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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
설교 제목: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https://youtu.be/nsbejutQv98?feature=shared
설교 목적:
사도 바울이 교회를 가리켜 또는 교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거는? 이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와 존재적 사명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 그런 삶으로의 부르심과 사명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 방식은 분명히 땅의 가치관과 특징과는 다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가두고 있는 관습의 틀을 깨트리고 자유인으로 서서 하늘의 정신으로 살 것을 다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2. 하나님의 성전은 왜 필요했는가?
3. 하나님의 성전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4.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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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지 않느냐?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므로 너희도 거룩하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고린도교회는 분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분란을 겪는 이유는 그 교회 안에 파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파당이 생겨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었습니다.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볼로가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 즉 게바를 더 따랐습니다. 고린도교회의 파당과 분쟁은 교회 지도자들을 따르는 성도들의 취향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어떤 단체에 파당과 분쟁이 일어나면 그 단체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파당을 짓고 분쟁하는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파당이 왜 생겼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주문하기를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며 보통 사람은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지며 하나님도 그런 지혜를 헛것으로 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고전 3:20).
이것으로 볼 때 교회 안에 파당이 생기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혜가 파당의 원인입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입니다.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기는 어디에서나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하여 우리는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분쟁과 파당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안에서 이리 저리 휩쓸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쟁과 파당이 일어나는 집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도 그렇고 그런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세우려면 사도 바울이 주는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파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우리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바보처럼 침묵하라는 것입니다(고전 3:18). 그래야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인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글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이고 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지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성전은 왜 필요했는가?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성전 이전에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기에 회막(會幕, The Tent of Meeting)이라고 명명되기도 했습니다(출애굽기 33:7).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성막이 완공된 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성막이 왜 필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34~38
성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거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 솟은 구름과 불기둥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신호와 같고 표지판과 같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진을 시작하고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이유는 아마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들은 열방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모든 나라들에게 모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자기 백성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목적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들의 성전에서 떠나신다면 그 백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목자를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2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9:1~9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이 필요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그곳을 주목하며 그곳에 마음을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그 말씀을 따르면 이스라엘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배반하면 그들의 성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성전을 떠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전을 주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을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하려면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요?
3. 하나님의 성전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먼저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말씀은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그에게 모든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목적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인간의 위치와 영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편 8:4~8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을 맡아 다스리고 관리할 대리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관을 쓴다는 말은 곧 그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만물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세움을 받은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우시고 그를 인도하시려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만물을 통치하시고 인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려고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고 함께하면서 교제하고 더불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처소가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에덴동산도 일종의 성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거하시고 사람을 그리로 인도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성막도 성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곳에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그를 통하여 그와 더불어 일하시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 그곳에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며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일하시려고 택하신 사람이 있음을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요한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9~22). 그때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통하여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신 이유는 그곳에 거하시고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말로 거하기를 원하시는 곳은 돌과 나무로 지은 집이 아니라 자기 형상으로 지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셨으며,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 안에 계시며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며 성전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분쟁과 파당이 있는 교회를 가리켜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깨워 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려고 택하시고 부르시며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 만드실 것인데 그런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고 다툰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시고 사람에게 은혜와 지혜를 주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고 택하신 장소이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살고 있습니다. 전에 광야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나무와 천, 돌과 흙으로 만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숨쉬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의 이름을 두셨다면 오늘 우리들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장차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밧모섬의 요한에게 하나님이 장차 될 일이라고 보여주신 계시 가운데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끝 날에 마귀가 붙잡혀 심판을 받은 후에 세상이 새롭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낡은 세상은 물러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와 온 땅을 하나님의 영광 가득한 곳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계 21:3). 그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처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며 비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에 이 세상에 지음을 받아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실 때까지 성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끝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4.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썼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그 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들이 그 소임을 잘 감당한다면 만물의 중심에 있는 그 에덴동산은 만국을 소성하게 하는 생명수의 원천이 되고 만국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대리인적 사명을 첫 사람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 가운데 들어가 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처소인 하나님의 집이 성막이며 성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절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고 참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처럼 소중히 여기고 사명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길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목적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8:29).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9).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셨습니까?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성경이 들려주는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기업가의 입장에서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들려주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따랐습니다(히 3:1). 예수님이 고난과 수치를 견디신 것을 교회는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을 교회는 기념했습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고난을 견디고 신앙의 진실성을 붙들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를 향하여는 가난하고 벌거벗었으며 눈 멀었다고 책망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3:17).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교회가 책망을 받고 칭찬을 받은 것은 그 규모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과 인내, 그리고 그들의 정절과 섬김,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이 책망과 칭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교회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까? 우리는 규모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우리는 스스로를 규모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깨닫기 전에 권력자들을 두려워하고 예루살렘의 성전건물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예루살렘의 빛나는 성전을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누가복음 21:5~6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들은 무엇을 자랑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가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속물이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속물(俗物, snob)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꽉 들어찬 사람입니다. 사전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속물: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때때로 속물근성이 제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육신의 생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주님과 조용히 동행하는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속적인 생각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누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여 결국 분쟁과 파당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들을 일깨워주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힘을 모아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생각이나 다른 취향을 앞세우다가는 하나님의 집을 더럽게 하고 허무는 자가 됩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기도하면서 두 가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그 하나는 아무리 못났어도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자녀로 삼으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저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에게 맡겨 주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의 말씀처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을 붙들고 저는 다시 사역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을 이끄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자신을 돌아봅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