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를 읽고 >
2024.9. 더불어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오후,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성씨여서 고3때 우리는 같은 반의 앞뒤로 번호가 있었다. 고3이던 1994년도에 우리는 친구네 집에 가서 시험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을 먹고 방에 가서 수다를 떨고는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통영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친구와는 줄곧 연락을 하며 지내다가 결혼을 하고 타지로 이사를 가면서는 가끔씩 안부를 묻고 지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그 시절의 나로 데려가는 듯하다. 잊고 지내던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것도 신기하다.
나도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그럴 때 선뜻 전화까지 이어지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냥 생각만 하다가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전화까지 해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저녁, 대학을 갓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에 다니면서 저녁에는 일본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에 만났던 동생의 전화가 왔다. 그 동생은 직장이 통영으로 발령이 나서 저녁에 일본어를 배우러 왔다가 나와 인연이 된 것이었다. 우리는 또래이기도 했고 그 당시 나도 동생도 통영에 내려와서 친구가 별로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동생이 통영에 있는 동안 자주 만나다가 다시 타지로 발령이 나서 통영을 떠나고도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았다. 결혼식에도 가고 집들이에도 가고 그 동생의 부모님께서 기르시던 진돗개가 새끼를 낳아서 그 새끼 중에 한 마리를 친정에 데려와서 키우기도 했다. 그렇게 나도 동생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들을 서로 공유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실 일 년에 한번 얼굴을 보기도 어려운 사이이지만 가끔 전화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어제 만난 사이처럼 금세 활기를 띄며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주 만나지도 자주 연락을 하지도 않지만 연락을 내가 먼저 할 때도 상대방이 먼저 할 때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의 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어색함이 끼워들 틈이 없고 그저 편안하게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고는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이야기에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고나서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고는 한다.
‘눈부신 안부’를 읽으면서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고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상처는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큰 아픔이 될 것이고 없던 것이 되지 않고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 자국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지 않을까한다. 나를 생각해주고 나를 응원해주는 그 마음들이 전해지면 나는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은 때로는 내가 과연 이런 상처들을 극복해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고 하겠지만 느리지만 조금 씩 조금 씩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소설 속에서 선자이모가 파독간호사로 낯선 독일에 가서 자신에게 되새기듯이 썼던
“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라는 생의 한가운데의 문장은 매일 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글을 통해서 나또한 위로가 되는 듯했다.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다정한 마음이다. 누가 조금 더 마음을 내고 덜 내고의 계산 없이 서로에게 보내는 천진한 호의가 있다면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