, 인간 자기의 그 측은지심에서 나는 긍휼을 나타내러 다니는 것입니다. 양심이 가진 긍휼,
자기가 알고 있는 긍휼, 그것은 곧 불쌍한 사람을 측은히 여기고 가난한 사람이나 병들어 돌볼 사
람이 없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 등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이 말씀을 나에게
하셨던 그때는 내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는 것을 이후 깨닫게 되었고, 그러므
로 교회가 된 내가 할 일은 또한 외형의 건물을 놓고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그런 것을 구할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나로 바르게 알아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전하게
하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겉의 외형적인 것,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
께서 은혜 줄 자, 그 은혜를 진심으로 구하는 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일
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좋다고 작정했다면 모를
까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부귀영화 다 준다 해도 사람의 기분에 맞추는 말 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기 때문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각자 자기 선택이지 여기에 다른 말이 저에게는 필요 없
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기서 드리는 말씀을 상투적인 말로 듣지 않는 복이 있기를 진심으
로 바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모든 사람이 이 긍휼에 대하여 예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인간 열심, 자기 열심의 긍휼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
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런 인간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대로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의 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하신 것
을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도와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불쌍한 사람 도우러
인간 긍휼의 마음 가지고 쫓아다니는 것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몸담은 교회의 이름
이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아지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 하더라도 표적에 맞히
지 못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 자기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은 그런 불쌍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에 쫓아다
니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고 그 죄 용서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또한 죄를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전하여 하나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용서받을 만한 구석을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죄악으로 나간
행악의 종자입니다. 그런데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단을 따라 가인의 길로 나간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악에서 구
원하여 주시는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피 흘리게 하시고 죄 용서의 은혜
를 베풀어주신 것, 그것은 죄인이 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로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누구누구를 불쌍히 여겨 주옵
소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불쌍히 여기시고 죄 용서의 긍휼을 베풀어주셨습
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셨기 때
문에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뭘 또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 기도는 하나님과 사
이클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어도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게 해주시라고, 긍
휼히 여기신 은혜에 들게 해주시라고 하는 기도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하신 이 긍휼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의 긍휼, 죄인
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 긍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제 내가 그
긍휼을 입었으면 예수님의 이 긍휼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 이제 여러분이 다 아셨습니다. 인간에
게서 나는 긍휼의 마음, 자기 착하기 때문에 자기 착함을 드러내고 자기가 마음이 좋으니까 자기
마음 좋은 것 드러내고, 자기가 도덕적이니까 그 도덕적인 것 드러내는 그런 인간 양심의 일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아셨습니다. 인간은 저나 나나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잘난 척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면서 온갖 죄짓고 살아온 죄인이었어요. 그런 죄인인 나를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겨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남의 죄 보고 정죄할 자격 없다는 것 또
한 아는 것입니다. 나하고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하고 비웃을 권리 없다는 것 알게 되는 거예요.
다만 저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죄로 죽은 나도, 또 저 사람도 다 구원하시기 위하였으니 그가 죄를 알지 못하여 영원한 지
옥의 형벌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기에,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저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만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계산적인 것이 없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히 여기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긍휼히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어
디서든지 죄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겁니다. 믿는다면서 긍휼히 여김이 없
으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았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았으므로 그 긍휼의 마음이 있어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시기, 질투, 미움, 원망, 정
죄, 욕심, 탐심의 죄로 살지 않습니다. 그런 자기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아 사단에게 내줘버렸으니
그러므로 정죄의 마음이 없습니다. 남의 죄를 보고 비난도 정죄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정죄할
권리나 자격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
것이 긍휼을 입은 자의 긍휼입니다. 만일 정죄나 미움이나 비난이나 비웃음, 이간질, 용서하지 못
하는 이런 사단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아직 긍휼의 은혜를 온전히 입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으로서 자신이 먼저 긍휼을 입은 자가 되는 것에 온 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불
신하는 가족도 참으로 그들이 구원에 들기를 원하면 그들에게서 다른 어떤 것도 보아서는 안 됩니
다. 자기 속에 절대로 정죄나 미움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세상을 원하고 육의 것들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그 영혼이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는 것이 중요하니 긍휼의 은
혜를 입을 자가 되게 하는 영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신도
하나님 긍휼의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잘돼야 하는, 자기가 원하는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정죄가 있고 분쟁한다
면 그것은 세상으로 몰아내는 것으로서 절대로 구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는 큰 힘이 되는 것
입니다. 참으로 가장 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죄 용서를 알고 구원받게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음이 되었으면 그것은 예수님의 긍휼을 가
진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긍휼의 은혜를 받은 자는 거기에 오만하고 더러운 정죄가 있
을 수 없고,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바라고 원함이 되어서 다그칠 수 없고, 그것
을 위해 힘쓰지 않고 못 한다고 비난하는 말, 정죄하는 말, 분쟁하는 말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 얻게 하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만이 긍휼을 입은 자의 할 일로써, 지
옥의 길에서 건져내는 데 필요하다면 희생하고 포용하고 용납하고 인내하고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믿는다는 사람들이 사실은 긍휼히 여김이 없어서, 아니,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신 그 긍휼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오히려 가족에게 불신을 심어주
는 역할을 힘 있게 잘하였음으로써 마음이 돌아서 버리게 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이 닫혀버리게 하여 돌아설 힘이 없게 한 것입니다. 믿는다는 그 속에 긍
휼은 없고 무엇만 있느냐? 정죄하고 강요하고 자기 틀에다 집어넣으려는 권위주의가 되어서 마음에
상처 주고 독을 뿌려 넣는 것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설 수 없도록 하는 낭패를 당한 예들입니다. 특
히 그 대상이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이 교회 열심히 다녀 구원받
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훌륭한 인물 되고 이름 내고 잘되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들밖에
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 공부 열심히 잘해서 훌륭한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밖에 배운 것이 없습니
다.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세워놓고 쫒아다니는 종교인의 모습밖에 보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늦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기회 주시는 것이라면 지체치 말고 종교인 노릇을 한 자신을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할 것을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종교인 노릇을 한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나 특히 자녀들이 믿음을 잘못 보여서 구원받지 못할 곳,
복음에서 마음이 돌아서 버렸다면 어떤 것도 변명하지 마십시오. 변명은 절대로 해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겠다는 오만이요 교만입니다. 자기중심과 자기 속에 있는 세상을 다 철저
히 금식하십시오. 육체의 밥 굶는 것을 금식이라 내세워서 내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하는 그 더러운
짓들 고만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는지 자신부터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그같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죄인으로서 은혜를 입었으면 자기 안에 긍휼의 마음만 가
지십시오. 하나님의 뜻만 가진 온유한 자가 되십시오. 자기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만이 자기에게 살아 있어야 하지 왜 자기 속에 세상 것을 탐하는 아간을 두고 자녀들에게 그것
을 세워주는 것입니까? 왜 자기 속에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세상 것을 더 좋게 여긴 사울
왕을 두고 있습니까? 이것은 긍휼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왜 세상 것에다
마음을 두고 정죄하고 비난합니까? 마귀는 세상 것을 원하도록 하는 존재요,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하여 지옥의 형벌로 끌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마귀의 편에 서서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는 속을 들여다보면 세상 것을 위해 믿는 것이 되어 마귀에게 푹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백 번 천 번 "나 예수님 믿는다" 말해도 믿는 것 아닙니다. 세상 잣대에 맞지 않는다고 자
기 맘에 안 든다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말 서슴지 않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보
다 더 악한 자입니다. 교만이고 미련한 자입니다. 그렇기에 자녀들의 영혼도 자기 저주에 함께 꽁
꽁 묶어놓은 것이니 그 자녀들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길로 나올 수가 있으며 구원 얻을 길
이 되겠습니까? 자기 속에 그런 교만과 악한 저주를 품고 있으면서 정죄가 있고 비난이 있고 미움
이 있으면 절대로 구원으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믿는다면 세상을 원하고 육의 것들을 원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
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지옥의 길에서 건져내어 구원받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
에 그들이 죄를 알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하는 영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마음
에서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긍휼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만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뭐라고 하십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왜냐? 하나님께서 긍
휼히 여길 자로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이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완성된 것을 보기 때문입니
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로 불신 가족이 돌아오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요,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이요, 착한 행실이기 때문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맛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요, 모든 악을 이기는 빛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복이 있나니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게 되어
지혜뿐 아니라 총명을 주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명예도 주셨던 것을 여러분이 안다면, 저의
이 같은 말씀을 충분히 알아듣는 지혜가 있을 것입니다.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 풀무 불에 던져질
지라도 하나님께서 구해내시겠으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했던, 그러나 그리하셨던 하나님을 여러분
이 진정 안다면,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죄의 정욕을
채워보려고 믿는 것이었다는 것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의 그 본을 보인 것이 아니라, 세상 성공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게 하고, 주님
믿고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한다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좋은 직장, 직업
을 가져야 하니 주님 잘 믿어야 한다고, 그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넣어 주는 것으로 거짓된 믿음
이 되는데로 이끈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백 번 천 번 하나님을 잘못 알았고,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기만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자녀의 영혼도 진정으로 구
원 얻기를 원한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자녀에게도 실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18:6-9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장난삼아, 그냥 예사로 하신 말씀 아닙
니다. 성영님께서 제 앞에다 십수 년 동안 크게 두고 계시면서 이것을 교회들에 분명히 말하라 하
셨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와 온유와 겸손을 배웠습니까?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합니까? 겸손이라 하니까 아무에게나 고개 속이고 아무것에나 좋다 하며 함께하라는 것입니까?
자기 잘났다는 것을 마음으로 으스대며 가슴 내밀고 다니라는 것입니까? 마9:13에 예수님께서 너희
는 가서 내가 긍휼(矜恤)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호세아6:
6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엔 관심도 없으면서 예배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무조건 예배만 쫓아다니는 것,
그런 예배는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면서 긍휼히 여김도, 긍휼도 알지 못하면서 수천 번
수만 번 예배당 나와 예배한다 해도 그런 예배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는 것과 교회 나오는 이
유를 땅에서 사는 동안 자기 마음이나 좀 위안을 얻고, 뭔가 힘을 얻어 살기 위해 나오는 것이 돼서
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넘어 육체에서 떠나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 예수님이 계신 그곳
에 들어가기 위해 참으로 믿는 믿음으로 생각을 돌리고 믿음의 방향을 즉시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빈 수레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겉으로 요란하게 들레고 떠드는 것은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영님은 요란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영님께 말씀을 통해 배우고
믿음의 능력, 속사람의 능력을 갖춰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고 나는 은혜 줄 자
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 지식으로
받고 성영님의 도우심으로 영혼에 깨닫는 능력이 되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로 은혜를 입
었고, 긍휼히 여길 자로 긍휼을 입은 자로 영혼에 갖춰진 온유한 자가 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돼야 하는 것에 온 맘을 써야 합니다. 자기의 사는 뜻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하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신 그 선하심과 예수님의 의를
드러냄으로 예수님을 비추는 자가 되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인 것을 명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맺습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던 말씀대로 나에게
이 은혜의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로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4 장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p65-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