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유년 시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강한 분이셨다. 그것은 외조모의 영향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인물이 뛰어 났고, 용모도 항시 단정하셨다. 또한 인정이 많고 경노심이 뛰어나 인근의 노인들을 부모처럼 공경했으며, 어려운 어른들을 보살피는 일 또한 늦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어머니를 “후덕한 사람”이라 부르며 좋아했고, 어머니도 이웃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어머니는 유독 소설책을 많이 읽으셨다. 외조모가 일찍이 글읽기를 좋아해서 당시 소설책을 모두 사 읽었다. 특히 「삼국지」, 「옥류몽」, 「류충렬전」, 「장끼전」 같은 소설에는 능통하셨다. 어머니는 새로 책이 출판되면 빠짐없이 구하여 읽으셨다. 어머니는 소설을 읽으면, 암송하듯 그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기를 좋아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총명하셨던 것 같다. 판단력도 뛰어나셨고, 이론이 정연한 분이셨다. 때때로 외조모가 오셔서 수일 쉬었다가 가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와 외조모는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한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자 마음을 붙일 곳이 필요해서, 「삼국지」, 「옥류몽」 같은 굵직굵직한 소설에 더 심취했다고 회상하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1909년 2월 4일(음) 충남 공주군 계룡면 하대리에서 경주 김씨 성국(成國) 씨의 장녀로 태어나셨다. 그 해는 순종(純宗) 3년,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로서 을사조약 조인을 1년 앞 둔 해였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해였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동아기독교가 조직된 지 3년이 지난 때였다. 특히 어머니가 태어나신 공주지역은 이미 1907년 제2회 대화회를 개최할 정도로 동아기독교와는 깊은 인연을 맺은 고장이었다.
어머니의 생가를 세살박이 동생 을수(乙洙)와 함께 처음 방문한 것은 내 나이 일곱 살 때였다. 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경에 내린 뒤, 다시 흰색의 버스를 타고 갔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외가를 찾은 것은 해방된 뒤였다. 그 때 내 나이는 19세. 그 곳에는 외숙 3형제가 살고 있었다. 큰 외숙댁에는 화준, 화식, 가운데 외숙댁에는 딸만 셋, 그리고 막내 외숙댁에는 영준, 영주라는 외사촌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막내 외숙댁에 속했다. 외숙모는 대인관계가 좋았고 집안을 늘 화목하게 이끌어가셨다. 같은 마을에 이모댁이 있었고 이종 사촌들도 있었다. 어머니 친정 큰 아버지의 딸 한 분이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사셨는데, 그의 소생이 함연태(咸然泰) 씨였다. 이종형인 함연태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어머니는 1년에 한 번씩 40리 떨어진 이모집을 찾아가 2, 3일 쉬어 오는 것을 일상생활의 낙으로 여기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 형제도 함께 동행했다.
나에게는 두 분의 고모와 한 분의 숙부가 계신다. 큰 고모는 공주군 사곡면 가교리 박충복 씨에게 출가하여 아들로 봉화와 그의 누이동생을 두셨고, 작은 고모는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풍덕리 김경국(金京國) 씨와 혼인했다. 숙부 김영만(金永萬) 씨는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던 분인데, 1923년경 공주군 계룡면 하대리 노덕칠(盧德七) 씨의 작은 딸과 혼인하셨다. 3-4년 같은 집에서 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숙모의 등에 업혀서 지내던 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촌으로는 복련, 철수, 철순, 봉수가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먼저 기독교인이 되셨다.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시게 된 것은 두 분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 분은 나의 외조모시다. 외조모는 본래 논산군 연산면 오구리에 사셨는데, 자식들의 직장을 따라 잠시 장항읍(長項邑)으로 이사하셨다. 그때 외조모는 장항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도 이런 외조모의 기독교신앙을 은연중에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기 3년 전 쯤, 내 아우 병수(丙洙)는 갓 돌을 넘긴 어린 나이에 태독으로 독창(악성 부스럼)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어 어머니의 근심을 날로 심해 갔다.
그 때 주일만 되면 어머니를 찾아와 전도하던 분이 있었다. 그분은 김형원(金炯元) 씨의 모친이었다. 하루는 그 모친이 전도부인인 자기 동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어머니는 전도부인에게 별 생각 없이 안고 있던 아이의 머리를 가리키며, “이 아이 병을 낫게 해주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전도부인은 “걱정말고 나오라, 반드시 고쳐준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고 앉은뱅이도 고친 분이라고 장담을 했다. 어머니는 죽은 자도 살린 분이라면 이 정도의 독창쯤 아무 것도 아니겠거니 생각되어 교회에 나가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동생의 병은 점점 차도를 보여 완치되었고, 그 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 이 일을 지켜보던 이웃사람들도 점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마을에 전도의 문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