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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 세례요한
(24.4.7)
<요1:6~8>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오늘 요한복음 두 번째 시간이다. 성경 66권 중에서 딱 한 권만 고르라면 요한복음을 고른다고 한다. 이유는 ㅎ님께서 자기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요한 스스로도 자신을 일컬어 ‘주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닉네임을 붙이고 사는 자였다.
요13장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거야) 하니까, 베드로가 요한을 보면서 머리짓으로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할 때 요한 자신을 일컬어 ‘주의 사랑하시는 자’/십자가 밑에서(마리아 옆에 서있는~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홀로 남다: 사랑의 힘)/부활하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주의 사랑하시는 다른 제자’ 요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 사이에서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요한은 ‘주의 사랑을 받는 자’로 통하고 있었다. 요한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대표하는 자라는 암시이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요한은 ㅎ님의 사랑을 주제로 성경을 기록했다(요한복음, 요일, 요이, 요삼, 계시록). 요6장에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게 보내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는 게 나의 일(말씀). -누구를 지칭? 창세전 ㅎ님이 택하신 자를 말하고 있다. 이것을 ‘처음사랑’이라고 한다. 성도의 신앙의 바탕에 이 처음사랑, 즉 원천적이고 본질적 사랑이 자리잡고 있어야 그 믿음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만일 ㅎ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에서 벗어나서 ‘내가 잘해야지 구원 받고 ㅎ님도 기뻐하실 거야’한다면 즉시 실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가 가장 성도다워 지는 것은 자기 행위를 믿지 않고 ㅎ님의 사랑을 믿는 것에 있다.
요13.1절에는,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이 자기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심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불사하고서 이다. 주님의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주시는 사랑이다. 그러하니 제자들이 배신하고 저주까지 해도 버리시지 않고 다시 찾아가서 만나주시는 그 사랑이다. 그 어떠한 죄를 저질러도 용서와 긍휼로 덮어 주시는 무한 사랑을 언급하신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일4장에서 ㅎ님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한다. ‘ㅎ님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ㅎ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ㅎ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요...
-> 왜일까요? 왜 ㅎ님은 우리를 사랑하지요? 남들보다 뭐가 특별한 게 있서서 인가요? 아니다. 오히려 불교인들이나 다른 어떤 종교인들보다 윤리 도덕적이지도 않고 착하고 훌륭하지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ㅎ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요?
이에 대해 요15장에서 답을 준다. 우리가 ㅎ님을 택한 게 아니라 ㅎ님이 우리를 택하셨다고요..언제? 역사 이전, 먼 영원전에 ㅎ님이 우리를 IX 안에서 사랑으로 택하셔서 우리를 그리도 애지중지 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바냐서 3.17절에,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ㅎ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마치 할부 할미가 손주가 너무 예뻐서 이리 빨고 저리 빨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라고 하듯이..ㅎ님이 자기백성을 사랑하신다.)
사49.16절에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신다. 손은 일하는 도구의 상징이다. 무엇을 하든지 한시도 잊지 않고 마음에서 어른거리는 사랑을 말씀하고 있고, 눈을 뜨면 성벽처럼 눈앞에 크게 서있는 존재가 바로 ㅎ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씀이다. 이같이 성경은 ㅎ님의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의 편지이다. 사랑사랑사랑...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구구절절 사랑의 고백이 넘치는 게 성경이다. 그래서 ㅎ님은 사랑이시라고 한다
이렇듯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남자가 여자를 향하여 품는 연심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이것은 창2장부터 언급된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여기서 사람인 아담은 성육신 하신 IX를 상징하고 돕는 베필은 하와를 상징한다. 그래서 아담이 잠들 새 갈비뼈에서 하와를 만드시는 것은, IX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성도인 교회가 탄생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니라~축복하신다(이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영으로 연합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화와는 참 아담이신 IX의 피로 탄생된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를 상징한다. 즉 IX의 형상을 닮은 자이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 IX와 한 몸 한영으로 연합된 자가 성도이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바울은 해석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란 사랑의 연합체를 상징한다.
ㅎ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호세아서에서는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고멜로 표현하였고, 룻기에서는 보아스와 청상과부 룻으로 표현했다. 음란한 여인 고멜 같은 죄인을 용서 하시사 ㅎ님의 아내로 삼아주시는 그 사랑, 룻처럼 청상과부가 되어 온 평생 구걸하며 살아야 할 끈 떨어진 연과 같은 기구한 여인을 아내로 삼아주시는 그 사랑을 노래하는 책이 성경이다.
그 하이라이트격인 성경이 아가서 아닌가? 절대적 권세를 가진 솔로몬 왕이 누구를 사랑했다? 무수리를..., 예루살렘 성에는 스펙이 짱짱한 여인네들이 즐을 섰는데도 솔로몬은 유독 천하고 천한 그것도 얼굴이 거무스름한 무수리 신분의 슬람미만 사랑했다가 아가서이다. 아가서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말이다. 최고의 노래, 천상의 노래가 뭐다? 무수리를 사랑한 솔로몬은 죄인 중의 죄인을 사랑하시는 IX를 비유한다. ㅎ님도, 예수님도 사랑의 아이콘이다. 어찌 보면 성경 전체가 아가서이다, 천상의 노래 ㅎ님이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주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딤전1.15절을 같이 보았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주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셨도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솔로몬의 취향이 하나 있다면 피부가 검은 무수리를 사랑하는 것이었듯이 주님의 취향이 그러하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고백하는 자를 용서의 은혜로 안아주신다. 이것을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무수리 슬람미를 사랑하는 것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성경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빗대어 설명한다. 한 몸으로 연합된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14.20절에서,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하심). 그날(성령이 임하면~)
또한 요17장에도, 주님은 여러 번 ‘아버지와 주님과 성도가 하나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같이 ㅎ님이 성도와 하나 됨이 바로 ㅎ님의 궁극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가 단순히 천국간다가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의 연합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남편과 아내의 사랑으로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고, 이게 최종적으로 계시록 19장에서는 혼인잔치로 묘사하면서 계21장에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을 일컬어 어린양의 아내로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거꾸로 마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 준비를 한 다섯 처녀와 기름 준비를 못한 다섯 처녀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랑의 문제이다. 예수님을 택하심에서 유발된 ‘처음사랑’에 근거해서 은혜로 신앙한 자와, 자신이 ㅎ님께 잘 보이려고 온갖 종교적인 행위를 내세우는 신앙을 한 자와의 차이이다. ㅎ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자는 진정한 감사와 감격이 없다. 말로는 은혜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실제와 내용이 없는 거짓일 뿐이다. 생전에 사랑으로 연합된 적이 없는 거짓 신앙이기에 그날에 주님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에 대하여 마17장 말미에서 주님은 중요한 언급을 하신다. 두 번째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하게 됨.. 그리고 속전 세를 걷는 자들이 와서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안내냐고(질문)/ 베드로가 듣고 집에 들어가니 주님이 먼저 아시고 말씀하심-세상임금들이 자기 아들에게 세금을 받냐? 타인에게 받냐? (타인이죠.) 그렇지? 그러나 그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서 먼저 오르는 물고기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그것으로 나와 너의 것으로 주라(하심)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반세겔의 속전세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생명을 속하는 속전 세는 출30.12절에 나오는데, 한마디로 구속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예물이다. 부자라고 해서 더 많이 내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서는 안 된다. (반+반=온전함) 이것은 어린양이신 IX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받아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반 세겔을 물고기를 잡아서 거기서 취한 한 세겔을 너와 나의 것으로 드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당시 가롯 유다가 관리하는 돈궤에는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당연히...) 그러나 그 돈을 내지 않으시고 굳이 낚시를 통해 반 세겔과 반 세겔을 취하신 이유는 주님의 메세지다.
주님과의 한 영되는 생명의 연합,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너 베드로는 바로 사망의 물에서 낚여진 물고기라는 말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나와 격리되면 죽는다. 이처럼 너의 옛생명은 끝났고 예수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얼마 후 십자가 사건후 성령을 받으면..). 베드로는 예수 만나서 옛사람은 죽고 예수와 연합된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마13장 끝의 천국비유에서 천국은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와 같은데,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물고기는 내어버린다고 하신다. 이때의 좋은 물고기란 성령 받아서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 자를 말하고 못된 물고기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열심을 내어 종교생활을 했지만 주님의 사랑과는 무관한 자들을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열심이 특심이 된 자기 자랑이 넘치기에 못된 자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ㅎ님의 의이신 IX를 믿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둔 사람의 의를 붙잡느냐로 구분된다.
마25장을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나 미련한 다섯 처녀나 모두 똑같이 신랑이 더디 옴으로 밤이 깊어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는 육신을 입은 연약한 인간들은 누구든지 ㅎ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을 내어놓지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들을 비유한다. -자신은 ㅎ님의 말씀대로 살수 없는 무능하고 무력한 자임을 알기에 주님의 택하심의 사랑이 그리도 감사하고 다행일 수가 없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은혜만을 붙잡는 자가 되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은 이치다. 그래서 자기 의가 없는 창기와 세리 같은 죄인들이 죄사함 받으면 주를 더욱더 사랑한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야 누가 주님을 사랑하겠는가? 아무 대가도 없이 죄사함 받아 영벌에서 구원함을 받은 사실이 있기에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자신의 최고의 가치로,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 자들이 성도들이다.
그 사랑이시며 생명이시며 빛되신 구원자 IX에 대하여 증거하는 이가 있다. 바로 세례요한이다. 6절에 보면, 요한은 ㅎ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다. 바로 IX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어진 자였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구약, 즉 옛언약은 새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잠정적으로 운영되어진 ㅎ님의 경륜이다. 그래서 구약은 새언약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몽학선생이다.
<마11:10~14> 읽으면서~
10절( 내 사자를 앞서 보낸다)..말라기 3장에서 인용, 내 사자(이 사람=세례요한)
11절(여자가 낳은 자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말함,/가장 큰 자란 메시야 예수를 본 자라서)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언어적 기법: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임)..누가? 율법으로는. 경륜을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 천국은 크고 작은 차별이 없다. 다 은혜로 가기에~
12~13절(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은 IX께 안내하는 몽학선생)
14절(즐겨 받을진대...깨닫는다면 알아먹는다면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다) 대다수: 몰라
그렇다면 왜 굳이 IX를 가리키는 자가 먼저 있어야 할까? 언약으로 일하시는 ㅎ님의 신실하심(주도면밀 하심)이다. 이를 통해 메시야이신 IX의 신분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렇게 사전에 예언된 일이 없이 메시야가 온다면 그가 과연 ㅎ님이 언약하신 그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나? 정당성이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미리 예언하신 것이다.
매시대마다 사단의 사주를 받은 짝통 메시야가 얼마나 많이 등장했던가? 지금도 신천지 이만희나 ㅎ님의 교회 안산홍(사망-아내가?: 사단 역사)이 있듯이 가짜들이 있어왔다(현재 한국에만 30여명의 자칭 그리스도 있다함).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예언하기를 -미리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선지자가 먼저 와서 ‘저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분이야’라고 지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서에 주님을 예비하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예언하셨고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말3:1~6> 1절 읽고, 여기서 ‘내 사자’란 세례 요한을 지칭한다.
좀전 읽은, (마11:10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실 메시아인지 물어보았다. 유대인들의 한계가 이런 모습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였지만 그들의 메시아관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이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능력자로 오셔서 다윗 왕조를 재건할 메시야를 기다려왔다. 그래서 세례요한 자신이 감옥에 갇혔지만 예수께서 능력을 발휘해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일거에 제압하고 자신을 옥에서 꺼내주며 새시대를 열어줄 것으로 여겼지만, 이런 낌새가 전혀 없으니까 세례 요한이 답답해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 질문한 것에 대해 주님이 답변하신 내용이 바로 말라기 3:1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라기 3:1절에서 ‘보라 내(여호와)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예수님)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께서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말씀이신데 예수님은 이 여호와의 자리에 자신을 그대로 대입(동격)시키시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언행을 유대인들이 견디지를 못한 것이다. 암튼, 이 예언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세례요한으로 왔고 그 세례요한이 증거한 주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분이 주가 되신다. 주란 여호와 하나님께 호칭한 내용인데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고백한 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증거였다. 주께서 홀연히 전에 나타나신다고 한다. 홀연히 나타나시는 것은 예기치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즉 심판의 주가 졸지에 임하신 것이다. 이 분이 바로 언약의 사자이시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께서 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전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사람 성전을 말한다. 성도가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이 분이 그들의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로 오신 것이다.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2절, 그의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누가 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서 임하시는 날, 즉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지만 그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다른 선지자들도 예언하였다. 구원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기에 두려운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임하셔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바리새인:심판을/창기 세리 죄인들: 구원을)
주께서 임하시는 날에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불이란 부정한 것을 소멸하는 동시에 정화시키는 일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시고 정결케 하실 자를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또한 세탁하는 사람들이 잿물로 옷감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언약의 사자가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3절, 또한 은을 연단하는 것처럼 레위자손을 연단하여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드린 제물이란 율법에 따른 짐승제물로서 여호와를 멸시하는 제물이었지만 이제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제물을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제물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불 심판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십자가 죽음이다. 그렇게 금과 은을 연단하시는 것처럼 연단하셔서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참된 레위 자손은 IX를 말한다.
<말4:1~6>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좀 전에 살펴본 말3장 1절 이하와 동일함. 1절의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는 교만한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이란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열심과 정성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지징하는 말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세상의 악을 말하는 게 아님). 반면에 2절의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란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4~6>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4~5절,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명한 율법과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율법과 법도를 기억함으로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게 함이다. 그 율법과 법도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율법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주신다고 하신다. 엘리야는 산 채로 하늘에 받아들여진 자이기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할 때 나타났고 그것을 목격한 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습니다. 방금 본 4절과 5절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이 나온 것처럼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17:9-13절)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러므로 변화산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엘리야의 역할은 세례 요한이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였지만 성경의 증거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는 것이다.
(누가복음 1:17절)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천사가 제사장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들이 세례 요한인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엘리야의 겉모습도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열왕기하 1:8절에 보면 엘리야의 모습이 털이 많은 사람이며 가죽 띠를 띠었다고 한다. 털이 많다는 것은 다른 번역에서 털옷을 입은 사람으로 말한다. 그러니 가죽옷을 입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막1:6).
약대처럼 털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를 고백하는 상징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말은, 정한 음식인데 메뚜기처럼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을 소망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꿀송이처럼 단 말씀으로 사는 자세를 의미한다.
암튼, 이런 외모만이 아니라 사역의 배경도 엘리야의 활동 시에 악한 왕 아합과 더 악한 이세벨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의 배경은 악한 왕 헤롯과 그보다 더 악한 헤로디아가 있었다. 이런 헤롯과 헤로디아를 공격하였다고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진 것이다. 당시에 엘리야가 둘 사이에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며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친 것처럼 세례 요한도 외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 요한이 외친 그 외침의 끝에 누가 오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이다. 그 날이 닥친 것이다. 그 날이 되면 말3:18절 말씀처럼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란 신약식으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빛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 하였는지 찾아보자.
첫째, 자신은 빛이 아니요라고 한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돌들로도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리라”
이렇게 외쳐되니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메시야 인가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자기들의 어려움에서 구해줄 영웅을 기다리 듯, 이들도 성경이 약속한 메시야를 자기들의 입장에 맞도록 생각하며 기다리는 중이기에 세례요한에게 제자가 생기고 많은 사람이 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는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는 것이다.
그 대답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말하면서 자신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것이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광야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뒤에 계시는 분을 소개하러 왔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그 분의 신들메를 푸는 종의 역할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자세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 요한의 제자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간다는 보고를 하자 요한의 응답이 무엇이었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은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자신의 사명을 따라 증거를 다 한다. 그 증거의 내용이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죄를 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증거를 한다.
둘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한다.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자유케 된 것은 그들이 독립운동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증거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실제로 오신 분이 바로 IX라는 말이다. 이처럼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메시야가 실제로 오셔서 새언약을 성취하시러 오신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알 수가 있다.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사명이 이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시사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 우리가 거듭나서 ㅎ님의 자녀로 등극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으면 말해 보시라.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하는 그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세상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셨기 때문이다. 그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된 자들이 새 이스라엘이다.
셋째, IX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2-34>)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시니라.”
성령세례는 인간이 어떤 의미있는 행함이 있어야 임하는 게 아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서 자신이 죄 밖에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성령세례다. 우선은 ㅎ님의 택함을 먼저 받아야 하고 그럴지라도 먼저 율법아래에서 죄인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때가 차면 아들의 영을 부어주셔서 ㅎ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다 ㅎ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이지 사람의 조건과 자격은 1도 개입되지 않는 차원이다. 그러하니 이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런 일인가?
그리고 성령이 임한 자는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된다. 자신이 그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입을 열어 말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는데 어떻게 입을 닫고 있겠는가? 그렇게 애타게 목말라했던 사랑의 생명수가 배속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와 보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외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은 X의 영이시기에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분만을 붙들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령이 임하였다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또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데 어떤 증인이 되는가 하면 결코 자기의 그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아니요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처럼 자신은 점차 찌그러지고 주님만 높아지기를 소원한다.
오늘 우리가 주의 성령이 임한 자라면, 그것이 나의 기도와 나의 경건과 나의 권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오직 나는 아니요, 세상죄를 지고 가신 IX의 공로임을 잊지 말고,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
첫댓글 이번 동영상에 오류가 생겨서 설교 원고로 대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