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림경영인협회 정은조 회장의 선친 윤제(允濟) 정상환 공의 공덕비(주석) 나는 역사학도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연구해왔으나 한국산림경영인협회 회장이며 전 한국산림아카데미 2기 동창회장 정은조 선친인 윤제 정상환 공처럼 애민정신(愛民精神)이 투철한 사람을 본 일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 거쳐간 인물 가운데 애민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걸인청을 설립하여 어려운 걸인을 궁휼한 토종(土亭) 이지암(李之菡) , 고구마를 재배하여 가난의 허기를 면케한 김육(金堉), 목화씨를 가져와 추위를 면하게 한 문익점(文益漸) 과 정천익(鄭天翼), 사방 100리 안에 거지가 나타나면 나의 책임 임을 알라는
경주 최 부자집, 누구든지 어려우면 식량을 가져가라는 타인능해(他人能解)의 구례 운조루(雲鳥樓)의 류 부자집, 오랜 가뭄으로 아시가 된 제주민을 구제한 만덕(萬德) 여인, 전설적인 적선의 여인 전주 덕진(德眞)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못지 않는 적선지가(積善之家)가 있으니 바로 정은조 회장의 선친인 정상환 공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고립무원의 귀빠진 보성이라는 남도 지역이지만 그 향(香)은 천리에 미쳐 여기에 그 공덕비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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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을 설치한 윤제 정상환 公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은 한평생을 자기 본분에 충실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로다. 이는 인간의 당연한 도리(道理)라 표방하면서도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뿐 실행한 자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 까닭은 인생의 참 의의와 삶의 존재 가치를 깨치지 못함이요 흔쾌히 봉사하는 금도활여(襟度豁如)의 괘락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고로 이를 선각하고 희생정신(犧牲精神)으로 어려운 곳을 찾아 도와주는 적선지가(積善之家)의 행적을 금석문(金石文)에 명각(名刻)하여 불후천추(不朽千秋) 유방백세(流芳百世)케 함이 아니던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220CEA47522FB0DE06)
화순군에 있는 윤제공 공덕비 앞 도로 여기 윤제(允濟) 공(公)은 한평생을 남이 추종을 불허할 만큼 덕본재말(德本財末)하고 위국충정(爲國忠正)과 세수인경(世守仁敬)하며 헌신적 봉사를 실천궁행(實踐躬行)한 인물로 추앙되고 있기에 천명(闡明)하려 하였으나 본인이 생전에 공덕지면(公德之名)은 부덕(不德)이라고 극구 사양함에 따라 미루어 오던 중 을유(乙酉) 서기 2005년 8월 12일 타계(他界)하심으로써 작금(昨今)에 이를 추진하는 바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171354B522FA44A0A)
공덕비 앞에서 공(公)은 보성 벌교에서 1923년 2월 14일 출생으로 호는 윤제(允濟), 자는 용식(龍植), 명은 상환(尙煥)이니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고려 좌정승공(左政丞公) 정응(鄭膺)이 조조(肇祖)이시며 조선 좌찬성(左贊成) 하원군(河原君) 봉조하시문절수충(奉朝賀諡文節守忠) 장(長) 윤화(胤和)가 성종(成宗) 3년 서기 1472년 보성 군수로 부임 청정애민(淸政愛民)으로 명성을 떨치신바 그분이 낙남(落南) 시조(始祖)로서 공(公)의 16대조이며 헌종(憲宗) 기유(己酉) 서기 1849년중 진사(進士)한 지인(志寅)이 기아유민(饑餓流民)을 매상긍휼(每常矜恤)히 여겨 구휼(救恤)하고 80세에 이르러 전 재산을 처분 빈민 노비에게 배분해주고 타계하니 이 비보(悲報)를 접한 이의 상곡(喪哭) 소리가 하늘과 산천을 감동케 하였다는 바 이분이 바로 공(公)의 증조(曾祖)이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33E4B522FA44A09)
헌화 그 유덕선행(有德善行)이 전요(傳搖)되어 유림(儒林)의 소(疏)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贈)된 바라고 상재지향(桑梓之鄕) 진사(進士) 골에 구비(口碑)로 전하며 조(祖) 순종(順鐘)은 선궤(先軌)로 극기복례(克己復禮)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으며 고(考) 해영(海永)과 모(母) 김해 김씨는 숭유삼대(崇儒三代) 적선지가(積善之家)의 태생이니 유덕엄격(有德嚴格)한 가풍을 묵시유염(黙示濡染)으로 성장한 바 공(公)의 소시 성장에 현대판 맹모단기지계(孟母斷機之戒)로 훈육(訓育) 공(公)의 인생여정(人生旅程)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홍진세파(紅塵世波)에 견인불발(堅忍不拔)하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제활동(經濟活動)으로 득리(得利)한 재산을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 사회에 환원하는 수훈을 남기셨기에 그 공헌이 각계각층 각 분야별로 높이 평가되어 국세청장의 표창, 한국로타리 라이온스 양 총제의 봉사상, 한국로타리 장학문화재단 이사장의 ‘奉仕의 人’ 칭호 수상, 대한적십자 총제의 박애정신 포상, 한국유도회(韓國儒道會)와 성균관 관장의 표창, 공익법인 범민족예의생활실천본부 총제의 표창, 보성군민상, 전라남도 모범도민상, 박정희 대통령이 수여한 통일주체한국민회의 윤제장, 5.16민족상, 대한민국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그 외 300여개의 상장 패를 석면제약(石面制約)으로 불승매거(不勝枚擧) 함이 아쉬울 뿐이다. 모든 시상금은 전액 딱하고 어려운 이웃과 고향 인재육성 기금에 쾌척(快擲)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66F994A522FAFD12F)
평소 윤제공과 지인이시며 한국경영인협화미고문이신 한철웅 회장께서 고사(告辭)를 올리고 있다. 이에 따른 주요 공적을 약술(略述)하자면 1960년대 후반에 불모지 임야 300정에 100만주를 조림산림녹화자원조성에 기여하였으며 전남향토문화 지역사회개발 농업기술 등을 보급시켰다. 그리고 전남도문화사, 보성군사, 새마을운동사, 88올림픽사, 보성문학대간, 화담사지(花潭詞誌), 하동정지(河東鄭誌), 광주향교지등 편찬에 참여하고 그 논고를 유림춘추(儒林春秋)에 기고한바 공의 객관적사적(客觀的史的) 고찰에 정평을 받아 주요 일간지에 특집 보도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향도(嚮導)로서 대포리(大浦里) 회관 건립, 피지학교 벌교 동·서·남·북·교의 환경 조성, 우범지역 전기가설, 식수난지역 우물파주기, 오르간 비치, 벌남교(筏南校) 체육기구 설치 부담, 그 외에도 소소한 것은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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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에 묵념을 올리는 정은조 회장
여순반란사건과 6.25동란이 휩쓸고 간 소설 태백산맥의 발생지내 고향 벌교에 펼치는 공의 훈훈(薰薰)한 손길은 흉흉했던 지역 인심을 달래는 산파역을 하였으며 또한 2세 교육을 위하여 빈한한 칩도(蟄島) 초등분교장(初等分敎場)을 단독 신축 교육당국에 기증하여 낙도민 자녀교육 기회의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염소장학회를 창립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부담하였고 그리고 내고향 번영회를 조직 매년 궁춘(窮春)에 소맥분 500백포를 10년간 행정기관을 통해 구황(救荒)케 하며 극빈자의 병원비를 부담, 부군(夫君) 수감(收監)으로 아사직전의 임산부 구출, 나주 희망원(希望院)과의 자매결연과 지원, 30년간 벌교(筏橋)의 고독(孤獨)한 환과(鰥寡)를 부양, 유리표백(遊離漂白)한 행려병자(行旅病者), 무의탁노인 후대(厚待) 등 자선긍행(慈善躬行)의 본(本)을 보였다. 그리하였기에 모상시(母喪時) 조객이 무수불절(無數不絶)이요 천여 매의 만장행렬이 장장 3리에 달하니 공의 인덕이 명불허전(名不虛傳) 임을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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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인사
또한 벌교천 수해복구 직강공사(直江工事) 추진과 국도 15호선 벌교구간 확포장(擴鋪裝) 공사시 지장건물과 소액보상 책정으로 일시 중단된 상태에 있을 때 사비(私費)로 백미 일백여팔대(壹百如叭代)를 부담 계속 공사케 함으로써 지역 수치를 모면케 하였으며, 겸백면(兼白面) 수남리(水南理) 농로 5리 가설과 벌교(筏橋) 중도(中島) 농언궤누(農堰潰漏) 구간복구 등을 전액 사비로 완공케 함으로써 수천여 몽리민(蒙利民)의 오랜 숙원을 해소하여 주었고, 보성수협율포지소 신축부지 희사, 예비군 3917부대 4개 본부 청사 신축 기증, 대서면대 신축부지 보성해안도서작전기지화사업 후원, 벌교충혼탑 건립 및 주변 다목적공원조성 관내초등교에 이충무공 동상건립 기증으로 진충보국(盡忠報國) 의지를 배양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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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 정공 상환 독림가 공적비 앞에서 한때 정수리(淨水里) 마을 공동양식장이 도시민에게 부채를 안고 양도될 위기에 있을 때 당시 고흥수협장 김연섭을 통해 백미 사백팔대(四百叭代)의 빚물이를 해줌으로써 300 부수리(浮水里) 민에게 활력과 생활안정을 도모한 바 그 같은 내용의 보고를 접한 허련(許鍊) 전남지사는 공한(公翰)하기를,“국가의 도움으로 치부한 재계인 중에는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반계곡경(盤溪谷徑)에만 불쫓아 휘황(輝煌)함이 현실인데 公은 그 많은 정재(淨財)를 새마을 운동에 출연(出捐)한 지정(至情)은 나의 평생에 들은 바 처음이요 선생이 심은 감당(甘棠)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꽃피고 알찬 결실이 있을 겁입니다. 근일에 상면할 기회를 앙망(仰望)한다.” 며 극사(極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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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비를 둘러보는 한철웅 부부, 소현주, 김봉미, 정진중, 한민숙, 구윤자 등
도지사(道知事) 회동석상에서 건의한 장암지구 특별보조와 상진(上(津) 선착장확장사업 지원 등이 동기가 되어 상암(上岩) 마을이 보성군에서 가장 잘사는 선도적 농어촌이 되었다. 1980년에 그니스 태풍으로 유래 없는 참상이 있었을 때 벌교읍사무소 광장에 세제비누 상자를 산적하고 수재민에게 무료 배분했던 등등의 미담 열거는 저 같은 두소지재(斗筲之才)로는 형언난(形言難)으로 화호불성(畵虎不成)일까 두려울 뿐이다. 광복 후 나라가 어지럽고 국민생활이 어려울 때 역사의 그늘에서 公의 헌신적인 봉사활동과 지역개발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자아실현(自我實現)으로써 그 결실을 수상화서(穗狀花序)와 같이 연연히 꽃피우게 했으니 그 공적이 어찌 영원무궁하지 않으리오. 같은 메아리로 KBS를 비롯한 주요 매스컴들이 앞을 다퉈 특별 프로로 “인간상록수” 라 일컫어 전국에 방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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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민의 공덕심에 존경심이 절로 났다.
그리고 우리의 옛고구려 영역에 속한 세계적 문화유산을 오늘의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슬그머니 역사왜곡 함에 분개 비판하며 우리 민족 대종교 창시자요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홍암(弘岩) 라철(羅喆) 대종사의 만주활동사적자료 모집차 유림지도자 53명을 솔거(率去) 중국 환인(桓仁) 집안(集安)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 광개토대왕비를 시찰하고 환인 고구려성 1천여계단 821m 고지에 등단(登壇) 단군성조께 초헌례를 올리고 이국타향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애국지사의 영령이 명복을 빌며 그의 후손들인 조선족학교와 자매결연을 고천(告天)하였다. 귀국 후 모집한 자료를 토대로 라철(羅喆) 선생의 독립운동가로 위대한 업적을 2003년 유림춘추(儒林春秋)에 연재 투고한 바 公의 민족적 의분과 선열의 역사적 발자취 탐방 열정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벌교 칠동리(七洞里) 금곡(錦谷) 마을 생가터에 사재로 부지를 마련하고 유적비를 건립하는 등 홍암 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이 왕성하였다. 또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회장직무 대행으로서 사단법인 범국민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를 창립하고 사회부조리 척결, 예의염치회복 孝사상 고취, 도의선양실천본부(道義宣揚實踐本部) 부총제와 한국독림가회 명예회장으로서 맹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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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묘소
그리고 숭조현창사업(崇祖顯彰事業)에도 진력면려(盡力勉勵)한 바 광주 화담서원花潭書院)에 고려 충신 묵은공(黙隱公) 정희(鄭熙) 선생을 주벽(主壁)에 모시게 하고 그의 행적을 수년간 연구한 사학적 고증 제시로 본 서원이 광주지방문화제 제18호로 지정 관리케 하였으며 정화(鄭和) 보성군수의 청렴애민(淸廉愛民) 치적의 유애비(遺愛碑)가 임진정유 병화로 인멸(湮滅) 됨을 안타깝게 여겨 오던 차에 공(公)의 온축(蘊蓄)된 사학적 조예(造詣)와 논증정연한 설파력으로 보성 향교정에 온 유림(儒林)과 관민(官民) 절찬리에 멸실(滅失)된 비를 복원견립(復元堅立)하였음은 공이 아니면 천년이 지난들 어찌 누가 감당수행(勘當遂行)할 수 있으리오. 문중후손들은 조상을 섬기는 공의 불멸의 공적금자탑을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본받음이 마땅할 지어다. 반려자 부인 박정례(朴正禮) 여사는 밀양 박계삼(朴桂三)과 전주 이방례(李方禮) 사이에 출생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덕을 겸비한 요조숙녀(窈窕淑女)로서 삼남이녀三男二女)의 어진 어머니로 시부모께 혼정신성(昏定晨省)한 효부이며 부군의 내조가 돈실(敦實)한 바 규범(閨範)이 칭송회적(稱頌膾炙)되니 덕배병명(德配竝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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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비 옆 배롱나무
공의 후덕을 후대들에게 표방(標榜) 함이 마땅하다는 성원열화(聲援熱火)로 천학비재(淺學菲才)한 불초(不肖)가 35개 성상(星霜)을 본부행정 말단에서 견문지실(見聞知悉)한 윤제(允濟) 선생의 박시제중(博施濟衆) 덕행선적(德行善蹟)을 졸문(拙文)으로 찬(撰)하여 강호(江湖)에 천명(闡明)하노니 방명(芳名) 영세불망(永世不忘)할지어다. 서기 2008년 3월 0일 原任書記官 國政弘報委員 南江 鄭相鉉 撰述 子 銀照 永照 三照 女 丞喜 任淑 謹堅
"덕은 천년 만년 갑니다."
한국산림아카데미 대기자 정진중 어려운 한문의 비문을 알기 쉽게 풀어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