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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금보의 [독무이지차구곡가운]
이원걸(문학 박사)
Ⅰ. 머리말 Ⅱ. 생애 Ⅲ. 문집의 체제와 내용 1) 편집 2) 체재 3) 내용 Ⅳ. 퇴계 추존과 정심의 미학이 담긴 시문학 1) 향토 산수 우월 정신 2) 자연친화와 한거흥취 미학 3)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의 유가 심미 의식 4) 사우 교유와 선현 추모 5) 퇴계 추존 의식 6) 수신과 정심의 미학 7) 「진정부」의 유가 이념 지향성 Ⅴ. 매헌 시문학의 의의 1) 퇴계 산수자연관 체득 2) 퇴계 출처대의의 실천 3) 퇴계 학문정신의 계술 Ⅵ. 마무리 |
Ⅰ. 머리말
본고는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연차적으로 연구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진행된 것이다. 개별 작품 분석에 앞서 철저한 작가의 주변 탐색이 이루어져야 작품에 응축된 작가의 심미의식과 정신세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매헌梅軒 금보琴輔(1521-1584)의 생애와 문집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의 시문학 특징을 정리한다. 이를 위해 매헌이 살았던 시대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조선 전기 중앙에 진출했던 정치 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눈다. 이들 지배 계급 내부의 갈등은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조에 걸친 네 차례의 사화 가운데 매헌과 연관된 사화는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는 중앙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었다. 이후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 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 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여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 갈등이 발생되었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았으며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 대에 외척인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이후 외척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예고된 바 있다. 문정왕후는 그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하여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뿐 아니라 더욱 복잡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재기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는 상태에서 제2계비 문정왕후가 후일 명종인 경원대군을 낳았다. 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어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고 했다. 이후 두 외척 간에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로·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파를 중용했지만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명종이 된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하에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양사兩司를 통해 형조판서 윤임․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제거하려고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아뢰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일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세 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또 위의 세 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종친인 계림군도 이 사건과 연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이에 따라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은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을사사화 여파는 한동안 이어져 1547년 9월에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로 인해 봉성군 송인수 등은 사형에 처해졌고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가 일어났다.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1498년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 일단 막을 내렸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 중심의 대의명분론적 유교정치는 선조대宣祖代로 이어져 권력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다. 정리하면, 조선 전기의 사화들은 그것이 훈구세력에 의해서든 궁중 또는 외척에 의해서든 간에 화를 당한 쪽이 거의 신진사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정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세의 당쟁과 연결된다.
‘사화’에서는 ‘학통과 정치이념상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당쟁’은 순전히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투쟁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당파성이 강하였다. 또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은둔한 사림들에 의해 서원이 일어나 사림의 학문적 도장과 정론政論의 광장으로 후세 당론의 진원지가 되어 붕당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왕조의 정치문화적 특성과 정치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매헌 금보는 진사시를 거쳐 성균관에서 유학하며 선비 학자로서 미래를 차근차근 설계해 나갔다. 매헌은 26세(1546) 4월에 증광 생원시 3등으로 합격하였다. 28세(1548) 봄에 단양군수로 재직 중인 퇴계를 찾아뵙고, 29세(1549) 여름에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백운동서원에서 강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0세(1550) 9월에 정민공貞愍公 이해李瀣가 별세하여 올현兀峴으로 반구返柩했다.
31세(1551) 가을에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매헌은 늘 맑고 곧은 심지를 견지해 나가며 시론에 휩쓸리지 않아 당시 명사들이 모두 그를 중히 여겼다. 33세(1553) 가을에 월천 조목과 성균관에 머물면서 경전을 강론했다. 이에 퇴계는 월천에게 서찰을 보내 매헌의 학문 성취가 출중하다고 칭찬하면서 함께 공부하는 유익을 높이 평가하며 기뻐했다. 35세(1555) 2월에 퇴계를 모시고 귀향했다. 이 당시 매헌은 성균관에서 공부한 지 5년을 맞았는데 을사사화의 당화黨禍를 겪고, 시대의 조짐이 크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 귀향을 결행했다. 이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퇴계를 가까이 모시고 학문 연구와 수신에 정진하였다.
이러한 생애를 살다 간 매헌의 생애와 문집을 면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 매헌 시문학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가능하다. 매헌의 주 생애는 향리에서 퇴계를 종유하며 학문 유업을 계술해 갔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시와의 연관성 파악을 위해 시문학 유산을 ‘향토 산수 우월 정신’․‘자연친화와 한거흥취 미학’․‘「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의 유가 심미 의식’․‘사우 교유와 선현 추모’․‘매헌 시문학의 의의’로 정리하여 매헌의 시문학 정신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생애
매헌 금보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字는 사임士任, 호는 백당栢堂․매헌梅軒이다. 선대先代를 소급한다. 시조始祖는 고려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의儀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했으며 시호諡號는 영열英烈이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했다. 고조高祖 용화用和는 비순위 영중랑장備巡衛領中郞將을 역임했다. 부인은 연안송씨延安宋氏로 대사성大司成 광언光彦의 따님이다. 증조曾祖 회淮는 은진현감恩津縣監을 역임했다. 부인은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지평주사知平州事 도䆃의 따님이다. 조부祖父 계啓로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역임했다. 부인은 월성이씨月城李氏로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아들 생원生員 시민時敏의 따님이다. 부친 원수元壽는 충순위 충무위 부사도시첨정忠順衛忠武衛副司䆃寺僉正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증직贈職되었다.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장령將令 영수永銖의 따님이다.
매헌梅軒은 1521년(중종16) 4월에 경북 봉화현奉化縣 남괴촌南槐村 집에서 3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매헌의 백씨白氏 인軔의 자字는 백임伯任이며 호號는 송계松溪․송암松巖으로 중종中宗 경오년庚午年에 태어났다. 경자년更子年 진사시進士試에 수석 합격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하였다. 주관主觀이 바르고 정확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혼정기昏政期를 당해 향리鄕里에 물러나 후학들을 양성하는 것을 긍지矜持로 삼았다. 영주榮州 도촌桃村에 시거始居했으며 향년享年 83세이다. 묘소는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에 있다. 사림士林의 추망推望을 받아 구만서원龜灣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부인은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참봉參奉 장樟의 따님이다. 매헌의 계씨季氏는 은車/隱인데 자는 여임汝任, 호는 고봉高巖으로 중종中宗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중형仲兄 매헌과 함께 퇴계 문인으로 늘 농운정사隴雲精舍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하며 질의質疑하였다. 그의 언변言辯이 정밀精密하고 심오深奧하여 퇴계가 감탄하였다. 거상居喪에 애통함이 지나쳐 사람들은 ‘효도와 우애를 논할 때 반드시 공의 형제를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을 당해 군공軍功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봉화 법전 풍정리에 묘소가 있다. 부인은 옥천전씨沃川田氏로 내금위內禁衛 혼渾의 따님이다.
매헌은 7세(1527)에 엄정한 글공부 과정이 없었지만 스스로 글을 읽고 글자를 썼다. 행하는 바가 일반 아이들과 달라 숙부 군수공郡守公이 그 점을 기특하고 여겼다. 숙부 원복元福의 자字는 성지成之이며 성종成宗 경자생更子生이다. 음보蔭補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및 현 행정구역상 충남忠南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인 면천군수를 역임했으며 풍자風姿가 뛰어나고 장중莊重하였다. 6읍 수령을 역임하여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 예조禮曺에 8년간 재직하는 동안 조정朝廷에서 대례大禮를 거행할 때 반드시 공을 추대하여 어려운 절차를 감당케 하였다. 향년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봉화 법전 아현牙峴에 있다. 퇴계
가 ‘묘갈명’을 지었다. 부인은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교수敎授 신伸의 따님이다. 숙부 원복은 매헌을 사랑스럽게 여겨 ‘배’와 ‘밤’을 주면서 “절하고 받으렴.”하자, 매헌은 “배와 밤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과일이니 ‘붓’․‘벼루’․‘종이’․‘먹’을 주신다면 절을 올리고 받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군수공이 문방文房 제구諸具를 상으로 주자 매헌은 절을 올리며 받았다. 군수공이 기뻐 매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라고 하며 기뻐했다.
매헌은 타고난 재주가 빼어나 20세가 되기 이전에 문예文藝와 필격筆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13세(1533)에 부친이 선현의 격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게 명했다. 손님들이 와서 부친을 기다리다가 매헌이 써서 걸어둔 글씨를 보고 놀라며 기특하게 여겨 매헌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하는 이들이 매일 찾아왔다. 14세(1534)에 형 송계 인과 풍정사楓井寺에서 독서하였다. 당시 매헌은 문예가 숙성하였다. 명성이 선비들 사이에 자자하여 모두들 두 형제의 실력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난형난제’라며 칭송하였다. 18세(1538)에 중용을 읽고 「체용도體用圖」를 지었다. 형인 송계 인이 “아우는 중용의 내용을 한 번 연구하고 사색하고도 성정중화性情中和의 구별을 알아내니 식견의 총명함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20세(1540)에 진성이씨眞城李氏 부인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퇴계의 백형伯兄 여절교위勵節校尉 잠潛의 아들로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한 인寅의 따님이다.다시 말하면 부인은 퇴계의 종손從孫이다 22세(1542)에 「조보론趙普論」을 지었다. 재종형 남계南溪 축軸이 아우 매헌의 글재주가 풍부하고 박학한 점을 고려하여 이 글을 짓게 했다. 남계 축은 매헌이 지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며 “매헌이 이제 막 약관弱冠임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대의大義를 이처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리 집안에서 원대하게 꿈을 이룰 그릇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3세(1543)에 온계溫溪에서 살게 되었지만 매월 어김없이 어버이를 찾아뵈었다. 간혹 맛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인편을 통해 어버이에게 보내어 봉양하되 자신이 먼저 먹은 적이 없었다. 매헌은 이 무렵부터 퇴계로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았다. 퇴계는 매헌의 타고난 재질이 도를 가까이 하고 재주와 성품이 특출하여 당신의 자질子姪과 다를 바 없이 친절하게 가르쳤다. 24세(1544) 가을에 용수사龍壽寺에서 독서했다.
26세(1546) 4월에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 3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퇴계와의 사제지간 학문 교류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28세(1548) 봄에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재직 중인 퇴계를 찾아뵙고 중용의 이론에 대해 질의하였다. 당시 매헌은 퇴계와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다하며 강학하는 여가에 구담龜潭과 도담島潭의 승경勝景을 유람하면서 산수록山水錄을 남겼다. 하지만 전해지지는 않는다. 29세(1549) 여름에 소백산小白山을 유람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강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매헌은 형 송계松溪를 도촌桃村으로 찾아가 만나 풍기․영주 선비들과 백운동서원에서 몇 달 동안 강학과 토론을 벌였다. 30세(1550) 9월에 정민공貞愍公 이해李瀣가 별세하여 올현兀峴으로 반구返柩했다. 31세(1551) 가을에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매헌은 늘 맑고 곧은 심지를 견지해 나가며 시론時論에 휩쓸리지 않아 당시 명사名士들이 모두 그를 중히 여겼다. 32세(1552) 봄에 면천군수沔川郡守로 재직 중인 형 송계를 방문하여 체류하다가 가을에 귀향하여 부모를 찾아뵈었다.
33세(1553) 가을에 한양으로 가서 월천 조목과 함께 성균관에 머물면서 경전 공부에 주력하며 강론하며 토론했다. 이에 퇴계는 월천에게 서찰을 보내 매헌의 학문 성취가 출중하다고 하며 함께 공부하는 유익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했다. 34세(1554) 7월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을 조문했다. 35세(1555) 2월에 퇴계를 모시고 환향還鄕했다. 이 당시 매헌은 성균관에서 공부한 지 5년을 맞았다. 을사사화의 어려운 시국 현황을 보고 시대의 조짐이 크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귀향을 결심했다. 당화를 당해 많은 어진 이들이 쫓겨나거나 귀양을 가는 상황을 목도하였다. 이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세상 명리名利에 빠져 날마다 더러운 곳에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사람노릇 하는 것을 숭상하는 게 더 낫다.”고 하자, 부친은 기뻐하며 “네 좋을 대로 하여라.”라고 하였다. 3월에 청음석淸吟石을 유람하였다. 6월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별세하였으며 이어 양곡暘谷 이국량李國樑이 세상을 떠나 제문을 지어 조문하였다.
매헌은 36세(1556)부터 은둔 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에 6년 앞서 퇴계는 경술년(1550) 2월에 토계 서편에 복거卜居하여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바위 시내 사이 띠 이엉 집을 옮겨 얽으니 바위에 피는 꽃 어지러이 붉도다. 옛날이 가고 오늘이 와 때 이미 늦었지만 아침 밭갈이 저녁 글 읽기 즐거움은 끝이 없어라”고 하며 지냈다. 매헌은 36세 되던 해(1556) 여름에 한서암의 남쪽 개울가에 집을 지었다. 퇴계는 “해와 별처럼 빛난 성현의 교훈이 옛글에 실려 있으니 이 엄한 스승 대하니 절로 넉넉함 있네. 바다 냄새 따라가는 것은 참 특이한 일이니 그대가 수고를 마다 않고 이웃에 집 지어 감탄한다네.”라는 시어 주며 기뻐했다. 아울러 퇴계는 매헌에게 「경재잠도敬齋箴圖」를 써서 주었는데 매헌은 족자簇子를 만들어 벽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장중莊重하게 외며 “엄한 스승께서 여기에 계신다네.”라고 했을 만큼 스승을 존경하였다. 한서암 남쪽에 집을 마련한 매헌은 스승 퇴계의 행적처럼 집 앞에 매화를 심고 호를 ‘매헌梅軒’이라고 했다. 이에 일휴日休 금응협琴應夾이 “계상의 찬 매화가 옥색 맑은 자태로 눈 속에 피어나리.”라는 시를 지어 축하했다.
이처럼 매헌은 퇴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색과 강론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욱 심화해 나갔다. 스승 퇴계를 통해 인격적인 감화와 학문적 영향을 크게 입었다. 이 무렵 퇴계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차編次하면서 문인들에게 선사繕寫케 했는데 매헌이 이를 담당했다. 11월에 계당溪堂의 사마회司馬會에 참석하여 시문을 창화唱和했다. 「주자서朱子書」를 읽어 사서四書를 이해하는데 지침을 삼는 공부를 했다. 퇴계는 일찍이 ‘선비들이 「주자서」를 읽는 다면 학문의 방도를 안다고 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한 뒤에 사서를 읽는다면 성현의 말씀이 구구절절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라고 했다.
37세(1557)에 평소 사서四書에 대해 퇴계에게 질의한 내용을 정리한 「사서질의四書質疑」를 편찬했다. 38세(1558)에 ‘경敬’․‘성誠’․‘화和’ 세 글자를 써서 띠로 만들어 차고 다녔다. 매헌은 일찍이 “마음을 다스리는데 ‘경敬’자字를 얻었고, 사람들을 접하면서 ‘성誠’자를 얻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면서 ‘화和’자를 얻었다. 또한 「성경음誠敬吟」이란 시에서 “한 가지 정성이 움직이면 천 가지 거짓이 사라지고 한 번 경에 거하면 백 가지 사특함 물러나네. ‘성경誠敬’ 공부는 반드시 병행해야 하리니 어질게 되고 성스럽게 됨을 다른 데서 구하랴?”라고 하면 일상에서 ‘성聖’을 실천하며 퇴계가 강조한 ‘거경居敬’ 생활을 하면서 수신했다. 39세(1559) 봄에는 동경東京을 유람하며 회고시懷古詩를 남겼다. 40세(1560) 4월에 월천月川 조목趙穆․읍청정浥淸亭 김부의金富儀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고산孤山을 유람하면서 석벽시石壁詩를 남겼다.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읽고 「심근강의心近講義」를 편찬했다. 이 무렵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신축되었다. 그해 겨울에 도산서당에 가서 머물며 공부하였다.
41세(1561) 4월에 맏형 군수공郡守公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매헌은 동생들이 모두 어린 탓에 초상과 장례를 집례하면서 슬픔을 다하여 예법에 어긋남이 없게 하였고 군수공의 행적을 초안草案하여 퇴계에게 묘갈명墓碣銘 작성을 요청했다. 42세(1562)에 「사물잠四勿箴」을 지어 항상 책상 위에 얹어두고 시청언동視聽言動 과정에서 자신을 살피며 수신을 실천했다. 아울러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무이구곡도가운武夷九曲櫂歌韻」에 차운하는 시를 남겼다. 이처럼 주자의 「무이지」를 읽고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도가운」에 차운하는 형식은 퇴계를 비롯한 퇴계의 학문을 추구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계승해 나가려는 당대의 주요한 문학 운동이었다. 매헌 역시 그러한 퇴계 추존 문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러한 차운 시를 남겼다. 시의 품격과 정제된 언어 표현 및 성리 미학 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매헌의 시인적 자질을 넉넉히 볼 수 있는 편린片鱗이다. 43세(1563) 3월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부고를 받고 조문했다. 이 무렵 매헌의 성리학 사유가 무르익어 「사례정변四禮正變」․「사례기문四禮記問」․「가선휘편嘉善彙編」 등의 저서를 편찬했다. 편찬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44세(1564) 봄에 용수사龍壽寺를 유람했다. 4월에는 동문 여러 벗들과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했다. 일행은 균헌筠軒 이문량李文樑․읍청정浥淸亭 김부의金富儀․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원암遠巖 이교李窖․권경용權景龍․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만취사晩翠士 김원金元․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등이었다. 창수시를 남겼다. 「소주小註」에 “산을 즐기고 물을 좋아하는 것은 내 능한 바는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승 퇴계를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물외物外의 유람하는 것은 ‘증점曾點이 공자孔子를 모시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대舞雩臺에서 바람을 쐬던 것과 우열을 논할 수 있으니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후이지만 반드시 예전 증점의 일만 아름답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매헌이 퇴계를 모시고 산수를 유람하면서 도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은 그 옛날 증점이 공자를 모시고 산수를 유람하며 도덕을 실천하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했다.
45세(1565)에 퇴계에게 「계몽문목啓蒙問目」을 올렸다. 당시 매헌은 「주역周易」을 즐겨 읽으며 연구하느라 침식도 잊을 정도였다. 46세(1566) 이후로는 이러한 성리학 관련 서적 연구에 더욱 침잠하게 되어 또렷하게 자득自得하는 경지를 이루어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욕欲’이 가장 제어하기 어렵다. ‘욕欲’을 다스리면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 지고 일마다 저절로 ‘간결簡潔’해 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안현감禮安縣監 곽황郭趪이 매헌의 학문이 박학다문博學多聞한 점을 감안하고 향의鄕議를 따라 조정에 추천하려고 하자 매헌을 서찰을 보내 만류하면서 “저는 어려서부터 어버이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염려스러운데 어찌 명예를 탐해 벼슬 구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저마다 마땅히 행할 바를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애당초 벼슬을 구하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고 성리학 공부를 위해 학문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월천 조목도 매헌의 굳은 심지를 칭찬하며 장려했다. 매헌의 이러한 올곧은 성품과 출처대의에 분명한 성품은 부친을 닮았다. 부친이 어렸을 때 부친의 진로를 위해 권요자權要者를 소개해 주려는 자가 있었는데 부친은 “실천궁행實踐躬行 없이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는 것은 제가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라며 사양했다. 3월에 송암 권호문을 방문했다. 8월에 겸암 류운룡이 매헌의 벼슬 사양에 대한 격려의 글에 대한 겸손한 답서를 보냈다.
47세(1567) 봄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했으며 「역동서원창건록易東書院創建錄」을 썼다. 퇴계는 역동 우탁이 「주역周易」을 조선으로 가져온 공을 인정하여 오담鼇潭 곁에 역동서원을 세웠다. 매헌은 재산을 출연出捐하여 서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다. 이밖에 향교鄕校를 중수重修할 때에도 퇴계에게 여쭈어 ‘약조約條’를 찬정撰定했다. 또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건할 때에도 시종일관 감독을 하되 풍우를 가리지 않고 힘을 쏟았다. 매헌이 사문斯文을 위해 주력한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를 도산서당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퇴계는 여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비의 출처대의出處大義에 대해 강조하였다. “유가儒家란 의미는 절로 구별이 있으니 문예에 힘쓰는 것도 선비의 일이 아니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선비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탄식하며 “세상의 수많은 영재들이 세속의 과거공부에 섞이어 골몰하니 그 누군들 이 ‘과거’라는 절구통에서 떨쳐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48세(1568) 2월에 역동서원에 모여 스승 퇴계의 자문을 토대로 한 역동서원 운영을 위한 「제의祭儀」와 「규약規約」을 정했다. 4월에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과 남천南川을 유람하고 역동의 고택을 방문하고 창수시唱酬詩를 남겼다. 6월에 「도산기고증陶山記考證」를 수정修整했다. 매헌은 일찍이 「도산기陶山記」 한 부를 정사淨寫해 둔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읽고 의난처疑難處를 찾아내어 본주本註와 함께 기록해 두었다. 만년에 이따금 암송하면서 “이를 읽노라면 스승을 천연대 天淵臺와 농운정사隴雲精舍에서 친히 뵙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애독하며 스승을 존모尊慕하였다. 7월에 퇴계에게 서찰을 올렸다. 이에 퇴계는 한양의 형편이 어려움이 많아 돌아갈 계획이 아득하여 후회스럽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 해(1568)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직된 아우 은車/隱의 둘째 아들 11살 된 윤고胤古를 데리고 와서 양자로 삼았다. 윤고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다. 윤고는 퇴계에게 학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퇴계는 윤고의 재주와 타고난 성품이 우수함을 칭찬하였다. 11월에 모친 김씨상을 당했다. 49세(1569) 정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매헌은 삼 년 동안 애통해 하며 상례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행하였다. 3월에 부친을 풍정楓井의 언덕 숙부인淑夫人 김씨 묘소에 합장했다. 50세(1570) 11월에 평생 존경하고 사모하던 스승 퇴계의 질병이 심해져서 계당溪堂으로 문후問候하였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나 퇴계는 별세하였다. 매헌은 심상心喪 3년을 치르고 잔치 자리나 즐거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퇴계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제문에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천지에 다함이 없도다!”라는 표현을 썼다.
51세(1571) 2월에 구성龜城으로 출타했다가 귀가하기도 전에 집에 화재가 났다. 서실에 소장해 둔 퇴계의 수필手筆․잠명箴銘․간찰簡札과 매헌의 차록箚錄 등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는데 「경재잠도敬齋箴圖」와 「사서질의四書質疑」는 화재를 면했다. 매헌은 “나의 글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돌아가신 스승의 보배로운 유묵遺墨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다시 구할 수 있을까?”라고 하며 통곡하였다. 뒤에 이 당시 감회를 시로 남겼다. 3월에 탈상을 하고 퇴계 장례를 치렀다. 4월에 후조 김부필․일휴 금응협․성재 금난수 등과 향교에 모여 「유생벽불소통문儒生闢佛疏通文」에 답서를 작성했다. 이에 앞서 ‘보우普雨’와 관련해 유림들이 상소했으며 퇴계가 ‘유소儒疏’나 ‘예궐詣闕’ 모두 합당하지 않다는 경계가 있어, 이에 이르러 답서로 이러한 뜻을 전했다. 이어 「진정부陳情賦」를 지어 평생 품은 뜻을 피력했는데, 그 가운데 “대들보가 꺾이고 몇 달 동안 기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니 참으로 우리 유학의 도가 빛을 발하지 못한 탓이니 울어도 소용이 없네.”라며 통분해 하는 문구가 있다. 6월에 동문들과 역동서원에 모여 퇴계 문집을 편집했다.
52세(1572) 봄에 백형伯兄이 온계溫溪로 와서 체류했고 춘당春堂 오수영吳守盈이 시를 지었다. 학봉 김성일․몽재 이안도와 퇴계의 「사단칠정론변서四端七情論辨書」를 편차編次대로 썼다. 4월에 역동서원에 모여 「퇴계일록退溪日錄」을 수정修整했다. 후조당 김부필․백담 구봉령․정문봉․문곡 이문규․서애 류성룡․금일휴․금성재와 부석사浮石寺를 유람하며 창수시唱酬詩를 남겼다. 그해 7월에 「향교중수서鄕校重修序」를 지었는데 ‘입약立約’ 25조條를 부기附記했다. 12월에 계상溪上으로 가서 퇴계의 제사를 올렸다.
53세(1573) 봄에 향교鄕校 낙성연落成宴에 참석하였는데 향중鄕中 제생諸生이 시를 지어 후학들의 학문을 권장하였다. 3월에 후조당 김부필․매암 이숙량․성성재 금난수․설월당 김부륜 등과 부용대芙蓉臺가에 있는 곽연정廓然亭에서 우의와 신의를 새롭게 다짐하며 대화하는 강신講信을 가졌다. 11월에 이산서원伊山書院으로 가서 퇴계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간재 이덕홍․몽재 이안도․물암 김륭․잠재 장근과 파산사巴山寺에서 묵으며 저마다 슬픈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다. 54세(1574) 때이다. 퇴계가 돌아가신 이후 선비들이 학문만을 숭상하는 폐단이 있어 매헌은 일휴에게 서찰을 보내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우는 것을 말함에는 치우치거나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우리들의 한가한 논의는 ‘구이지습口耳之習’이 되어 말단의 학문적 폐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말학末學의 폐단을 여는 대요大要는 ‘거경居敬하여 근본을 세우고 궁리窮理하여 지知에 이르며 자신을 돌아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 학문의 종지宗旨이다.”라고 하였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 창건을 감독했다.
55세(1575) 봄에 백률당栢栗堂을 지었다. 매헌은 계상溪上 옛집이 수마에 휩쓸려가 송내촌松內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집 좌우에 토질에 적합한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이루었다. 잣나무와 밤나무가 가장 무성하여 집 이름을 ‘백률당’이라 하고 독서하였다. 우음시偶吟詩에서 “오두막집이나 여기서 심신을 수양하고 다행스레 근처에 온천도 있다네. 노년이지만 한서헌 스승의 가르침 어기지 않고자 홀로 창가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네.”라고 하였다. 5월에 첨지僉知 금헌琴憲의 초상을 당했다.
56세(1576) 2월에 ‘도산서원신판陶山書院神版’을 쓰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했다. 매헌은 필법筆法이 정묘 精妙하여 매암梅菴 이숙량李叔樑․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과 ‘계문삼필溪門三筆’로 일컬어졌으며 그 가운데 매헌이 으뜸이었다. 매헌은 이러한 필법은 특정인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며 자득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퇴계는 매헌의 필법을 애지중지하여 때로 병풍이나 족자에 휘필케 하여 보관했다. 퇴계는 일찍이 “문하생들의 필법이 모두 우수하나 매헌의 ‘심획心劃’은 매우 우수하다. 서예가 비록 작은 재주라 할지라도 매헌의 마음에 조금도 사곡邪曲한 것이 없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선고先考 찬성공贊成公묘갈문墓碣文을 촉탁囑託하였다. 이와 함께 매헌은 유려한 필치로 퇴계의 묘비명墓碑銘을 썼으며 ‘도산서원신판’도 쓸 정도로 추대 받을 만큼 퇴계 문도 가운데 필법이 탁월했다. 그래서 ‘퇴계 묘지명을 지을 이는 고봉 기대승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매헌을 제치고 그 누구도 그 글을 정서精書할 이가 없다’는 평판을 들었다. 감사監司 이청李淸은 매헌의 유적遺蹟을 수양관首陽館에서 간인刊印하여 서북西北 지방 선비들의 모법模法을 삼게 하였다.
이 무렵 매헌은 벗들과 애일당愛日堂 모여 시회詩會를 가졌다. 이계李繼가 술을 가져 와 오춘당․조월천․미애암․금일휴와 시회詩會를 즐겼다. 57세(1577) 2월에 동암서원東巖書院으로 가서 퇴계의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이어 진사 남서룡南瑞龍의 「묘갈음기墓碣陰」를 지었다. 11월에 후조당의 초상을 당했다. 58세(1578) 여름에 청음석淸吟石에서 노닐었다. 매헌은 동문 제우들과 종일 그곳을 서성이며 “스승의 자취와 향취가 시냇가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에 오면 절로 번잡한 흉금을 씻어낼 수 있으니 경치를 즐기고 흥을 탐내려는 것뿐이랴!”라며 감회를 털어 놓았다. 이에 이매암은 “그대는 참으로 순임금이 국그릇만 대해도 요임금을, 담을 마주해도 요임금을 사모했던 것처럼 스승 퇴계를 존모하는구려!”라며 감탄했다. 이와 함께 매헌은 평소 좋은 시절이나 아름다운 경치나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나 수려한 바위를 홀로 찾아가거나 동지들과 함께 즐기면서 시를 지어 티끌세상을 벗어난 느낌을 받았다. 청음대淸吟臺의 수석水石은 봄가을로 항상 유람했던 곳이다. 매헌은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시작詩作 활동도 왕성했는데 시의 품격이 ‘충담청절沖澹淸節’했다.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수를 읊으면 ‘쨍그랑’하고 쇠붙이나 돌이 울리는 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매헌은 퇴계와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여 ‘인자요산仁者樂山’․‘지자요수知者樂水’의 정취를 지녔으며 ‘욕기풍영浴沂風詠’의 기상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59세(1579) 봄에 매정별서梅亭別墅에 머물렀다. 별서別墅는 용계수龍溪水 가에 있다. 매헌은 만년에 한적한 곳을 택해 항상 책상 위에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계몽전의 啓蒙傳疑」․「무이기武夷記」․「도산기陶山記」를 올려두고 문생門生들과 종일토록 반복해서 강론하고 토론을 벌였다. 자질子姪들이 매헌의 기력이 쇠할 까 염려하였다. 매헌은 “나는 이 때문에 즐거워 날마다 유익을 얻는데 신체가 손상되랴?”라고 할 만큼 성리학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아들 윤고를 월천에게 수업 받게 했다. 60세(1580)에 성성재 금난수에게 시와 서찰을 지어 주었고 수운정水雲亭을 지어 서식棲息하고자 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동군河東君 이유李裕의 「묘갈명墓碣銘」을 작성했다. 당시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재직 중인 이유의 아들 희득希得이 매헌을 찾아와 부친의 「묘갈명」 작성을 청했다. 희득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금매헌의 묘갈명을 받지 못했더라면 큰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고 하였다. 62세(1582) 7월에 읍청정 김부륜의 제사를 올리고 만사輓詞를 지었다. 8월에 사미정思美亭에서 이빙李憑을 만났다. 의성義城 이준李寯․오춘당吾春塘․금성재琴惺齋․지간芝澗 이종도李宗道 등이 모였다. 11월에 풍정楓井으로 가서 정문봉鄭文峯에게 받아 둔 첨정공僉正公의 묘갈墓碣을 세웠다.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의 초상을 당해 만사를 지었다. 63세(1583)에 이의성의 죽음을 맞아 만사를 지었다. 가을에 도촌桃村의 백형伯兄의 영전에 조문했다. 11월에 월천의 내방을 받고 시를 주고받았다. 12월에 월천서당에 모여 강론했다.
64세(1584) 정월에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사당을 참배하였다. 2월에 정사精舍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이에 원근의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병문안하며 위로했다. 그럴 때면 매헌은 의관을 갖추어 오는 이들을 정중히 맞아 평소처럼 담소하며 평생 퇴계를 직접 종유하며 배운 행운을 얻어 여한이 없다고 말하며 스승 퇴계에 대한 존모 의식을 표현하였다. 3월에 병이 낫자 빈객을 물리치고 자질들에게 ‘경전’과 「도잠圖箴」을 별실에 옮기라고 명했다. 이 날 매헌은 자질들에게 “스승께서 주신 잠명과 간찰이 매우 많았지만 화마를 겪은 나머지 화액을 면한 것은 이 「경재잠」 한 건뿐이지만 내 평생 힘을 쏟은 것이니 고이 간수하여 잃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7월에 정침에서 운명하니 향년 64세였다. 9월 20일 예안禮安 용두산龍頭山 동쪽 기슭 흥당興堂 묘향卯向에 장례를 치렀다. 묘소는 집과 10리 쯤 떨어져 있다. 부인 진성이씨는 매헌 사후 9년 뒤인 계사년(1595) 5월에 별세하여 매헌과 합장했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시문是文으로 봉사奉事, 차남은 시무是武로 호군護軍, 삼남은 시정是正으로 진사進士, 4남은 시양是養인데 숭정절의崇禎節義로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었으며 정려旌閭를 하사 받았다. 5남 시율是律은 출계出系했으며 6남은 시려是呂 판관判官을 지냈다. 장녀는 사인士人 김광부金光溥에게, 차녀는 생원生員 류형립柳亨立에게 출가했다.
시문是文은 아우 시양是養의 차남 현달絃達을 양자로 맞았다. 시무是武의 첫 부인 아들 삼달三達은 문행文行이 있었고, 측실側室에게서 종달種達을 낳았다. 시정是正의 아들은 서달瑞達이다. 시양是養은 명달明達․현달絃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현달을 맏형 시문의 양자로 보냈다. 시율是律은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취규聚奎, 차남은 서규瑞奎로 진사 출신이다. 3남 성달聖達은 형 서규와 동방同榜 진사 출신이다. 성달은 정시廷試에서 장원을 했으며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역임했다. 4남은 찬규燦奎이다. 따님은 사인士人 김한규金漢奎에게 출가했다. 시려是呂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방달邦達, 차남은 융달隆達이며, 세 딸은 각각 사인 김정金濎․권한權垾․여국로余國老에게 출가했다. 증현손曾玄孫 이하의 기록은 생략되었다.
Ⅲ. 문집의 체제와 내용
1) 체제
[매헌선생문집]은 목판본 4권 2책이다. 이는 매헌의 10세손 우열佑烈이 1891년(고종28)에 편집․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이휘녕李彙寧의 「서문」과 후손 금업琴忄業이 지은 「연보」가 실렸다.
권1에 시 29수(淸吟石謹次退溪先生韻幷序․伏次退溪先生和李大成文樑之任平陸郵官韻呈大成丈․仙夢臺謹次退溪先生韻贈主人李靜可閱道․茂陵周先生世鵬與琴夾之應夾遊淸凉有詩病未同賞追次其韻․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可興郵官次內姪金文卿箕報韻․敬次聾燮從叔父司馬會韻․誠敬吟․庚申四月約趙士敬穆金愼仲富儀琴聞遠蘭秀陪退溪先生遊孤山敬次先生題石壁韻․淸凉蓮臺寺敬次退溪先生韻幷序․原韻․約會龍壽寺李大成丈大用叔樑金彦遇富弼惇敍富倫趙士敬琴聞遠琴壎之應壎柳美叔目斌思擧冲李章騫皆至首成近體一律示諸公․諸丙寅司馬榜目․丙午暮春訪權章仲好文次松巖唱酬韻․次具景瑞鳳齡韻別金惇敍金景保壕與諸友約鄭主倅惟一會川南訪禹諫議高居遂至皐巖暢吟․東都懷古․辛未二月出龜城家偶失火先生手筆箴銘簡札及所書諸冊盡入灰燼惟敬齋箴圖四書質疑僅免困感泣一絶․謝金惇敍韻․偶吟․次金彦遇梅韻見寄․與金彦遇李景昭文奎具景瑞琴夾之琴聞遠鄭子中柳而見成龍遊浮石寺唱酬韻․伊山書院奉安李退溪先生位版歸路與李逢原李宏仲金道盛隆張而信謹諸君同宿巴寺各敍悲感之懷․巴寺翌日別諸君․陶山書院董役之暇吟示諸君․與諸友會愛日堂次士敬韻․原韻․寄聞遠孤山書齋․會月川書堂吟示趙士敬)․「만사輓詞」 3편(挽李觀察公榦仲樑․挽金生員愼仲․挽李義城廷秀寯)․「부賦」 1편(陳情賦)이 실렸다.
권2에 「서찰書札」 7편(上退溪先生啓蒙問目․與金士純誠一李逢原論先生與存齋奇明彦大升四七辨書編次別紙․上郭侯趪․答柳應見雲龍․與琴聞遠․答金惇敍․答琴夾之)․「제문祭文」 3편(祭退溪先生文祭退溪先生․祭金愼仲․祭李庇遠國樑)․「묘갈명墓碣銘」 2편(叔父通訓大夫行沔川郡守府君․成均進士南公)․「잡저雜著」 6편(趙普論․鄕校重修立約序․陶山記考證․靜存齋箴考證․易東書院記事․附遺墨)이 실렸다. 권3은 사서질의四書質疑로 사서에서 의심나는 대목에 대한 논변이다.
권4는 「부록附錄」으로 스승과 동문이 지어준 시를 모은 「사우기증시師友寄贈詩」 11수[退溪先生2首(題琴士任溪齋:日星明訓載前書.對此嚴師自有餘.逐臭海濱良異事.歎君辛苦築隣廬․次琴士任韻:寒谷冰霜致客來.一尊今日荷君開.不妨眞率頻相款.更約明年趂早梅)․月川趙穆2首(次琴士任韻:栢樹亭陰綠水臨.相逢呼酒去年心.詩來起我春村興.此事聊將歲歲尋)․(士任初自鳳城臨.溪上營居最苦心.晩歲家溫朋酒樂.且將前訓卷中尋)․春塘吳守盈2首(次琴士任韻:少年流落惱梅枝.想得淸香著淬衣.一別多年湖海隔.至今魂夢更依稀․寄琴士任:衡門雖設書常關.但取前題盡日刪.黃菊待霜和露臥.綠苔乘雨上階斑.東峯對戶君多月.南嶺當樓我有山.世事紛紛都不管.從今十畝得閒閒)․日休琴應夾2首(詠紅桃寄梅軒琴士任:浥露迎暉紅滿枝.爭姸鬪媚百花時.如何溪上寒梅樹.玉色冰姿雪裏披․與金惇敘遊山院奉呈琴士任:鹵莽年來失舊聞.多慚愚我索離群.逢君尙記前遊事.春八庭梅滿樹芬)․惺齋琴蘭秀1首(龍壽寺次琴士任韻:佛宇深深古澗傍.群公聯袂折陪行.添沽斗酒何辭醉.全廢床書久欠商.義理戰勝肥子夏.病痾吟苦瘦東陽.多君筆灑珠璣璨.按劒休敎抵夜光)․雪月金富倫1首(次呈琴梅軒:兎走烏飛雨不留.紅顔坐見白渾頭.寒燈耿耿三更夜.落葉蕭蕭九月秋.淸韻向來塵外詠.煩襟依舊世間愁.方知事過都成夢.莫把窮通較孰優)․月川1首(會四美亭悼琴士任:墻隅十挺樹陰淸.四美亭中四老情.存歿悲歡成感慨.酒盈樽處恨兼盈)]가 실렸다. 이어 매헌에 대한 「가장家狀」(琴是養撰)․「행장行狀」(許傳撰)․「묘지명墓誌銘」(琴忄業撰)․「묘갈명墓碣銘」(李彙載撰)이 실려 있다. 이어 「발문跋文」 3편(金鶴鎭撰․琴書述撰․琴佑烈撰)이 실려 있다. 말미에 매헌의 아들 역여繹如 윤고胤古의 생평生平을 기록한 「부송파공묘갈附松坡公墓碣」(許傳撰)이 실렸다.
梅軒詩 | ||||||
連番 | 詩題 | 形式 | 內容 | 備考 | ||
1 | 淸吟石謹次退溪先生韻幷序 | 5絶 | 4首 | |||
2 | 伏次退溪先生和李大成文樑之任平陸郵官韻呈大成丈 | 7絶 | ||||
3 | 仙夢臺謹次退溪先生韻贈主人李靜可閱道 | 7絶 | ||||
4 | 茂陵周先生世鵬與琴夾之應夾遊淸凉有詩病未同賞追次其韻 | 7律 | ||||
5 | 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 | 7絶 | 10首 | |||
6 | 可興郵官次內姪金文卿箕報韻 | 7絶 | ||||
7 | 原韻 | 7絶 | ||||
8 | 敬次聾燮從叔父司馬會韻 | 5絶 | 7首 | |||
9 | 誠敬吟 | 7絶 | ||||
10 | 庚申四月約趙士敬穆金愼仲富儀琴聞遠蘭秀陪退溪先生遊孤山敬次先生題石壁韻 | 7絶 | ||||
11 | 淸凉蓮臺寺敬次退溪先生韻幷序 | 5排 | ||||
12 | 原韻 | 5排 | ||||
13 | 約會龍壽寺李大成丈大用叔樑金彦遇富弼惇敍富倫趙士敬琴聞遠琴壎之應壎柳美叔目斌思擧冲李章騫皆至首成近體一律示諸公 | 7律 | ||||
14 | 題丙午司馬榜目 | 5絶 | ||||
15 | 丙寅暮春訪權章仲好文次松巖唱酬韻 | 7絶 | ||||
16 | 次具景瑞鳳齡韻別金惇敍金景保壕 | 7絶 | ||||
17 | 與諸友約鄭主倅惟一會川南訪禹諫議高居遂至皐巖唱吟 | 7絶 | 4首 | |||
18 | 東都懷古 | 7律 | ||||
19 | 辛未二月出龜城家偶失火先生手筆箴銘簡札及所書諸冊盡入灰燼惟敬齋箴圖四書質疑僅免困感泣一絶 | 7絶 | ||||
20 | 謝金惇敍韻 | 57絶 | 2首 | |||
21 | 偶吟 | 7律 | ||||
22 | 次金彦遇梅韻見寄 | 7絶 | ||||
23 | 與金彦遇李景昭文奎具景瑞琴夾之琴聞遠鄭子中柳而見成龍遊浮石寺唱酬韻 | 7絶 | ||||
24 | 伊山書院奉安李退溪先生位版歸路與李逢原李宏仲金道盛隆張而信謹諸君同宿巴寺各敍悲感之懷 | 7絶 | 2首 | |||
25 | 巴寺翌日別諸君 | 7絶 | ||||
26 | 陶山書院董役之暇吟示諸君 | 5律 | ||||
27 | 與諸友會愛日堂次士敬韻 | 5絶 | ||||
28 | 原韻 | 5絶 | ||||
29 | 寄聞遠孤山書齋 | 7絶 | ||||
30 | 會月川書堂吟示趙士敬 | 7絶 | 5首 | |||
合 | 30題 57首 | |||||
師友寄贈詩 | ||||||
連番 | 人物 | 詩題 | 形式 | 內容 | 備考 | |
1 | 退溪 | 題琴士任溪齋 | 7絶 | |||
2 | 退溪 | 次琴士任韻 | 7絶 | |||
3 | 趙穆 | 次琴士任韻 | 7絶 | 2首 | ||
4 | 吳秀盈 | 次琴士任韻 | 7絶 | |||
5 | 吳秀盈 | 寄琴士任 | 7律 | |||
6 | 琴應夾 | 詠紅桃寄梅軒琴士任 | 7絶 | |||
7 | 琴應夾 | 與金惇敘遊山院奉呈琴士任 | 7絶 | |||
8 | 琴蘭秀 | 龍壽寺次琴士任韻 | 7律 | |||
9 | 金富倫 | 次呈琴梅軒 | 7律 | |||
10 | 趙穆 | 會四美亭悼琴士任 | 7絶 | |||
合 | 9題 10首 |
2) 편집
매헌의 저서로 사서질의四書質疑․심경강의心近講義․사서기문四書記問․사례정변四禮正變․가언휘편嘉善彙編 등과 시문이 있었는데 집안의 화재로 사서질의만 남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사후에도 손자 금시양琴是養이 찬한 「가장家狀」 외에는 따로 시문을 정리하지 않아 대부분 산일散逸되었다.
그 후 저자의 10세손 금우열琴佑烈(1824-1904)이 산일되고 남은 저자의 시문과 관계 기록을 도산陶山의 초본草本과 여러 문중의 고적古蹟에서 수집하는 한편, 허전許傳(1797-1886)에게 받은 「행장行狀」과 이휘녕李彙載(1795-1875)에게 받은 「묘갈명墓碣銘」 등 부록 문자를 모아 1891년에 4권 2책으로 편차해 두었다.
이를 사손嗣孫 금무열琴祜烈(1853-1926)이 1909년에 김학진金鶴鎭의 「발문跋文」을 받아 매헌의 유묵遺墨 3판과 아들 금윤고琴胤古의 「송파공묘갈松坡公碣銘」 3판을 덧붙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저본이 매헌집 초간본인 「국립중앙도서관본」인데 간행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본異本은 「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본」․「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본」․「장서각본」․「계명대학교동산도서관본」이 있다.
3) 내용
본집은 「연보年譜」․「원집原集」 3권․「부록附錄」 1권으로 4권 2책이다. 이휘녕李彙寧은 「서문序文」에서 매헌이 주자朱子의 학문을 집성集成한 퇴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정통 유학의 계승한 점을 강조하였다. 한서암 곁에 집을 마련하거나 만년에 온계溫溪로 이주해 살면서 시종 퇴계의 학문과 사상 및 인품을 익혔던 열정이 사서질의四書質疑․심근강의心近講義․사례기문四禮記問․사례정변四禮正變․가선휘편嘉善彙編에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매헌의 학문은 ‘사서四書’에 바탕을 두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근간으로 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매헌은 세상 명리에 유혹을 받지 않고 의리義理를 강구 講究했던 학문 정신은 퇴계를 통해 더욱 심화된 결과였다. 특히 ‘경敬’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성誠’으로 접물接物하며 ‘화和’로써 집안을 보살폈던 점을 강조하였다. 매헌은 필한筆翰이 정예正詣하고 심획心劃이 정대무사正大無邪하여 퇴계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매헌이 남긴 저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잔편殘編을 통해서도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체득한 선비 학자의 면모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연보年譜」에는 64세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매헌의 생장 과정과 성균관 유학 생활 및 귀향 이후 퇴계를 통해 학문을 온축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퇴계 문도와 교유하며 학문 활동을 지속했던 점과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를 실천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매헌집의 편찬 「목록目錄」이 실렸다.
권1은 시詩 30제題와 부賦 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헌의 시는 퇴계 시에 차운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청음석근차퇴계선생운淸吟石謹次退溪先生韻」은 퇴계가 지은 「청음석淸吟石」 시에 차운하여 봄의 경치를 읊은 4수의 시이다.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은 성학聖學의 체용體用, 동정動靜을 언사言辭 이외로 표현한 것이다. 「경신음誠敬吟」은 ‘성誠’으로 천 가지 위선을 소멸시키고 ‘경敬’으로 백 가지 사악함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성경誠敬’ 공부工夫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동경회고東京懷古」는 경주慶州를 유람하고 황폐해진 고도古都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 「이산서원봉안이퇴계선생위판귀로여이봉원이굉중김도성륭장이신근제군동숙파사각서비감지회伊山書院奉安李退溪先生位版歸路與李逢原李宏仲金道盛隆張而信謹諸君同宿巴寺各敍悲感之懷」 퇴계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안도李安道․김륭金隆 등과 파사巴寺에 묵으면서 스승을 생각하며 비감悲感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만시輓詩는 이중량李仲樑․김부의金富儀․이준李寯에 대한 것이다. 「진정부陳情賦」는 퇴계가 별세한 뒤에 심경을 읊은 것으로 반 백 년을 살아온 인생 여정을 읊으며 성문聖門에 어긋나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2는 서書 7편․제문祭文 3편․갈문碣文 2편․잡저雜著 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퇴계선생계몽문목上退溪先生啓蒙問目」 ‘역상曆象’․‘오운五運’․‘음양변합陰陽變合’․‘기우다과奇偶多寡’․‘영성零星’․‘기중氣中’․‘일교재교一交再交’․‘기삭분제氣朔分齊’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김사순성일이봉원논선생여존재기명언대승사칠변서편차별지與金士純誠一李逢原論先生與存齋奇明彦大升四七辨書編次別紙」는 퇴계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변四七辨’의 편차編次에 대해 김성일金誠一ㆍ이안도李安道와 논의한 내용이다. 「상곽후황上郭侯趪」은 ‘유천儒薦’에 대해 시론이 분분한 것을 들어 인재의 추천은 명실상부하게 추천하여야 하며 이는 풍화風化와도 연관되니 신중을 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답류응견운용答柳應見雲龍」에서 최근 소백산小白山 유람을 축하하며 출처대의出處大義를 언급하였다. 「여금문원與琴聞遠」에서 추위 탓에 역동서원의 모임이 여의치 못해 안타깝다고 하며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베껴 보낸다고 했다. 「답김돈서答金惇敍」는 안부와 근황을 전한 내용이다. 「답금협지答琴夾之」에서 금응협琴應夾과 ‘존성덕도문학尊德性道問學’에 대해 논했다.
제문 3편은 스승 이황李滉과 김부의金富儀․이국량李國樑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이다. 다음 「숙부통훈대부행면천군수부군갈문초략叔父通訓大夫行沔川郡守府君碣文抄略」은 매헌이 어렸을 때부터 가르침을 주었던 숙부 금원복琴元福의 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성균진사남공묘갈음기成均進士南公墓碣陰記」는 진사 남서룡南瑞龍의 생평을 정리한 글이다. 잡저 「조보론趙普論」은 송宋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太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태종太宗을 도와 태평 시대를 이룩한 ‘조보趙普’에 대해 논한 글이다. 「향교중수입약서鄕校重修立約序」는 향교를 중수하고 규약을 정한 내용이다. 「도산기고증陶山記考證」은 도산陶山의 정경을 기록한 퇴계의 「도산기陶山記」에 주석을 붙인 내용이다. 「정존재잠고증靜存齋箴考證」은 「정존재잠靜存齋箴」에 주석을 단 것이다. 「역동서원기사易東書院記事」는 우탁禹倬을 모신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세운 전말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어 매헌 친필 유적遺蹟 간찰簡札 세 편이 실렸다. 2편은 김돈서金惇敍에게, 1편은 조도사趙都事에게 보낸 것이다.
권3은 「잡저雜著」이다. 매헌의 저작著作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서질의四書質疑는 매헌이 1556년 한서암寒栖庵 곁에 거처하며 퇴계에게 강의를 받고 문난問難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논어 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중용에 대한 설명에는 「체용도體用圖」가 첨부되어 있다. 사서질의는 ‘제도制度’․‘경의經義’․‘구두口讀’․‘이의異意’․‘자의字意’ 등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부연해 두어 경학經學 연구의 중요 지침서로 평가된다.
「부록附錄」의 「사우기증시師友寄贈詩」 10수이다. 퇴계가 매헌이 한서헌寒栖庵 남쪽에 집을 지은 것을 보고 격려하며 지어준 시와 또 다른 한 수의 퇴계 시, 조목趙穆․오수영吳守盈․금응협琴應夾이 각각 2수씩, 김부륜金富倫․금난수琴蘭秀가 각각 1수씩 지어준 시가 실렸다. 매헌의 시에 차운하거나 매헌을 애도한 내용이다. 이어 금시양琴是養이 지은 「가장家狀」․허전許傳이 지은 「행장行狀」․금업琴忄業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휘재李彙載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실렸다. 권말에 1909년에 김학진金鶴鎭이 지은 「발문」․1853년에 금시술琴書述이 지은 「발문」․1891년에 금우열琴佑烈이 지은 「지識」가 실렸다.
Ⅳ. 퇴계 추존과 정심의 성리 미학이 담긴 시문학
1) 향토 산수 우월 정신
매헌의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은 사실 퇴계의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를 둔다. 퇴계의 자연 애호 사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화단을 만들어 ‘연’․‘송’․‘죽’․‘매’․‘국’을 심은 뒤에 ‘절우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형’이라고 불렀다. 퇴계는 식물인 매화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이처럼 존중하며 고결한 벗으로 대했다. 그리고 퇴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도 제자들에게 분재한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평생 매화를 곁에 두고 애정을 기울였다. 퇴계에게 매화는 너무나 소중한 벗이었다. 매화의 고결한 인격을 그리워하여 그러한 인격을 구비한 매화를 벗으로 대했다. 퇴계는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연꽃’ 가운데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는 매화를 가장 먼저 ‘절우사’에 심었다.
그런 점에서 퇴계는 도산서당 일대를 수도의 공간으로 조성하려고 했다. 퇴계가 붙인 서당 주변 자연 경물과 건물 명칭은 모두 도학적 함의를 띄고 있다. 그러므로 도산은 퇴계에 있어 도학을 실천하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후계는 퇴계가 도산서당에 ‘매화’․‘국화’․‘대나무’․‘소나무’를 심고 이를 즐기며 「도산잡영」을 남긴 전례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근저에는 ‘청량산’이 자리하고 있다.
‘황지’에서 달음질을 시작한 낙동강은 태백산을 거칠게 달려 와 퇴계가 ‘우리 산’이라 애창했던 청량산 앞을 지난다. 이제 낙동강은 거친 숨결을 늦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 유유한 흐름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고운 석벽, 유리알처럼 맑은 자갈, 은빛 반짝이는 모래와 함께 비취색 물빛으로 흐르면서 도산의 멋진 풍광을 자랑해 보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도산의 자연 경관은 일찍부터 이중환의 주목을 받아왔다.
강촌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가 제일이다. 도산은 두 산이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이루고 산은 크게 높지 않다. 그래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골짜기를 벗어나 비로소 강이 된다. 밖으로 큰 강 이 흐르는데 양쪽 산이 석벽을 이루고 또한 그 산의 아래쪽이 물에 잠겨 경치가 뛰어나다. 물은 나룻배가 건너기에 넉넉하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강촌으로 명품 지역인 예안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낙동강이 도산에 이르러 강을 이루며 강 양쪽으로 석벽을 이루는 산과 그 산 아래에 펼쳐진 정경을 기록했다. 낙동강이 태백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면 주물주가 빚어낸 천연적 굽이를 돌면서 못[沼]을 만들고, 내[川]와 협(峽)을 형성했다. 강을 이룬 낙천은 청량산을 지나 고산, 단사, 천사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연출해 내었다. 이 물줄기는 도산서당 주위에 이르러 동서로 병풍처럼 고운 산을 맞이한다[東翠屛․西翠屛]. 병풍 아래 곱게 흐르는 강물은 유리처럼 맑고[琉璃水色], 맑은 강과 어울린 산은 비단처럼 곱다[錦繡山光]. 그래서 퇴계는 영남의 낙동강이 물 가운데 임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청량산을 찾아가면서 7곡에 이르러 벗 이문량(1498-1581)에게 써준 시에 그림 속을 거니는 것 같다는 감탄사를 발했다. 이처럼 ‘청량산’과 ‘낙동강’은 안동 문인 학자들에게 뗄 수 없는 소중한 ‘성리 이념을 담은 문학 소재’이며 ‘성리 이념 지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동의 문인과 학자들은 안동의 수려한 산수 자연을 성리 이념을 담은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정감 있게 시문학으로 표현하거나 심신을 수양하며 정신적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다. 매헌 역시 이러한 스승 퇴계의 향토 자연 애호 사상을 깊이 체득했다. 이는 그가 호를 ‘매헌’이라고 한 것에서 일단 유추된다. 퇴계가 ‘매화’를 즐겨 ‘매형’이라고 불렀듯이 그는 스승 퇴계가 즐겼던 매를 자호의 근간으로 삼았던 점이나 퇴계의 한서암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답습하려고 했던 데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이 깃든 작품이다.
백 척 기암이 푸른 강에 우뚝 섰고 百尺奇巖枕碧江
우리 고을 승경을 비교할 데 없네 吾鄕形勝說無雙
어제 바위에서 서로 불러 술 마실 때 巖頭昨日相呼飮
시야 가득 구름 산이 들어왔었네 滿目雲山盡竪降
선현 역동 우탁이 살던 곳을 방문하고 지은 작품이다. 하늘 높이 우뚝 선 기이한 형상의 바위는 강직한 절의 정신으로 고려조에 명성을 날렸던 역동의 정신 지향을 대변해 준다. 매헌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기암을 올려다보며 역동의 날카롭고 굳센 기상을 떠올리며 마음 가득 감동과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왔을 터이다. 기암의 직선적 시상 전개를 통해 곧고 강한 정신세계를 표방하는가 하면 유려한 낙동강의 흐름을 연계함으로써 그러한 선비 정신 지향성이 영구적으로 이어질 것을 전망하게 하였다. 낙동강의 흐름은 쉼 없이 전개되고 이어질 정신세계의 지속성을 유인하는 매개이다. 특히 검붉은 기암절벽의 형상과 푸른 강물의 색상 대비를 통해 전체 시의 색채감도 선명하게 살렸다. 기암의 곡선미와 낙동강의 곡선미와의 조화를 거쳐 시적 미감도 한층 강화되었다. 이러한 선비 정신과 유려한 자연 경관이 빚어낸 향토 산수의 승경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는 극찬을 언명함으로써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우월 정신’을 보여주었다.
매헌은 어제의 일을 회상하였다. 매헌과 일행은 바위 정상에 당도하였다. 서로 손짓을 하여 불러 술을 마시며 산수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형성된 자연 미적 감각에 매료되고 술이 올라 흥에 만취되었던 때를 회고하였다. 시야 가득한 구름과 산에 의해 시인의 가슴은 그 무엇에 형용할 수 없는 청신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감흥을 억누르기 어려웠기에 매헌은 하루가 지난 뒤에도 어제 경험한 그 쾌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다시금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매헌의 산수 자연 인식론 근저에 이러한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론을 보기로 한다. 매현의 이러한 인식론은 ‘용수사’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에서도 확인된다. 향토 산수 애호 정서가 담뿍 담긴 작품이다.
좋은 날 고찰 곁 진경 찾으러 勝日尋眞古寺傍
연이은 말고삐 옷소매 줄을 이뤘네 聯鏕幷袂看成行
매화가지 버들개지 보기 즐겁고 梅梢柳眼供淸賞
시냇물 솔바람 소리 음률도 곱네 溪響松濤奏雅商
퉁소 연주 가슴 가득 폐를 시원케 하고 爽籟入懷蘇肺氣
산 남쪽에 눈발 따라 저문 연기 일어나네 暮烟隨雪裊山陽
제군들 시 지어 차운하지만 諸君有句應詮次
그림 속 이 풍광 묘사하기 어려우리 畫裏難摸此景光
고찰古刹’은 신라의 고찰 ‘용수사’이다. 매헌이 44세 되던 해인 1564년(명종19) 봄에 용수사龍壽寺를 유람했다. 이대용李大用․이숙량李叔樑․김부필金富弼․김돈서金惇敍․조목趙穆․금난수琴蘭秀․금응훈琴應壎․류빈․이빙李憑․이충李冲․이건李騫 등과 용수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모두 모였기에 매헌이 앞장서서 율시 한 편을 지어 모인 분들에게 보였다. 쾌청한 날씨는 용수사를 찾는 이들에게 흥겨움을 더한다. ‘용수사’를 배경으로 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자연 풍광의 아름다운 ‘진경眞景’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말을 몰고 가는 이들과 선비들의 연이은 행렬은 장관을 이룬다. 흥겨운 봄 날씨에 맞게 곱게 핀 매화와 어여쁜 버들개지를 바라보면서 걷는 이의 마음은 흥겹기만 하다. 이러한 신선한 시각적인 심상은 이어지는 시냇물 소리의 청각적인 심상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봄 동산을 찾아가는 상춘객의 발걸음을 더욱 명랑하게 만든다. 전반부의 시에서는 계곡을 따라 등정하는 초봄의 여정을 묘사하였다.
후반부에서는 용수사 주변의 경관을 묘사하였다. 진경을 감상하는 자리에 와서 일행은 퉁소 소리에 가슴을 비워주는 청량감을 맛보았다. 초봄의 눈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산 남쪽 옹기종기 모인 산촌의 저녁 짓는 연기를 보며 더욱 정겨운 느낌을 받았다. 모인 이들이 저마다 시를 지어 풍광을 묘사하느라 부산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야에 펼쳐진 이 산수 진경을 제대로 그려낼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 부분에서 매헌의 산수 자연 인식론을 파악할 수 있다. 산수 자연의 미적 가치를 그려내거나 묘사는 하지만 진면목을 액면 그대로 영사映寫해 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자연은 있는 실물 그대로를 두고 관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시적 발상은 매헌의 산수 자연 애호 정신이 각별하다는 점을 반영해 주는 사례이다. 매헌의 산수 자연 애호 사상은 사정상 ‘청량산’을 직접 탐방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과정을 상상하면서 지은 시에서도 명확히 제시된다.
늦가을에 신선 산 다시 찾아드니 仙山秋晩客重尋
찬바람 뼈에 스밀까 두렵겠네 却怕天風瘦骨侵
시 짓는 암자에 살아있는 그림 펼쳐졌고 詩到孤菴開活畵
달 비친 창에 벗님들 가슴 맑아지겠네 月生幽戶伴淸襟
금강의 꿈 깨어도 닭 울음 들리잖고 金剛夢罷鷄含舌
반짝이는 은하수 물결 따라 기러기 날으리 銀漢波明鴈送音
내 마음 벗들과 호탕하게 즐거워하고자 意與諸公同放曠
성곽이 막건 말건 청량산 육육봉 향해 달리네 不論城郭向凉岑
무릉 주세붕과 협지 금응협이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시를 남겼다. 당시 매헌은 병이 나서 그들과 동행하지 못해 그 시에 차운했다. 함께 하지 못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이 시를 지었다. 함께 산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산행 과정을 상상하면서 감회를 풀어나갔다. 늦가을에 청량산을 찾아 가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펼쳐진 풍광을 시에 담는 암자에는 그림 같은 정경이 펼쳐졌을 것을 떠올렸다. 어느덧 밤이 되어 산사의 창에 달이 오르고 벗님들 가슴이 절로 맑아질 것을 확신하였다. 법당에서는 불교 의식을 하느라 인기척이 들리지만 닭 울음은 들리지 않고 정적을 이어간다. 먼 하늘 달 빛 아래 아름답게 펼쳐진 은하수 길을 따라 기러기가 날아가는 아름다운 현상이 드러났다.
매헌의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이 무한한 서정성을 발휘한 것이다. 낭만과 아스라한 정감이 가미된 시적 표현이 돋보인다. 말미에 와서 매헌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지만 호탕한 시적 풍류를 누리고픈 마음은 청량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청량산 애호 정서와 시적 감흥이 유감없이 펼쳐진 유창한 시적 매력이 담긴 작품이다. 이처럼 매헌에게 있어서 ‘청량산’은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려는 의지의 반영이며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매헌은 44세 되던 1564년(명종19) 4월에 이문량․금난수․김부륜 등과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한 적이 있다.
퇴계의 산수 애호 사상은 퇴계의 후손 후계 이이순에게서 명확히 파악된다. 후계는 산수 실경을 묘사한 시를 많이 남겼다. 이러한 시 경향은 퇴계의 산수자연시 애호 정서와 같은 맥락이다. 후계의 선조 존모 사상은 퇴계의 행적을 답습하여 실행했던 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만촌 정착기에 절개와 고절을 상징하는 화초와 나무를 심어 두고 자연을 완상하며 학문 연찬을 지속해 나갔다. 그는 심성 수양과 함께 후진 양성 활동을 병행했다. 「후계서당잡영」에 후계의 산수 미의식이 담겨 있다.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정사잡영」을 읊었던 것을 퇴계가 도산에 거주하며 그곳의 산수 자연을 「도산잡영」으로 묘사했던 선례를 따른 것이다. 후계는 「도산구곡」(9)에서 9곡의 지리적 배경과 퇴계의 시를 인용한 경위를 밝히면서 청량산의 승경을 극찬했다.
선생께서 「무이구곡도발」에서 ‘삼십육 동천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있다면 무이산이 당연히 첫째일 것이다’ 라고 했다. 육육봉은 열두 봉을 말함이다. 그러나 육육봉과 삼십육 동천의 차이가 없다면 이제 육육봉을 삼십육 동천 가운데서 도 첫째로 삼을 수 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이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일지라도 청량산 만한 곳이 있을까?
도산구곡의 절정인 청량산의 모습은 장관이다. 열 두 봉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풍광과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청량산은 퇴계가 강학하던 공간이다. 후계의 청량산에 대한 인식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계는 중국 명산대천을 대표하는 36동천이 있다 해도 그 가운데 ‘무이산이 가장 으뜸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청량산과 무이산은 동격’이 된다. 그렇지만 청량산은 무이산 여러 경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산수 자연 공간이라고 했다. 때문에 ‘청량산의 승경은 무이산의 그 어떤 경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난 곳’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결론적으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무이산보다 고품격의 경관을 지녔으므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서도 최고의 품격을 지닌 으뜸 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계는 선조 퇴계처럼 아주 특별하게 청량산을 애호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매헌은 후계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매헌이 소유한 청량산 애호 사상을 후계에게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퇴계를 비롯한 문인들과 후손들은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청량산’과 ‘낙동강’의 미적 조화를 이룬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것은 곧 퇴계의 정신 지향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신 의식의 반영임과 동시에 향토 자연 미의식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다. 매헌이 남긴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그러한 의식의 반영이다. 이는 곧 퇴계의 정신 기맥과 정통 성리학 전통을 이어가길 소망한 의지의 결집이라 하겠다.
2) 자연친화와 한거흥취 미학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자연 친화적인 시적 표현과 한거흥취를 반영한 시를 통해 미적 흥취가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스승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수용하며 미적 감흥을 시적으로 형상한 것이다. 퇴계의 산수 자연관에 입각한 친자연적이고 자연 흥감을 시를 통해 발휘했다.
맑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바라보니 鏡裏光華白髮臨
이제는 소년 때 마음 생기잖네 只今非復少年心
일 없이 몸이 항상 건강하다면 若爲無事身常健
매일 와 술 마시며 정담 나누리니 村酒情談日日尋
인생을 반추하면서 벗과 담박한 삶을 이어가길 다짐한 작품에 낭만 정조가 담겨 있다. 시인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놀란다. 백발이 성성하여 소년 때와 같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소년 시절처럼 기력이 왕성하지는 않지만 자연 흥취와 풍류 서정은 시들지 않았다. 한가한 시간을 마련해 정다운 벗과 술 마시고 정담 나누며 소일하겠다는 소박한 의지를 담았다. 인생 회고와 풍류 지향 의식이 담겼다. 다음 시도 이런 정서를 담았다.
산중에 세모의 섣달이 찾아오니 歲晏山窓月復臨
산중에 일 없지만 감회가 일어나네 幽居無事了關心
종이에 적힌 그대 두 수를 읽으니 看君一紙題雙韻
시구마다 고상하고 깊은 정 담겼네 雅意深情字字尋
세모에 느끼는 회고 정서를 담았다. 산중에서 세모를 맞아 큰 변화는 없지만 잔잔한 감회가 일어났다. 이 시는 매헌이 한양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한 이후에 지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모를 당해 시대 상황과 진출을 포기하고 향리에서 지내면서 학문 활동과 수신에 전념하지만 감회가 있었을 터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성균관 유학을 했지만 그는 스승 퇴계의 출처대의에 따라 퇴거를 결행한 만큼 큰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세모에 느끼는 감회와 회상의 시간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내 극복된다. 벗이 보내온 시를 읽으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잠시 공허해진 마음에 벗의 아름다운 시에 담긴 감동으로 내적 희열이 충만해졌다. 이처럼 산수 자연 속에서 벗과의 교유와 수신에 전념하기에 그러한 작은 회고 정서가 그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벗이 보낸 시 두 수를 읽으면서 고상하고 깊은 뜻을 되새기며 감동을 느꼈다. 그러한 감동이 공허한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의 가슴에는 벗이 보낸 고마운 정으로 넘쳐났다. 향토 산수 애호 정서는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심경의 반영에서 선명히 제시된다.
봄 정취 함께 누리지 못하고 不共探春意
멀리서만 듣고 그리워했네 遙聞首幾回
시내 산이 날 비웃으리니 溪山應笑我
그 언제 벼슬 버리고 오리 何日就辭來
향토 산수 애호 정서는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심경의 반영에서 선명하게 제시된다. 선현의 유적지인 ‘청음석’에서 선인의 향취를 사모하며 지은 작품이다. 먼 지방에서 벼슬살이하는 주체를 이입시켜 그런 내면의 지향을 표현하였다. 먼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천에서 전개되는 아름다운 봄의 향연을 동경하는 심정을 담아내었다. 멀리서 그리워만 하는 고향 산천과 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가지 못하기에 산천이 언짢아하리라고 하면서 고향 산수 자연을 향한 그리움을 애정하게 그려내었다. 그런 이면에 매헌의 산수 자연 애호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봄비가 내리는 자연 정서를 정감 있게 담은 작품이다.
꽃비가 시인을 재촉하여 花雨催詩客
솔 그늘에 잠시 머물다 돌아왔네 松陰暫駐回
푸른 산 아쉬움 남으리니 碧山應有恨
맑게 갠 날 다시 오길 기약하네 淸霽待重來
조용히 내리는 꽃비가 시인의 마음을 재촉하여 봄 동산을 찾았다. 온갖 꽃이 만발하여 시인의 마음을 흥겹게 하고 보슬비가 내려 정겨움을 더해 주었다. 시인은 꽃동산을 거닐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느긋하게 자연의 경물을 감상하였다. 애써 서두를 필요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잠시 머물다가 발걸음을 돌렸지만 두고 온 푸른 산이 아쉬움을 표현하기에 쾌청한 날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였다. 자연이 허락하는 대로 경물을 감상하고 만끽하는 철학 자세가 담겼다. 조급할 필요 없이 느긋한 마음으로 관조하는 경지를 터득한 것이다. 이러한 내면에는 자연과 일체된 성리 철학 이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한 약속은 다음에서 이루어진다.
꽃 천지 봄 산이 화려하고 花滿春山富
맑은 시내에 저녁놀 감도네 溪淸夕照回
솔 그늘 본디 싫지 않거니와 松陰元不惡
저녁 바람까지 불어와 주네 更有晩風來
꽃 화사하게 핀 봄의 산천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화려한 봄꽃이 만개한 산이 이미 곱지만 게다가 맑은 시내의 경쾌한 물소리와 저녁놀이 시인의 흥을 한껏 돋운다. 천지를 환하게 해주는 꽃들의 잔치는 낮을 이어 초저녁까지 이어진다. 밝은 웃음처럼 환한 꽃이 핀 산천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맑은 시냇물의 청신한 멋과 물 흘러가는 소리의 경쾌한 리듬이 시청각 음률을 조성해 주어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시냇물에 저녁놀이 곱게 비친 그림 같은 광경을 시에 그대로 담았다. 매헌의 시적 표현 능력이 섬세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이어 소나무 그늘을 찾았다. 소나무 그늘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멋스러움을 즐긴다. 소나무의 고결한 자태와 올곧은 기상을 마음 가득 담고 저녁 무렵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선비의 멋진 품격을 누렸다. 자연의 아름다운 미감과 함께 소나무의 속성을 살려 고절한 선비의 기상을 함께 표백한 작품이다. 고암의 정경 묘사에도 그런 정서가 담겼다.
고암의 좋은 경관 자랑할 만하니 皐巖形勝足雄誇
팔방의 구름 산이 눈 아래 가득하네 八面雲山眼下多
우리 고을에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 없어 只爲鄕無好事者
나무꾼 목동이 민둥산 만들게 버려두었네 放敎樵牧兀山坡
고암의 빼어난 경관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라고 하며 자부심을 표출했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팔방으로 자욱한 구름과 산이 눈 아래 한없이 펼쳐졌다.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산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산 위를 두르고 있는 구름의 정겨운 모습을 담아내었다. 시각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살려내었다. 나무꾼이 벌목을 하고 목동이 소에게 풀을 먹이느라 일부 훼손된 산의 모습을 보도하였다. 바위가 드러난 산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는 사실적 안목이 반영된 시이다. 사실적 묘사는 바위틈에 자란 식물을 포착한 데서도 드러난다.
뾰족한 바위틈에 꽃과 버들 자랐고 春風花柳間危岑
산 위 푸른 솔 변치 않는 마음일세 巖上蒼髥不易心
말로만 듣고 십 년 만에 와 보니 聞說十年今始見
유인께서 나보다 앞서 와 차지하였네 幽人實獲我先尋
병인년(1566) 늦봄에 권호문을 방문하여 송암의 창수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소나무 바위에서 지은 작품이다. 뾰족한 바위 틈새에 생명을 이어가는 야생화와 버들을 주목하였다. 극한의 열악한 환경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굳건히 살아가는 식물의 고결한 자태에 매료되었을 법하다. 그를 바라보면서 매헌 역시 강인한 정신력을 다시 다짐했을 터이다. 산 정상의 푸른 솔은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하며 시인을 맞는다. 실제 시인은 이곳을 처음 찾아왔다. 말로만 전해 듣던 소나무와 바위가 절경인 이곳을 십년 만에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 절경을 먼저 알고 감상하며 즐긴 유인이 있다고 하였다. ‘한거자락’의 정취가 담긴 시를 보기로 한다.
높은 정자에서 술 마시니 一酌高亭上
친한 벗들 사방에서 찾아오네 親朋四鼎來
주량은 서로 달라도 飮雖隨量異
좋은 회포 펼쳐보세 聊與好懷開
정자에서 벗님들과 음주하며 흥을 즐기는 정서를 담았다. 경관이 좋은 높은 정자라서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한 멋을 누릴 수 있다. 사방에서 친한 벗들이 찾아 와 흥겨운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저마다 주량은 다를 지라도 좋은 모임에서 누리는 회포를 푸는 점에 있어 동일한 흥겨움을 발산한다. 이 무렵 ‘벗’과 ‘술’과 ‘자연’은 흥겨움에 동참한다. 저마다 좋은 회포를 열어 시를 짓거나 흥겨운 이야기꽃을 피우며 선비의 멋진 풍류 정서를 만끽한다. 고산정에 은거하고픈 소망을 담은 시에도 이런 정서가 담겨있다.
고산정 서쪽 우뚝한 고산 孤齋四畔峙孤山
산 아래 두어 칸 집 지을 만하네 山下容開屋數間
산의 절반을 빌릴 수 있다면 可得借儂山一半
수운정 지어 강과 구름이랑 짝하리 此身同伴水雲閒
성재 금난수의 유적지인 고산정을 찾았다. 고산정 서쪽에 우뚝 솟은 고산을 주목하였다. 고산 아래 두어 칸 오두막을 지을 만한 터를 발견하였다. 문득 천진한 발상을 하였다. 이 산의 절반을 빌릴 수 있었으면 하였다. 성재에게 산을 절반을 빌려 수운정을 짓고 강을 바라보며 구름 속에서 신선처럼 살고자 계획했지만 분주한 여러 가지 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매헌은 이곳에 수운정을 지을 계획을 하였다. ‘산’과 ‘강’과 ‘구름’과 벗하여 살고 싶은 소망을 담아내었다. 자연 친화와 산수 애호 정신이 듬뿍 담겼다. 매헌의 산수 자연 애호 정서는 산수 유람을 통해 가시화된다.
지팡이 짚고 가볍게 앞서고 뒤서며 鳩杖飄然共後先
청화절 좋은 때 봉산 정상에 오르네 淸和佳節鳳山巓
난정의 모임 무엇이 부러우랴 蘭亭勝會何須羨
이번 산행에 지상선 되었다며 들떴네 爭道今行總地仙
김언우․이문규․구경서․금응협․금난수․정자중․류성룡 등과 부석사를 유람하면서 수창한 시다. 음력 사월 청화절 좋은 시절에 지팡이 짚고 청량산을 탐방한다. 난정의 모임도 부러울 것 없다며 자긍심을 드러내었다. 명문장이라고 칭해지는 「난정기蘭亭記」는 ‘「난정집서蘭亭集序」’․‘「계서禊序」’․‘「난정서蘭亭序」’․‘「계첩禊帖」’․‘「난정연집서蘭亭宴集序」’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서는 「난정기蘭亭記」로 실려 있으며 고문관지古文觀止에는 「난정집서蘭亭集序」로 실려 있다. 서예가 왕희지의 작으로 천하제일의 행서로 칭해진다. 중국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 9년(353) 3월 초에왕희지와 아들 왕응지王凝之와 왕휘지王徽之, 왕조지王操之, 왕헌지王献之, 손통孫統, 이충李充, 손작孫綽, 사안謝安, 지둔支遁 등 소장군현 41명이 회계산 북쪽 난정에서 모여 계제사를 행한 후 시회詩會를 열어 26명의 시 37수를 모아 편집한 것이 난정집이며 이 서문을 쓴 것이 「난정집서」인데 모두 324자로 되어있다. 이번 산행을 통해 모두 지상선이 되었다고 할 만큼 만족하였다. 친 자연 사상과 자연 애호 정서를 토대로 산행을 통한 ‘난정고사’처럼 독실한 모임과 성리 이념 강화를 통하 내적 희열과 수양의 효과까지 이루는 것을 보고하였다. 다음 시 역시 청량산 탐방을 통한 시문 수창을 통해 자연 애호 정서를 담아낸 것이다.
연대사 청정한 곳 蓮臺淸淨界
산이 마주한 형상일세 一山當面勢
단청처럼 빛나고 새롭고 金碧煥增新
상교처럼 화려하고 곱네 象敎何詭麗
알듯 말 듯한 스님들 居僧知不知
번갈아 수고하셨다 하네 迎勞來更遞
대 위에 바람 일어 피하려고 臺上起避風
당 앞에 나란히 앉았네 堂前坐接袂
함께 온 이들 모두 뛰어나 同遊盡英英
일찍이 온 분들도 많네 曾到亦濟濟
술병 기울여 술을 돌리고 傾壺細酌傳
포부 열어 담론을 펼치네 開抱宏論揭
의견 달라도 번거롭지 않고 參差不厭煩
합치되어 교분이 깊어지네 邂逅或深契
이에 수창하는 시가 없으랴 那無唱與酬
앞선 선현들 사례가 있어 前賢固有例
늙은 내가 선창을 하고 老我敢先挑
좋은 화답시 지켜 보리라 佇看諸盛製
퇴계가 지은 청량산의 「연대사蓮臺寺」라는 제목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청량산 연대사 청정한 주변 경관에 도취되어 기쁨이 충만하였다. 예전에 청량산 ‘연대사’는 26개의 사찰과 암자를 거느린 대규모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누대 위에서 바람이 일어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당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일행들을 둘러보니 모두 출중한 인물이다. 술병을 기울여가며 돌리고 담론을 펼치는데 이견이 나오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럴수록 교분이 깊어간다. 이 무렵 시를 수찬하는 시도가 이어진다. 연장자인 매헌이 선창을 하고 이어 답례로 따라 짓게 하였다. 아름다운 경관을 그림을 그려내듯 시에 담고 풍류 서정도 채색하게 배려한 것이다. ‘연대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절에 있는 당루堂樓의 벽에 그려진 ‘삼각우三角牛’가 있다. 옛날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유씨 성을 가진 이의 집에서 이 소가 태어났는데 사람들이 길들일 수 없었다. 이 절을 창건할 때 유씨가 일을 맡아보는 스님에게 장난삼아 “저 소를 끌고 가시오.”라고 했다. 스님이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는 소 앞으로 갑자기 다가서니 소가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고는 마치 유순하게 따르는 모습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양하는 재물을 운반하였다. 이러한 전설을 소재로 하여 벽에 그림을 그려둔 것이다. 이러한 산수 자연 취향의 서정은 산수흥취 발산으로 확대된다.
정자 위에 거문고 상자 열어두고 亭上先開綠綺匣
시냇가에서 또 좋은 시인 만났네 溪邊又値好詩人
서로 손잡고 한 잔 술 권하니 相携勸進一杯酒
몇 해만에 봄 풍광 즐기세나 爲此韶華屢開春
봄에 느끼는 낭만 정서이다. 정자 위에서 거문고 궤를 열어두고 연주하며 흥을 발산하였다. 정자 앞에 펼쳐진 좋은 풍광과 맑은 바람은 풍류객의 흥을 돋우기에 최적의 상태이다. 이에 흥겨운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니 풍류가 일품이다. 시냇가로 걸음을 옮겨 다시 시인들을 만나 즐거움이 극에 달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맑은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시를 창수하니 흥겹기만 하다. 상춘객의 즐거움은 술잔을 건네면서 더욱 심화된다. 몇 해 만에 누리는 상춘의 기쁨을 만끽한다. 풍류 흥취 사상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는 다음 작품에서 그 폭을 더욱 넓혀간다.
산 그림자 날마다 창가에 찾아오고 山影當窓日日臨
시골 그윽한 흥취 그대들 마음에 흡족해 村居幽興稱君心
벗을 불러 술 걸러 진솔회 이루니 呼朋漉酒成眞率
절로 풍류 넘쳐 다른 데서 구하잖네 自有風流不外尋
월천서당에 모여 월천에게 지어 준 작품이다. 매일처럼 창가에 산그늘이 찾아 들고 시골의 그윽한 흥취가 전개된다. 고즈넉한 시골 분위기는 모인 시인들의 마음을 한결 즐겁게 해주고 흥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에 벗을 불러 문주 모임 형식인 ‘진솔회’를 여니 풍류가 넘쳐나서 다른 데서 이러한 풍류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골의 그윽한 흥취가 일품으로 오를 무렵에 벗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진솔한 모임 이루니 굳이 다른 데서 풍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풍류 흥취의 정서는 이처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예전에 속세 찌든 마음 여기서 비웠나니 疇昔塵襟到此虛
종일 누대 바위에서 흥겨워하였네 臺巖終日興何如
강물 소리에 갑자기 신선의 꿈 깨니 江聲忽碎遊仙夢
석양 하늘가 후두둑 소나기 쏟아지네 天外斜陽白雨疎
선몽대仙夢臺에서 퇴계의 시에 차운하여 주인 이열도李閱道(1538-1591)에 준 작품이다. 이열도의 본관은 진성이며 자는 정가, 호는 우암遇岩이다. 1576년에 문과 급제하여 형조좌랑․고령군수를 역임했다. 고령군수 재직 시에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귀향 후 선몽대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마쳤다. 누대에 올라 속세에 찌든 마음을 비웠다. 하루 종일 누대 바위에서 흥겨움을 누리며 즐거워하였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경관을 둔 낙동강은 유유히 흘러간다. 그런 탓에 시인은 잠시 잠에 들고 말았다. 흥겨움이 충만했다가 일시적인 정적감이 돌았다. 다시금 강물에 떨어지는 소나기 소리에 잠을 깨는 과정을 정밀하게 그려내었다. 전반부의 서정 묘사와 후반부의 서경 묘사에 이어 청각적 심상이 덧붙여진 치밀한 창작 기법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러한 자연 흥취 탐구 정서는 다음 시에서 더욱 확대된다.
관광하다 첫 국화 필 때 온다던 약속 저버렸고 觀光虛負菊初開
이 밤의 심회를 한 잔 술로 달래네 此夜心懷付一杯
밝은 달 오르고 강물은 졸졸졸 明月又來江水咽
나그네 맑은 흥취 넘쳐나 주체할 수 없네 客中淸興浩難裁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에 옛 지명인 가흥加興 역관驛館에서 김기보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김기보金箕報(1531-1588)의 본관은 안동이다. 음보蔭補로 언양현감彦陽縣監․회인현감懷仁縣監을 역임했다. 잦은 일로 첫 국화가 필 때 온다던 약속을 저버린 아쉬움을 담았다. 여기서 ‘관광’은 매헌이 성균관 유학 시절 한양의 문물을 견문하고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식견을 넓혀가던 시절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허전한 맘을 달랠 길 없어 한 잔 술로 위로해 본다. 시인은 주변 정황의 급전환으로 이내 밝아진다. 밝은 달이 오르고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에 내면 깊이 잠재된 풍류 흥취가 자연 발생하여 흥을 억제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만큼 매헌은 산수자연 애호와 이를 감상하고 체득하는 산수 심미관을 지녔기에 산수 자연 흥취의 여유 있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의 유가 심미 의식
중국 10대 명산의 하나인 복건성福建省에는 무이산武夷山이 있다. 이 산은 송대宋代 대유학자로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1130-1200)가 무이산 아홉 굽이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구곡가九谷歌’를 지었다. 즉,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구비를 성리 이념과 결부시켜 시로 읊은 것이다. 무이산은 복건성의 최고 명산으로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다. 약 8㎞의 계곡에 펼쳐진 아홉 구비는 ‘승진동升眞洞’ㆍ‘천왕봉玉女峯’ㆍ‘선기암仙機巖’ㆍ‘금계암金鷄巖’ㆍ‘철적정鐵笛亭’ㆍ‘선장굴仙掌峯’ㆍ‘석당사石唐寺’ㆍ‘고루암鼓樓巖’ㆍ‘신촌시新村市’의 이름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주자는 1183년에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지었다. 이듬해인 1184년에 「무이구곡도가」를 지었는데 이 시는 첫 수를 제외하고 무이구곡의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승경을 묘사하고 있다. 자연 경관을 묘사하고 있지만 성리학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과 성리 미학을 내포하고 있다.
주자는 1곡에서 우뚝 솟은 대왕봉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2곡에서 ‘옥녀봉’ 산수의 수려함을, 3곡에서 3천년을 버틴 ‘홍판교虹板僑’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을, 4곡에서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웠다는 ‘선조대仙釣臺’를, 5곡에서 주희가 학문을 완성했다는 ‘무이정사’를, 6곡에서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인 ‘선장암’을, 7곡에서 ‘도원동산문桃源洞山門’을, 8곡에서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쌍유봉雙乳峰’을, 9곡에서 ‘무릉도원이 따로 없고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라고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이었기 때문에 남달리 존모했다. 특히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은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여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삶속에 이를 체현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조선의 유학자들도 도처에 ‘구곡’을 경영하면서 ‘구곡시가’를 짓고 자연과 예술․철학이 융합된 거대한 ‘구곡문화’를 형성해 왔다. 영남 유림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수용하여 ‘안동’․‘봉화’․‘문경’․‘성주’ 등지의 27곳의 ‘구곡’을 경영하였다. ‘구곡원림’의 경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명승지 아홉 곳을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처럼 경영함으로써 주자의 사상과 문학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구곡시가의 창작은 기록상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가 시초이다. 박하담은 1536년(중종31)에 경북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승경勝景을 ‘구곡’으로 경영하면서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한국 구곡문학의 대략을 연대별로 정리하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도산구곡陶山九曲」→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고산구곡高山九曲」→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무흘구곡武屹九曲」→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의 「오대구곡梧臺九曲」→우암尤巖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화양구곡華陽九曲」→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곡운구곡谷雲九曲」→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황강구곡黃江九曲」→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성고구곡城皐九曲」→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1664-1730)의 「횡계구곡橫溪九曲」→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59)의 「화지구곡花枝九曲」→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의 「석문구곡石門九曲」→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우이동구곡牛耳洞九曲」→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의 「춘양구곡春陽九曲」→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 「포천구곡布川九曲」→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1832-1893)의 「옥계구곡玉溪九曲」→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1862-1938)의 「이산구곡駬山九曲」 등 구곡이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있지만 구곡시가를 남긴 대표적인 곳으로 ‘구곡’이라 이름 지어진 곳은 전국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처럼 한국문학사에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수용은 성리 이념 체계의 강화와 함께 산수 문학사 및 예술사에 주요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조선조 16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무이도가武夷櫂歌」 차운이 유행했는데 이런 경향은 구곡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무이지武夷志를 탐독하거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감상하는 시대적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실경산수화 창작 동기 역시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지은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그림으로 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조선조 유학자들은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谷’ 운영 형태를 계승하여 자연 풍광이 수려한 곳을 골라 ‘구곡원림九谷園林’을 운영하며 구곡 관련 시문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 구곡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구곡시는 성리 이념과 산수흥치를 시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그동안 구곡시는 관련 연구를 통해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구곡시 관련 연구 성과로는 구곡시 연구, 「구곡도」 연구, 구곡 관련 조경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로써 영남 구곡 원림 설정 및 경영의 대체가 파악되었으며, 구곡 시 창작 전통 체계도 이루어졌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영남 구곡문화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경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출중하게 명현 거유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수려한 산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구곡문화가 선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본격적 삶은 퇴계로부터 시작되었다. 퇴계는 어느 날 「무이지」를 읽고 나서 「무이도가」에 차운한 시를 지었다. 시의 제목은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인데 ‘한가히 지내며 「무이지」를 읽고 「구곡도가」에 차운한 10수’라는 의미이다. 시의 제목을 통해 이 시의 창작 배경을 알 수 있다. 「무이지」는 중국 무이 지방의 풍물을 기록한 책으로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기록도 자세히 실려 있다. 퇴계는 이 책을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면서 ‘무이구곡’ 유람의 감회를 주자의 「무이도가」의 형식과 정신을 이어 차운시를 썼다. 퇴계가 지은 ‘구곡시’의 지리적 배경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이다. 퇴계의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를 일별한다.
신선 산은 신이함을 붙이지 않으니 不是仙山託異靈
창주의 유적을 생각하니 상쾌해지네 滄洲遊跡想餘淸
전날 밤 꿈에 감격하여 故能感激前宵夢
노 두드리며 구곡가 이어 부르네 一櫂賡歌九曲聲
첫 구비에서 고깃배 찾아 오르니 我從一曲覓漁船
천주봉 의연히 서천을 굽어보네 天柱依然瞰逝川
참 선비 한 번 음상한 이후로 一自眞儒吟賞後
그 정자는 그때처럼 풍광 드러내지 않네 同亭無復管風烟
이곡은 선녀가 푸른 봉우리로 변한 곳 二曲仙娥化碧峰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라네 天姸絶世靚修容
다시는 경국지색을 천거하지 않으리니 不應更覬傾城薦
깊은 골짜기엔 구름 깊게 드리워있네 閭闔雲深一萬重
삼곡엔 높은 벼랑에 큰 배가 걸려 있어 三曲懸厓揷巨船
공중을 날아와 걸린 그 때가 괴이하도다 空飛須此怪當年
내를 건넌 들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 濟川畢竟如何用
유구한 세월 귀신 돌봄과 사랑으로 번거롭네 萬劫空煩鬼護憐
사곡의 선기암에 밤 깊어 고요한데 四曲仙機靜夜巖
금계 울어 새벽 되니 깃털 길게 드리웠네 金鷄唱曉羽毛毿
이 사이에 참된 풍류 있으니 此間更有風流在
양구 벗고 월담에서 낚시 하리라 披得羊裘釣月潭
그 때 오곡의 깊은 산으로 들어가 當年五曲入山深
대은이 도리어 수풀 속에 은거했네 大隱還須隱藪林
거문고 빗겨 안고 달밤에 연주하니 擬把瑤琴彈夜月
산 앞의 은자는 이 마음 알리 山前荷簣肯知心
육곡에는 푸른 구슬 여울 흐르고 六曲回環碧玉灣
신령한 자취 아득하고 구름이 에워쌓네 靈蹤何許但雲關
깊은 골짜기에서 도화 둥둥 떠 오니 落花流水來深處
신선의 세월 한가함을 알겠네 始覺仙家日月閑
칠곡에서 노 잡고 또 한 여울 오르니 七曲橕篙又一灘
기이한 천호봉 풍경 가장 볼 만하네 天壺奇勝最堪看
어찌해야 신선이 마시는 유하주 얻어 何當喚取流霞酌
취해 비선을 끼고 학의 등을 타려나 醉挾飛仙鶴背寒
팔곡에는 구름 걷히니 호수가 열리고 八曲雲屛護水開
표연히 노에 맡기고 물 위를 빙 도네 飄然一棹任旋洄
고루암은 조물주의 뜻을 알아서 樓巖可識天公意
유인을 불러 끝까지 찾아오게 하네 鼓得遊人究竟來
구곡에는 산이 열려 눈앞이 트이고 九曲山開只曠然
인가 연기 피는 곳 긴 냇물 내려보네 人烟墟落俯長川
그대는 이곳을 노닐기 좋은 곳이라 말지니 勸君莫道斯遊極
묘한 곳에 오히려 별천지가 있다네 妙處猶須別一天
안동 지역은 이러한 구곡 문화의 발흥지로 의의를 지닌다.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한국유학사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는 인물들이 안동에서 배출되었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태백산을 통과하고 청량산에 이르러 강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낙동강은 수많은 골짜기와 협을 형성하여 도산은 구곡원림 형성의 최적지 여건을 갖추었다. 퇴계는 처음에 도산陶山의 북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은거지로 삼았다가 뒤에 도산의 남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朧雲精舍를 세우며 구곡원림을 경영하고자 했다. 그가 지은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 가운데 3곡으로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沙曲’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그 「주註」에도 “월란암은 산이 가깝고 물이 임하여 잘린 것이 누대의 형상과 같은 것이 무릇 7곳이고 물에 산을 둘러 굽이를 이룬 것이 무릇 3곳이다’라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이미 어느 정도 구곡원림이 지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가산지에 의하면, 청량산淸凉山의 계곡을 따라 낙천洛川이 굽이굽이 흐르면서 절경을 이루는 도산구곡 원림은 제1곡이 ‘운암雲巖’, 제2곡이 ‘월천月川’, 제3곡이 ‘오담鰲淡’, 제4곡이 ‘분천汾川’, 제5곡이 ‘탁영濯纓’, 제6곡이 ‘천사川砂’, 제7곡이 ‘단사丹砂’, 제8곡이 ‘고산孤山’, 제9곡이 ‘청량淸凉’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제5곡에 마련했는데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건립한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매헌이 남긴 시문학 유산 가운데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에 반영된 매헌의 유가적 심미 의식을 검토하기 위해 ‘선유船遊’의 행적이 담긴 작품을 보기로 한다.
새벽에 술 두 병씩 허리에 차고 凌晨各佩玉甁雙
친한 벗 이별하고 창에 기대 술 취했네 相送親朋醉倚窓
외기러기 아득한 하늘 끝에서 슬피 울고 孤雁哽哀天網漏
기쁘게 봄 술 마시며 강에서 뱃놀이 하네 好將春酒泛春江
구봉령의 시에 차운하여 김돈서․김호와 작별하며 지어준 시이다. 이른 새벽부터 친한 벗과 이별주를 마셨다. 이별의 아쉬움 탓에 술기운이 빨리 올라 창에 기대 술에 흠뻑 취해 버렸다. 고독한 시인의 심상을 말해주듯 먼 하늘가 외기러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독한 시적 자아의 이미지는 기러기로 전이되어 슬피 울고 만다. 이런 일시적인 고독을 삭히기 위해 시인은 봄의 강에 배를 띄워 술 마시며 선유의 흥을 이어간다. 고독한 심상이 시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소재로 삽입되어 시적 전환과 유동성을 강화했다. 시의 전반에 풍류흥취의 정서가 관류하고 있다. 이러한 선유의 시작 배경에는 주자의 「무이지」를 탐독하고 난 뒤에 지은 시에서 매헌의 유가적 심미안이 담겨있다. 「서시」이다.
깨끗한 명승지 기이하고 신령한 모습 蕭灑名區著異靈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 차고도 맑아 溪流曲曲澹寒淸
그 아름다운 경관 아는 이 없는데 箇中佳景無人識
한가로운 시냇가 늙은이 노 젖는 소리만 閒聽溪翁扣枻聲
깨끗한 명승지에 무이 아홉 구비마다 형성된 절경에 기이하고 신령한 모습이 드러난다. 맑고 차가운 물이 굽이굽이 돌면서 청량감을 더해주고 신선한 공간 확보에 기여한다. 차가운 ‘촉감’과 맑은 ‘청신감’이 배합되어 아름다운 배경을 그려주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는 ‘청각감’을 제공해 준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아는 이 없으며 강물에 한가롭게 노 젖는 어옹의 낭만적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매헌은 서두의 시에서 잔잔한 시상과 아름다운 전경을 함께 소개하면서 심미 의식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한가롭게 노 젖는 어옹을 등장시켜 ‘선유’의 노래 전개를 예고했다. 「1곡」이다.
일곡 맑은 구비에 작은 배 매니 一曲淸灣繫小船
긴 강을 따라 많은 봉 우뚝하게 이어졌네 群峯傑卓列長川
참 선비 떠난 후 산은 주인 잃었고 眞儒一去山無主
푸른 나무 붉은 절벽 저녁놀에 쌓였네 碧樹丹崖鎖暮烟
첫 번째 맑은 구비에서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 간다. 길게 흐르는 강을 따라 여기저기 우뚝 솟은 봉우리가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참 선비가 떠난 이후 산은 주인을 잃어버려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서 참 선비는 ‘주자’의 또 다른 이미지 형상이다. 퇴계는 주자의 학문을 한국에서 집대성한 분인 만큼 주자에 대한 존모심이 강했고 그의 학문을 체계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터이다. 긴 강을 따라 우뚝하게 솟은 봉우리는 주자의 정신적인 지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주자가 세상을 떠났지만 푸른 나무 절별에 비치는 석양 노을은 그를 추모하는 퇴계의 서정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말미에 푸른 나무가 우거지고 붉은 절벽과 노을이 조화를 이룬 멋진 풍광을 소개하였다. 주자에 대한 존모와 산수 자연 표현 미감이 드러난다. 「2곡」이다.
이곡은 가파르고 푸른 옥녀봉 二曲崢嶸碧玉峯
선녀가 강에 내려와 고운 얼굴 치장하네 仙娥臨水斂花容
양대의 옛 꿈 이제 기약할 수 없으니 陽臺舊夢今難再
겹겹이 쌓인 푸른 산 바라본다오 望裏靑山隔幾重
옥녀봉 전설을 소재로 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푸르고 가파른 옥녀봉은 여인의 자태를 닮은 듯하다. 고운 봉우리는 여인의 몸매를 닮은 듯하다. 옥녀봉을 의인화하여 여성 안목에서 미화하였다. 가파르고 푸른 옥녀봉의 자태를 늘씬하게 어여쁜 여인의 모습으로 형용했다. 고운 옥녀봉 아래 선녀가 내려와서 고운 얼굴을 치장하는 상상력을 담아내었다. 하지만 이제 양대의 꿈을 꾸지 못한 채 겹겹이 푸른 산만 바라본다고 하였다. ‘양대의 옛 꿈’ 전설은 다음과 같다.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신녀神女를 만나 하룻밤의 인연을 맺고 서로 작별할 때 그 신녀는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내리는 비가 되어 언제나 양대의 다리 아래 있겠사와요.”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옥녀봉 전설을 시의 소재로 하고 양대의 꿈을 담은 로맨스를 곁들여 여성 미감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매헌의 여성 정감적인 미감이 드러난 작품이다. 「3곡」이다.
삼곡 바위 벼랑에 배타고 낚시질 三曲巖崖倚釣船
풍경 그대로 그 때와 같네 依然風景似當年
가르침 받고 싶지만 늦게 태어났으니 欲承謦欬嗟生晩
높은 산 바라보며 홀로 슬퍼한다네 仰止高山獨自憐
세 번째 구비에서는 바위 벼랑에 앉아 낚시질하는 강태공의 형상을 담았다. 이는 ‘골짜기에 매어 둔 배’라는 ‘가학선架壑船’ 전설을 채용한 작품이다. 바위 벼랑은 ‘소장봉小藏峯’을 말한다. 소장봉 중간 벼랑에 구멍을 내고 통나무를 시렁처럼 박고 그 위에 시신을 넣은 널을 얹어 두는 것이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가학선’은 고대 무이산 일대에 살았던 ‘고월인古越人’이 죽었을 때 시체를 안장하는 장례 의식에 사용되는 배이다. 이 배를 타고 다른 세상으로 간다고 믿었다. 전설에 의하면 ‘가학선관’은 신선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남긴 배로서 배안에는 유골이 있었다고 하며 비바람에도 썩지 않고 천년을 그대로 있다고 한다. ‘가학선관’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널을 말하고 홍교판虹橋板은 무지개다리 판이니 선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천애 절벽 위에 있는 가학선과 홍교판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선의 전설을 담고 있다. 무이계곡의 ‘선관船棺’은 은殷나라 말기에서 시작하여 주周나라 초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풍습은 약 3800여 년 전에 복건성에 살던 소수 민족의 유물로 볼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가학선관을 고대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이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자는 장대하고 웅장한 소장봉에서 절벽에 내걸린 가학선관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 깊이 느끼며 이 시를 지었다. 하늘은 끝없는 바다로 상징된다. 벼랑 끝에 배를 정박했다가 하늘로 한 없이 노 저어가는 상상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러한 무한한 상상의 자유 세상을 희구하면서 문학 작품에 수용한 것이다. 시적 상상력의 자유와 무한한 자유세계를 동경하는 이상적 염원이 담겼다. 매헌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를 썼다. 가학선 풍경은 변함없이 예전 그대로이다. 주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늦게 태어나 그럴 수 없는 아쉬움에 한탄이 담긴 어조로 슬픔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높은 산은 주자의 흔적이며 남은 행적이다. 그리고 그 벼랑 밑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성리학의 영구 지속성을 지향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3곡에서는 ‘가학선’ 전설 채용과 함께 성리학 전통 계승과 전승에 대한 도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 주자 성리학 전통 계승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담고 있다. 매헌의 이러한 주자 존모 사상은 퇴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각별한 성리학 전승 의지를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4곡」이다.
사곡은 금계가 새벽 바위에서 우니 四曲金鷄唱曉巖
시냇가엔 푸른 풀 무성히 우거졌네 溪邊靑草碧監毛毿
그윽한 생활 절로 연하의 흥취가 일어 幽居自有烟霞趣
긴 낚싯대 잡고 푸른 못에 낚시한다네 手把長竿釣碧潭
‘금계’가 울어 새벽을 알리는 전설을 채용하였다. ‘금계金鷄’는 전설상의 황금 닭이다. 이 닭이 ‘부상扶桑’의 산 위에서 한 번 울면 천하의 닭이 모두 따라서 울며 새벽이 밝아온다. 4곡에는 산수 자연 흥취를 가득 담아내었다. 금계가 울면 온 세상의 닭이 따라 울면서 새벽을 알린다는 전설을 시화하였다. 새벽에 우는 금계는 시각과 청각 이미지가 합성되었다. 이어지는 시구의 푸른 풀빛을 통해 시각 이미지가 증폭되었다. 이로 인해 그윽한 자연 속에서 지내는 평온한 삶의 향연이 일어나 자연 생활에서 느끼는 흥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윽한 생활로 인해 그래서 어옹을 자청하며 푸른 못에 낚시를 드리우며 한거한 멋을 누린다. 매헌의 작품에는 ‘선유’의 전통성 시화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선유’와 ‘어옹’의 등장을 통해 ‘선유’에 근거한 이 작품의 특성을 잘 살렸다고 할 수 있다. 「5곡」이다.
오곡은 조용하고 깊은 골짜기 五曲沉沉洞壑深
당시 대현께서 구름숲에 은거하셨네 大賢當日隱雲林
임간에서 일찍 경륜의 뜻을 품으셨고 林間早抱經綸志
성현 유업 이어 후학 가르치느라 고심하셨네 繼往開來幾苦心
5곡에는 성리학 이념이 응집되어 있다. 주자의 무이정사가 있고 성리학이 온축된 신성한 공간 설정이기 때문이다. ‘정사精舍’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집, 수양하는 곳, 불도佛道를 닦는 중이 거처하는 집 등으로 정의된다. 초기 정사의 의미는 안거를 목적으로 한 공간을 의미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종교 의례를 위한 성소聖所로서의 의미로 변화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정사 건축의 개념이 형성된 시기는 14세기경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성리학의 전성기인 16-17세기경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의 개념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정사의 의미는 은거 생활을 위한 공간, 수학을 위한 공간, 강학의 장소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매헌은 조용하고 깊은 9곡의 중심부인 5곡에서 산을 가린 구름 속에 은거하며 강학하며 수도했던 주자를 회상하며 추모 서정을 담았다. 여기서 ‘구름’은 ‘속세’와 ‘은거구도 공간’을 차단해 주는 매개체이다. 이어 주자가 은거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정통 유학을 이어 정성을 기울여 후학을 지도했던 행적을 추념하였다. ‘계왕래학繼往來學’은 ‘성현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후손에게 가르쳐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의 완성을 위해 헌신했던 주자에 대한 존모심을 담았다. 「6곡」이다.
육곡에 푸른 물줄기 굽이굽이 돌아 六曲逶迆遶碧灣
골짜기의 가암에 소나무로 빗장 삼았네 架巖鑿谷閉松關
아름다운 산과 강에 봄바람 불어 와 佳山好水春風到
고운 자줏빛 붉은 꽃 핀 경관 한가롭네 萬紫千紅麗景閒
6곡에도 가학선 전설을 채용했다. 굽이쳐 흐르던 강물은 자연스럽게 돌고 돌아 멋진 풍광을 선사하였다. 골짜기 벼랑에 가학선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바위 주변에는 빽빽한 소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어 절로 골짜기 빗장을 만든 것 같다. 게다가 봄철을 맞아 산과 강에 봄바람이 불어와 온갖 꽃을 피운다. 자줏빛과 붉은 꽃 잔치가 펼쳐진 아름다운 정경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산수 자연의 그림 같은 모습을 묘사하여 시에 오롯이 담아내면서 산수 자연 미감 의식을 드러내었다. 가학선 전설 채용과 잔잔한 시상으로 자연 경관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7곡」이다.
칠곡은 시냇가에 돌 여울 있어 七曲溪邊有石灘
하늘엔 밝은 달 보기 좋게 떴구나 天壺仙掌可堪看
맑은 바람 불어 와 구름을 몰아가니 淸風吹盡浮雲捲
온 골짜기 봉우리의 달빛 차갑네 萬壑千峰月影寒
자연 애호 정서가 짙게 담긴 7곡의 표현이다. 시냇가 돌 여울 있어 즐겁고 저녁이 되어 하늘에 밝은 달이 떠올라 정겹다. 낮과 밤에 전개된 지상과 천상의 현상을 클로즈업하면서 생동하는 물상의 양태를 담았다. 특히 저녁의 시간 추이에 따른 경물의 묘사에도 치중하였다. 맑은 바람이 불어 와 구름을 몰아간 하늘에는 밝은 달이 찬란히 빛난다. 봉우리와 청아한 달빛이 청신한 맛을 제공한다. 흐린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되었고 밝은 달이 비추는 것은 성리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내면에 인욕이 제거되고 본연지성이 회복된 광풍제월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철리 사유 의식이 담겨진 시이다. 인간의 내면에 인욕이 제거되어 기질지성을 회복하여 정화되고 본연지성이 회복된 상태가 현시된 것을 말한다. 성리 철학 이념이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8곡」이다.
팔곡은 벼랑 끝에 푸른 절벽 이어져 八曲懸崖翠壁開
우뚝한 누대 암자 아래 강물 휘돌아 흐르네 樓巖卓立水旋洄
한가로운 가운데 참 흥취 무궁무진한데 閒中眞趣無窮極
음풍농월하며 자유롭게 오가리라 弄月吟風任去來
한거 미학과 자연 흥취 조화를 미적으로 응축 표현한 8곡이다. 위험한 벼랑 끝까지 절벽이 이어져 있다. 우뚝 솟은 바위 암자 아래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광경은 직선과 곡선미의 조화를 표착한 것이다. 전반부가 서경 묘사에 치중한 반면 후반부는 서정 묘사로 집약된다. 이러한 아름답고 평온한 공간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은자는 한가한 가운데 내적 희열이 충만하며 풍류흥취도 극에 달하여 무한한 기쁨에 도취되었다. 이에 음풍농월하는 무한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9곡」이다.
구곡은 봉우리가 장엄히 솟았고 九曲峯巒勢屹然
구름과 노을 앞개울에 잠겼네 雲烟靄靄鎖前川
도화유수 따라 와 참된 길 찾았으니 桃花流水尋眞路
별천지에서 천성을 즐기네 壺裏乾坤自樂天
유학의 유토피아적인 심상을 집약한 9곡이다. 장엄한 봉우리에 구름과 노을이 개울에 잠긴 신비한 정경은 이곳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개의 신성한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늘 높이 우람하게 솟은 봉우리는 지금까지 진행한 무이구곡의 최정상 이미지 투영이다. ‘호리壺裏’는 ‘별천지’라는 의미이다. 중국 고사에 의하면, 호공壺公이라는 신선이 시장에서 약을 팔고 있었다. 모두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루는 비장방費長房 이라는 사람이 호공이 천정에 걸어둔 술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후 비장방은 호공을 극진히 모시다가 어느 날 호공을 따라 술병 속으로 따라 들어갔더니 완전히 별천지였다. 그 곳에도 해와 달이 뜨고 선궁仙宮이 있다고 한 데 근거를 둔다. 앞개울에 잠긴 구름과 노을은 세상과 별천지를 가르는 관문이다. 속인들은 개울 저 편에 숨겨진 별 다른 세상의 존재 유무를 인식하지 못한다. 유학에서 추구하는 수신과 정심을 체득한 이들이 누리는 이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열망을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복숭아꽃이 냇물을 따라 둥둥 떠서 흘러나오는 별천지에서 천성을 즐기는 기쁨을 표현하였다.
유교의 최고 이상향을 그려내면서 대미를 장식하였다. 무릉도원 별천지에서 하늘이 준 천성을 즐긴다는 표현에서 유교적 이상향에서 절대 자유를 만끽하는 성리학자이며 시인인 매헌의 멋진 심상을 엿볼 수 있다. 유교적 최고 절대 미학의 경지를 추구하는 선비 정신 지향을 파악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매헌은 스승 퇴계가 「무이지」를 읽고 난 뒤에 「무이구곡도가차운시」를 지었던 것을 답습하여 「무이구곡도가차운시」를 지었다. 이러한 발상은 퇴계의 정신 지향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했던 명확한 흔적이다. 이처럼 퇴계를 비롯한 매헌의 「무이구곡도가차운시」 전통은 퇴계 후손들을 중심으로 왕성히 추진되었다.
퇴계는 도산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구곡가를 짓지 않았다. 후일 정조 때의 후손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도산구곡가」를 지어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도산구곡의 대체적인 경관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는 한편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퇴계 학문을 전승하고 영남 학맥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퇴계에 대한 조정의 배려도 도산구곡 창작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퇴계 가문 후손들에 의해 이러한 활동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데, 후계 이이순․광뢰 이야순․하계 이가순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후계는 현장 답사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도산구곡의 정확한 위치를 서술한 서문을 작성하고 구곡시를 남겼다. 말하자면 후계는 향토선현들의 유촉지에 대해 각별한 애정 의식을 지녔으며, 이런 의식을 기반으로 문헌적 고증과 탐사를 통해 지난 역사와 문화 복원에 이바지했던 인물로 평가해야 한다. 「도산구곡」 서문을 검토해 보면 후계의 면밀한 작가 의식이 드러난다.
세상에서 ‘도산’을 일컬어 ‘무이’라 한다. 지역상 서로 떨어진 것이 1만여 리이고 시대상 서로 떨어진 것이 오백여 년 인데 두 산이 서로 이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참으로 양항숙이 ‘땅은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에 같아진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의 빼어난 경치 또한 서로 멀지 않으니 두 선생이 지은 「잡영」을 살펴보면 「무이잡영」의 12 수와 「도산잡영」 18절이 또한 절절이 서로 부합된다.
후계는 ‘무이’와 ‘도산’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무이’와 ‘도산’의 밀접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연관성을 공고히 한다. 주자가 강학을 하던 ‘무이’와 ‘도산’은 지리상 일만 여리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도 이미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두 곳은 상호 근친성을 확보하고 있다. 결국 후계는 양항숙의 말을 빌려 땅은 뛰어난 사람으로 인해 같아진다는 논리를 들어 반증해 보인 것이다. ‘무이’가 ‘주자’로 인해 그 절경이 천하에 회자되듯이, ‘도산’은 ‘퇴계’가 있기 때문에 무이와 같은 승경을 지닌 곳이 된다는 것이다. 「무이잡영」 12수과 「도산잡영」의 18절은 동일한 성리학 사유 의식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무이구곡’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도산의 ‘낙천’도 선유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이와 도산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주자가 은거구도했던 무이처럼 도산도 그러한 성리학 성지 공간으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후계는 서두에서 도산과 무이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두 곳은 성리학 유풍이 깃들고 철리적 사유가 구현되며 천인합일이 이루어진 신성한 지역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어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이에 한두 동지들과 물을 거슬러 오르며 굽이를 따라 노닐면서 강산의 승경을 토론하였다. 저 ‘영지산’과 ‘부용봉’이 구름 끝에 솟은 것은 ‘만정봉’과 ‘옥녀봉’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학소암’과 ‘갈선대’가 가파른 절벽에 임한 것은 ‘금계 동’과 ‘선장봉’과 매우 닮았으며, ‘동취병’과 ‘서취병’은 참으로 ‘대은병’과 같다. ‘청벽’과 ‘단사’는 그대로 ‘벽소’와 ‘도원’ 이다. 처음에는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들의 그윽하고 깊은 곳을 찾았는데, 끝에는 시내의 근원에서 별천지의 기이한 절경에 임하여 가득히 얻어 호연히 돌아오니 거리가 멀고 세월이 아득하다는 한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산천과 운물이 서로 닮았을 뿐만 아니라 천지 사이에 우리 도가 한 가지 기맥이 북에서 남으로 서로 관통하기 때문 이다. 이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구비에 따라 차운하여 구비마다 지난 일을 기록해두었으니 후일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다르지 않으며 지리상 멀지도 않은 곳임을 알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 했다. 또 도산지를 편찬하여 구곡의 승경을 실어 무이지와 짝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청량산의 복이 아닌가? 나 는 이로 인해 깊은 기대를 하고 있다.
후계는 동지들과 함께 ‘무이’와 ‘도산’의 산천 지리적 유사성에 착안하여 구곡의 위치 설정에 대해 토론을 했다. 도산의 ‘영지산’과 무이의 ‘망정봉’을 견주었다. 이어 도산의 ‘부용봉’과 무이의 ‘옥녀봉’을 비교했다. 이어 도산의 ‘학소암’을 무이의 ‘금계봉’에, 도산의 ‘갈선대’를 무이의 ‘선장봉’에 비교했다. 도산의 ‘동취병’과 ‘서취병’을 무이의 ‘대은병’에 비교하였다. 이는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도산서원이 ‘동취병’과 ‘서취병’에 위치한 것처럼 무이정사가 ‘대은병’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다. 퇴계가 학문을 강학하던 도산서원이 도산구곡의 제5곡에 있고, 주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대은병’이 무이구곡의 제5곡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 도산의 ‘청벽’을 무이의 ‘벽소’에, 도산의 ‘단사’를 무이의 ‘도원’에 비교하면서 도산의 지리적 특성이 무이의 지리적 특성과 상호 부합됨을 강조했다.
이어 도산의 ‘청량산’과 무이의 ‘무이산’은 짝을 이루고, 도산지와 무이지도 절묘한 대를 이룬다. 이로써 ‘무이’와 ‘도산’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퇴계의 학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유학의 정수가 온축된 성지로서 명실상부한 공간임이 확증된다고 했다. 이제 후계는 도산과 무이의 상호 부합성을 인지시키고 나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구곡 설정에 자신이 직접 나선다. ‘청량산’에서 ‘운암’까지 명승지를 충분히 관찰하고 「무이구곡」에 견주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음처럼 구곡을 설정한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가운데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하여 상하를 관할하며 하나 의 동천을 형성한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에 따라 나누면, ‘운암’이 제1곡, ‘비암’이 제2곡, ‘월천’이 제3곡, ‘분천’이 제4곡, ‘탁영담’이 제5곡에 있는데 여기에 도산서당이 있다. 제6곡은 ‘천사’, 제7곡은 ‘단사’, 제8곡은 ‘고산’, 제9곡은 ‘청량’이다.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과 음상이 미친 곳이다.
특히 후계는 자신이 직접 도산구곡의 위치를 추적하고 현장 답사를 거쳐 선조 퇴계의 유촉을 실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후계는 ‘시험 삼아 「무이구곡」의 설정 선례를 따라 「도산구곡」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했다. 「무이구곡」은 주자의 학문이 온축된 성지인 만큼 도산의 퇴계 유촉지에 한국 유학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후계의 구곡 설정은 일부 다르다. 후계는 2곡을 ‘비암’,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다. 오가산지에 의하면, 2곡을 ‘월천’, 3곡을 ‘오담’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이유는 후계의 의식 근저에는 「도산구곡」은 「무이구곡」의 지형과 유사성을 확보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후계는 주자의 학문 전통이 퇴계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듯이, 「무이구곡」의 지형과 「도산구곡」은 외형상 일체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래서 「무이구곡」의 2곡에 있는 여성 이미지의 ‘옥녀봉’을 닮은 바위가 「도산구곡」의 제2곡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굳이 ‘비암’을 2곡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도산구곡」 제3곡에도 「무이구곡」의 제3곡에 있는 ‘가학선’을 닮은 벼랑이나 바위가 존재해야 한다고 신념했기 때문에, ‘부용봉’이 있는 ‘월천’을 제3곡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후계는 「무이구곡」 제2곡 ‘옥녀봉’을 의식하면서 「도산구곡」 제2곡에서 ‘비암’을 두른 푸른 숲의 모습을 여인이 머리를 길게 닿은 것에 비유하여 정감이 있게 표현했다.
이런 정신은 실제 구곡시 창작 과정상 현장 답사 후 구곡의 실제 위치와 관련 인물 행적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구곡시를 지을 때 반드시 퇴계 시문 가운데 한 두 구를 인용하여 창작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는 ‘무이’와 ‘도산’을 비교하면서 상관관계를 시종일관 강조한 점을 유추해 볼 때, 후계 의식 저변에 「도산구곡」과 「무이구곡」의 지형성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이 2곡을 ‘비암’으로,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후계의 구곡 설정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학문 계술 의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을 이은 도산 지역 원림을 중심으로 한 도산구곡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 도산구곡 위치 고증을 위한 학술 조사, 「도산구곡陶山九曲」 연구, 「도산도陶山圖」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로써 도산구곡 연구도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개별 작가 및 작품의 심층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아울러 도산구곡 창작 배경과 작품 간의 상호 연관성을 면밀히 파악하여 전체를 조망하는 틀을 마련하는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도산구곡 문학의 통합적 연구 성과가 결집되어 고유한 구곡문화의 전승과 재창출 모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산구곡은 과거 역사 속의 화석 같은 공간으로 명맥만 이어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안동의 역사․문화와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고품격 문화로 재창출되어야 한다. 도산구곡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측면과 생태 환경적 기반과의 융합을 거쳐 도산구곡은 명품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낙동강 도산구곡 문학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산구곡에 대한 단계별 연구와 이를 통합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아울러 봉화를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봉화 구곡의 연구도 함께 진척되리라 전망한다. 그런 점에서 매헌의 「무이구곡도가차운시」는 퇴계 정신 지향 계승을 위한 선구적 업적으로 평과된다. 이 작품이 매헌 시문학 가운데서도 주목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4) 사우 교유와 선현 추모의 유가 의식
시문학에 투영된 매헌의 성리 미학 심미 의식은 사우 교유 활동과 선현 추모의 정서 표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매헌은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벗과의 친밀감은 잔잔한 정이 묻어나는 시편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모인 이들 모두 출중한 흥취 滿座軒軒趣
풍류 넘치는 선비들 많구나 風流幾彦駿
모두들 문주 모임 자긍하니 自多文酒會
신의가 한결 돋보이네 著却一端信
문주 모임에서 지은 것이다. 문관들이 모여 술 마시며 글짓기하는 모임인 문주회文酒會이다. 저마다 풍류와 낭만적 기질이 출중하다. 그런 가운데 신의가 돋보이는 이들의 모임이야말로 선비들의 단아한 모습이다. 모두들 이러한 모임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모임 자체가 결속을 다지고 신의를 존중하는 것인 만큼 나름의 자부심이 많았다. 이에 저마다 숨은 시문학 표현을 구가한다.
빼어난 선비들 모임 庠士斯文契
장차 정성을 기약하네 期將一副誠
일곱 편 백설시 읊고 七章吟白雪
모두 약속한 듯 정겹네 都是約中情
선비들과의 친밀한 유대는 이들의 사기 진작과 함께 도의 정신을 함양하였다. 모두 정성스러운 선비의 자질을 갖추고 학문에 정진하며 수신의 도리를 실천한다. 위의 ‘백설시’는 ‘백설사白雪詞’를 말한다. 이는 초나라의 ‘백설白雪’과 ‘양춘陽春’ 두 가곡 가운데 하나인 ‘백설사白雪詞’로서 뛰어난 시를 비유한다. 이 가곡은 매우 고상하여 화답하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이는 사마시 합격 모임에서도 동일하게 보인다.
사마시 합격한 좋은 모임 司馬諸高會
다시 그때처럼 기뻐하네 應知欣復古
재상 장수 모임 가진 뜻 相將修契義
참으로 말할 만 하네 誠信可堪道
종숙부 금원정의 사마회시에 공경하며 차운한 시이다. 금원정琴元貞(1472-1556)의 본관은 봉화이며 자는 정숙正叔, 호는 농수聾叟이다. 1501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사마시 합격 동문의 모임을 보면서 지은 작품이다. 모두 합격 당시처럼 기뻐하면서 즐긴다. 이제 모두 저마다 진로를 찾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니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매헌은 사우 교유를 통해 학문적인 권면과 수신의 도리를 확인하고 도의를 실천하였다. 이어지는 시를 보자.
일생 동안 곧게 사셨고 一生惟兀兀
백세의 나이에 선인되셨네 期耋是仙人
조물주가 다함없음 가졌으니 造物藏無盡
서로 기뻐하는 이유 있네 雙淸也自因
종숙부께서 일평생 곧게 사셨고 장수하며 은덕을 베풀었던 점을 회고하였다. 이에 조물주의 다함없는 진리를 깨닫고 그를 통해 생의 미학을 배우고 성리 이념을 다져가길 다짐하였다. ‘쌍청雙淸’은 두보杜甫의 시 가운데 “백발로 명아주 지팡이 짚으니 마음과 자취 모두 맑아져 기쁘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종숙부의 올곧은 인생철학과 선비의 지조 정신을 존경의 마음으로 그려내었다. 그로 인해 일가친척과 벗들이 기뻐하는 이유를 담아내었다. 그를 통해 매헌은 정신적 위안을 삼았고 학문적 스승으로 섬겼다는 내면의 심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제 교유 관계를 통한 이러한 의식을 탐색해 보기로 한다.
동해로 벼슬 살러 분천을 떠나 宦遊東海辭汾川
백사장 맑은 강엔 고운 달빛 남았네 沙白江淸月獨姸
백로는 약속 어긴다 서운해 말지니 鷗鷺莫嫌今背約
몇 년 뒤 만나도 예전 같으리니 他年相對亦依然
이 작품은 퇴계가 이문량李文樑(1498-1581)이 강원도 동해시에 있었던 평릉역찰방平陵道察訪으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여 이문량에게 다시 올린 시이다. 이문량의 자는 대성, 호는 벽오碧梧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퇴계와 교유했으며 평릉도찰방을 역임했다. 이문량이 벼슬에 나선 이후 분천에는 맑은 강물과 고운 달빛만 남아 주인이 오길 기다린다고 하였다. 백로와의 약속을 쉬이 저버리지 말기를 강조했다. 몇 년 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예전 그대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며 도의를 표현하였다. 이런 도의적 사귐은 동문들 사이에서도 돈독하게 표현된다.
어제 이산서원에서 작별하였더니 昨日伊山曾別處
오늘 아침 또 이별하는 정을 남기네 今朝又別總留情
이 가운데 슬픈 감정 누르기 어려우니 此中悲感尤難旣
그대와 나 그 언제 이 한을 삭히랴 君我何時恨卽平
이 당시 매헌은 이산서원에 퇴계의 위판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파사에서 묵으면서 애잔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스승과 사별한 아픔과 이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는 애석한 마음 등 복합적인 감정의 교차로 인해 슬픈 마음을 내내 주체할 수 없었다. 파사에서 묵었다가 벗들과 헤어지며 지은 작품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같은 스승 아래서 함께 공부했던 동지요 학문적인 벗과의 교유 활동이다. 이제 서로 헤어지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겹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한 회포를 서술하면서 도의 연마와 학문 정진을 다짐했다. 벗과의 관계성에서도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였다.
오천이나 온혜나 烏川唯樹谷
모두 봉호 별천지라오 俱是別蓬壺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去地無相遠
지혜롭고 어리석음 논하지 마시길 休論智與愚
김돈서에게 지어준 시이다. 수곡은 온계에 있다. 돈서의 시에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현격하다고 하며 스스로 겸손해 하였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봉호蓬壺’는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동해의 삼신산 가운데 하나인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을 말한다. 상대방과 자신은 신선이 산다는 ‘봉호산’과 ‘방장산’ 선비로 지조와 신념을 지녔다고 자부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살지만 신의와 도의를 잊지 말고 친밀하고 우정 있게 지내길 당부하였다. 서로 존중하고 도의를 숭상하자는 넉넉한 마음이 담겼다. 다음은 스승의 과거 합격 기록을 보고 추모의 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등과한 이 쉰 분이었지만 登科已五十
별세하신 분 세른 분일세 仙去逾三十
십 구년 전의 일 떠올리니 十九年前事
갑자기 탄식나오며 슬프지네 瞥然吁可悒
매헌은 병오년(1546)에 스승의 등과를 기록한 사마방목을 보았다. 등과한 분들이 50명이었지만 현재 세상을 떠난 이가 33명이라고 하며 슬퍼했다. 19년 전 시절을 회상하니 탄식과 함께 슬픈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농암의 유촉지 애일당을 찾아가 다음처럼 추모 서정을 표현했다.
고운 나무에 새가 모여들고 禽尋佳木集
아름다운 바람은 꽃을 피우네 風送好花來
경치 대하니 문득 감회가 일어 對景還成感
빈 집에 옛 길은 그대로일세 堂虛古徑開
오랜 만에 찾아온 애일당의 정경과 서정을 결부한 작품이다. 곱게 자란 나무에 새가 찾아들고 살랑대는 바람은 절로 꽃을 피운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니 감회가 일어나고 옛 길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 채 길손을 맞아준다. 주인이 떠난 집에 덩그런 집과 길만 남아 시인을 맞아준다. 농암 이현보를 추모하며 농암의 충절과 효성 정신을 반추하면서 회고 정념을 살려내었다. 역동이 살던 곳을 방문하고 지은 작품이다.
지팡이 짚고 옛 현인 살던 곳 찾아오니 散策遺墟訪昔賢
넓은 들판에 숲과 낙동강 아름답네 平疇無限好林泉
풍도와 절개가 당대에 탁월하지 않았다면 若非風節超當世
백대토록 그 누가 공경 일으키랴 百代何人起敬焉
여러 벗과 함께 현감 정유일과 약속을 하고 천남川南에 모였다. 역동이 살던 곳을 방문하고 고암으로 가서 흠뻑 취해 이 시를 지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역동이 살던 집을 방문하였다. 넓은 부포 들판에 숲이 무성하고 낙동강은 유유히 흘러간다. 산천은 예전 그대로이지만 그리운 분은 떠나고 없다. 들판의 푸른 숲은 역동의 절의 정신이 만고에 푸를 것을 상징하며 쉼 없이 흘러가는 낙동강의 흐름 역시 역동의 강직하고 고결한 선비 정신이 유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고 이후에도 그렇게 전승되길 염원하는 의지가 담겼다. 역동의 풍도와 절개가 탁월했던 탓에 당대는 물론 미래에도 공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고 강조했다. 역동의 선비 정신을 극찬하며 후세에까지 그처럼 올곧은 정신 지향이 영속되길 다짐하였다. 선현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 지향을 사모하고 그러한 정신 지향이 만개하고 영속되어 선비 정신이 구현되기를 다짐하는 의지도 반영하였다.
선생의 풍절은 고려 때 으뜸이었으니 先生風節振麗宗
도의와 경서가 내면에 충만하였네 道義經書滿腹中
당시에 학문 연찬하던 곳 추억하니 想得當年參究處
용문의 심사와 이처럼 같구나 龍門心事倘相同
역동의 충성과 절의 정신은 고려조에 가장 으뜸이었다고 칭송하며 내면에 ‘도의’와 ‘경서’가 충만했다고 하였다. ‘용문龍門’은 ‘명성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역동이 빼어난 선비 정신을 갖추어 학문을 연찬하던 곳을 방문하니 새삼 그러한 정신 기맥을 이어가고픈 강한 충동을 느꼈다. 매헌의 이러한 선현 추모 정서는 송재와 퇴계의 유촉지 탐방에서도 여실히 파악된다.
총각 때 모시고 찾아온 곳 總角陪遊地
시 읊던 혼 떠나고 돌아오질 않네 吟魂去不回
돌 위 여전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惟餘溪響石
다시 찾아 온 날 위로해 주는 듯 似欲慰重來
언덕에 큰 반석만 남아 坡陀巨石在
그윽한 개울 감돌아 흐르네 窈窕一溪回
산 꽃 피길 기다려야 하는데 更待山花發
꽃 피기 이른 지금 찾아 왔네 吾今較早來
이 시를 지은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온계 하류에 반석이 있다. 예전 신미년(1511)에 강원도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송재松齋 선생 우堣가 이곳 바위 위에서 놀며 지은 시가 있다. 정미년(1547) 늦봄에 퇴계 선생이 이곳을 유람하며 예전 일을 추억하여 송재 선생 시의 ‘맑은 읊조림이 도리어 흥을 깨다[淸吟還敗意]’에서 의미를 취해 ‘청음석淸吟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시의 운을 사용하여 절구 두 수를 지은 적이 있다. 이에 절구 네 수를 지어 퇴계에게 올렸던 것이다. 총각 시절에 스승 퇴계를 모시고 유람을 하면서 즐겼던 곳을 찾아오니 스승의 자취는 없고 돌 위에는 여전히 개울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예전에 들었던 그 개울물 소리가 스승을 뵐 수 없는 아쉬움에 가득한 시인을 위로해 주고 있다. 언덕에는 그 옛날 송재가 찾아 와서 시를 남기고 스승 퇴계가 시를 남겼던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는 흔적만 남았다. 그윽한 개울물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두 분을 추억하게 하는 시간 여행을 이어준다. 반석은 송재와 퇴계의 굳건한 정신 기맥을 상징하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아직 꽃이 피기에는 때 이른 시간이었다. 매헌은 꽃이 피기 전에 그 유촉지를 찾고픈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선현과 스승을 추모하는 심정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이다. 문득 그곳에서 스승의 나막신 소리를 듣는 환청을 느끼게 된다.
봄 흥취 다 찾지 못해 不盡尋春興
혼자 다시 찾아와 거듭 시 읊네 重臨獨詠回
먼 곳 나막신 울리는 듯하니 遙知鳴屐意
어디선가 걸어오시는 듯하네 何許步歸來
봄 흥취를 다 누리지 못해 스승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유촉지를 탐방하였다. 홀로 조용히 찾아와 거듭해 시를 읊는다. 시냇물 소리와 산새 울음소리도 귓가를 스친다. 고운 풀잎도 이름다운 서정을 발산케 하고 시야를 즐겁게 한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친 정을 억누르지 못해 마음이 허전하고 그리움으로 가득 찰 무렵, 어디선가 멀리 스승께서 걸어오는 소리를 환청을 듣게 되었다. 지나친 그리움과 사모의 정념 탓에 이러한 현상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스승 퇴계에 대한 매헌의 추모 정서가 이처럼 강렬했다. 이런 퇴계 추모 정서는 추존 의식으로 편폭을 늘여 표현된다.
5) 퇴계 추존 의식
퇴계를 곁에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매헌의 퇴계 추존 의식은 남달랐다. 그는 퇴계가 애호했던 매화를 가까이하며 즐겼다. 특히 그의 호를 ‘매헌’이라고 한 것 역시 그러한 의식의 반영이다. 퇴계를 존모했던 매헌은 퇴계처럼 매화를 사랑하며 매화처럼 고결했던 퇴계에 대한 추존 의식을 담아내었다.
고산의 학과 매화에게 묻나니 爲問孤山之鶴梅
서호와 낙동강 어디가 더 아름다울까 西湖東洛孰勝否
노스승께서 절벽에 남긴 시를 보건대 請看老師題壁詩
아름다운 명성 더욱 유구해 지리라 也應佳名更悠久 細註
매화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굳센 기상과 맑은 향기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매화는 청렴과 절개를 상징하며 나무가 늙고 파리한 것에서도 신선의 풍격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꽃 가운데 이른 봄에 피기에 ‘화형花兄’․‘화괴花魁’라고도 불린다. 또한 맑고 아름다운 자태 때문에 ‘살결이 맑고 깨끗한 미인’이라는 의미의 ‘빙기옥설氷肌玉屑’이라고도 한다. 북송北宋 때 은자였던 임포林逋(967-1028)는 시서詩書에 능했지만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20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임포는 아내와 자식 대신 매화와 학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렸다. 매헌은 이러한 시 작품 배경을 근거로 해서 퇴계 추존 의식을 표현했다.
경신년 4월에 사경士敬 조목士敬․신중愼仲 김부의金富儀․문원聞遠 금난수琴蘭秀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고산을 유람하면서 퇴계가 석벽에 남긴 시에 차운한 시이다. 매헌은 매화를 즐겼던 임포와 퇴계를 비유하여 상징적 의미를 전하고자 했다. 임포가 은거했던 고산의 학과 매화에게 ‘서호와 ’낙동강‘ 두 곳 가운데 어디가 더 아름다운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에는 ’서호‘보다 ’낙동강‘이 더 섬세하게 아름답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이 역시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이 번영된 것이라 하겠다. 매헌은 퇴계와 함께한 유람에 더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임포가 그랬던 것처럼 매화를 즐기는 스승을 모시고 임포의 은거지와 동일한 지명인 고산에서 서호와 낙동강을 견주면서 도산 산수 우월 정신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스승께서 남긴 시가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갈 것을 확신하였다. 매헌의 퇴계 추존 의식은 ‘매화 사랑’과 ‘청량산 애호 정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매헌은 화재를 당해 보물 이상 소중히 간직했던 퇴계의 유묵을 소실하고 나서 한없는 슬픔을 탄식하였다.
정성 다해 필적 대하니 스승 뵙는 듯하고 盥薇對筆德容臨
열 겹으로 싸 간직하니 옥구슬 안은 심정일세 十襲珍藏控璧心
어인 일로 불기의 가혹함이 이러한가 底事鬱攸猜戱劇
스승 잃은 슬픔을 더욱 깊게 한다네 樑摧哀臆轉增深
매헌은 신미년(1571) 2월에 구성으로 출타를 했다가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했다. 51세(1571) 2월에 구성龜城으로 출타했다가 귀가하기도 전에 집에 화재가 났다. 서실에 소장해 둔 퇴계의 수필手筆․잠명箴銘․간찰簡札과 매헌의 차록箚錄 등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는데 「경재잠도敬齋箴圖」와 「사서질의四書質疑」는 화재를 면했다. 매헌은 “나의 글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돌아가신 스승의 보배로운 유묵遺墨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다시 구할 수 있을까?”라고 하며 통곡하였다. 뒤에 이 당시 감회를 시로 남겼다. 스승 퇴계의 수필․잠명․간찰 및 써둔 여러 종류의 책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오직 사서질의와 「경재잠」만 겨우 재액을 면했다. 그러한 슬픔을 시에 담았다. 매헌은 망연자실했다. 화마 속에서 남은 「경재잠」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려고 하니 옥구슬을 안은 것 같다고 하였다. 화마의 혹독함은 매헌을 참담하게 하였다. 스승을 여의고 슬프고 허전한 마음으로 지내는 터에 불의 화액을 당해 퇴계의 친필 유묵이 잿더미로 변하여 스승을 잃은 슬픔을 더욱 혹독케 했다. 이처럼 매헌은 평소 스승 사후 편달을 받았던 점을 회상하며 존모 의식을 표현했다.
외람되이 노둔한 재주에 편달을 받아 猥將駑質荷鞭加
문로에서 결국 바름과 사특함 변증케 하셨네 門路從敎卞正邪
제향 올리며 오는 길 감회가 많고 薦豆歸來多少感
산속 깊은 밤 등잔불도 꺼졌네 山窓深夜落燈花
이산서원에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파사에서 묵으며 애절한 추모의 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산서원에 퇴계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봉원․이굉중․김융․장근 등과 파사에 묵으면서 각자 슬픈 감회를 서술하였다. 매헌은 스승으로부터 편달 받았던 점을 상기하면서 그로부터 ‘바름’과 ‘사특함’을 변증케 되었다며 감사해 하였다. 스승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를 올리며 추모의 정을 올렸다. 문도와 함께 파사에 묵으면서 여러 가지 감회가 우러나오는 것을 멈출 길 없었다. 밤이 깊도록 잠을 청하지 못한 시인은 갖가지 상념이 일어났다. 등잔 불 꺼지고 모두 잠든 밤이지만 그는 홀로 밤을 지새우며 스승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이런 심지는 스승의 가르침을 매진할 것을 강조하면서 극복된다.
춘풍 같은 스승을 모신 지 몇 해였던가 春風座下幾年迴
이 날 문하생들 모두 백발 재촉하네 此日門生白髮催
둔재인 나는 진보가 이렇게 늦고 噫我駑才難進步
그대들 용맹히 전진하여 머뭇거리지 말라 須君勇邁莫徘徊
이산서원에 퇴게의 위판을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봉원․이굉중․김륭․장근 등과 파사에 묵으면서 저마다 슬픈 감회를 표현하였다. 매헌은 춘풍처럼 온화한 성품의 스승을 모시고 자상한 가르침을 받았던 지난날을 회고하였다. 문하생들은 이미 백발의 나이를 먹고 말았다. 스승께서 당부하신 가르침을 잊지 말고 실천궁행하기를 권고한다. 자신은 재주가 노둔하여 성취가 느리지만 동료들은 더욱 분발하여 용맹하게 전진해 나가라고 당부하였다. 이는 도산서원 공사를 감독하면서 함께 공력을 기울인 이들을 격려하면서 지은 시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도에 뜻 둬도 방 안을 엿보긴 어려웠고 志道難窺室
문장 공부해도 진수 맛보지 못하였네 攻文未嚼英
결국 사공도의 분수를 헤아려 알았으니 終知圖揣分
처음부터 어찌 곽문처럼 무정해서이랴 初豈郭無情
다행히도 우리 고을에 선비들 많아 幸賴邦多士
의리로 명성 돌아보길 기약하네 相期義顧名
은둔해 수신하는 곳 얻었으니 藏修嬴得地
어짊과 영화로움을 힘쓸지니 盍亦勵仁榮
도산서원의 공사를 감독하는 여가에 여러 선비들에게 보여준 시이다. 47세(1567) 봄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했으며 「역동서원창건록易東書院創建錄」을 썼다. 퇴계는 역동 우탁이 「주역周易」을 조선으로 가져온 공을 인정하여 구담龜潭 가에 역동서원을 세웠다. 매헌은 재산을 출연出捐하여 서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다. 이밖에 향교鄕校를 중수重修할 때에도 퇴계에게 여쭈어 ‘약조約條’를 찬정撰定했다. 또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건할 때에도 시종일관 감독을 하되 풍우를 가리지 않고 힘을 쏟았다. 매헌이 사문斯文을 위해 주력한 것이 이와 같았다. 안동 고을 선비들의 의리를 숭상하는 좋은 풍습을 칭송하였다.
사공도司空圖가 중조산中條山에 머물면서 삼휴정三休亭을 지었다. 그 이름을 짓게 된 연유는 첫째 마땅히 쉬어야 하며, 둘째로 분수를 헤아려 보니 마땅히 쉬어야 하고, 셋째 늙고 귀가 먹었으니 마땅히 쉬어야 한다고 했다. 온교溫嶠가 곽문郭文에게 “배고프면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장성하여서는 아내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선성께서만 유독 감정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곽문이 대답하기를, “감정은 생각을 거쳐서 나오는데, 나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감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자를 짓고 삼 도산서원이 완성되면 이곳에서 선비들이 수신하며 어질고 영화롭게 되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수신과 도덕 연마의 도장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룰 것을 희망했다. 이러한 문면에 수신과 정심을 추구하는 매헌의 성리 미학이 담겨있다.
6) 수신과 정심의 미학
위에서 정리한 퇴계 추존 의식은 단순 존모 이상 스승의 정신 지향과 학문 정신을 이어 참된 선비의 길을 모색하며 실천하는 정심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곧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계술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헌 나름의 생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한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지 살펴보기로 한다. 회고 정서를 집약한 작품이다.
강 비껴 흐르는 옛 제왕의 성터 控帶橫流古帝城
옛 사적 찾으려니 개암나무 가시밭 우거졌네 欲尋舊事半榛荊
육조의 산 빛의 그 모습 그대로이나 六朝山色顔猶在
천겁 세월 강물 소리에 한이 담겼네 千怯江聲恨未平
요새였던 구렁에 넝쿨이 우거졌고 設險丘陵生蔓草
성을 둘렀던 뽕나무 새 경작지에 이어졌네 遶闉桑柘接新耕
십년 만에 다시 와도 물어볼 이 없고 十年重到無人問
홀로 동풍 맞으며 서있으니 슬퍼지네 獨立東風一愴情
신라 천 년의 수도인 경주를 탐방했다. 천 년의 사적은 개암나무와 가시나무로 우거져 있다. 산천은 그 옛날 그대로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흐르는 강물에 한이 담겼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영사회고 계열이지만 회고 정서가 집약되어 있다. 요새였던 구렁에는 넝쿨이 우거졌고 성을 둘렀던 곳은 새로운 경작지가 형성되어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십년 만에 다시 찾아왔지만 동풍 맞으며 홀로 서 있으니 서글퍼진다. 이러한 회고 정서는 개인 신세를 한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 명리 부질없어 서글프고 名場悲濩落
자연 속 초가집에서 지내네 泉石守茅茨
술 마시는 건 흥 즐김이 아니니 佩酒非耽興
숨긴 내 마음 그 누가 알리 逸懷有孰知
세상 명리를 초월하고 자연 정취를 만끽하며 오두막에서 지내는 멋스러움을 표현해 내었다. 하지만 매헌에게도 드러내지 못한 내밀한 고심이 있음을 문면에 살짝 드러내었다. 진솔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흥을 탐내서가 아니라 번뇌를 이겨내고픈 한 방편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과정은 있기 마련이다. 매헌 나름 경세의 꿈도 가졌다. 하지만 ‘을사사화’라는 사화의 여파가 늘 그를 불안케 했고 ‘출처대의’에 대한 결단을 촉구했다. 결국 그는 스승 퇴계의 출처대의 명분을 따라 낙향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입신출세에 대한 미련 정도의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오늘 따라 그러한 내면의 정서가 감출 길 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것은 아니다. 매헌은 이를 정제된 선비의 품격 유지로 극복해 나간다.
주석에서 오건을 거꾸로 쓰고 酒席烏巾倒
꽃동산에서 호접몽 꾸네 花園蝶夢中
평생 기구한 일 절반인데 百年奇事半
오늘 흥이 제대로 익었다네 今日興堪濃
주석에서 오건을 거꾸로 쓸 정도로 만취해 보았다.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호접몽을 꾸기도 한다. 평생 내력을 회고하니 기구한 생애가 절반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깊이 잠재된 회한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매헌은 감정을 절제하여 그것을 삭히며 흥취 표출로 치환하면서 반전을 시도했다. 품격 있는 선비로서 감정을 조절하고 격조 높은 흥취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내적 고민과 갈등을 풀어가는 극복 대안을 찾아낸다.
풍상 속에 송국은 절조 지키고 松菊風霜節操臨
책 속에 옛 성현의 마음 남아있네 書存千古聖賢心
노쇠한 선비에게 무엇이 남았으랴만 頹然一士中何有
머릿결에 세월이 찾아옴 느끼네 惟覺頭邊歲月尋
풍상 가운데 소나무와 국화는 절조를 지킨다고 전제했다. 이 역시 퇴계의 올곧은 정신 지향을 상징한다. 온갖 세파 속에서도 꿋꿋한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선비 형상과 다름 아니다. 스승이 떠나고 그가 남긴 사상과 학문 정신이 스승이 남긴 책 속에 오롯이 남겨져 있다. 스승이 남긴 유훈을 되새기며 바르고 곧은 선비의 도리를 찾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후학으로 마땅히 행할 것임을 알기에 그 길을 쉼 없이 모색하는 것이 바로 매헌이 정심을 지향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가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아쉬움도 남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매헌의 내면에 잠재된 성리 이념 지향은 명리를 초극하고 사념을 제어해 간다는 의지 표명을 통해 해소된다.
석양에 산의 노을 술잔에 어리고 晩峯霞影酒杯臨
오늘은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네 傾倒懽呼此日心
분분한 세상 일 말해 무엇하리 世事紛紛何足道
저녁 구름 사라지고 천 길 푸르네 暮雲歸盡碧千尋
풍류 정취의 서정과 성리 철학 사유가 물씬 풍긴다. 석양 무렵 산의 노을이 술잔에 담겼고 기쁨에 충일하여 즐거워한다. 분분한 세상을 탓할 필요도 없다.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대하니 산을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고 천 길이나 푸른 산이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 역시 성리 미학 사유가 반영된 시이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가로 놓였던 구름이 제거되니 자연과 사람의 만남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내밀한 관계를 담았다. 그래서 명리를 초월한 정심을 통해 광풍제월을 염원하였다.
높은 하늘 구름 걷혀 우주가 열려 長天雲捲玉函開
앞마을에서 사온 술에 달이 가득 담겼네 沽酒前村月滿杯
오래 힘겹게 지낸 세월 우습고 堪笑浮生長役役
셀 수 없는 가을 회포 떨친 듯 하네 秋懷千斛若爲裁
높은 하늘 구름이 걷혀 공활한 우주가 펼쳐진다. 구름이 걷힌 청아한 하늘은 인욕이 제거되고 정화된 광풍제월의 성리 미학 사상을 함축 반영한 것이다. 그와 함께 매헌 특유의 낭만 정신이 가득 담겼다. 앞마을에서 사온 술잔에 휘영청 밝은 달이 담겼다. 그래서 오래 힘겹게 지냈던 지난 세월의 정회가 도리어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가을을 맞은 회포도 떨쳐내 버린 듯 홀가분하다. 그의 내면에 지녔던 묵은 감정이 모두 해소되고 내적 희열이 충만한 정경을 그려내었다. 매헌이 이렇게 내적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부단 없이 수신하며 정심을 추구했던 데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매헌의 성리 미의식이 집약된 작품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성이 일어나면 온갖 거짓 사라지고 一誠動處消千僞
경에 거하면 모든 사특함 이긴다네 一敬居時勝百邪
성경 공부는 반드시 병행해야 하니 誠敬工夫須兩做
어질고 정성됨을 다른 데서 구하랴 爲賢爲誠豈求他
성이 일어나면 온갖 거짓이 사라지고 경어 거하면 모든 사특함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다. 성과 경의 공부는 병행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으며 정심공부는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언명하였다. 매헌의 정심과 수신 철학 이념이 집약된 작품이다. ‘성’과 ‘경’ 유의미한 작용을 강조하였다. ‘성’과 ‘경’으로 ‘위선’과 ‘사특함’을 극복해 나간다고 신념하면서 이를 과단히 실천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성’과 ‘경’의 공부를 병행해서 실천하면 모든 잡념과 사욕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자신의 수양 방식은 퇴계의 ‘거경궁리’를 답습해서 실천한 것이다.
7) 「진정부」에 반영된 회고 정서와 유가 이념 지향성
위의 시 검토를 통해 매헌의 자연 애호 정서와 퇴계 추존 의식 계술 지향과 그 근저에 자리한 수신과 정심의 성리 미학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의식이 종합 정리된 작품이 「진정부」이다. 이 작품에 매헌의 생애 반추에 따른 회고 정서 및 성리 이념 지향 의식이 종합되어 있다. 이 역시 위에서 검토한 내용과 유기적이다. 분절해서 정리한다.
아! 받은 명이 기구하고 천박하나 嗟賦命之奇薄
살아 온 지 어언 51년이 되었네 歷歲元兮五十一
젊어서부터 남다른 명성이 없었고 自少壯而無異聞
속절없이 늙어서 질병만 안고 있네 空潦倒而抱疾
학해를 바라보니 하늘 오름과 같아 望學海有若登天
재주와 식견이 용렬함을 부끄러워하네 愧才鈍而識劣
반평생을 돌아보면서 기구한 생에 대한 한탄을 털어놓았다. 젊어서 남다른 명성을 얻은 것도 없고 부질없이 질병만 껴안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학문을 한다고 했지만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학해學海’는 ‘학문의 길이 한없는 바다같이 넓음’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수많은 냇물은 바다를 배워 바다에 이르지만 구릉은 산을 배우되 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데서 연유한다. 매헌의 겸손이 묻어나는 표현으로 회고의 성격을 담고 있다. 51년 생애를 회고하면서 가없는 학문의 경지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였다.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여 도리어 부끄럽다고 하면서 겸손의 표현을 하였다.
병오년 봄 소과 선발에 입격하여 屬丙午之春選
외람되이 200명 중에 참여하였네 試叨參於二百
5년 동안 성균관에서 국록 먹으며 歲周五兮竊廩
취우하며 함께 함을 부끄러워하였네 混吹芋兮赬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 늙음을 생각하니 念家貧而親老
따뜻하고 배부름에 어찌 무관하랴 縱溫飽兮何關
병오년 봄에 소과에 급제하여 200명 가운데 선발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소과 입격 인원은 생원시에 100명, 진사시에 100명을 선발하였다. 매헌은 31세에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시대의 어수선한 것을 간파하고 35세에 벼슬길에 나서는 마음을 접고 귀향했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성균관에서 국록을 먹으며 학문을 연마했던 시절을 회상하였다. 성균관 유학 시절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며 한때 대과를 거쳐 정도양양하기를 기대했던 심리도 반영되어 있다. 그가 굳이 과거에 임하려했던 의도도 비쳤다. ‘취우’는 ‘자격도 없는 사람이 관리들 틈에 섞여 지냈음’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수백 명의 악공樂工을 모집했는데 남곽처사南郭處士는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그들 틈에 섞여 지내며 대접을 받았다.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한 뒤에 악공 한 사람씩 나와서 악기를 연주하게 하자 남곽처사는 도망을 치고 말았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 늙음에 효도할 방안으로 대과를 통해 입신양명하기를 희망했다. 매헌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솔직한 내면의 반영이라 하겠다. 입신출세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픈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직면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러나 스스로 내 몸을 살피니 退自省夫吾身
농사에 묻히는 것 만한 것이 없네 曷若投分於農畝
홀로 따로 떨어져 무리 짓지 않고 判獨離兮不群
밤낮 두려워하며 허물을 없애리라 日夕惕而無咎
골몰한 내가 미치지 못할 것 같으니 汨余若將不及
겨우 저장하여 겨울을 대비하여야 겠네 聊可旨蓄而御冬
하지만 혼란한 세파는 그의 진출을 거부하게 하였다. 사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보존하며 수신하며 학문 수양에 전념하기로 다짐했다고 술회하였다. 46세(1566) 때였다. 읍재邑宰 곽황郭趪이 매헌의 학문이 박학다문博學多聞한 점을 감안하고 향의鄕議를 따라 조정에 추천하려고 하자 매헌을 서찰을 보내 만류하면서 “저는 어려서부터 어버이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염려스러운데 어찌 명예를 탐해 벼슬 구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저마다 마땅히 행할 바를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애당초 벼슬을 구하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고 성리학 공부를 위해 학문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월천 조목도 매헌의 굳은 심지를 칭찬하며 장려했다. 매헌의 이러한 올곧은 성품과 출처대의에 분명한 성품은 부친을 닮았다. 부친이 어렸을 때 부친의 진로를 위해 권요자權要者를 소개해 주려는 자가 있었는데 부친은 “실천궁행實踐躬行 없이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는 것은 제가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라며 사양했다. 자신을 바로 잡고 흐트러짐이 없게 매사 근신하며 수신을 다짐했다. 거경과 실천궁행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맛있는 채소를 저장하여 겨울을 대비하듯이,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에 “내가 맛있는 채소를 저장하는 것은 또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함일세.”라는 데 근거한다. 혼란한 시대에 단정한 선비로 살아가기 위해 튼실한 내적인 수양이 관건임을 강조하였다. 종일토록 자신의 몸을 살펴 수신에 정진하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힘을 기울이면 허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 겨울을 나기 위해 김장 채소를 준비하듯 수신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연이은 시련은 더욱 그를 상심케 한다.
일찍부터 어버이 떠나 스승을 따라서 蚤辭親而從師
자식의 도리 못한 것이 개탄스럽네 慨子職之未供
어찌하여 풍수의 탄식 멈추지 않아 何風樹之不止
참혹하게도 호시께서 연이어 돌아가셨네 慘怙恃之繼禍
통곡하며 부르짖어도 어쩔 수 없고 痛號踊而無逮
스스로 죽으려 하여도 하지 못하였네 欲自滅又不果
세상 일이 못난 나에게 부여되어 付世故於葑菲
향화를 영원히 받들기로 기약하였네 期永奉乎春秋
원문(缺)
일찍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 스승을 따라 학문을 익히느라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점을 죄송해 하였다. ‘풍수의 탄식’은 ‘풍수지탄風樹之嘆’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길을 가고 있는데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고어는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니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다. ‘호시’는 ‘부모’를 말한다. 시경詩經에 “아버지 아니시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 아니시면 누구를 믿을까?”라는 데 근거한다. ‘봉비葑菲’는 ‘썩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취할 것이 없음’을 비유한다. 시경에 “순무를 캐고 순무를 뜯네. 뿌리 때문만은 아니라네.”라는 데 근거한다. 두 분께서 연이어 별세하여 자식으로 도리를 못한 게 낸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너무 애통하여 목숨을 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하였다. 어버이에게 다하지 못한 효심을 애석해 하면서 신세가 궁박한 것을 한하였다. 이어지는 작품에서는 내외적인 시련이 연속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아! 슬퍼라 嗚呼噫嘻
질박한 도가 이미 흩어지고 나니 大樸已散
순박한 풍속 사라져 버렸네 淳風不復
인정은 반복하여 무상하고 人情兮飜覆
세도는 어지럽고 각박하네 世道兮淆薄
생명이 있으면 욕심이 있나니 覽生之有欲
그 욕심 부귀와 안일함에 있네 在富貴與安佚
그 누가 부귀 사양하고 가난할 것이며 孰謝富而居貧
재물 앞에 욕심을 끊어내리 孰臨財而截欲
고인 물이 쉽게 마름을 잊어버리고 忘潦深之易渴
어리석게도 이곳에 엎드려 있네 昧倚伏之在是
부과된 세상 일이 인해 부담을 느낀다. 게다가 도의가 실추되고 순박한 풍속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인정은 찾아보기 어렵고 세도는 날이 갈수록 각박해졌다. 생명을 가진 이는 저마다 욕심을 부리고 부귀와 안일을 추구한다. 때문에 부귀를 마다하고 빈궁을 자처할 이가 없는 것이다. 재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고인 물이 이내 마르지만 거기에 의지해 있는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인들이 작은 이익에 연연하면서 각박한 인정세태를 형성해 가는 것에 대ㅙ 분개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개아적 반성으로 이어진다.
원헌의 가난을 지키고자 함이여 欲守原憲之貧兮
안자만큼 즐겁지 못해 부끄럽네 愧所樂不如顔子
옛 사람을 흉내 낼 줄 알았지만 惟知效顰於古人
군자의 지학에는 이르지 못하였네 未達君子之志學
번수가 농사일 배운 것 뒤따르고 踵樊須之學稼
자공이 재물 늘인 것을 모방하니 倣子貢之貨殖
염구처럼 부를 도운 것이 아니라 非冉求之爲富
그저 가난 대비하여 급할 때 구제함이네 聊備荒而救急
만약 석서가 야유하여 지붕을 뚫는다면 若有碩鼠揶揄而穿屋
어느 한 사내가 감히 구휼하랴 孰一夫之敢恤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인 원헌原憲의 자는 자사子思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 제자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이 원헌이었다고 한다. 원헌의 집은 아주 작았고, 생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하였다. 또 쑥으로 얽어 만든 문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뽕나무로 지도리를 만들었으며, 깨진 항아리로 들창을 낸 방이 둘이 있었으나 누더기 갈옷으로 창을 막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이재에 밝았던 자공子貢이 원헌을 찾았다. 원헌은 가죽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쓰고, 뒤꿈치가 떨어진 신발을 신은 채 명아주나무 지팡이를 짚고 문에 나가 그를 마중했다. 원헌의 행색을 보고 자공은 느닷없이 "선생은 어찌 이렇게 병이 들었습니까?" 라고 나무라듯이 말했다. 병이 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궁색하게 살고 있는냐는 말투였다. 이 말에 원헌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들어 알기로는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이 든 것이 아닙니다.” 자공이 머뭇머뭇 부끄러운 기색을 짓자, 원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대저 세상의 평판이 좋기를 바라면서 행동하고, 끼리끼리 작당을 하여 벗이 되며, 학문은 남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서 하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의 이익만 좇으며, 인의를 빙자하여 악한 짓을 일삼고, 수레나 말이나 장식하는 짓은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자공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원헌의 가난은 결코 병이 아니었다. 그의 가난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으며, 병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자공보다도 더 튼튼한 지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상과 꿈을 안고 한두 해를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과 손해는 누구보다 셈이 빨랐지만 그 명석한 머리로도 자공은 원헌의 가난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헌처럼 빈궁에 처해 지내고 안자처럼 안빈낙도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고 했다. 다만 그들의 흉내를 낼 정도라고 하며 군자처럼 학문에 뜻을 두지 못했다고 겸손한 표현을 하였다. 번수가 농사를 배우고 자공이 재물을 늘였던 것을 시도했다고 술회하였다. 염구처럼 남을 부하게 도운 것도 없다며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제자 안회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그 도를 바꾸지 않고 즐거워했던 행적을 따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는 논어에서 “누추한 거리에 지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라고 한 데서 근거한다. 번수樊須는 공자의 제자인 번지樊遲의 이름이다. 이는 논어에서 번지가 농사일을 배울 것을 청했다. 공자는 “소인이로다! 번수여! 어찌 농사짓는 일을 힘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한 데 근거한다. 자공子貢은 공자의 제자로서 성은 단목端木이며 이름은 사 賜이다. 이는 “자공은 천명을 받지 않고도 재물을 늘였으나 억측하면 자주 들어맞는다.”라고 한데 근거한다. 염구가 그의 모친을 위해 곡식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공자는 “군자는 곤궁한 이를 보살피고 부유한 이에게 계속 대주지 않는다.”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석서鼫鼠’는 ‘폭정’을 말한다. 이는 시경에서 “큰 쥐야, 큰 쥐야! 우리 기장을 먹지 말렴. 삼년 동안 날 괴롭히고도 날 봐주지 않는구나!”라고 한 데 근거한다. 다양한 경전을 원용하면서 원헌처럼 가난에 처하지도 못했고 안연처럼 안빈낙도의 생활도 실천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학문에 전면적인 열정을 바친 것도 아니라면서 자신을 회고하는 정서를 담았다. 험난한 세파 속에서 안주하지 못하는 서정 자아의 면모가 담겼다. 이제 이에 대한 탈출구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旁有一人
거듭거듭 날 꾸짖으며 말하네 申申其詈余曰
“어딘들 유독 방초가 없겠는가? 何所獨無芳草
자네는 어찌하여 가난하게 지내는가? 爾胡爲乎窘步
접역 전 지역을 살펴보면 洞相觀乎鰈域
살 만한 곳이 허다하네 有可居者幾許
골짜기에서 고반의 즐거움 읊고 澗谷詠考槃之樂
형문에는 느긋이 머물 곳이 있다네 衡門有棲遲之處
자내가 참으로 가서 머문다면 子苟往而居之
또 장소 없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又不患其無所
일찍 도모하여 농장으로 물러가지 않는가? 何不蚤圖而退莊
참으로 감탄스럽고 괴이한 일일세 誠可歎而可怪
아! 도도한 세상 사람들이여! 嗟世人之滔滔
모두 옻으로 머리 감고 풀리기를 기다리네” 總沐漆而求解
이 말 듣고 문득 마음속으로 깨달으니 忽聞言而心寤
우리 객의 깊은 경계에 감동하네 感吾客之深戒
이에 가난하게 지내는 시인에게 전원에 귀의하여 안분낙도의 삶을 영위해 나가라고 권고한다. 그래서 시인은 세인들에게 이를 적극 권장하면서 속세에 찌들어 있지 말고 전원을 동경하며 즐거움을 누리라고 했다. ‘접역鰈域’은 ‘가자미가 잡히는 동해’를 말하는데, 곧 ‘한반도’를 지칭한다. ‘고반’은 ‘한가히 지내는 은자’를 상징한다. 이는 시경에서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훌륭한 분이 태연하게 지내네.”라고 한 데 근거한다. ‘형문’은 ‘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보잘 것 없는 문’으로, ;안분자족하는 은자의 삶‘을 말한다. 이는 시경에서 “형문 아래에서 느긋하게 지낼 만하네.”라고 한 데 근거한다. ‘옻으로 머리 감고 풀리기를 구한다’는 것은 ‘경제에 매여 벼슬을 못하는 신세’를 의미한다. 이는 송宋나라 장뢰張耒의 고문진보古文眞寶 「송진소장서送秦少章序」에서 진관이 가족을 위해 관리 노릇을 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옻으로 머리감으면서 머리를 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라고 한 데 근거한다. 매헌은 길손의 입을 빌어 은거를 희망한다. 은거구도야 말로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유일한 극복 대안이기 때문이다.
결어에 이르노니 그만이구나! 誶曰已矣
백년의 절반이 지나도록 百年强半
어려움 헤친 적 없으니 未曾涉難
머리는 이미 세었으나 頭雖已白
계획을 진작 세우지 못했네 計不宿筭
매헌은 길손의 충고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원했지만 제대로 경영한 것은 없음을 깨닫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은거구도’를 결심했지만 이미 세월은 반백년이 지나가 버렸다. 진작에 이러한 결행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한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 결행이 진정 합당한 것이라고 천명하며 기뻐한다. 지금까지 이어온 어두운 분위기는 불식되고 반전을 이룬다. 퇴계를 통한 자상한 가르침 속에 그의 내적 갈등과 번민이 수신과 정심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어 내적 희열로 충만해 진다.
우러를 만한 것은 所可仰者
선생님 문하에서 函丈門下
어지신 보살핌도 많았지 濫荷仁眷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시고 諄諄誨䆃
끊임없이 바로 잡아 주시어 針砭不倦
사랑이 이 몸에 사무쳤으니 愛澈微軀
참으로 잊기 어렵다네 誠所難忘
평생 그가 얻은 것은 바로 퇴계의 가르침이다. 스승을 통해 어진 교훈을 받으며 보살핌을 받았다고 감사해 하였다. 정성스럽게 가르치고 바로 잡아준 그 은혜는 잊기 어렵다고 술회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해 받은 따뜻한 사랑이 자신에게 사무쳐서 잊기 어렵다고 술회하였다. 매헌은 퇴계로부터 ‘학문’과 ‘은덕’을 두루 입은 점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고민과 방황 가운데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끌어준 위대한 스승 앞에 감사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이어 스승의 죽음을 맞는 슬픔을 담아 또 다른 반전이 이루어진다.
맹세컨대 위급해도 변절하지 않고 矢顚沛而不渝
한 마음으로 끝없이 받들고자 하네 奉一心於無疆
대들보가 서둘러 꺾일 줄 어찌 알았으랴 何知樑木之遽摧
말씀 듣지 못한 지 여러 달이네 曠謦欬於屢月
참으로 이 도를 밝히기 어려우니 誠此道之難明
비록 통곡한들 어찌 따라잡겠는가 縱啜泣兮何及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쳐도 변절하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섬기길 다짐했다. 하지만 스승의 별세로 인해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았다. 스승의 교훈을 듣지 못한 것이 몇 달이 되었다면서 스승을 잃은 아픔을 절실하게 그려내었다. 여전히 자신에게 스승의 가르침이 절실하다고 하면서 가르침이 단절된 현실 위기에 불안한 내면 심리를 반영하였다. 그러면서 그 가르침이 내내 수신의 방편이 되고 있음을 언명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체념에 매일 수는 없다. 말미에 이르러 매헌은 다음과 같이 퇴계의 유훈을 실천하길 다짐하면서 상실감을 극복해 나간다.
우러러 선성의 훌륭한 말씀 중에 仰宣聖之至言
덕은 덕으로 보답하라는 말씀이 있네 有德報以德恩
바라건대 마음에 새겨 잃지 말아서 庶佩服而勿失
성문에 저버림이 없기를 期無負於聖門
그래서 ‘덕’을 ‘덕’으로 갚으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성리 이념 구현에 이바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선성宣聖’은 ‘공자’를 말한다. 논어 「헌문편」에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남이 나에게 원한이 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원한에 대하여 덕과 은혜로 갚으면 어떻습니까?” 그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가? 갚을 길이 없지 않느냐? 원한에 대해서는 공평무사한 태도로 대하면 된다. 나에게 덕과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덕과 은혜로 갚는 것이 옳은 길이다.” 이는 어떤 혹자를 설정하여 원망을 안겨준 사람과 덕으로 은혜를 끼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으냐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다.
이에 공자는 원망을 준 사람을 무조건 수용해서 덕으로 보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 원망을 안겨준 사실 근원을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잣대로 판단하여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덕을 베풀어 보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솔직한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정직이다.’라는 논리이다. 원망은 그 마음이 생겨난 원인을 풀어내야 없어지는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짚고 따져서 죄줄 것은 죄주고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 원망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솔직한 마음인 정직으로 보답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나에게 덕을 베푼 사람에게는 덕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해註解」를 참고하면, ‘원한이 있는 자에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것으로서 사랑이나 증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덕으로 보답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겨 공자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매헌은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스승 퇴계의 가르침과 은덕을 가슴에 새기고 이를 실천해 나가길 다짐했던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학문적 가르침과 인격적인 감화 및 유훈을 실천하며, 이를 계승해서 그러한 가르침이 지속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러한 다짐과 실천을 통해 ‘베푼 덕을 덕으로 보답’하길 다짐했던 것이다. 아무튼 결론에 이르러 매헌은 퇴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계승함으로써 보답을 실천했다. 그러한 정신 지향이 시문학이나 퇴계 추존 및 계술 사업을 통해 구현되었다.
Ⅴ. 매헌 시문학의 의의
1) 퇴계 산수자연관 체득
매헌의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은 퇴계의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를 둔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화단을 만들어 ‘연’․‘송’․‘죽’․‘매’․‘국’을 심은 뒤에 ‘절우사’라고 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형’이라고 불렀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도 제자들에게 분재한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매화에게 애정을 쏟았다. 퇴계는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연꽃’ 가운데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는 매화를 가장 먼저 ‘절우사’에 심었다. 퇴계에게 매화는 정신적 동지였다. 매화를 소재로 한 매헌의 다음 작품에 퇴계의 산수 자연 미감이 담겼다.
소아가 변해 강 매화에 깃들어 素娥化作寄江梅
점점이 어여쁘게 피려하네 欲使鉛華點樹開
세인들이 탐낼까 염려스러워 只恐世人貪翫得
깊은 밤 차가울 때 피게 하였네 故敎三夜犯寒來
김언우의 매화시에 차운하여 보낸 작품이다. 매화를 ‘어여쁜 여인’과 ‘달’에 비유하였다. ‘소아素娥’는 월궁月宮에 있는 ‘백의선녀白衣仙女’를 말하며 ‘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가에 피려는 매화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한서암 앞 졸졸 흘러가는 냇물 언덕에 피려는 매화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달처럼 고운 여인의 형상이 매화에 전이되어 고운 형상체로 드러난다. 세인들이 탐을 낼까봐 깊은 밤 추위 가운데 핀다는 것이다. 매화의 고결한 속성을 섬세히 여성 정감으로 표현하였다. 매헌 역시 이러한 스승 퇴계의 산수 자연 애호 사상을 깊이 체득했다. 이는 그가 호를 ‘매헌’이라고 한 것에서 일단 유추된다. 퇴계가 ‘매화’를 즐겨 ‘매형’이라고 불렀듯이 그는 스승 퇴계가 즐겼던 매를 자호의 근간으로 삼았던 점이나 퇴계의 한서암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답습하려고 했던 데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매헌이 퇴계처럼 유독 매화를 즐겼던 점은 「사우기증시」에서도 확인된다.
찬 골짜기 서리 내리자 손님 찾아와 寒谷氷霜致客來
오늘 술 동이 그대 위해 가져와 열었네 一樽今日荷君開
진솔회 자주 열어 즐겨도 무방하니 不妨眞率頻相款
다음 해 이른 매화 피길 기약하세나 更約明年趂早梅
퇴계가 매헌의 시에 차운해서 준 작품이다. 병진년(1556) 11월에 계당溪堂에서 사마회司馬會를 열렸다. 골짜기에 무서리 내리는 겨울 문턱이다. 길손이 찾아 왔기에 무르익은 술동이를 처음 열었다. 선비들의 문주文酒 분위기가 고조되어 흥이 난다. 이 모임을 자주 열어도 무방하다고 하면서 이듬 해 이른 매화 필 때 다시 모이길 기약하였다. 스승 퇴계가 매헌에게 매화가 필 때 재회하길 기약하였다. 매화처럼 고결한 선비의 모임을 이어가자고 당부한 것이다. 다음은 ‘선성삼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오수영의 작품이다.
젊어서 떠돌던 자네 매화에 빠지니 少年流落惱梅花
맑은 향이 찬 옷에 스몄음을 알겠네 相得淸香著淬衣
이별하여 여러 해 떨어져 지내니 一別多年湖海隔
이제 와서는 꿈 속에 더욱 아련하네 至今魂夢更依稀
오수영吳守盈(1521-1606)의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겸중謙仲이다. 매헌이 젊은 시절에 유랑했다는 표현은 매헌의 성균관 유학 시절을 말한다. 매헌이 청운의 꿈을 안고 성균관에서 열심히 학문에 매진했던 때를 회상하면서 현재 낙향하여 매화를 즐기며 한적한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격려하였다. 맑고 고운 매화 향기가 매헌의 옷에 스며들었을 것을 상상하면서 산수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련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 형상을 찬양한 것이다. 이별한 지 몇 해가 되어 꿈에서 아득하게 만난다는 아쉬움을 담아내었다. 매화를 사랑하는 매헌의 인품과 안정적인 생활 방식을 흠모하였다. 금응협도 매헌의 매화 애호 정신을 형상화했다.
맺힌 이슬로 아롱져 붉게 물든 꽃가지 浥露迎暉紅滿枝
아름다움 뽐내려고 온갖 꽃 피웠다네 爭姸鬪媚百花時
어이하여 시냇가 차가운 매화나무 如何溪上寒梅樹
옥과 얼음 자태 눈 속에서 피웠나 玉色氷資雪裏披
금응협琴應夾(1526-1596)의 본관은 봉화이며, 자는 협지夾之이다. 이 시에 두 종류의 꽃이 등장한다. 기․승구에는 ‘홍도’의 붉은 꽃 이미지가 강렬하게 제시된다. 붉은 꽃에 이슬이 맺혀 아름답다. 이를 시샘하듯 수많은 꽃이 만개하였다. 형형색색 고운 꽃 향연이 펼쳐진다. 화려함은 한계가 있다. 이내 싫증이 날 법도 하다. 그런 점에서 ‘홍도’는 세상적인 ‘명리’를 상징한다. 전․결구의 ‘매화’는 시냇가 차가운 날씨 가운데 ‘옥구슬’․‘얼음’ 같은 청고한 자태로 고고하게 피어났다. 이러한 ‘매화’의 이미지는 ‘고고한 선비 형상’과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매화’는 세상 명리를 초극하고 청고한 삶을 지향하는 ‘매헌의 형상’이다. 금응협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직접 전수 받는 매헌의 정결한 삶을 매화에 투영시켜 이처럼 표현하였다. 금응협은 매화 향기 가득한 봄의 풍경도 시에 담았다.
거칠게 세월 보내느라 옛 벗 저버리고 鹵莽年來失舊聞
부끄럽게 못난 나는 홀로 지냈네 多慚愚我索離群
그대 만나 예전 유람 더욱 생각나니 逢君尙記前遊事
봄 맞은 뜨락 매화 가지마다 향기 가득 春入庭梅滿枝芬
분주한 세상살이로 친했던 벗과 자주 상면하지 못한 정을 표현하였다. 벗과 자주 만나지 못한 채 외롭게 지냈던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만나 즐거운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하였다. 봄을 맞은 뜨락에는 매화 향기가 가득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본 뜨락에 가득한 매화 향기는 매헌의 선비 학자 향기를 상징한다. 매헌의 고결한 선비로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닮아 인간적인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실제로 매헌에게 그러한 풍모가 느껴지는 것은 매헌이 퇴계를 지극히 존모한 데서 비롯된다. 매헌은 58세 여름에 ‘청음석’에서 노닐었다. 매헌은 동문 제우들과 종일 그곳을 서성이며 “스승의 자취와 향취가 시냇가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에 오면 절로 번잡한 흉금을 씻어낼 수 있으니 경치를 즐기고 흥을 탐내는 것뿐이랴!”라며 감회를 털어 놓았다. 이에 이매암은 “그대는 참으로 순임금이 국그릇만 대해도 요임금을, 담을 마주해도 요임금을 사모했던 것처럼 스승 퇴계를 존모하는구려!”라며 감탄했다. 이러한 퇴계 추존 의식은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수용케 하였다. 그래서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도 자연히 계승된다.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근저에는 ‘청량산’이 자리하고 있다. ‘황지’에서 달음질을 시작한 낙동강은 태백산을 거칠게 달려 와 퇴계가 ‘우리 산’이라 애창했던 청량산 앞을 지난다. 이제 낙동강은 거친 숨결을 늦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 유유한 흐름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고운 석벽, 유리알처럼 맑은 자갈, 은빛 반짝이는 모래와 함께 비취색 물빛으로 흐르면서 도산의 멋진 풍광을 자랑해 보인다. 낙동강이 도산에 이르러 강을 이루며 강 양쪽으로 석벽을 이루는 산과 그 산 아래에 펼쳐진 정경을 기록했다. 낙동강이 태백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면 주물주가 빚어낸 천연적 굽이를 돌면서 못을 만들고, 내와 협을 형성했다. 강을 이룬 낙천은 청량산을 지나 고산, 단사, 천사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연출해 내었다.
이 물줄기는 도산서당 주위에 이르러 동서로 병풍처럼 고운 산을 맞이한다. 병풍 아래 곱게 흐르는 강물은 유리처럼 맑고, 맑은 강과 어울린 산은 비단처럼 곱다. 그래서 퇴계는 영남의 낙동강이 물 가운데 임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청량산을 찾아가면서 7곡에 이르러 벗 이문량에게 써준 시에 그림 속을 거니는 것 같다는 감탄사를 발했다. 이처럼 ‘청량산’과 ‘낙동강’은 안동 문인 학자들에게 뗄 수 없는 소중한 ‘성리 이념을 담은 문학 소재’이며 ‘성리 이념 지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동의 문인과 학자들은 안동의 수려한 산수 자연을 성리 이념을 담은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정감 있게 시문학으로 표현하거나 심신을 수양하며 정신적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선비 정신과 유려한 자연 경관이 빚어낸 향토 산수의 승경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는 극찬을 언명함으로써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우월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퇴계의 청량산 애호 정서는 매헌에게 이어져 다음처럼 청량산 사랑 노래로 표현된다.
어여쁜 청량산 可愛淸凉山
창공에 우뚝하여라 碧空崢嶸勢
절경은 봉래 영주같고 異景擬蓬瀛
고려 때부터 빼어난 명성 勝名擅高麗
물외에서 소요하니 物外放逍遙
세속이 문득 아득함을 느끼네 塵寰覺超遞
회포 열어 저마다 뜻을 말하니 開懷各言志
진경 찾아 모두 왔다네 探眞共連袂
이처럼 함께 유람 즐기니 況是同遊人
모인 이들 참으로 많구나 來何盡濟濟
장난삼아 바위에 이름 새기고 巖間戱題名
풍류를 시로 기록해 두었네 記取風流揭
천 년 전 무우대 유흥이 千載詠歸興
내 묵은 소원과 서로 부합되네 宿願暗相契
인자와 지자는 되지 못해도 仁智縱未能
이 즐거움 예사 아닐세 此樂非常例
각자의 마음 알고자 欲識箇中意
맑은 시를 다시 읽네 更看淸韻製
청량산 연대사에서 퇴계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매헌은 44세 4월에 동문벗과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했다. 일행은 균헌筠軒 이문량李文樑․읍청정浥淸亭 김부의金富儀․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원암遠巖 이교李窖․권경용權景龍․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만취사晩翠士 김원金元․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등이 모여 창수시를 남겼다. 「소주小註」에 “산을 즐기고 물을 좋아하는 것은 내 능한 바는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승 퇴계를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물외物外의 유람하는 것은 ‘증점曾點이 공자孔子를 모시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대舞雩臺에서 바람을 쐬던 것과 우열을 논할 수 있으니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후이지만 반드시 예전 증점의 일만 아름답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매헌이 퇴계를 모시고 산수를 유람하면서 도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은 그 옛날 증점이 공자를 모시고 산수를 유람하며 도덕을 실천하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했다.
날이 저물어 보현․문수․만월 등 여러 암자에서 잤다. 퇴계는 연대사에서 묵었는데 먼저 율시 한 수를 짓고 유생들에게 창화하게 하였다. 매헌은 ‘요산요수에는 능하지 못한지만 매우 다행한 일이다. 선생님을 모시고 물외에서 좋은 경치를 조용히 산보하니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던 일과 천 년이 지나서 서로 부합된다. 여점의 탄식이 반드시 예전에만 아름다운 일이었겠는가!’라고 하며 즐거워하였다. 스승 퇴계가 늘 동경하며 즐겼던 청량산 탕방의 감회를 한껏 표현하였다. 언제 보아도 어여쁜 청량산이 창공에 우뚝 서서 길손을 맞이한다. 그 아름다운 경관은 봉래산 영주산과 같다고 자부하였다. 고려 때부터 명산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청량산을 찾아 물외에서 노니는 산수 자연 미감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흥에 따라 시를 짓고 진경을 찾아 온 흥겨움이 묻어나고 있다. 모인 선비들은 저마다 펼쳐진 자연 경관을 소재로 하여 정감 있게 시로 표현하기에 열중한다. 스승과 제자들의 시문 표현과 함께 공자가 제자들과 노닐었던 ‘무우대’ 고사를 연상하면서 천 년 전의 그 흥취가 지금 펼쳐지고 있어 희열로 충만하였다. ‘인자요산仁者樂山’․‘지자요수智者樂水’에는 끼일 수 없어도 이 즐거움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하였다. 스승의 시에 저마다 화운하며 청량산 애호 정취를 유감없이 표현하는 즐거움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퇴계 문도가 청량산을 애호하는 정신은 스승 퇴계가 지향하는 성리 이념의 형상화와 연결된다. 퇴계가 「도산구곡」에서 청량산을 성리학 성지로 규정하고 최고의 이상향이라고 설정한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매헌의 퇴계의 사상과 학문 정신을 계승하고 추존하고 있다는 점은 이처럼 청량산 애호 정신의 표현에서 선명히 제시된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퇴계가 극찬한 ‘청량산’과 ‘낙동강’은 유학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청량산이 유학의 긍극적인 목적을 상징한다면, 낙동강은 그러한 정통 유학의 지속적인 전송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퇴계의 산수 자연 인식론이 매헌에게 그대로 전승되어 시문학을 통해 형상화된 것이다. 매헌이 소유한 청량산 애호 사상을 후계에게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퇴계를 비롯한 문인들과 후손들은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청량산’과 ‘낙동강’의 미적 조화를 이룬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것은 곧 퇴계의 정신 지향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신 의식의 반영임과 동시에 향토 자연 미의식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다.
매헌이 남긴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그러한 의식의 반영이다. 이는 곧 퇴계의 정신 기맥과 정통 성리학 전통을 이어가길 소망한 의지의 결집이라 하겠다. 매헌의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다음 세대를 통해 「도산구곡」 문학 운동으로 확산된다.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는 한편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퇴계 학문을 전승하고 영남 학맥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퇴계에 대한 조정의 배려도 도산구곡 창작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퇴계 가문 후손들에 의해 이러한 활동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데, 후계 이이순․광뢰 이야순․하계 이가순이 대표적 인물이다. 퇴계 후손을 중심으로 청량산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도산구곡 설정과 도산구곡시가 창작을 통해 퇴계 계술 정신을 확장해 나간 점에서 선구적 의의를 지닌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자연 친화적인 시적 표현과 한거흥취를 반영한 시를 통해 미적 흥취가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스승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수용하며 미적 감흥을 시적으로 형상한 것이다.
2) 퇴계 출처대의의 실천
매헌과 퇴계의 필연적 만남은 그가 퇴계 집안으로 장가를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매헌은 20세에 진성이씨 부인을 맞이했다. 퇴계의 백형인 잠潛의 아들로서 장사랑을 역임한 인寅의 따님이다. 이렇게 혼반 관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헌의 부인은 실제로 퇴계의 종손從孫이다. 매헌이 퇴계로부터 수업을 받은 것은 23세 때부터 온계에서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퇴계는 매헌의 타고난 재질이 도를 가까이 하고 재주와 성품이 특출하여 남달리 친절하게 가르쳤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6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퇴계와의 사제지간 학문 교류는 변함없이 이어져 28세에 당시 단양군수로 재직 중인 퇴계를 찾아뵙고 중용에 대해 질의하였다. 여가에 ‘구담’과 ‘도담’을 유람하였다.
특히 유의할 부분은 30세 9월에 퇴계의 형인 정민공 이해李瀣가 별세하여 반구返柩했다. 이해의 죽음을 맞은 매헌은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 31세에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매헌은 곧은 심지를 견지해 나가며 시론에 휩쓸리지 않아 당시 명사들이 모두 그를 중하게 여겼다. 33세 가을에 월천과 함께 성균관에 머물면서 경전 공부에 주력하며 강론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퇴계는 월천에게 서찰을 보내 매헌의 학문 성취가 출중하다고 하며 함께 공부하는 유익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했다. 이처럼 매헌은 나름 포부와 열정을 품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불안한 정국은 그의 낙향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35세(1555) 2월에 퇴계를 모시고 귀향했다. 이 당시 매헌은 성균관에서 공부한 지 5년 째였는데 을사사화의 어려운 시국 현황을 보고 시대의 조짐이 크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귀향을 결심했다.
이후 매헌은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세상 명리에 빠져 날마다 더러운 곳에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사람노릇 하는 것을 숭상하는 게 더 낫다.”고 하자, 부친은 기뻐하며 “네 좋을 대로 하여라.”라고 하였다. 36세부터는 본격적인 은둔 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보다 6년 앞서 퇴계는 1550년 2월에 토계 서편에 복거하여 한서암을 짓고, “바위 시내 사이 띠 이엉 집을 옮겨 얽으니 바위에 피는 꽃 어지러이 붉도다. 옛날이 가고 오늘이 와 때 이미 늦었지만 아침 밭갈이 저녁 글 읽기 즐거움은 끝이 없어라.” 라는 시를 읊으며 지냈다.
매헌은 36세 되던 해 여름에 한서암의 남쪽 개울가에 집을 지었다. 퇴계는 “해와 별이 빛나고 성현의 교훈은 옛글에 실려 있어 이처럼 엄한 스승 대하니 절로 넉넉함 있네. 바다 냄새 따르는 것 참으로 특이한 일이니 그대가 수고를 마다 않고 이웃에 집을 지어 감탄한다네.”라는 시어 주며 기뻐했다. 아울러 퇴계는 매헌에게 「경재잠도」를 써 주었는데 매헌은 족자를 만들어 벽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외며 “엄한 스승께서 여기에 계신다네.”라고 했을 만큼 스승을 존경했다. 한서암 남쪽에 집을 마련한 매헌은 스승 퇴계의 행적처럼 집 앞에 매화를 심고 호를 ‘매헌’이라고 했다. 이에 금응협이 “계상의 찬 매화가 옥색 맑은 자태로 눈 속에 피어나리.”라는 시를 지어 축하했다. 이처럼 매헌은 퇴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색과 강론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욱 심화해 나갔다. 스승 퇴계를 통해 인격적 감화와 학문 영향을 크게 입었다.
46세 이후로는 이러한 성리학 관련 서적 연구에 더욱 침잠하게 되어 또렷하게 자득하는 경지를 이루어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욕欲’이 가장 제어하기 어렵다. ‘욕’을 다스리면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 지고 일마다 저절로 ‘간결’해 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안현감 곽황이 매헌의 학문이 박학다문한 점을 감안하고 향의鄕議를 따라 조정에 추천하려고 하자 매헌을 서찰을 보내 만류하면서 “저는 어려서부터 어버이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염려스러운데 어찌 명예를 탐해 벼슬 구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저마다 마땅히 행할 바를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애당초 벼슬을 구하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고 성리학 공부를 위해 학문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월천도 매헌의 굳은 심지를 칭찬했다. 매헌의 이러한 올곧은 성품과 출처대의에 분명한 성품은 부친을 닮았다. 부친이 어렸을 때 부친의 진로를 위해 권요자權要者를 소개해 주려는 자가 있었는데 부친은 “실천궁행 없이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는 것은 제가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라며 사양했다. 8월에 겸암 류운룡이 매헌의 벼슬 사양에 대한 격려의 글을 보내와 겸손하게 답서를 보냈다.
47세 봄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했다. 그 당시 퇴계를 도산서당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퇴계는 여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비의 ‘출처대의’에 대해 강조하였다. “유가儒家란 의미는 절로 구별이 있으니 문예에 힘쓰는 것도 선비의 일이 아니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선비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탄식하며 “세상의 수많은 영재들이 세속의 과거공부에 섞이어 골몰하니 그 누군들 이 ‘과거’라는 절구통에서 떨쳐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매헌은 출처대의를 체득을 했고 스승의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주저 없이 은둔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실제로 그는 치열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자기 수양을 위해 노력했다.
작은 오두막에서 정신 수양하려고 하니 矮屋將斯得養神
다행히 근처에 온천도 있어 좋다네 溫泉何幸接芳隣
강과 바다 작은 도랑물 수용하고 河海量深容細瀆
감형은 안목 높아 옥석을 판별하네 鑑衡度大辨珩珉
창고 넘친들 부유함을 이어가랴 嬴廩豈爲要繼富
구황은 가난한 사람부터 해야 하네 救荒聊可急周貧
암서헌 가르침 늙도록 저버리지 않으려고 暮年不負巖栖訓
홀로 밝은 창 마주해 책에 파묻히네 獨對明窓卷裏人
온혜 송계로 이주를 한 뒤에 지은 작품이다. 작은 오두막을 지어 정심공부에 주력하고 가까운 곳에 온천이 있어 다행이다. ‘강’과 ‘바다’가 ‘도랑물’을 수용할 수 있다는 표현은 스승의 학문 역량이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모두 수용하는 도량을 지녔던 점을 의미한다. 스승의 예지와 분별력이 출중하여 ‘옥석’을 구분해 낸다고 하였다. 그러한 학문은 결코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것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창고’와 ‘구황’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를 위해 부단히 자기의 연찬을 계속해 나간다. ‘암서헌’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책상에서 유교 경전을 정독하며 자기 수양을 실천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매헌의 퇴계의 출처대의를 그대로 계승해서 실천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3) 퇴계 학문정신의 계술
위에서 매헌이 퇴계의 산수자연관 수용 및 출처관을 따라 선비 학자로서 수신과 정심을 실천했던 배경을 살폈다. 이제 그러한 과정에서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계술했던 행적을 정리한다. 매헌은 7세 때부터 글을 익혔다. 숙부 원복元福에게 글을 배웠다. 숙부는 성종대 인물로 면천군수를 역임했으며 여섯 고을 수령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예조에 8년 재직 동안 조정에서 대례를 거행할 때 어려운 절차를 감당했으며 퇴계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처럼 매헌의 선대와 퇴계와의 교유가 독실했다.
매헌은 20세가 되기 이전에 우수한 문예와 필격으로 명성이 높았다. 18세에 중용을 읽고 「체용도」를 작성했다. 22세에 「조보론」을 지었다. 23세 무렵부터 퇴계를 종유하면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는 매헌의 재질이 도를 가까이 하고 재주와 성품이 특출하여 매우 사랑하며 가르쳤다. 28세에 단양군수인 퇴계를 찾아가 중용의 이론에 대해 질의하였다. 29세에 백운동서원에서 강학과 토론 활동을 하였다. 31세 성균관 유학을 통해 성리학에 심취하여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33세에는 월천과 함께 성균관에서 경전 공부와 강론 및 토론으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하였다.
35세 귀향 이후 그는 퇴계를 통해 학문적 수준을 더욱 심화해 나갔다. 한서암 곁에 집을 짓고 조석으로 퇴계를 뵈었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심화해 나갔으며 퇴계를 통해 인격적 감화와 학문 영향을 크게 입었다. 이 당시 퇴계는 「주자서절요」 편차 과정에서 하면서 매헌에게 이를 선사繕寫케 했다. 매헌은 퇴계의 가르침을 따라 「주자서」를 읽어 ‘사서’를 이해하는 지침을 삼는 공부를 했다. 37세에 「사서질의」를 편찬했고 38세에 ‘경敬’․‘성誠’․‘화和’ 세 글자를 써서 띠로 만들어 차고 다녔다. 「성경음」이란 시를 통해 일상에서 ‘성聖’을 실천하며 퇴계가 강조한 ‘거경居敬’ 생활을 하면서 수신했다. 40세에 조목․김부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고산을 유람하면서 석벽시를 남겼다. 「심경」․「근사록」을 읽고 「심근강의」를 편찬했다. 이 당시 도산서당이 신축되어 그해 겨울에 거기에서 머물며 공부했다. 42세에 「사물잠」을 지어 근신했으며, 퇴계처럼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도가운」에 차운하는 시를 남겼다. 이처럼 주자의 「무이지」를 읽고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도가운」에 차운하는 형식은 퇴계를 비롯한 퇴계의 학문을 추구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계승해 나가려는 당대의 주요한 문학 운동이었다. 매헌 역시 그러한 퇴계 추존 문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러한 차운 시를 남겼다.
43세 무렵 성리학 사유가 무르익어 「사례정변」․「사례기문」․「가선휘편」 등을 편찬했다. 44세에 동문들과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며 창수시를 남겼다. 「주」에서 스승을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는 행운은 옛날 증점이 공자를 모시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대에서 바람을 쐰 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며 자부했다. 45세에 「계몽문목」을 지어 퇴계에게 올렸다. 이 당시 「주역」 연구에 전념하였다. 46세 이후 성리학 관련 서적 연구에 몰두하여 자득의 경지를 이루었다. 47세 봄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했으며 「역동서원창건록」을 썼다. 퇴계가 역동서원 건립을 주도하자 매헌은 재산을 출연하여 서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다. 이밖에 향교를 중수할 때에도 퇴계에게 여쭈어 「약조」를 찬정했다. 도산서원 창건 때에도 시종일관 풍우를 가리지 않고 감독했다.
48세에 퇴계의 자문을 토대로 역동서원 운영을 위한 「제의」와 「규약」을 정했다. 6월에 「도산기고증」을 수정했다. 매헌은 일찍이 「도산기」 한 부를 정사해 둔 적이 있다. 그것을 읽고 의난처를 찾아내어 「본주本註」와 함께 기록해 두었다. 만년에 “이를 읽노라면 천연대와 농운정사에서 스승을 친히 뵙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애송하며 스승을 존모하였다. 50세 11월에 평생 존경하고 사모하던 스승 퇴계의 질병이 심해져서 계당으로 문후하였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나 퇴계는 별세하였다. 심상 3년을 치르고 잔치 자리나 즐거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퇴계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제문에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천지에 다함이 없도다!”라는 표현을 썼다.
51세에 김부필․금응협․금난수 등과 「유생벽불소통문」에 답서를 작성했다. 이에 앞서 ‘보우’와 관련해 유림들이 상소했다. 퇴계는 ‘유소儒疏’나 ‘예궐詣闕’ 모두 합당하지 않다는 경계가 있어, 이에 이르러 답서로 이러한 뜻을 전했다. 이어 「진정부」를 지어 평생 품은 뜻을 피력하면서 사문 실추를 우려하였다. 6월에 퇴계 문집을 편집했다. 52세에 김성일․이안도와 퇴계의 「사단칠정론변서」를 편차대로 썼다. 4월에 「퇴계일록」을 수정했다. 12월에 퇴계의 제사를 올렸다. 53세 11월에 이산서원에 퇴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덕홍․이안도․김륭․장근과 파산사에서 묵으며 슬픈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다. 54세 때이다. 퇴계가 돌아가신 이후 선비들이 학문만을 숭상하는 폐단이 있어 매헌은 일휴에게 서찰을 보내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우는 것을 말함에는 치우치거나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우리들의 한가한 논의는 ‘구이지습口耳之習’이 되어 말단의 학문적 폐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말학의 폐단을 여는 대요는 ‘거경居敬하여 근본을 세우고 궁리窮理하여 지知에 이르며 자신을 돌아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 학문의 종지宗旨이다.”라고 하였으며, 도산서원 창건을 감독했다.
55세 봄에 백률당을 지었다. 계상 옛집이 수마에 휩쓸려가 송내촌으로 이거하였다. 집 좌우에 토질에 적합한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이루었다. 잣나무와 밤나무가 가장 무성하여 집 이름을 ‘백률당’이라 하고 독서하였다. 「우음시」에서 “오두막집이나 여기서 심신을 수양하고 다행스레 근처에 온천도 있다네. 노년이지만 한서헌 스승의 가르침 어기지 않고자 홀로 창가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네.”라고 하였다. 56세에 ‘도산서원신판’을 쓰고 석채례를 행했다. 57세 2월에 동암서원으로 가서 퇴계의 「묘갈명」을 썼다.
58세 여름에 청음석에서 노닐었다. 동문들과 종일 그곳을 서성이며 “스승의 자취와 향취가 시냇가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에 오면 절로 번잡한 흉금을 씻어낼 수 있으니 경치를 즐기고 흥을 탐내려는 것뿐이랴!”라며 감회를 털어 놓았다. 59세 봄에 매정별서에 머물렀다. 매헌은 만년에 한적한 곳을 택해 항상 책상 위에 「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계몽전의」․「무이기」․「도산기」를 올려두고 문생들과 종일 반복해 강론하고 토론을 벌였다. 64세 정월에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사당을 참배하였다. 이러한 매헌의 퇴계 학문 정신 계술 성과는 금업琴忄業이 지은 「묘지명」에 집약되어 있다. 금업(1557-1638)의 본관은 봉화,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수재晩修齋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승지․창원부사를 역임했다. 분절해서 정리한다.
태사공의 명문가 太師華冑
공께서 아름다움 이었소 公趾其美
효도하고 우애로우시니 克孝克友
학문에 모두 담겨 있네 爲學在是
암서헌에서 가르침 받아 立雪巖軒
성리학에 종사하셨네 從事性理
명문 봉화금씨 선조의 행적을 소개하고 매헌이 그러한 전통을 이었다고 했다.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던 어진 행적이 그가 남긴 글에 오롯이 남아 있으며 퇴계를 통해 암서헌에서 교훈을 받아 성리학에 종사했던 이력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매헌이 퇴계의 학문 적통임을 강조하였다.
박학다문하시어 博學多聞
월천의 평가대로였다네 月評卽是
왕휘지 필법 명성 자자했고 筆闡鍾王
시와 만사에 정풍을 이었네 詩輓正始
비석과 신판에 공의 글씨 빛나고 碑版照耀
서찰엔 공의 고운 글씨 가득하네 翰札盈紙
동문들에게 중하다 추대 받았고 同門推重
종당이 모두 의지했다네 宗黨咸依
매헌의 학문이 굉박하여 공인받았다고 하였다. 그가 ‘선성삼필’로 필력이 탁월했던 점과 시문학의 특징을 ‘정풍正風“으로 확정했다. 이는 시경의 인간 성정의 온유돈후한 측면을 강조한 성리 미학이 담긴 문학론과 연관된다. 인간의 성정을 교화하고 풍교적인 작용을 중시하는 문학관을 의미한다. 이 역시 퇴계가 지향하는 문학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매헌의 우수한 필치는 퇴계의 신도비를 비롯한 도사서원 신판과 남긴 서찰의 유묵으로 남아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매헌은 필법이 정묘하여 이숙량․오수영과 ‘계문삼필’로 일컬어졌으며 그 가운데 매헌이 으뜸이었다. 퇴계는 매헌의 필법을 애지중지하여 때로 병풍이나 족자에 휘필케 하여 보관했다. 퇴계는 선고 찬성공 묘갈문을 촉탁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인품과 학문을 모두 존경한다고 했다.
온혜 시냇가 한 개울 溫泉一曲
큰 인물이 사신다네 碩人所里
방안엔 무엇 있나 一室何有
좌우에 잠명도와 역사서 左圖右史
때로 유람을 즐겨 小車時出
명산 고운 개울물 찾았네 佳山勝水
이 역시 정치하는 것이니 是亦爲政
반드시 벼슬살이해야만 하나 奚其膴仕
집안에 어진 내조 있었으니 內有賢助
이 분이 여사이셨네 是爲女士
자손에게 좋은 계책 주시어 錫類貽謀
조카를 양자로 맞이하였네 無子有子
생전의 일상을 추억하였다. 온혜 송내로 이주해 살 때 좌우에 잠명과 서책을 두고 독서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산수 유람을 즐겼던 시절을 회고하였다. 이처럼 향리에서 자기완성을 위한 수신과 정심의 학문을 하는 것 역시 정치라고 하며 굳이 벼슬살이를 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였다. 진성이씨 부인의 내조와 양자를 맞아들인 행적도 기록했다. 잔잔한 인정을 엿볼 수 있다.
저기 저 묘소에 宰如之阡
공의 신발 감춰있네 衣屨藏只
지관이 길함을 돕고 靑烏協吉
부부가 함께 하였네 雙劍會此
묘지에 행적 새겨 두어 刻誌幽宮
천세토록 알게 하리라 用視千祀
결론이다. 매헌의 묘소에 어진 행적이 남아 있고 부부 합장의 아름다운 면모도 소개하였다. 매헌의 어질고 고결한 선비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대대로 전하겠다는 마음을 담아내었다. 매헌이 퇴계로부터 전해 받은 아름다운 인격과 학문 정신을 기록하여 후세에 그러한 노력과 공력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담았다. 매헌은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정확히 계승한 장본인임을 명시했다.
Ⅵ. 마무리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퇴계의 직전 제자 매헌의 ‘생애’․‘문집’․‘시문학’․‘의의’를 검토했다. 매헌의 시대는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기였다.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반대파 명사들이 대거 피해를 입었다. 이어지는 대옥사는 을사사화로 일단 막을 내렸으나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림 중심의 대의명분론적 유교정치는 선조대로 이어져 권력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다.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은둔한 사림에 의해 서원이 일어났다. 서원의 발달은 조선조 정치 문화 특성과 정치 투쟁의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매헌 금보는 진사시를 거쳐 성균관에서 유학하며 미래를 차근차근 설계해 나갔다. 성균관 유학 이후 시류의 형편을 고려하고 퇴계의 가르침을 따라 귀향했다. 이후 향리에서 퇴계를 종유하며 학문 유업을 계술하며 수신에 정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문집 내용과 시문학을 검토하고 그 의의를 정리하였다.
Ⅱ에서 매헌의 생애를 정리했다. 그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벼슬을 하며 명성이 높았던 명문의 후예이다. 부친은 원수이며 모친은 안동김씨다. 숙부 원복에게 글을 배웠는데 약관 이전에 이미 문예와 필격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했다. 20세에 퇴계의 백형 잠潛의 아들로 장사랑을 역임한 인 寅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23세에 온계로 이주하면서부터 퇴계에게 수업했다. 26세 증광시에 합격해 30세부터 5년간 성균관에서 유학했다. 35세에 을사사화를 목도하고 시대의 조짐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퇴계를 모시고 귀향했다. 36세에 한서암 개울가에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호를 ‘매헌’이라 했다. 37세에 「사서질의」, 38세에 「성경음」 시를 지었다. 40세 동문과 퇴계를 모시고 고산을 유람했고 「심근강의」를 편찬했다. 42세에 「사물잠」과 「무이구곡도가운」 차운시를 썼다. 43세에 「사례정변」․「사례기문」․「가선휘편」 등을 편찬했다. 45세에 퇴계에게 「계몽문목」을 올렸다. 47세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했고 「역동서원창건록」을 썼다. 48세에 역동서원 「제의」와 「규약」을 정했고 6월에 「도산기고증」을 수정했다. 그 해 조카 윤고를 양자로 삼았다. 49세에 부친상을, 50세 에 스승 퇴계상을 당했다. 51세에 집안의 화재를 당했는데 「경재잠도」와 「사서질의」만 화액을 면했다. 52세에 역동서원에서 「퇴계일록」을 수정했고, 53세에 퇴계의 위판을 이산서원에 봉안하였다. 54세 때 도산서원 창건을 감독했으며, 55세에 송내촌으로 이거했다. 56세에 ‘도산서원신판’을 썼고, 57세에 퇴계의 「묘갈명」을 썼다. 64세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사당을 참배했고, 7월에 정침에서 운명하니 향년 64세였다.
Ⅲ에서 문집의 체제와 내용을 정리하였다. 매헌선생문집은 목판본 4권 2책이다. 책머리에 「서문」과 「연보」가 실렸다. 권1에 시 29수․「만사」 3편․「부」 1편이 실렸다. 권2에 「서찰」 7편․「제문 3편․「묘갈명」 2편․「잡저」 6편이 실렸다. 권3은 사서질의로 사서에서 의심나는 대목에 대한 논변이다. 권4 「부록」에 「사우기증시」 11수가 실렸다. 이어 「가장」․「행장」․「묘지명」․「묘갈명」이 있다. 이어 「발문」 3편이 실려 있다. 말미에 아들 역여 윤고의 생평을 기록한 「부송파공묘갈」이 실렸다. 매헌의 저서로 일부 시문과 사서질의만 남았다. 매헌 사후 손자 금시양이 찬한 「가장」 외에 따로 시문을 정리하지 않아 대부분 산일되었다. 그 후 10세손 금우열이 1891년에 산일되고 남은 저자의 시문과 관계 기록을 도산의 초본과 여러 문중의 고적에서 수집하는 한편, 「행장」과 「묘갈명」 등 부록의 글을 모아 4권 2책으로 편차해 두었다. 이를 사손 금무열이 1909년에 김학진의 「발문」을 받아 매헌의 유묵 3판과 「송파공묘갈」 3판을 덧붙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매헌선생문집은 「연보」․「원집」 3권․「부록」 1권인 4권 2책이다. 이휘녕은 「서문」에서 매헌이 주자의 학문을 집성한 퇴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정통 유학을 계승한 점을 강조하였다. 「연보」에는 64세 일기로 별세하기까지의 생장과 성균관 유학 및 귀향 이후 퇴계를 통해 학문을 쌓는 과정을 기록했다. 권1은 시 30제와 부 1편이다. 매헌의 시는 퇴계 시에 차운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무이산의 정경 묘사와 함께 성리 이념을 담은 작품이다. 「경신음」은 ‘성’으로 천 가지 위선을 소멸시키고 ‘경’으로 백 가지 사악함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정부」는 퇴계가 별세한 뒤에 심경을 읊은 것으로 반 백 년 인생 회고와 퇴계 계술의 다짐 및 정심 추구의 성리 이념을 담고 있다. 권2는 서 7편․제문 3편․갈문 2편․잡저 5편이다. 편지 글은 주로 성리학 논변을 담고 있다. 잡저 「조보론」에서 송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태종을 도와 태평 시대를 이룩한 ‘조보’에 대해 논했다. 「도산기고증」에서 도산의 정경을 기록한 퇴계의 「도산기」에 주석을 붙였다. 「역동서원기사」에서 우탁을 모신 역동서원 건립 전말을 기록했다. 권3은 「잡저」로 매헌의 저작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서질의는 한서암 곁에 거처하며 퇴계에게 강의를 받고 문난한 것을 기록했다. 「부록」의 「사우기증시」 10수에서 사우 관계를 엿볼 수 있다.
Ⅳ에서 퇴계 추존과 정심의 성리 미학이 담긴 시문학을 검토했다. 첫째, 매헌의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을 살폈다. 퇴계의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퇴계가 ‘매화’를 즐겨 ‘매형’이라고 불렀듯이 그는 스승이 즐겼던 매화를 자호의 근간으로 삼았던 점이나 퇴계의 한서암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답습하려 했던 데서 확인했다. 선비 정신과 유려한 자연 경관이 빚어낸 향토 산수의 승경을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고 극찬함으로써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우월 정신을 보여주었다. 매헌이 소유한 청량산 애호 사상을 후계 이이순을 통해서도 확인했다. 퇴계를 비롯한 문인들과 후손들은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청량산’과 ‘낙동강’의 미적 조화를 이룬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것은 곧 퇴계의 정신 지향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신 의식의 반영임과 동시에 향토 자연 미의식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매헌이 남긴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그러한 의식의 반영이었다. 이는 곧 퇴계의 정신 기맥과 정통 성리학 전통을 이어가길 소망한 의지의 결집이었다.
둘째, 자연친화와 한거흥취 미학을 검토했다. 향토 산수 애호 정신과 자연 친화적 시적 표현이다. 이 역시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수용하며 미적 감흥을 시적으로 형상한 것이다. 매헌은 산수자연 애호와 이를 감상하고 체득하는 산수 심미관을 지녔기에 산수 자연 흥취를 여유 있게 누렸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자연 친화적인 시적 표현과 한거흥취를 반영한 시를 통해 미적 흥취가 드러났다. 이 역시 스승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수용하며 미적 감흥을 시적으로 형상한 것이다. 퇴계의 산수 자연관에 입각한 친자연적이고 자연 흥감을 시를 통해 발휘했다. 인생 회고와 풍류 지향 의식도 담았다. 이는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심경의 반영에서 선명히 제시되었다. 이면에 매헌의 산수 자연 애호 정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자연 정서를 정감 있게 담은 작품을 통해 그러한 미감이 심화되었다. 이는 자연과 일체된 성리 철학 이념을 소유한 데서 가능한 것임을 확인했다. 자연의 아름다운 미감과 함께 소나무의 속성을 살려 고절한 선비의 기상을 함께 표백하기도 하였다. 사실적 묘사는 바위틈에 자란 식물을 포착한 데서도 드러났다. 회포를 열어 벗과 정다운 담소를 즐기는 서정 묘사와 고산정 은거 소망을 담은 시에도 이런 정서가 담겼다. 자연 애호 정서는 산수 유람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친 자연 사상과 자연 애호 정서를 토대로 산행을 통한 ‘난정고사’처럼 독실한 모임과 성리 이념 강화를 통한 내적 희열과 수양의 효과까지 이루었다. 청량산 탐방을 통한 시문 수창을 통해서도 자연 애호 정서를 담아내었다. 이러한 산수 자연 취향의 서정은 산수흥취 발산으로 확대되었다. 매헌이 산수자연 애호와 이를 감상하고 체득하는 산수 심미관을 지녔기에 산수 자연 흥취의 여유 있게 누릴 수 있었다.
셋째,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을 검토했다. 주자가 무이산 아홉 굽이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한 정신이 반영되었다.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본격적 삶은 퇴계로부터 시작되었다. 퇴계는 어느 날 「무이지」를 읽고 「무이도가」에 차운한 시를 지었다. 매헌에 앞서 퇴계가 「무이지」를 읽고 차운한 시를 지은 전통을 이어 이러한 시를 지어 퇴계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한국 무이구곡 문학의 전통과 영남 무이구곡의 현황 및 도산구곡 문학사의 전통과 퇴계 후손을 중심으로 한 도산구곡시 문학 운동 양상도 살폈다.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는 한편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퇴계 학문을 전승하고 영남 학맥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매헌의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다음 세대를 통해 「도산구곡」 문학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단초를 제공했다.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는 한편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퇴계 학문을 전승하고 영남 학맥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매헌의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퇴계 후손을 중심으로 청량산과 낙동강 중심의 도산구곡 설정과 도산구곡시 창작을 통해 퇴계 계술 정신을 공고히 추진하게 한 추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매헌의 「무이구곡도가차운시」는 도산구곡 문학 운동 과정상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이 매헌 시문학 가운데서도 주목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넷째, 사우 교유와 선현 추모의 유가 의식은 사우 교유 활동과 선현 추모의 정서 표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매헌은 다정다감하며 스승 퇴계에 대한 추모 정서가 절실했다. 이런 퇴계 추모 정서는 추존 의식으로 편폭이 확대되었다. 다섯째, 퇴계 추존 의식을 검토했다. 퇴계를 곁에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매헌의 퇴계 추존 의식은 남달랐음을 파악했다. 호를 ‘매헌’이라고 한 것은 매화를 사랑하며 매화처럼 고결했던 퇴계에 대한 추존 의식의 발로였다. 그는 화재를 당해 보물 이상 소중히 간직했던 퇴계의 유묵을 소실하고 나서 한없는 슬픔을 탄식하면서 퇴계에 대한 추모 의식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평소 스승 사후 편달을 받았던 점을 회상하며 존모 의식을 표현했다. 퇴계에 대한 그리움을 스승의 가르침을 매진하면서 극복하였다. 재주가 노둔하여 성취가 느리지만 동료들은 더욱 분발하여 용맹하게 전진해 나가길 다짐했다. 이러한 심지는 도산서원 공사를 감독하면서 함께 공력을 기울인 이들을 격려하면서 지은 시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이면에 수신과 정심을 추구하는 성리 미학이 담겨있다.
다섯째, 수신과 정심의 미학의 시적 표현을 보았다. 이는 퇴계 추존 의식의 확대 기념이었다. 퇴계의 정신 지향과 학문 정신을 이어 참된 선비의 길을 모색하며 실천하는 노력이었다. 그것이 곧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계술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매헌 나름의 생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한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수신과 정심을 통해 현실 위기를 정제된 선비의 품격 유지로 극복해 나갔다. 내면에 잠재된 성리 이념 지향은 명리를 초극하고 사념을 제어해 간다는 의지 표명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그래서 명리를 초월한 정심을 통해 ‘광풍제월’을 염원하였다. 내적 정화는 부단 없이 수신하며 정심을 추구한 데서 가능했다. 관련 시에는 이러한 매헌의 성리 미의식이 집약되어 있었다. 「성경음」시에서 ‘성聖’을 실천하며 퇴계가 강조한 ‘거경居敬’ 생활을 하면서 수신하고자 했다. ‘성’과 ‘경’의 공부는 병행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으며 정심공부에 주력했다. 이러한 수양은 퇴계의 ‘거경궁리’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여섯째, 「진정부」에 반영된 회고 정서와 유가 이념을 보았다. 생애 반추에 따른 회고 정서 및 성리 이념 지향 의식이 표출되었다. 매헌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에 효도할 방안으로 대과를 통해 입신양명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에게 직면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혼란한 시대에 단정한 선비로 살아가기 위해 튼실한 내적 수양이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세인들이 작은 이익에 연연하면서 각박한 인정세태를 형성해 가는 것에 대해 분개심도 비쳤다. 다양한 경전을 원용하면서 안빈낙도의 생활을 실천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학문에 전념한 것도 아니라면서 자아 반성적 시각을 담았다. 험난한 세파 속에서 안주하지 못하는 서정 자아를 투영했다. 급기야 이에 대한 탈출구를 모색하였다. ‘은거구도’야 말로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유일한 극복 대안이었다. 퇴계의 가르침을 통해 내적 갈등과 번민은 수신과 정심으로 치환되어 내적 치유와 희열로 충만해졌다. 젊은 시절 고민과 방황 가운데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끌어준 위대한 스승 앞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내었다. 이어 스승의 죽음을 맞는 슬픔을 담아 또 다른 반전이 이루었다. 가르침이 단절된 현실 위기에 따른 내면의 불안 심리를 털어놓았지만 그 불안을 해소할 방안 역시 퇴계의 가르침을 이어 정심공부에 주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매헌은 스승의 가르침과 은덕을 가슴에 새기고 이를 실천해 나가길 다짐하면서 위기감과 상실감을 극복해 나갔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학문적 가르침과 인격적 감화와 유훈을 실천하며 이를 계승해 그러한 가르침이 지속되기를 희망했다. 그러한 다짐과 실천을 통해 ‘베푼 덕을 덕으로 보답’하길 다짐했다. 그러한 정신 지향이 시문학이나 퇴계 추존 및 계술 사업 추진으로 구체화되었다.
Ⅴ에서 매헌 시문학의 의의를 살폈다. 첫째, 퇴계 산수자연관을 체득했다. 매헌의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은 퇴계의 ‘산수 애호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매화를 자호의 근간으로 삼았던 점이나 퇴계의 한서암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답습하려고 했던 데서도 확인되었다. 매헌이 퇴계처럼 유독 매화를 즐겼던 점은 「사우기증시」에서도 증명되었다. 금응협의 경우,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직접 전수 받는 매헌의 정결한 삶을 매화에 투영시켜 표현하였다.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근저에는 ‘청량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매헌이 수용하여 시문학으로 형상했다. 퇴계의 청량산 애호 정서는 매헌에게 이어져 청량산 사랑 노래로 표현되었다. 퇴계 문도가 청량산을 애호하는 정신은 스승 퇴계가 지향하는 성리 이념의 형상화와 연계된다. 퇴계가 「도산구곡」에서 청량산을 성리학 성지로 규정하고 최고의 이상향이라고 설정한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매헌의 퇴계의 사상과 학문 정신을 계승하고 추존하고 있다는 점은 이처럼 청량산 애호 정신의 표현에서 선명히 제시되었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 자연관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퇴계가 극찬한 ‘청량산’과 ‘낙동강’은 유학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청량산이 유학의 긍극 목적을 상징한다면, 낙동강은 그러한 정통 유학의 지속적 전송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퇴계의 산수 자연 인식론이 매헌에게 그대로 전승되어 시문학을 통해 형상된 것이다.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청량산’과 ‘낙동강’의 미적 조화를 이룬 ‘향토 산수 우월’ 정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것은 곧 퇴계의 정신 지향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신 의식의 반영임과 동시에 향토 자연 미의식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다. 매헌이 남긴 「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은 그러한 의식의 반영이다. 이는 곧 퇴계의 정신 기맥과 정통 성리학 전통을 이어가길 소망한 의지의 결집이다. 매헌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자연 친화적이며 한거흥취를 반영한 시를 통해 미적 흥취가 드러나고 있다.
둘째, 퇴계 출처대의의 실천을 살폈다. 매헌과 퇴계의 필연적 만남은 그가 퇴계 집안으로 장가를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매헌이 퇴계로부터 수업을 받은 것은 23세 때부터 온계에서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퇴계는 매헌의 타고난 재질이 도를 가까이 하고 재주와 성품이 특출하여 남달리 친절하게 가르쳤다. 26세에 증광시에 합격 이후 퇴계와의 사제지간 학문 교류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시국 정세의 혼란을 보며 퇴계를 모시고 귀향했다. 한서암 근처에 집을 마련한 매헌은 스승처럼 매화를 심고 자호를 삼았다. 퇴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색과 강론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욱 심화해 나갔다. 46세 이후 성리 서적 연구에 침잠하여 자득의 경지를 이루었고 다양한 퇴계 추존 사업도 펼쳐나갔다. 아울러 퇴계를 통해 출처대의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받았다. 치열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자기 수양을 위해 노력했다. ‘암서헌’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책상에서 유교 경전을 정독하며 자기 수양을 실천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매헌의 퇴계의 출처대의를 계승하여 실천한 전형이다.
셋째, 퇴계 학문 정신의 계술을 살폈다. 매헌은 20세 이전에 문예와 필격으로 명성이 높았다. 18세에 중용을 읽고 「체용도」를 작성했다. 22세에 「조보론」을 지었다. 23세부터 퇴계를 종유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28세에 단양군수인 퇴계를 찾아가 중용의 이론에 대해 질의하였다. 29세에 백운동서원에서 강학과 토론 활동을 하였다. 31세 성균관 유학을 통해 성리학에 심취하여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33세에는 월천과 함께 성균관에서 경전 공부와 강론 및 토론으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하였다. 35세 귀향 이후 그는 퇴계를 통해 학문적 수준을 더욱 심화해 나갔다. 한서암 곁에 집을 짓고 조석으로 퇴계를 뵈었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심화해 나갔으며 퇴계를 통해 인격적 감화와 학문 영향을 크게 입었다. 37세에 「사서질의」를 편찬했고 38세에 ‘경敬’․‘성誠’․‘화和’ 세 글자를 써서 띠로 만들어 차고 다녔다. 「성경음」이란 시를 통해 일상에서 ‘성聖’을 실천하며 퇴계가 강조한 ‘거경居敬’ 생활을 하면서 수신했다. 40세에 「심경」․「근사록」을 읽고 「심근강의」를 편찬했다. 42세에 「사물잠」을 지어 근신했으며, 퇴계처럼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도가운」 차운시를 남겼다. 43세에 설이학 사유가 무르익어 「사례정변」․「사례기문」․「가선휘편」 등을 편찬했다. 44세에 동문들과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며 시를 남겼다. 45세에 「계몽문목」을 지어 퇴계에게 올렸다. 47세 봄에 역동서원 창건을 주관하며 「역동서원창건록」을 썼다. 퇴계가 역동서원 건립을 주도하자 재산을 출연해 서당 건축을 도왔다. 이밖에 향교를 중수할 때에도 퇴계에게 여쭈어 「약조」를 찬정했다. 도산서원 창건 때에도 시종일관 풍우를 가리지 않고 감독했다.
48세에 퇴계의 자문을 받아 역동서원의 「제의」와 「규약」을 정했다. 6월에 「도산기고증」을 수정했다. 매헌은 일찍이 「도산기」 한 부를 정사해 둔 적이 있다. 그것을 읽고 의난처를 찾아내어 「본주本註」와 함께 기록해 두었다. 만년에 “이를 읽노라면 천연대와 농운정사에서 스승을 친히 뵙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애송하며 스승을 존모하였다. 50세 11월에 평생 존경하고 사모하던 스승 퇴계의 질병이 심해져서 계당으로 문후하였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나 퇴계는 별세하였다. 심상 3년을 치르고 잔치 자리나 즐거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퇴계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에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천지에 다함이 없도다!”고 했다. 51세에 김부필․금응협․금난수 등과 「유생벽불소통문」에 답서를 작성했다. 「진정부」를 지어 평생 품은 뜻을 피력하면서 사문 실추를 우려하였다. 6월에 퇴계 문집을 편집했다. 52세에 퇴계의 「사단칠정론변서」를 편차대로 썼다. 4월에 「퇴계일록」을 수정했다. 12월에 퇴계의 제사를 올렸다. 53세 11월에 이산서원에 퇴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54세 때 도산서원 창건을 감독했다. 57세 2월에 동암서원에서 퇴계의 「묘갈명」을 썼다. 59세 이후 「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계몽전의」․「무이기」․「도산기」를 묵독하며 강론과 토론을 했다. 64세 정월에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사당을 참배하였다. 이러한 매헌의 퇴계 학문 정신 계술 성과는 금업이 지은 「묘지명」에 집약되어 있다. 매헌이 퇴계의 학문 적통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인품과 학문을 모두 존경하며 생전의 일상을 추억하였다. 매헌의 어질고 고결한 선비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대대로 전하겠다는 마음을 담아내었다. 매헌이 퇴계로부터 전해 받은 아름다운 인격과 학문 정신을 기록하여 후세에 그러한 노력과 공력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담았다. 매헌은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정확히 계승한 장본인임을 명시했다.
[참고 문헌]
文選
法言
中庸
論語
詩經
聾巖集
退溪集
懶隱集
杜陵集
擇里誌
廣瀨集
後溪集
博物志
退溪全書
漢詩外傳
松齋續集
古文眞寶
吾家山誌
明宗實錄
陶山及門諸賢錄
奉化琴氏世譜(中郞將公派)(上)
梅軒先生集(國立中央圖書本)(乾)
梅軒先生集(國立中央圖書本)(坤)
이태진. 조선유교사회사론. 지식산업사. 1989.
강주진. 이조당쟁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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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걸. 매화나무 가지에 둥근 달이 오르네. 도서출판 파미르. 2006.
이원걸. 「景玉 李簠의 田家詩」. 漢文學報 18輯. 우리漢文學會. 2008.
이원걸. 「懶隱 李東標의 生涯와 詩」. 漢文學報 29輯. 우리한문학회. 2013.
이원걸. 「후계 이이순의 ‘도산구곡; 창작 배경」. 영남문헌연구 창간호. 영남문헌연구원. 2013.
이원걸. 「後溪 李頤淳의 生涯와 思想」. 國學硏究 23輯. 한국국학진흥원. 2013.
이원걸. 「난은 이동표의 삶과 시문학」. 봉화문화 제21집. 봉화문화원. 2013.
이원걸. 「충재 권벌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제22집. 봉화문화원. 2014.
이원걸. 「두릉 이제겸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23집. 봉화문화원. 2015.
이원걸. 「수서 박선장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24집. 봉화문화원. 2016.
이원걸. 「경암 이한응의 ‘춘양구곡’에 담긴 성리 미학」. 봉화문화원. 2016.
이원걸 : 문학박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 한국한문학 전공)
[매헌 연보]
01세 1521(중종16) 奉化 槐村里에서 태어나다.
15세 1535(중종30) 형 琴軔과 楓井寺에서 독서하다.
20세 1540(중종35) 眞城李氏 李寅의 딸과 혼인하다.
21세 1541(중종36) 「趙普論」 을 짓다.
23세 1543(중종38) 溫溪에 거처하며 退溪에게 수업을 받다.
24세 1544(중종39) 가을에 龍壽寺에서 독서하다.
26세 1546(명종01) 4월에 사마시에 합격하다.
28세 1548(명종03) 丹陽 郡守 퇴계를 찾아뵙고 中庸과 大學에 대해 질의하다. 龜潭․島潭을 유람하다.
29세 1549(명종04) 小白山을 유람하고 白雲洞書院에 머물다.
33세 1553(명종08) 泮宮에서 月川 趙穆과 講討하다.
35세 1555(명종10) 3월에 淸吟石을 유람하다.
36세 1556(명종11) 寒栖庵 남쪽에 집을 짓고 ‘梅軒’으로 호를 삼다. 朱子書節要를 繕寫하고 11월에 朱子書를 읽다.
37세 1557(명종12) 四書質疑를 짓다.
39세 1559(명종14) 봄에 慶州를 유람하다.
40세 1560(명종15) 4월에 趙穆, 金富儀와 퇴계를 모시고 孤山을 유람하다. 心經․近思錄 을 읽고 心近講義를 짓다.
42세 1562(명종17) 武夷志를 읽고 「九曲櫂歌」에 차운하다.
44세 1564(명종19) 봄에 龍壽寺를 유람하다. 4월에 李文樑․琴蘭秀․金富倫 등과 퇴계를 모시고 淸凉山을 유람하다.
45세 1565(명종20) 퇴계에게 啓蒙問目을 올리다.
46세 1566(명종21) 3월에 松巖 權好文을 방문하다.
47세 1567(명종22) 易東書院의 役事를 감독하다.
48세 1568(선조01) 4월에 鄭惟一과 川南을 유람하다. 7월에 조카 琴胤古를 양자로 삼다. 11월에 모친상을 당하다.
49세 1569(선조02) 1월에 부친상을 당하다.
50세 1570(선조03) 12월에 퇴계 이황을 곡하다.
51세 1571(선조04) 2월 화재로퇴계가준 「敬齋箴圖」와 자작 四書質疑만 구하다. 6월에 역동서원에서 退溪集 裒集하다.
52세 1572(선조05) 4월 역동서원에서 이황의 日錄을 수정하다. 具鳳齡, 鄭惟一, 柳成龍 등과 浮石寺를 유람하다.
53세 1573(선조06) 3월에 李叔樑, 琴蘭秀 등과 廓然亭에서 講信하다. 11월에 伊山書院에 이황의 위판을 봉안하다.
55세 1575(선조08) 봄에 栢栗堂을 짓다.
56세 1576(선조09) 吳守盈, 趙穆, 琴應夾 등과 愛日堂에서 모임을 갖다.
57세 1577(선조10) 2월에 이황의 墓碣銘을 쓰다.
58세 1578(선조11) 여름에 淸吟石을 유람하다.
59세 1579(선조12) 아들 琴胤古를 조목에게 보내 수업 받게 하다.
63세 1583(선조16) 11월에 조목이 내방하다.
64세 1584(선조17) 3월 7일에 졸하다. 9월에 禮安 龍頭山에 장사 지내다.
출처 : 이원걸. [제22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박표회].[매헌 금보 선생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 2019.