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가 되어서야 주실마을에 도착했다
먼저 맞은 것은 주실마을의 후손 조태열의 외교부장관 취임 현수막이다
나도 외가가 한양조씨이기에 이 마을을 굳이 찾은 것이었으나 경상도 땅인 관계로 친일적인 윤정권하에서 외교부장관이란 벼슬이 과연 이렇게 현수막까지 걸며 환영할 만한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이 주실마을의 또 한 인물 조지훈 시인을 봐서라도 진보까지는 그렇지만 극우로 가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것 아닐까?
먼저 지훈문학관부터 들러 마을을 돌아보았다
조지훈의 본명은 동탁으로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한 한국현대문학사를 정지용,서정주, 유치환 등을 거쳐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청록파로 이어가는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연속성을 부여한 큰 시인이다
이렇게 조지훈은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써냈다.
조지훈의 가정은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문학관에선 어머니가 유씨로 나오는데 아마도 입양 때문인 것 같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했다.
아버지 조헌영은 한의학자 겸 제헌 국회 의원으로서 정치가였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고, 조부 조인석은 한국전쟁 때 좌익 청년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집안에서 난리를 치자 그 수치감에 자살해버렸다고 전한다.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한의사 출신이며, 남한 제헌의원으로서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이 상당하다.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북한에서도 최초로 동의학(남한의 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동의보감 국역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고, 북한 내에서도 여러 고위직책을 맡으며 대접받았다.
위에서 거론한 조지훈의 아들 조태열은 현 외교부장관이고 증조부도 의병장 남주 조승기로 독립유공자이다.
사촌여동생 조동원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아내이다. 박준규 의장이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인척관계임을 생각하면 조지훈 집안은 대한민국 초반 굴직한 한 획을 긋는 명문가이다.
지훈문학관 왼편 산비탈로 오르면 지훈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지훈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리고 1947년부터 사망시까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교수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교가와 호상비문을 지었다.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 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1960년에는 4 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제자들의 4 19 의거를 지켜보고는 같은 해 4월 20일에 지은「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하여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그가 지었으며, 고려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 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조지훈 본가 방우산장이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라고 지조론에서 말했다
정치적 성향 자체는 진보가 아니라 정통적인 보수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김수영 시인에게 비판 당했다.
신경림 시인에 의하면 생전의 지론이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보다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격변의 시대에 살면서 지식인으로서 지난한 고민과 현실에의 실천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며 시대의 지도자로서 조지훈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조지훈이 태어났다는 생가 호은종택이다
조지훈은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이 주실마을은 조지훈 말고 또 한 인물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바로 조선후기 문신인 옥천 조덕린이다 조지훈의 12대조이다
옥천 조덕린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頵)이다.
1678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 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사마방목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이현일 이후 영남 남인의 벼슬길이 막힌 후 청대 권상일 등 영남의 대표로 중앙관직에 오른 몇 안되는 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 조덕린이 거했던 옥천종택이 전체 주실마을의 왼편에 있다
조덕린은 주실마을 입향조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0~1613)의 증손자이고, 부친 조군(趙頵, 1629~1669)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학문을 배웠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94년(숙종 20) 낙향하였는데 이때 옥천종택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1708년(숙종 34) 이후 관직이 몇 차례 제수되었으나 1725년(영조 1)에 당쟁에 관하여 상소했다가 노론(老論)의 탄핵으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에 유배가 풀린 후 봉화 옥천 옆 창주정사(滄洲精舍)와 사미정(四未亭)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옥천종택은 1694년 조덕린이 낙향한 후 짓기 시작하였고 초당(草堂)은 1695년(숙종 21) 완성하였다. 사당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되었다.
주실마을 가운데의 대종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즉 조지훈 생가에 비하여 마을 북쪽 가장자리 야산의 경사지에 자리잡은 집이다. 규모는 호은종택보다 작다. 남서향의 호은종택과 달리 남동쪽을 향하며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17세기 말 조덕린이 분가하며 지었고 조덕린이 사후에 향불천위로 옹립되면서 성립된 영양 주실마을 내의 소종가로, 경상북도의 주거와 씨족마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는 한옥체험으로 인해 들어가 보진 못했다
소박한 안사랑과 글 읽는 별당이자 큰사랑 역할을 하는 초당을 별도로 건립한 것은 특징적이다. 또한 정침의 안방이 오른쪽에 배치되고 사랑방이 왼쪽에 배치된 것은 경상북도 ㅁ자집의 일반적 구성과는 좌우가 달라진 것이다.
서쪽으로 지는 햇살을 받아 주실마을이 들어선 언덕에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