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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을 일일생활권이 되게 한 승천>의 줄거리:
강릉에서 ktx 첫차를 타면 서울에 가서 온종일 볼일 보다 다시 강릉에 내려오는 서울 일일생활권이 가능합니다. 뉴욕이나 파리 모로코 시드니 일일생활권이 가능한 날도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만들어진 일이 천국 일일생활권입니다. 하지만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과연 몇 명이나 이 기적을 누렸을까요?
천국을 일일생활권이 되게 한 승천
(사도행전 1장 9절~11절)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을 일일생활권이 되게 한 승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을 일일생활권이 되게 한 승천’
본문은 앞선 8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마지막 명령 이후에 나타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써 증언해야 될 내용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승천 사건 자체는 증인이 되라하신 말씀 이후에 일어났지만 승천 후에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기에 승천까지의 과정 모두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당하시고 수난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까지가 우리가 증인으로서 증언해야 되는 내용입니다.
한편 우리가 이러한 본문에서 주의를 집중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까지의 과정을 통해 하늘로 가시는 동선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또한 이 길은 성령님이 강림하시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령세례나 성령강림을 말할 때 성령께서 정해진 길을 통해 오신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세례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물세례가 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세례는 인격을 성령에 잠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령에 의해서 마음과 의식과 몸이 장악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령 충만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령세례 혹은 성령 충만을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령세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동선이라는 특정한 길을 통해 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성령께서 오시는 이 동선 위에 있을 수 없다면 성령과 마주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선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길이며 또한 성령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집중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흰 옷 입은 두 천사의 말이 참 이상합니다.
천사들이 말하고 제자들이 듣는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구름에 가려서 더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계속 하늘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다가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기 위해 하늘을 응시할 것입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렸다고 해서 금방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마음은 기쁘고 놀라운 동시에 그 예수님이 더는 자신들과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이별의 서운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만 제자들은 배신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다른 제자를 뽑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대신할 수 없는 분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제자들의 가슴은 미어졌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심정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등장해서 하는 말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제자들이 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지 몰랐던 것일까요? 천사들은 제자들을 향해 꾸짖듯이 묻고 있습니다. 대체 제자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꾸짖음을 당해야 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계속 오해가 빚어지는 대목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부분을 재림으로 해석했지만 재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의 의미도 감춰져버리고 맙니다. 설령 이 부분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하더라도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꾸짖음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의 본래 의미를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설마 너희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이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은 결코 이별이 아님을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제자들의 입장이었다면 떠나셨는데 왜 이별이 아니냐며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이별이 아닌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나타납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천편일률적으로 재림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입니다. ‘오시리라’는 한 마디에 다른 모든 말씀이 묻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분은 바로 ‘본 그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자면 천사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재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승천의 상황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보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온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보게 될 사건임을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북반구에 사는 사람, 남반구에 사는 사람, 적도 부근에 사는 사람, 그리고 지구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사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모든 사람이 동시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또 재림 때에는 온 우주가 마치 휴지가 물에 녹듯이 인간세상이 없어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든지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 애인이 있어도 애인을 볼 수 없고, 배우자를 볼 수도 없으며, 자식도 볼 수 없고, 갓난아기를 낳은 엄마조차도 예수님을 보느라 아기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은 재림이 아니라 성령이 오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앞서 계속하여 성령의 강림을 강조해온 맥락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성령이 어떠한 분이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오실 성령님께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같은 장 3절에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18~19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말씀을 재림의 상황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오는 효과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강림하시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땅과 천국 사이에 오고 감이 가능해지는 길이 생겨난 것입니다.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은 천국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권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이 너희들의 일일생활권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성령을 통하여 매일 예수님과 마주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된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왜 착각하고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승천하심을 통하여 천국이 일상적 관심의 영역으로 포함되고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드나들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며 살 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우리는 땅에 남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게 되는 사건입니다.
KTX를 통해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다고 합니다. 강릉에서 오전 6시 30분에 KTX를 타면 8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청량리에 도착합니다. 이제 서울에서 온종일 일을 보고 다시 강릉으로 내려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신 길을 통해 성령님이 강림하시면서 선민들에게 하늘과 땅 사이에 오고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이 우리의 일일생활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제자라 하여도 좋고 교인이라 하여도 좋고 성도라 하여도 좋습니다. 무엇이라 부르든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성령강림을 통하여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란 무엇일까요? 비유적으로 서울 일일생활권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서울에 가는 이유는 지방에서는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밀집되어 있고 문화시설도 많습니다. 간단히 말해 서울은 세상에서 말하는 좋음이 밀집된 곳입니다. 그렇기에 서울이 일일생활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지방에 살고 있을지라도 아침 일찍 서울로 출근하여 할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천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서울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이 밀집된 곳이지만 천국은 진정한 좋음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천국이 일일생활권이 됨으로써 우리는 그 하나님을 소원할 뿐만 아니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릉에 사는 사람이 KTX를 통해 매일 서울에 가서 일을 보고 내려오는 것처럼, 우리는 승천의 길을 통해 매일 천국으로 마음을 보내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하고 바라며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스웨덴으로 입양을 갔던 아이가 성장하여 한국에 돌아와 부모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아원에 맡겼던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부모를 찾아 상봉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제 스웨덴은 남의 나라가 아니게 됩니다. 일상적 관심사의 영역이 되어 항상 스웨덴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처럼 이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승천은 천국이 연고지가 되게 한 사건이며 일상적 관심의 대상으로 만든 사건인 동시에 마음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의 채움을 천국에서 이룰 수 있게 한 사건이 바로 승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천국의 일일생활권이 허락된 사람이라면 천국에서 좋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갖고, 천국에 대한 좋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내 것으로 삼기를 소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자 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일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벌어 하나님으로 부자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을 통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한편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사는 동안에는 마치 가장이 서울로 출퇴근을 하면 배우자가 집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여 가시면서 천국에 올라간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세상을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가서 돈을 버는 것처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법니다. 그럴 때 땅에 남아있는 의식의 지정의와 언행에 대해서는 성령님이 주인이 되어주셔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행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강릉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KTX 표를 구입해야 하고 열차를 타야 합니다.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이보다도 간단합니다.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 외에는 의식할 사건이 없다는 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실제로는 돈 문제가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도 있고 가정의 문제가 있어도 이 모든 사건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등지고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면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성령님이 강림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됩니다. 공생애 때의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나의 삶에서 제일 큰 일로 여기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도록 지정의를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를 동일시할 때에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벌기 위하여 마음의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나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 뒤에 이 땅을 향해서는 몸과 의식을 움직이시면서 생각나게 하시고, 감정을 느끼게 하시고, 의지를 발동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내가 생각하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것 같고 의지를 발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성령의 역사가 개입하시게 됩니다. 보이는 일과 들리는 일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좋고 나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 예수님을 먼저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 귀에 들리는 일들에 대해서 내가 직접적으로 판단하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이 승천하신 길을 따라서 성령은 임하시고 천국의 일일생활권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을 벌게 되고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있음을 느끼시고 좋음을 판단하실 것이며 소원을 따라 진행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위해 해야 할 단 한 가지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지 않고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식으로 붙잡은 상태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오고 감이 이루어지는 길의 나들목입니다. 내 마음은 성령님께 이끌려서 하늘로 올라가고 성령님은 나의 삶의 주체가 되시고자 내려오시는 길입니다. 이것이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 한 가지 일을 못해서 복음이 약속하는 모든 은혜를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신분을 확인합니다. 배우자 앞에서는 남편이자 아내이며 자녀 앞에서는 부모입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아들이나 딸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앞서야 될 정체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이기 이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렸기에 주어진 일들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마음에 가족이 아닌 하나님의 있음이 우선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과 동일시가 되도록 고백하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십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라는 고백은 나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나의 의지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더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고 하늘에 대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에 나의 마음도 함께 올라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도 나의 생각은 움직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에 대한 판단은 이루어져야 하며 입장정립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나를 대신하여 성령께서 해나가시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삶의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회사에 나가서 자신의 신분을 찾습니다. 대리로 과장으로 부장으로 신분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위해 직접 마음으로 일에 개입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 성령이 임하셔서 마음은 성령과 더불어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서 마음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직장이 아닌 하늘에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성령께서는 그 길을 통해 나오셔서 지정의와 언행에 역사하시며 회사 일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모든 영역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으로 삶의 현장을 등지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크고 중요한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십자가 사건보다 더 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보다 큰 사건은 지구가 두 쪽이 나고 하늘이 무너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나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일 큰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승천하신 길을 따라서 성령은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예수님이 내신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내신 길을 따라 나의 마음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나의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증인의 삶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승천하심을 통하여 천국이 일일생활권 안으로 포함되게 하셨으니 오직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봄을 중단치 않음으로 승천하신 길을 따라 성령이 강림하게 하시고, 강림하신 성령에 의해서 권능이 드러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