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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애(姜淳愛) - 뜻길에 서서 - 4. 전도사로, 순회사로 1 나는 그해 하계 전도 기간에 전북 7개군과 전남순회의 명을 받고 처음으로 지방에 나가게 되었다.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어머님께서 선생님 땀 닦으시던 손수건을 주셔서 그 뜻을 깨닫고 금산(錦山)으로 출발하였다. 교회 위치를 모르고 헤매게 되어 트렁크를 지게에 지우고 찾아 다녔다. 2 금산교회 인도자는 이리교회 출신인 김순례(金順禮)씨였는데 냉방에서 먹을 것도 없이 주일 학교만 운영하고 있었다. 개척자의 수고를 여실히 엿보고 같이 울었다. 아이들과 예배를 보고 다음날 나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3 무주와 장수틀 거쳐 진안에 오니 여기는 홍광철(洪光鉄) 교회장님이 세운 여자 청년 몇 명이 믿음직하게 보였다. 이곳에는 마이산(馬耳山)이 있어서 올라가 보니 한 도사(道士)가 돌을 이성성상, 3제자, 12제자, 70장로 형(形)으로 쌓아 놓았고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를 책으로 써 놓았는데 아무도 볼 줄 모른다고 했다. 4 전주에서는 시장(市長)을 만나서 우리 뜻을 전하니 즉시 재건촉진회장을 불러 협조를 당부하고 싸인한 패스를 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전북의 7개군 순회를 마치고 광주에 도착하여 지구본부를 찾아가니 목조로 된 조그마한 임시 가건물이었다. 5 이 건물은 홍성표(洪性杓)씨가 대학시절에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고 그 돈으로 지었다고 한다. 나는 광주시장을 찾아 가서 전주시장의 싸인을 보여 주며 협조를 요청했다. 시장은 곧 재건촉진회장을 불러서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니 싸인을 해 주었고 교통비 할인권까지 주었다. 6 나는 우리 어린 식구들이 있는 곳곳마다 트렁크를 들고 시골길을 찾아 다녔고 때로는 험한 준령도 넘어야 했다. 식구들은 나를 만나면 친부모를 상봉하는 것보다 더 반가워했고 자기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 순회사 주겠다고 남겨 놓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순회사 온다고 잔뜩 기대하게 해 놓았었다. 7 그런 식구의 수고로운 모습을 보면 나의 피로도 잊고 밤새도록 말씀하여 주고는 또 다음 코스로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로는 폭염에 산을 넘을 생각을 하면 힘이 빠져서 길섶에 앉아서 기도하고 힘을 얻고는 그 산을 넘었다. 또 길을 가다 너무 더우면 트렁크를 냇가에 내려 놓고는 속옷 입은 채 물로 풍덩 들어가서 몸을 식힐 때의 상쾌함은 무엇으로 비하랴. 8 한번은 선생님이 전주로 가시는 차에 곡성 지역장과 같이 모시고 가게 되었다. 2백여 리를 선생님과 같이 가는 기쁨과 감사함에 나는 어린애 같이 되었다. 전주가 가까워졌을 때 황 지구장이 오토바이로 10리 쯤 마중나왔다. 9 이때 선생님께서 “순애 오토바이 하나 사줄까?” 하셨다. 전주에 도착해서 선생님이 운전사에게 2천 원을 팁으로 주시니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곡성에 다다르기 전에 남원에 들러서 광한루와 오작교를 거쳐 구례 화엄사로 향하였다. 거기서는 주지승을 만나 독신 생활의 필연성과 앞으로 도인들의 부부생활 문제 등을 피력한 결과 그도 긍정하게 되었다. 10 곡성에서 제주도까지는 이문원(季文元)씨와 길에서 나를 따라온 여인 등 셋이 동행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이문원씨가 소개해준 조카 댁에서 묵게 되었다. 지역본부에 가니 집사님이 너무 반가워 하면서 점심식사를 해 주고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11 간절한 기도로 예배를 보고 시장과 재건촉진회장 등 각 기관장들을 방문하였다. 경찰서에서는 찝차로 호텔까지 연락해 주고 잘 모시라고 하였고 촉진회장은 다음날 자기 차로 제주도를 돌면서 재건촉진회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점심 대접도 하였다. 12 하늘은 못난 나를 어디든지 보내시고는 염려하시며 누구를 시켜서라도 협조케 하여 고생시키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면서 감격의 눈물과 남모르는 희열감에 잠기면서 3년 동안 전남 일대를 누비며 순회하였다. 13 1962년 6월 4일에는 72쌍의 성혼식에 참석하여 축문(祝文)을 읽게 되었는데, 엄숙한 자리인지라 음성은 떨렸고 축문을 쥐고 있는 손까지 떨려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1962년 12월 29일은 효진씨가 탄생한 날이다. 나는 전남에서 이 전보를 받고 너무나 감격하여 울면서 뛰었다. 경축의 전문을 올리고 경사스런 봉헌식에 참석하여 우유와 미역국을 먹고 이날을 축하하였다. 14 1963년 7월 24일 124쌍의 성혼식 때는 김순화(金順華)씨와 같이 준비 위원이 되어서 신랑 신부 248명의 예복과 이부자리까지 준비하느라고 바빴다. 예복과 면사포는 대·중·소로 구별하여 몇 번이고 확인하여 놓았다. 그런데 성혼식 2시간 전에 한 신부가 면사포가 없다고 한다. 이제 식장에서 선생님이 직접 연습을 시키시는 시간이 다가왔다. 15 나는 아찔하면서도 허둥지둥 이곳 저곳을 다녀 보았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급한 김에 종이라도 사서 만들려고 하는데 옆에 옥색저고리가 보였다. 그것을 얻어서 저고리 소매를 잘라가지고 기장을 잇고 뒤의 리본은 다른 신부의 한쪽을 떼어서 붙여 가지고 간신히 시간 전에 입혀 놓았다. 그때 순간은 40일간 수고한 보람이 온데 간데 없고 미칠 것만 같았다. 옷이 없었던 신부는 미장원에 다녀오는 개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16 대구시내 집중적인 부흥회가 끝나고 대구에 머물라는 명을 받아서 남게 되었다. 여기에 강사로 곽정환(郭錠煥) 씨와 장 권사님, 그리고 공원노방 전도사로 정찬복 씨가 남았다. 나는 매일 경북대학, 대구대학, 청주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했는데 정한웅(鄭漢雄, 경북대 수의과 2년) 군을 학교 정문 가까운 곳에 방을 얻게 해놓고 학생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곽정환 강사의 강의를 듣게 하였다. 17 때로는 교내에서 학생들이 얘기해 달라고 하면 교실에 들어가서도 대화했다. 부흥회를 마친 후 대학생 식구 30여명으로 창건회(創建會)를 조직 하였다. 나는 이 창건회를 염려하고 완전히 세우기 위하여 3일 금식을 하였는데 금식을 끝내고 먹은 미역국에 체해서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그 무렵에 선생님이 오셔서 놀라시고는 병원에 가게 해 주셨고 곰탕 사 먹으라고 이요한(李耀翰) 목사님께 돈을 주면서 안 사 먹을까 봐 표를 사다 놓고 주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죽을 먹는 것을 본 김명화(金明和)라는 학생은 자기 집에서 점심을 많이 싸 가지고 와서는 매일 나에게 주고 가곤 했다. 18 1965년 1월 29일에 선생님은 제1차 세계순회노정을 출발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안 계시는 기간에 약을 복용하고 좀 휴양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기석 강원지구장 부인인 지생련(池生蓮) 씨로부터 자기 지구에서 전도해 놓은 장년들을 완전한 식구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요청을 받고 춘천으로 갔다. 교회는 좋은 장소에 마련된 큰 건물이었다. 19 그러나 이 교회를 마련하기까지 지구장인 이기석(季起錫) 씨가 몇 개월간이나 먹고 피를 토하며 여고(女高)에서 간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전에 들어가 앉으면 은혜가 막 내렸다. 나는 매일 전도된 사람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하고 토론을 했다. 20 나와 생련씨, 그리고 최정순(崔貞順, 당시 적십자사 도부녀과장) 씨 이렇게 셋이 하나 되어서 강원도 복귀를 위하여 하늘 앞에 간구하였다. 그리하여 점심은 최정순씨 댁에서 하고 두 끼는 보리쌀 한 되씩 사다가 김치와 고추장 하나만 놓고 먹어 가면서 활동하였다. 우리도 어려웠지만 지구장 생활의 궁핍은 말할 수 없었다. 생련씨는 임신 중인데도 건강히 식당경영과 교회생활을 하였다. 21 하루는 전국순회 강연을 들은 바 있는 강원도지사를 최정순씨와 함께 방문하였다. 너무 바쁜 분이어서 3분간 면회허락을 받고 “우리의 강의를 도청 직원 일동에게 듣게 해 달라”라고 하면서 뜻의 중요성을 말하고 강하게 요청했더니 선뜻 허락을 해 줘서 너무나 기뻤다. 22 전국 순회부흥회때 나는 정수원(鄭寿源) 씨와 안형관씨를 따라 다녔다. 제일 힘들었던 곳이 강원도 정선군에 갔을 때였다. 겨울에 비행기재를 넘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무난히 넘어 다녔다. 23 노란 옥수수 밥을 먹고 열심으로 활동하는 식구들의 노력에는 하늘이 함께 하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믿음의 아들 박원근(朴元根) 씨를 전도했다. 어렵게 순회를 마치고 본부교회에서 약을 먹고 정양하려는데 지생련 씨가 또 와서 강원지구로 가게 되었다. |
姜淳愛 - み旨の道に立ちて ④ - 伝道師として、巡回師として 一九六一年の夏季伝道期間に、私は全羅北道七郡と全羅南道巡回の命を受け、初めて地方に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早速、先生にご挨拶に行くと、ご主人が、先生の汗を拭かれたハンカチを私にくださいました。私はそこで天のみ意を悟り、まず錦山に向かって出発しました。 錦山教会の指導者は、裡里教会出身の金順禮さんでした。教会は食べるものもなく、冷たい部屋で日曜学校のみをやっと運営していました。開拓者の苦労を如実にうかがい知って、私は共に泣きました。次に、茂朱と長水を経て、鎮安に着きました。 教会は洪光鉄教会長が育てた女子青年が何人もいて、頼もしいかぎりでした。近くの馬耳山に登ってみると、一人の修道者がいて、『二性性相、三弟子、十二弟子、七十人長老、という形に石をめぐらし、天から受けた啓示を本に作ったが誰にも分からない……」と呟いていました。 全州では、市長に会ってみ旨を伝えると、すぐに再建促進会長を呼んで、協力を頼み、サインしたバス券をくださったので大いに助かりました。 全羅北道の七郡の巡回を終えて、光州に到着し、地区本部を探して行くと、木造の小さな建物が教会でした。その建物は、洪性杓氏が大学時代に登録金で建てたものでした。私は早速、光州市長を訪ねて、全州市長のサインを見せて協力を求めました。市長はすくに市の再建促進会長を呼んで、協力をお願いするとサイン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また、「交通割引券」までいただきました。 私は幼い食□たちのいるとろには、どこへでもトランク一つを抱えて田舎道を訪ね回りました。ときには険しい峰も越えて行きました。食口たちは私に会うことを、肉親に会うより以上に喜んでくれて、自分の食物を減らしてまで巡回師に差し上げると言って、数少ない食物を残して置いてくれるのでした。また、村の人々に、「巡回師が来る」と言って触れ回るので、皆はとても期待して待っていました。 そのような食口の苦労する姿を見ると私は、自身の疲れも忘れて、夜通しの和動をしてもすくにまた、次の巡回地に向かって出発するのでした。あるとき、あまりの酷暑に山越えができなくて、道端に座り込んで祈り、ようやく力を得て山を越えたこともありました。 ある日、私は全州に行かれる先生の車に谷城地成長と一緒に乗車する恵みを得ました。二百余里の道のりを、先生とご一緒できる喜びと感謝に私はまるで子供のようでした。全州に近づいたとき、黄地区長が十里ほどの道のりをオートバイに乗って迎えに来ました。 このとき、先生が「淳愛、オートバイを一台買ってあげようか?」とおっしゃいました。 全州に到着すると先生は、運転士にチップとして二千ウォンを与えられたので運転手は驚いた表情でした。 私は谷城に行くその前に、南原に寄って、廣寒楼と鳥鵲橋を得て求禮の華厳寺に向かいました。そこでは住職に会い、独身生活の必要性と今後就業者たちの夫婦生活の問題等を説明した結果、住職は私の話を肯定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谷城から済州島までは、李文元氏と途中私について来た女性たちの三人が同行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済州島では、李文元氏が紹介した甥の家に泊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地域本部に行くと、執事が大変喜び食口を呼び集めて昼食をしました。そして切なる祈りで礼拝をし、市長と再建促進会長等、各機関長を訪問しました。警察署ではジープでホテルまで送ってくださり、丁重にしなさいと言ってくれたし、促進会長は次の日、自分のジープで済州島を回りながら、再建促進会が動いている状況を説明し、昼食をご馳走してくださいました。 天は愚かな私をどこに送られても心配され、いつも誰かを遣わして協助するようにし、苦労させないようにされました。このようにして、父の心情を感じながら、私は感激の涙と人の知らない喜悦感にひたって三年間に、全羅南道一帯をぬって巡回しました。 一九六二年六月四日、私は七十二双の成婚式に参席し、祝文を読むようになったのですが、厳粛な場であるので声はふるえ、祝文を持っている手までふるえて恥ずかしいほどでした。 一九六二年十二月二十九日は、孝進様が誕生なされた日です。私は全南でこの電報を受け、とても感激し、泣きながら飛び跳ねました。早速、慶祝の電報をうち、慶ばしい奉献成に参席し、牛乳とワカメのスープを食べて、お祝いしました。 一九六三年七月二十四日、一二四双の聖婚式のときには、金順華氏と共に準備委員になって新郎、新婦二四八名の礼服と寝具の準備でおおわらわでした。礼服とベールは大・中・小に区別し、何度も確認しておきました。ところが、聖婚式の二時間前に一人の新婦がベールがないと言うのです。このとき、式場で先生が直接練習させる時間がやってきました。私は目まいがしながらもあわてふためいて、あちこち行ったり来たりしてみましたが求め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急ぐのだから紙でも買って作ろうと思い、ふと横を見ると淡い水色のチョゴリを見つけました。それをもらってチョゴリの袖を切って丈をつなぎ、後ろのリボンは他の新婦の一方を外して付け、やっとのことで時間前に着せることができました。その瞬間は、四十日間も苦労したようでした。 大邱市内の集中的な復興会が終わり、大邱に留まれという命を受け、私は残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こに講師として郭錠煥氏と張勧士先生、伝道師として鄭チャンボク氏が残りました。私は毎日慶北大学、大邱大学、青丘大学を巡りながら伝道しましたが、鄭漢雄(慶北大獣医科二年)君に学校の正門近くに部屋を借りるようにしておき、学生をそこに連れて行っては郭錠煥講師の講義を聞かせるようにしました。ときに、学生たちが校内で話してほしいと言えば、教室に入ってでも対話しました。 復興会を終えた後、大学生の食口三十余名で「創建会」を組織しました。わたしはこの創建会を気遣い、完全に育てるために三日間断食をしましたが、断食を終えた後食べたワカメ汁によって、非常に苦痛を受けました。その頃、先生が来られて私の様子に驚き、病院に行くようにしてくださり、「コムタンを食べるように」と言って、李ヨハネ牧師にお金を与えながら、「チケットを買っておいてあげるように」とまでおっしゃいました。 我々がひもじいのを見た金明和という学生は、毎日、自分の家から昼食をたくさん持って来てはみんなに分けてくださいました。 一九六五年一月二十九日に、先生は第一次世界巡回路程に出発されました。私は先生がいらっしゃらない期間に、薬を服用し、少し休養しようとしましたが、李起錫江東地区長婦人の池生蓮氏から「江東地区の壮年たちを完全な食口にしてください」という要請を受け、春川に行きました。教会はよい場所に備えられた大きな建物でした。しかし、この教会を備えるまで、地区長の李起錫氏が麸(フスマ・小麦粉を粉にするときに残る皮のくず)を何カ月間か食べて血を吐きつつも、女子高校で簡易食堂を営みながら備えたのです。だから、聖殿に入って座れば、すぐに恵みを感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私は毎日伝道された人たちにあって、み言葉を伝え、討論をしました。私と生蓮氏、そして崔貞順氏(当時赤十字社道婦女課長)の三人が一つになって、江東道の復帰のため天の前に切に祈りました。そうして、昼食はサイ貞順氏の家で食べ、あるときは麦一枡ずつ買って、キムチとコチュジャン(辛しみそ)だけを食べながら活動しました。私たちも苦しかったのですが、地区長の生活の貧乏は言葉では言えませんでした。生蓮氏は妊娠中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体が丈夫で、食堂経営と教会生活をしました。 ある日、全国巡回講演を聴いたことのある江原道知事を、崔貞順氏と一緒に訪問しました。あまりにも忙しい方だったので、三分間だけ面会の許可をもらって、「我々の講義を、道庁職員一同に聞かせ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訴えて、み旨の重要性を述べ強く要請したところ、即座に許可してくださったのでとてもうれしく思いました。 全国巡回復興会のとき、私は鄭寿源氏と安ヒョングァン氏について全国を回りました。一番辛かったのが江原道旌善郡に行ったときでした。冬に飛行場を越えるのは本当に危険なことでした。それでも私は無事に越えて行きました。黄色いとうもろこしのご飯を食べて熱心に活動する食口たちの努力には、天が共に働かざるを得ない状況でした。ここで伝道の子女である朴元根氏を伝道しました。 難しい巡回を終え、本部教会で薬を飲んで静養しようとすると、また池生蓮氏が来て、また江原地区に行くようになりました。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