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일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적응될지 염려스러웠던 호텔 방이 아득한 내 집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숙소가 있던 가부키초는 서울로 치자면 강남역, 부산으로 치자면 서면쯤 되는 곳이라 밤마다 매우 붐비고 시끄러웠는데 무슨 이유인지 주일 밤부터는 조용했다. 지금 돌아보니 그곳 숙소에서 전철역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보게 된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나에게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파도처럼 밀려온 시간들이었다.
월요일 오전에는 교회 성도님의 사업장에서 예배가 있었다. 선교사님께서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 그 사업장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계셨다. 그곳 예배 중에도 주책스럽게 자꾸 눈물이 났다. 자꾸만 나카이 교회가 어두운 곳에서 밝게 빛나는 주님의 빛이라는 감동이 몰려와서... 관련된 말씀을 나누면서도 자꾸 감정이 격해졌다.
사실, 월요일 저녁에는 기대하던 청년들과의 QnA 시간이 있었다. 청년들이 미리 서면으로 작성한 질문에 내가 답하는 형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 혼자 떠드는, 조금 아쉬운 방식이었다. 청년들의 얘기를 더 많이 들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카이 교회 청년부는 19살부터 30대 초반까지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친구들이었다. 1년 사이에 1명에서 9명으로 부흥했다고 하는데, QnA 시간에는 6명이 참석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눈빛과 자세를 통해 많은 것을 간파하곤 하는데, 청년들 모두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진지했고 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들 너~~무 이뻤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물론이고 국제학교를 다니며 영어까지 마스터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여러모로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들이다. 아직 영혼몸이 일어로 번역되지 않았기에 누군가 CBC에 가서 배우고 워맥 목사님 책들을 일어로 번역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해 보니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어서.
아무튼, 청년들이 준비한 질문들이 너무 탁월했고 완벽주의를 아직 버리지 못한 탓인지 전부 다 답하느라 나만 너무 떠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친구들 얘기도 들어보고 싶다.
화요일에는 필요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저녁에 요다 센세를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선교사님과 나, 그리고 요다 센세 이렇게 셋이 만나려고 했는데 그러면 선교사님께서 우리가 영어로 대화할 때 너무 무료하실 것 같아서 청년들 중에 영어를 하는 친구를 초대했다. 사실, 나도 워맥 목사님께 배운 유일한 한국인이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만만치만은 않았는데 그래도 우리 한국은 복음화율도 높고 이미 출판사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요다 센세는 복음화율이라고 할 수도 없는 1%에다가 또 홀로 모든 사역을 다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다 보니, 선교사님께서 그가 걸어온 길이 매우 외로운 싸움이었을 거라고 격려와 위로를 건내자 큰 감동을 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함께 식사하고 선교사님은 교회 일정으로 먼저 들어가시고 나랑 요다 센세와 청년부 형제는 2차로 일본식 카페에 가서 교제를 이어갔다. 그때 청년부 형제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나머지 청년들의 얘기를 듣지 못했던 QnA 시간이 아쉽게 느껴진 계기가 됐다.
수요일에는 도쿄 관광 일정이 잡혀 있었다. 나카이 교회 집사님, 권사님 부부가 시간을 내어 관광을 시켜 주셨다. 그중에 나는 도쿄 타워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잊지 못하겠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창가로 향했는데 도쿄 전경이 보이자 마음이 울컥하면서 축복기도가 터져 나왔다. "주님, 이곳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도쿄에 주님의 보혈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손을 들고 한 바퀴 돌면서 기도하는데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나 말고도 여기서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러길 바라며 내려다보는 내내 마음이 요동쳤다.
집사님 권사님 부부와 선교사님께서 나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시고자 애를 많이 쓰셨다. 내향인인 나도 에너지를 끌어모아 최선을 다해 리액션을 했지만 중간중간 에너지가 고갈될 때가 있었다. 허허...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