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창 이찬의 생애와 문집
이원걸(문학박사)
[국창의 생애]
이찬李燦(1575-1654)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字는 중명仲明, 호號는 국창菊窓이다. 그의 선조는 여주驪州로 뛰어난 성씨이다. 고려 때 휘 행行이 문형文衡을 맡아 명성을 떨쳤으며 호號를 ‘기우자騎牛子’라고 하였다. 양자 적逖은 조선조에 들어와 예문관직제학藝文官直提學이 되었다. 후손 사필師弼은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응천凝川에 은거하였다.
내한來翰 태迨는 권신權臣들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월연月然에 퇴거하여 호를 ‘월연주인月淵主人’이라고 했다. 손자 윤수潤壽는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윤수는 풍산류씨豊山柳氏 부인을 맞았는데 부인은 증贈 영의정領議政인 관찰사觀察使 류중영柳仲郢(1515-1573)의 따님이니 곧 이찬의 모친이다. 윤수는 어려서 용궁龍宮 고모姑母 백씨白氏의 집에서 길러졌다. 이로 인해 경북 예천 용궁의 무이촌武夷村에 살게 되었다.
국창은 만력萬曆 을해년乙亥年에 태어나 조고祖姑에게 길러졌다. 형제는 넷인데 그는 둘째이다. 맏형의 이름은 명明이며 두 아우의 이름은 경烱·환煥이다. 형제 우애가 좋고 재주가 뛰어나 ‘금옥金玉 같은 집안의 후손’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타고난 자질資質이 뛰어나고 성품이 올곧아서 이치를 깨닫고 글에 통달했다. 외삼촌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서애는 이들 형제를 특별히 사랑하며 ‘천리마의 기량을 지녔다’고 하며 애지중지했다. 외사촌 동생 수암修巖 류진柳袗(1582-1635)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영남의 선비들에게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막상막하의 실력을 쌓았다.
19세가 되어 선성宣城 고을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1531-1598)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설월당 김부륜의 당시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아 일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찬은 김부륜을 통해 퇴계의 학문 전통을 계승했다. 처남인 계암溪巖 김령金岭(1577-1641)과 학문을 익혔다. 설월당은 이들을 학문의 방도에 따라 가르쳤다. 바깥으로 나가서는 모든 이들에게 공손하며 안으로 처가에서는 유교 규범을 익혀 보고 듣는 바가 항상 반듯하였다. 장가를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는 당시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도 전염병에 걸려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
이듬해에 부친도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연이은 초상을 당해 스무 살 무렵 병약한 몸으로 근심에 얽히고 생전 겪어본 적이 없는 병에 걸렸지만 겨우 살아났다. 소년 시절부터 품었던 재주와 학문은 원래 경세經世를 위한 것이었지만 병이 호전된 이후, 과거 급제를 위한 공부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그는 여러 경전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의학 관련 서적을 심취해 읽었다. 그는 이러한 의학 서적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하여 처방한 결과 자신의 몸이 회복된 뒤에 고질병이나 기이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의술에 힘입어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모두 그를 두고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선비’라며 칭송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기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다. 세인들은 그를 보고 ‘명의’라고 칭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가서 약재를 구해 왔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병에 걸려 그를 찾아오면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많은 칭송을 들었다. 국창의 어진 인품과 선비 정신이 인술 시혜로 구현되었다.
인조仁祖께서 병환이 들어 태의太醫가 온갖 처방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자 조정에서 공을 불렀다. 당시 공은 시골에서 지냈는데 어명이 내려오자 조심스러웠지만 의리의 마음이 일어나 몸을 일으켜 대궐로 나아갔다. 당시 태학사太學士 이민구李敏求(1589-1670)가 제조약원提調藥院을 맡았는데 국창을 처음 만나자마자 공경하며 존중히 여겨 이르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영남 선비로서 임천에 묻혀 사는 보배로운 군자를 뵙게 되는군요!”라고 하며 즉시 동궁익위사사어東宮翊衛司司御를 내렸으며 연이어 종부주부宗簿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을 받았다. 이어 군위현감軍威縣監 직이 내려졌다. 몇 달 동안 인조를 치료한 공적으로 소문이 났다.
국창은 자신의 병을 다스린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그 뒤에 다시 조정의 부르심을 받아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가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어, 고을을 다스리다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직을 하고 귀향하기를 청하여 귀향했다. 고향에서 지내다가 팔십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국창은 타고난 바탕이 맑고 순수했으며 성품도 온화하고 유순했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평온한 마음으로 사물의 이치에 따라 순순히 응하여 스스로 편안하고 아담하며 깨끗하게 살았다. 들뜬 세상 명예에 대해서는 일체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자연을 완상하고 마음을 비웠다. 집안에서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 했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게 지내되 항상 정성을 다했다.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주어 조카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경서와 역사서를 읽고 시를 짓고 감상하는 것을 노년이 될 때까지 즐겁게 이어갔으니 이는 국창이 시례詩禮의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 연원의 흐름을 이어받았고 유학 본원의 바름을 이어받은 것과 남보다 특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을 통해 학문하는 방도를 철저히 익히고 엄하게 마음과 행동을 제어하여 평소 생활에서 유가儒家의 규범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종유하던 스승과 벗으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1571-1629),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1598-1674) 등이다. 국창은 이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고을에 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는데, 포은圃隱, 퇴계退溪, 서애西厓 세 분의 위패를 모셨다. 서원을 창건한 의도는 선비들이 몸을 담고 배우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국창은 이 서원 창건 무렵에 앞장서서 이 일을 완수하였다.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으로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이 시간이 지나면서 산일散逸된 편篇이 있어서 완간完刊을 할 수 없었다. 국창은 온 힘을 다 기울여 산일된 부분을 모아 완성본을 이루었다. 국창의 적극적인 유림 활동을 엿볼 수 있는 행적이다.
영인令人 광산光山 김씨는 설월당의 따님으로 명철한 식견을 지녔고 글에 달통하였다. 김씨 부인은 친정에서 어진 교육을 받아 아름다운 규범과 행실을 지녔다. 남편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고을의 남쪽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합장했다. 부인이 남긴 시 48수가 『국창집』 말미에 덧붙여져 있다. 국창의 후손들이 남편의 문집 뒤에 아내의 한시 작품을 편집해 두는 아름다운 사례를 남겼다.
[국창집]
이 문집은 그의 후손 이준구李駿九가 편집했다. 서두에는 이만인李晩寅의 서문과 「국창선생세계도菊窓先生世系圖」가 실려있다. 권1에는 「추회秋懷」를 비롯한 시 69수와 37편의 만사가 실려있다. 권1의 시는 석별의 정을 표현하거나 지인들과 나눈 화답시가 많다. 만사는 교분이 있던 이윤우‧정윤목‧김윤목 등 벗을 위해 지은 것을 비롯하여 집안 친인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것도 있다.
권2에는 9편의 편지글(金溪巖·韓山斗·金耀亨)과 5편의 「제문」(洪叔京·曺護軍·鄭仁輔·全性之·伯兄梅園公)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글은 김령‧한산두 등 지인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내용은 지인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치료법을 처방해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애집 출간 과정에서 주고받은 글로 채워져 있고 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도 있다.
권3에는 「행장」 1편(權璉夏撰)과 「묘갈명」 1편(李敏求撰), 국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만사」 83편이 실려 있다. 「행장」과 「묘갈명」‧「만사」에 저자의 가계와 학맥 및 의사로서의 탁월한 이력과 관력을 담고 있다.
권4에는 국창이 류성룡과 김령에게 받은 편지 11편과 다른 이가 국창을 위해 지은 「제문」 17편 및 「발문」 1편이 실려 있다. 타인의 편지를 모아놓은 것과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미에 영인 광산김씨 부인의 한시 48수가 실렸다.
국창이 남긴 시는 5언 절구 6수, 7언 절구 25수, 5언 율시 17수, 7언 율시 19수, 5언 배율 2수로, 총 43제 69수이다.
(202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