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진
서른다섯 해 지나
시드니항으로 만나러 와서는
사위가 은근하게 물들어서
진눈깨비 그치고 몸이 하얀 이슬처럼 뒤덮인 냉랭한 초저녁이었네 이모집에 휴가를 왔었네 삼팔선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둘러볼 요량으로 검문소 앞을 지날 때였네 바로 볼 수 없는 헌병 시선이 내 사진기에 닿았네 미동 없이 얼어붙은 눈사람이었네 불을 붙이며 노는 아이처럼 녹아내린 병정을 바라보았네 일순 불에 닿은 것처럼 서로를 건드리는 말초신경이 쌍쌍바처럼 녹아내렸네 붙어 있어 뜨거운 거진 간성, 병가 상가 둘러대고 여름엔 물오징어회 가을엔 멸치회와 이밥 겨울엔 생태찌개로 한철 보냈네 살림 차렸다고 송강리 아낙들이 쑥떡 방아를 찧고 다녔네 이모의 중추신경이 내 귓속으로 뛰어들었네 숨구멍 감금당할 때마다 전화통에 대고 봄엔 잔치국수를 먹자고 했네 입방아처럼 궁색을 떨었네 세월이 곧장 건너가도 말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네 심장이 메아리 쳐 그 깊이를 모를 때였네
기억이 깨어져 아름다운
김인옥
2017년 <문학나무> 등단. 2021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시집 <햇간장 달이는 시간>.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시작노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였던 시절이었다. 거진, 비무장지대로부터 더 멀지 않는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긴 시간이 지나면서 어제 그 사람이 아니라 그때 그 인연이, 어제 그 인연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으로부터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놓은 지점에 접어들었을 때 아카시아꽃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그래서 매일 마음이 후들거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