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4
요한복음 16장 13-14절 [1장 4-5항]
특별계시의 종결과 완성으로 주어진 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고 할 때 정경으로서의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66권 외에는 없다는 게 우리의 고백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으로 된 성경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이라는 것이고, 그것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교회가 정경으로 여기고 있는 소위 외경은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것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권위가 없습니다. 인간의 다른 저술들 그 이상으로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없고, 사용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4항과 5항인데, 4항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벧후1:19,21, 딤후3:16, 요일5:9, 살전2:13).
조금 있다가 살피게 되지만 4항에 이어 5항에서는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만큼 교회의 증거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항은 2항 마지막 부분에서 오직 66권으로 된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할 때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구약의 정경으로 39권을 결정한 것은 주후 90년경에 있었던 얌니아 회의에서입니다.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회의가 있었듯이 신약 역시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회의가 있었는데, 주후 379년 카르타고에서 있었던 제3차 종교회의에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의 권위가 종교회의, 종교회의를 이끌던 교회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가 그렇습니다. 이런 가톨릭을 의식하면서 칼빈은 자신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가운데는 오직 교회의 승인에 의해서 허용될 때에만 성경이 내적으로 엄중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보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널리 횡행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하여 어떤 경의를 드려야 할지, 어떤 책들을 그것의 목록에 속한 것으로 여겨야 할지, 이 두 질문이 모두 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말한다.”(1559, 1권 7장 1)
실제로 가톨릭교회 교리서 85항에 보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고 하면서 곧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지만, 저들은 성경만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여기지 않고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전’(聖傳)이라고 하는 거룩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전통까지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직무가 누구에게 있다고 하는가? 주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어지는 86항에서 “그렇지만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한다...”는 고백도 합니다. 하지만 95항은 “그러므로 성전과 성경과 교회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각기 독립되어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셋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영혼의 구원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고 함으로 성경만이 아니라 성전(聖傳), 교회의 교도권까지를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보고 있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교회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교황과 주교들이 부패하면서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나 로마 가톨릭이란 교파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긋나게 해석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조). 이런 사람에게, 혹은 교회의 증거에 성경의 권위가 의존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가톨릭에 대하여 칼빈은 그의 책에서 에베소서 2장 20절로 반박하는데(1559, 1권 7장 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교리가 교회의 터라는 것이고,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교리가 그 확실성을 확립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톨릭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교회의 승인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라면, 성경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있음으로 교회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그들의 교리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톨릭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교리를 교회가 생겨난 첫 시작점으로 삼는다고 할지라도 교회 자체의 판단에 따른 중재가 없다면 어떤 책들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돌려져야 하는지 여전히 모호하게 남는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선포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그 교리가 발견되는 곳마다 교리에 대한 수납이 교회보다 앞섰을 것임이 확실하며, 그 수납이 없었다면 교회 자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의 수중에 있다는 것, 때문에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승인에 달렸다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성경 앞에서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럼 성경의 권위는 누구에게 의존하는가? 신앙고백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일단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기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에서 좀 더 풍성하게 다루게 되는데, 신앙고백 1장 4항에서는 하나님을 진리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 자체라는 것은 하나님께는 거짓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부터 나옵니다. 특히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마귀에 대하여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증거 합니다. 진리와 거짓을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진리 자체라는 것은 거짓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거짓이 있다는 것은 진리에 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딤후3:16), 비록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66권이라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숨이 들어간, 그래서 오류가 전혀 없는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그리고 기록한 것이 성경의 모든 예언입니다(벧후1:21). 이런 성경이기에 사도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겁니다. 자신의 경험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성경조차 기록하고 인정할 만큼의 그런 경험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이라고 했던 것이고,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의 성경이기 때문에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던 것입니다(벧후1:19).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는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면, 다시 말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4항에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표현은 권위가 성경 자체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혹은 교회가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성도와 교회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도전 앞에 서게 되는데, 계몽주의 사조가 그것입니다. 계몽주의는 한 마디로 이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성의 강조가 결국 모든 것에 대한 판단 규범으로까지 있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진리는 인간 이성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인간 이성에 의해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신적 기원과 무오성은 노골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희 교단 신문에 위기에 처한 ‘오직 성경’이라는 글(김병기 목사)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http://repress.kr/25602/), 이하 내용은 그 부분을 소개하면서 성경에 대한 권위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믿는 계몽주의 관점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였던 여러 주장 가운데 중요한 두 입장은, 소위 신학적으로 “자유주의”(Liberalism)와 “신정통주의”(Neo-Orthodox)라고 소개합니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본주의 르네상스 운동이 낳은 계몽주의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 이성의 빛에 비추어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사조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의 말씀으로 받기보다는, 인간의 종교적 사상이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오류 가능한 인간들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인간의 “절대 의존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ängigkeitsgefühl)이라고 했으며, 성경은 초자연적으로 영감 되었거나 무오한 것이 아니므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인간 이성의 절대성으로 무장된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인간의 인식 한계 안에서 비평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성경의 권위를 인간 이성의 발아래로 끌어내렸습니다. 결국 과학에 기반한 물질문명 발전의 근거가 된 인간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현대인들은 물론, 그들에게 설득된 신학적 “자유주의”에 오염된 오늘날 신앙인들은, 더 이상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오류가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요,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법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신정통주의”(Neo-Orthodox)입니다. 실존주의에 철학적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했으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실존적으로 주관화시켜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는 성경과 계시를 구별했는데, 성경은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므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부 모순과 문자적 오류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이성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그 자체는 오류가 있지만, 신자가 성경을 읽거나 선포되는 성경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주의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무오성과 신적 기원을 부인한 자유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과 체험을 해석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게 하여, 교인들이 자의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하는 발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의 도전보다 더 심각한 도전이 있다는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또는 “탈근대주의”의 도전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이성의 절대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무한한 진보와 발전 가능성이라는 근대주의(Modernism)의 믿음에 대한 회의와 반대로부터 시작되었고,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며, 모든 가치와 지식과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합니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근대의 믿음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성경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성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 이성에 기초한 진리를 추구면서, “상대적”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리는 다 상대적인 진리다.”라고 주장하면서도, “모든 진리는 다 상대적인 진리다.”라는 이 주장만은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21세기 사상과 문화의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자기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다 옳다는 상대주의를 주장할 뿐입니다. 모두에게 옳은 객관적 진리는 없으므로, 결국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주장에 대해 수용할 수는 있지만, 성경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진리이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나 교인들이 절대적인 진리,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성경의 교훈을 상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받아들일 때, 자기가 원하는 말씀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반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비진리로 여기게 됩니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저한 상대주의적 입장은, 객관적 또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경의 절대성과 기독교 교리의 객관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조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말씀, 사사기 21장 25절의 말씀은 모든 역사 안에서 나타났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왕으로 두지 않을 때면 언제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권면하면서 경고하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1-4) 즉 교회의 사명, 교회 안에서 말씀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4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성경의 권위는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겨야 합니다.
4항과 관련하여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는 입장을 정리하면서 5항으로 넘어가자면, 가톨릭은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입장입니다.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도’라는 것은 성경 외에 성전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66권 외에 외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는 입장입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언제 그렇게 되는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이해될 때 그렇게 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절대 진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진리로서의 성경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66권의 저자입니다.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시듯 그분의 말씀도 진리입니다.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오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가? 5항은 교회의 증언과 성경의 여러 특징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성경 스스로의 증언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습니다(딤전3:15). 그리고 내용의 천상적인 특성, 교리의 유효성, 문체의 장엄함, 모든 부분들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 조망,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 및 그로 말미암은 전적인 완전성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거하는 요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나옵니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
4항에서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지만, 5항에서는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살폈지만 가톨릭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권위가 종교회의, 종교회의를 이끌던 교회나 사람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갖게 된 데는 어거스틴의 말이 한 몫을 했는데, 그는 “교회가 나를 이끌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http://repress.kr/19659/). 그러나 칼빈은 그의 책에서 가톨릭의 어거스틴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복음의 확실성이 달려 있다고 이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승인을 통하여 자극받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어떤 복음의 확실성도 없을 것이므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뿐이다.”(1559, 1권 7장 3)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가톨릭은 어거스틴의 말을 통해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로 인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거스틴은 교회의 인도로 인하여 성경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 것은 교회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고백서 5항 첫 번째 부분에서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가 더 높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스스로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5항의 나머지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 권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권위 아래에서 교회는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함을 통해 그 의미를 잘 드러낼 때 성경이 얼마나 높고 존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낸다는 차원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증거, 다시 말해 교회가 성경 66권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존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고 할 때 교회만이 진리의 기둥과 터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교회에 두셨고, 그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한 그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도 합니다.“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교회의 증거만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내용의 천상적인 특성, 교리의 유효성, 문체의 장엄함, 모든 부분들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 조망,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 및 그로 말미암은 전적인 완전성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거 하는 요지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가 천상적인 특성을 버리고 지상적인 특성으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합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 설교에 있어 주의해야 할 부분이 이것인데, 구약은 유아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복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상의 복에만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너머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 계속적인 훈련이 지상 삶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9-10)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즉 구약이나 신약이나 천상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교리의 유효성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교회요 택자로 하여금 반드시 유익을 준다는 것인데,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천상적인 특성, 교리의 유효성과 함께 성경은 문체의 장엄함, 모든 부분들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적인 조망을 보여줍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성경 66권의 저자라면 문체는 장엄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모든 부분의 일치는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기록하게 하셨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다를 수 없는데, 하나님이 진리 자체요, 따라서 오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자신을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십니다. 창조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이며, 섭리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물론 창조 직후 죄가 들어오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도 베푸십니다. 여기서 인간 구원의 길에 대한 충만한 발견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처럼 이 길도 구원의 길이요, 저 길도 구원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길로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만(요14:6) 그 구원의 길이 성경에서 충만하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신약 시대이지만, 구약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5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되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인 이상 성경은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을 가집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은 전적인 완전성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증거 할지라도, 또한 성경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 없이는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성령의 내적 역사에 대하여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잘 증거 해 주고 있는데, 요한복음 16장 13절과 14절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일단 성령 하나님을 ‘진리의 성령’으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 자체가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와 상관없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데, 그는 결코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과 성령의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성부가 스스로 계시듯, 성자도 스스로 계시며, 성령도 스스로 계십니다. 당연히 성부도 스스로 말씀하실 수 있고, 성자도 스스로 말씀하실 수 있고, 성령도 스스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의 뜻이 성자의 뜻이요, 성자의 뜻이 성령의 뜻이라고 할 때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만 자신의 뜻으로 가집니다.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뜻만을 자신의 뜻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과 상관없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요한복음 16장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알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떠나서, 혹은 말씀에 반하여 역사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5항 첫 부분의 고백을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는 겁니다. 교회의 증거가 성경의 권위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성경에 합당한 해석과 설교로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말씀 사역자는 바로 이 일에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