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노자 BC 570 ~ 480년 사이 추정, 춘추시대 말기)
노자는 楚(초)나라 고현(苦縣)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生(생), 沒(몰) 시기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신비적 존재라는 이미지를 후세인들에게 주었다.
그는 원래 주(周)나라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고 한다.
노자는 도(道)와 덕(德)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으며
오랫동안 주(周)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났다.
노자가 주나라를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선생께서는 앞으로 은둔하려 하시니 저를 위하여 억지로라도
글을 써주십시오’라고 청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상, 하편을 지어
도와 덕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선이 되었다는 설(說)도 있는데
후인들은 그린 노자의 모습은 실제로 신선처럼 묘사하여 그린 것들이 많다.
무위(無爲)를 주장한 노자는
현실의 처세(處世)를 논하는 유가(儒家) 사상을 낮게 보았다.
그의 사상은 유가의 사상과 달라서 당시 노자 학문을 하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하는 이들도 역시 노자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고요히 있으면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라고 사마천은 전하고 있다.
노자의 가르침은 공자와 맹자와 달리 이해하기가 난해하고 도덕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비유 자체가 어려워서 그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측면이 있다.
당연히 당시의 군주들은 노자의 말을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듯한 말로 여겼는데 노자가 설파한 사상은 부국강병이나 천하 제패와 같은 세속적인 추구와 먼 것이어서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노자의 깊은 도(道) 사상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양을 통하여 터득할 수 있는 것으로
노자 자신이 군주나 위정자 또는 일반 백성 중 어느 특정한 층을 대상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었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차원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깊은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던 군주가 있었더라면
차원 높은 정치를 펼치는 데 큰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장자가 노자의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의 생각과 행동에 다가가는 이론으로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